한파(寒波)를 밀고 내려오던 동장군의 기세가 한풀 꺾인 듯한 지난 14일 늦은 오후, 평년 기온을 회복한 겨울 바닷가를 나가보았다. 영일대 난간에 기대어 서쪽을 보니 붉은 윤슬을 가르며 제트 보트가 달리고 그 건너 해변에는 저녁나절의 산책을 즐기는 모습들이 어른댄다. 파도가 쉴새 없이 밀려오는 넓은 모래밭을 걸으면 물결이 밀려왔다 간 흔적 위에 많은 고둥 껍질이 예쁘게 깔려있고 흰 갈매기들이 몰려다닌다. 그 가운데 모이를 던져주는 소녀 주위에는 수십 마리의 갈매기 떼들이 몰려드는데 부근을 지나는 내 얼굴을 스치듯 하여 놀라기도 한다. 지난해 무안공항 참사의 원인이기도 한 갈매기 떼, 그러나 겨울 해변에서 활기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 새떼들이다.
해변에 찍힌 갈매기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무안공항 참사를 떠올려본다. 대형 참사가 나면 으레 ‘시체 팔이’를 하던 정치집단들이 희한하게도 이번 대형 인명 참사에는 조용하니 참 신기한 일이다. 입지조건이 좋지 않은 해변에 공항 건설을 한 것부터가 잘못이고 운항 허가도 졸속이라고 하는데도 아무런 투쟁이 없다니 어쩐 일인가.
밀려오는 파도를 피하며 천천히 걸어서 모래밭 끝 방파제까지 가서 바위에 앉아 쉬려는데 뒤쪽에서 붉은 햇살이 비친다. 저녁나절인데 웬 일출인가 하고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바다 건너에서 해돋이처럼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환호공원 위에는 스페이스워크가 어깨에 힘주어 과시하는 듯 우람한 자태가 있고 그 옆 고층아파트의 넓은 유리 벽이 지고있는 태양의 빛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몰과 일출을 동시에 보는 듯한 광경이었다. 겨울의 저녁녘에 해가 돋을 때의 빛 즉, 햇귀를 보는 듯한 신비로운 마음에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금새 그 모습은 사라지고 스페이스워크 위로 보름달이 떴다. 마침 보름쯤이라 일몰과 월출 시간이 비슷하게 오후 5시 30분경이었기에 묘한 느낌이었다. 조금 어둑해지고 갈매기 떼들도 자취를 감출 때쯤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마음도 씻었다.
15일 아침, 윤 대통령이 체포되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43일 만에 공조수사본부의 억지스러운 행위로 현직 대통령 체포라는 헌정사상 처음 있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다행히 유혈 충돌 없이 재집행 6시간 만에 완결되는 현장을 보면서 저녁의 햇귀 풍경을 떠올렸다. 계엄의 정당성을 떠나 그렇게나 완강하게 버티더니 왜 관저의 뒷문으로 잡혀 나갔을까? 자신 있는 마음으로 당당하게 국민 앞으로 나와 계엄의 속뜻을 피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는 햇살도 아파트 유리에 비치면 빛나는 햇귀라도 보여줄 수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상황을 보면, 트럼프 취임, 동유럽 전쟁, 세계 경제와 금융 시장 등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가 산더미인데 걱정이다. 햇귀 현상이 사라진 힘 빠진 저녁 바다를 되돌아오면서 보니 모래 위의 발자국은 지워져 버렸고, 방금 지나온 발자국도 밀려오는 물결이 지워버린다.
시골집에 노란 납매가 한창 피어 향기를 뿌려준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피는 꽃이 더 향기롭다고 하니, 우리도 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면 더 밝고 힘찬 국가가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