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 <br/><20> 되짚어 보는 선도산의 3가지 보물
언제나처럼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의 속도처럼 빨랐다. 취재를 위한 현장 답사 차원에서 처음으로 경주 선도산과 서악 일대를 돌아본 건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다.
올해 7~8월은 유난스러운 폭염이 사람들을 괴롭혔다. 마애여래삼존불을 만나기 위해 산을 오를 때면 목덜미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숨결은 거칠어졌고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다.
고대왕국 신라의 시작을 알린 박혁거세의 탄생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비밀스러운 여성 ‘선도산 성모’를 모시고 있다는 성모사(聖母祠) 처마 아래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차가운 얼음물을 들이켰던 기억이 선명하다.
서악마을 곳곳에 자리한 왕들의 무덤을 살필 땐 그곳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최고 권력자들을 떠올렸다.
무열왕,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 1400여 년 전을 살았던 그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보려면 큰 상상력이 필요했다. 그럴 때면 뜨거운 바람이 머리칼을 훑고 지나갔다. 저물 무렵 석양이 유난히 붉었다.
세상사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또한 끝이 있다. 선도산과 서악마을, 서악동 고분군, 백제인들이 성스러운 산으로 믿었던 충남 청양의 칠갑산까지 두루 돌아봤던 여정의 끝이 이제야 보인다.
최근에 찾아간 서악의 산과 왕릉 주변엔 늦가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11월 말이었으니 그럴만했다. 바람은 차가워졌고, 짙푸른 녹음은 갈색으로 변했다. 2시간 가까운 긴 산책에도 땀이 흐르지 않았다.
쉽지 않은 취재와 기사 작성이었지만 보람과 감동이 없지 않았다. ‘4개월 동안 내가 보고 느낀 건 무엇이었을까’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문화와 예술을 귀하게 여겼던 천년왕국 신라의 유물을 직접 보고, 선도산 성모의 설화와 전설 속에 담긴 은유와 상징을 파악하려 애쓰고, 줄줄이 늘어선 신라 통치자들의 유택에 관한 논문을 읽었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발견한 선도산의 3가지 보물을 다시 한 번 요약하는 것으로 짧지 않았던 여정을 마무리하려 한다.
빼어난 미적감각 인정받은 마애여래삼존불
잠에 든 권력자들의 무덤과 성모 신화까지
타임머신 타지 않는 한 실체 알 수 없지만
신라역사의 주요한 연구 대상임은 틀림없어
◆ 여전히 아우라 내뿜는 마애여래삼존불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 혹은,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으로 불리는 불상은 무열왕 통치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부 사학자들은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이 조성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내놓고 있지만, 연대를 알려주는 사료가 없어 불상이 깎아 세워진 시기를 정확하게 아는 이는 없다.
지금은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지만 부처상과 보살상이 내뿜는 아우라(aura·예술품이 가진 독특한 분위기)는 흘러버린 1천 년 이상의 시간과는 무관하게 빛난다.
‘두산백과’는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의 현재 모습을 그려내듯 설명하고 있다. 이런 문장이다.
“본존(本尊) 높이 6.85m, 왼쪽 협시보살(脇侍菩薩) 높이 4.05m, 오른쪽 협시보살 높이 4.05m다. 선도산 정상의 커다란 바위에 본존을 조각하고, 양 협시보살은 다른 돌로 된 삼존불상이다. 본존불의 얼굴은 많이 파손되었으나 고졸(古拙)한 미소가 남아 있고, 목은 길지만 삼도(三道)는 잘 보이지 않으며, 어깨는 넓고 크나 움츠린 것 같아 군위(軍威)의 삼존석굴 본존불과 같은 형태다. 한쪽 어깨에 걸친 법의(法衣)는 묵직하게 보인다…(후략)”
부처의 양쪽을 보좌하듯 서있는 2개의 보살상은 파손의 정도가 비교적 덜하다. 그래서일까? 거기서 “신라인의 미소를 봤다”고 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의 관음보살은 우아한 기풍을 엿보게 하는데, 본존불에 비해 신체는 섬세하며 몸의 굴곡도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는 대세지보살은 얼굴과 손의 모양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관음보살과 동일하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을 바로 뜨고 있어 남성적인 힘을 풍긴다”는 건 ‘위키백과’의 부연이다.
경주를 비롯한 한국 곳곳엔 돌을 깎아 만든 불상이 드물지 않다. 그 가운데서도 빼어난 미적 감각과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 게 선도산 마애여래삼존불이다. 이 평가에 관해선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이견이 없다.
◆ 서악동 고분군에 김유신 무덤이?
사적 제142호인 서악동 고분군은 경주 시내 한복판에서 관광객들을 맞는 대릉원과는 또 다른 고적함과 조용함으로 여행자들에게 다가온다.
서악마을 초입에 자리한 무열왕릉은 웅장하고 거대하다.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열왕 김춘추를 모르지 않는다.
‘삼한일통의 토대를 닦았다’고 이야기되는 무열왕은 영화와 TV 속 역사드라마 등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익숙하다. 김춘추의 업적과 위상에 어울리는 대형 고분이다.
무열왕릉을 뒤로 하고 선도산 자락으로 발길을 옮기면 적지 않은 수의 고분을 볼 수 있다. 비석이 없어 매장된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기 어렵지만, 학계에선 이 무덤들을 왕릉으로 추정한다.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 등이 깨어나지 못할 영원한 잠에 들어있다고 여겨지는 서악동 고분군의 주인들에 관한 ‘나무위키’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여기엔 무열왕 이상으로 지명도가 높은 신라 장군 김유신이 등장한다.
“서악동 고분군과 김유신묘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는데, 바로 배총(陪<51A2>·큰 무덤 옆에 딸린 작은 무덤) 중 하나가 김유신의 무덤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김유신묘는 난간석이 설치된 무덤으로 왕릉급의 장식으로 형성돼 있다. 난간석의 변화 등을 추론할 때 지금의 김유신묘는 김유신의 무덤이 아니라 신라 왕들 가운데 한 명의 무덤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따라서 서악동 고분군 아래 2기의 배총 가운데 하나가 실제 김유신의 무덤일 것이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이미 1351년 전에 사망한 김유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아볼 방법이 있을까?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할 듯하다. 그러나, 이런저런 논란과는 별개로 선도산 아래 서악동 고분군에 잠든 이들이 7세기 신라의 최고 권력자들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 2100여 년 전 신라의 시작을 알린 선도산 성모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태동해 935년까지 지속된 우리 땅 고대왕조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는 “진한 6부, 혹은 사로 6촌이 자신들을 다스려 줄 임금을 원하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내려와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맞이해 거서간(임금)으로 세웠다”고 쓰고 있다. 신라의 출발에 관한 서술이다.
박혁거세를 신라의 첫 번째 통치자로 보는 것에는 대부분의 사학자들이 동의한다. 그의 탄생에 관해선 각기 다른 두 가지 설화가 전한다. 이와 관련한 고문헌의 기록을 아래 옮긴다.
“박혁거세가 하늘에서 강림한 말이 낳은 알에서 태어난 난생설화를 전하면서도 한편으로 선도 산신(山神) 설화를 함께 기술해두었다. 선도성모 설화(仙桃聖母 說話) 또는 사소부인 설화, 파소부인 설화는 신라의 건국자 박혁거세의 생모가 바다를 건너가 박혁거세를 낳은 후, 경주 선도산 산신이 되었다는 설화다. 역사책에서 선도 성모의 이름은 파소 혹은, 사소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선도 산신(파소·사소)이 바로 바로 선도산 성모다. ‘한국민속문학사전’에 의하면 선도산 성모는 신라의 시조모로 알려졌기에 신라 건국 시기에 출현한 존재로 볼 수 있다. 김부식이 송나라 사신으로 가서 접한 성모 숭봉(崇奉)의 일을 ‘삼국사기’에 기록한 것이 최초의 자료라고 한다. 역사 서적 속에 등장하는 선도산 성모는 2100여 년 전 인물이다. 타임머신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누구도 그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명확하게 알려줄 수 없다.
하지만, 신라의 시작과 함께 이야기되는 박혁거세와 밀접한 관계로 기록된 선도산 성모는 앞으로도 신라 역사의 주요한 연구대상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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