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길은 꽃길이다. 철따라 온갖 풀꽃들이 피고 진다. 나는 날마다 그 꽃길을 걸어서 들을 한 바퀴 도는 산책을 한다. 들길 산책은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풀꽃을 만나는 기쁨을 빼놓을 수 없다. 꽃들은 언제나 나를 반겨 활짝 웃는 모습이다. 몰려든 군중들의 환호를 받는 유명인사의 기분이 어떤지는 몰라도, 풀꽃들의 환대를 받으며 들길을 걷는 것보다 더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이 고장은 기온이 온화한 편이어서 겨울에도 피는 풀꽃이 더러 있다. 개쑥갓이나 봄까치꽃은 혹한이 닥치면 잠시 움츠렸다가 조금만 기온이 올라도 무작정 꽃을 피운다. 물론 양지바른 둑길 밑을 눈여겨봐야 겨우 보이는 작고 희미한 꽃이다, 제철에 무리지어 화사하게 필 때도 좋지만, 삭풍을 맞으며 명주실오리 같은 겨울햇살을 부여잡고 간신히 피어있는 풀꽃이 더 뭉클한 감회로 다가온다. 크고 화려한 꽃보다 초라하고 가냘픈 겨울 풀꽃이 더 감격적인 것은 나뿐일까.
봄날엔 민들레가 이 들녘의 주인공이고 여름에는 개망초꽃, 가을에는 코스모스와 미국쑥부쟁이가 주종을 이룬다. 가을이 깊어 추수가 끝나가는 들길에는 뚱딴지꽃과 왕고들빼기꽃이 눈길을 끈다. 돼지감자로도 불리는 뚱딴지는 해바라기과로 토양이 좋으면 3m까지도 자란다. 꽃은 작지만 해바라기를 닮았다. 이름이 뚱딴지인 것은 엉뚱하게도 땅속 덩이줄기가 감자를 닮아서 붙여진 거란다. 야생으로 많이 자라지만 당뇨 등에 약효가 있다고 재배를 하기도 한다. 푸른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높다랗게 피어 있는 샛노란 꽃은 가을의 정취를 자아낸다.
왕고들빼기 꽃이 지금 한창인 것은 여름 내 수시로 뜯어먹었기 때문이다. 왕고들빼기는 식용으로 용도가 다양하다. 봄에는 뿌리째 뽑아서 겉절이나 김치를 담기도 하고, 여름에는 순을 잘라서 생으로 쌈을 싸먹거나 데쳐서 무치거나 비빔밥에 넣으면 쌉싸름한 맛이 산나물 못지 않다. 잎이 자란 순을 자르면 얼마 안 가서 더 많은 순이 돋아나서 여름 내내 거듭해서 뜯어먹을 수가 있다. 연노랑 왕고들빼기꽃은 가을이 깊어갈수록 생기를 더해가는 쑥부쟁이에 비해 연약해 보이는데, 아기의 배냇저고리처럼 포근한 느낌을 준다.
물론 그밖에도 빼먹으면 섭섭해 할 들꽃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여뀌꽃이다. 꽃이 붉고 잎이 매운 여뀌를 엮어서 문설주에 매달아 두면 역귀(疫鬼)를 물리친다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여뀌는 종류가 많은데, 그 중에서 붉은털여뀌와 흰여뀌가 가장 꽃이 탐스럽고 곱다. 이른 봄의 한 때를 장식하는 광대나물꽃과 흐린 날과 밤에만 피는 달맞이꽃, 메꽃, 달개비꽃도 들길에서 반갑게 만나는 친구들이다.
가을이 깊었다. 또 한해가 기운다. 올해도 나는 꽃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 언제나 들꽃들이 반겨주어서 내 삶은 외롭거나 쓸쓸하지 않았다. 남은 가을은 쑥부쟁이가 동행을 할 것이고, 겨울이 오면 늦게 핀 개쑥갓의 배웅을 받으며 이 해를 넘어갈 것이다. 그러면 또 봄까치꽃이 또 마중을 나올 것이고. 내 생을 마치는 날, 나는 꽃길을 걸어서 한세상 지나왔노라고 말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