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신성한 보고(寶庫) 선도산<br/><12>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 칠갑산을 가다
신라에 선도산이 있었다면, 백제엔 칠갑산이 있었다.
무열왕과 진흥왕 등 여러 명 신라 왕의 유택이 자리했고, 역사적 의미는 물론, 미학적 완결성까지 빼어난 마애여래삼존불이 아래를 굽어보며, 신라의 태동을 알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선도산 성모(聖母)의 설화가 떠도는 곳이 선도산 일대다.
신라, 고구려와 함께 이 땅에서 명멸했던 고대왕국 중 하나인 백제에도 선도산에 필적하는 성스러운 산이 없을 까닭이 없다. 백제 또한 화려한 문화를 꽃피우며, 한때 한반도의 절반 가까이를 통치했던 국가였으니.
백제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왜 칠갑산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칠갑산이 있는 충청남도 청양을 향했다.
포항에서 KTX 기차를 타고 대전까지, 대전에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청양군까지. 청양 시내에서 장곡사와 백제문화체험박물관 등이 있는 칠갑산 입구까지는 하루에 6번 운행한다는 시내버스를 이용했다.
백제 멸망 후 복신·흑치상지 중심 복위운동 도모
660~663년 나당연합군 맞서 왕족·병사 거센 저항
칠갑산 일대 열기현·고량부리현 등서 격전 추정
1400여년 전 나라 잃은 백성 울음소리 들리는 듯
◆칠갑산은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
사실 칠갑산에 얽힌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가수 주병선의 노래는 귀에 익숙하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베적삼이 흠뻑 젖는다”로 시작하는 유행가다.
산간을 태워 힘겹게 농사를 지었던 화전민의 애달픈 삶이 담긴 가사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려졌다. 애잔한 곡조로.
하지만, 이번 취재는 노랫말 속 칠갑산이 아닌 백제 역사 속에 스며든 칠갑산의 정체성과 그림자를 찾아가는 길. 먼저 ‘위키백과’를 찾아봤다. 칠갑산에 관한 짤막한 설명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것이다.
“칠갑산(七甲山)은 충청남도 청양군에 있는 산이다. 1973년 3월 6일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백제는 이 산을 사비성 정북방의 진산(鎭山)으로 성스럽게 여겨 제천의식을 행하였다. 그래서 산 이름을 만물생성의 7대 근원 칠(七)자와 싹이 난다는 뜻의 갑(甲)자로 생명의 시원(始源) 칠갑산(七甲山)이라 경칭해 왔다. 또 일곱 장수가 나올 명당이 있는 산이라고도 전한다. 충청남도의 중앙에 자리 잡은 이 산 동쪽의 두솔성지(자비성)와 도림사지, 남쪽의 금강사지와 천장대, 남서쪽의 정혜사, 서쪽의 장곡사가 모두 연대된 백제의 얼이 담긴 천년사적지다.”
백제 도읍지의 주된 산이며, 나라에서 직접 제사를 올린 산. 거기에 세상 만물이 생겨난 공간으로 여겨 이름을 지은 칠갑산은 멸망한 나라를 되살리려 한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백제부흥운동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역사 속에서 사라진 660년부터 663년까지 왕족과 병사 등이 중심이 돼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던 부흥운동을 뜻한다.
청양 시내에서 점심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칠갑산 초입에 도착해 먼 곳을 바라봤다. 가까이 완만한 능선 너머 웅장한 산세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1400여 년 전 국가를 잃은 백제의 왕과 귀족, 백성들의 슬픈 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백제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660년 신라 김유신의 5만 군대는 육로로,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0여 만 군사는 바닷길을 통해 각각 백제를 공격해 왔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으로 쳐들어오자, 백제 의자왕(641∼660)은 태자 효(孝)와 함께 웅진성(지금의 충남 공주)으로 피난하고, 제2왕자 태(泰)가 남아 사비성을 고수했으나 전사자 1만여 명을 내고 패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복신·흑치상지·도침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은 661년 1월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옹립하고, 백제부흥운동을 꾀하였다.”
여기까지가 백제가 신라에 병합된 과정과 백제인의 부활 의지를 요약한 것이다. 위의 과정을 거쳐 백제는 700년에 가까운 시간 속에서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다가 온전히 사라졌다.
◆청양은 사라진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한 지역
공주대학교 이효원의 논문 ‘청양 지역 백제부흥운동 연구’는 각종 고고학 자료를 검토해 현재의 청양군 일대가 사라진 백제를 되살리기 위한 부흥운동의 본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고 있다.
“백제부흥운동 발호 당시 두시원악이라는 이름으로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청양 지역은 부흥운동의 핵심적인 활동이 웅진·사비 지역의 탈환이라는 기치 아래 진행되는 동안 최전선으로서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 열기현은 직접적인 전장이 된다는 점에서, 고량부리현과 사시량현은 임존성의 배후성이 되면서도 한티·대치 같은 육로나 무한천·지천 같은 수로를 통해 전장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로 쓰인다는 점에서 활약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선도산이 한 고대왕국의 시작을 알리고, 전성기가 어떠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면, 백제의 칠갑산은 침몰하는 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또 다른 고대왕국을 되살리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가뭇없이 흘러버린 기나긴 세월. 칠갑산에 남아 있는 백제의 흔적을 찾아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닐 듯했다.
웅진·사비시대 배후도시였던 청양지역 출토 유물 전시
청양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은
청양 시내에서 자동차로 10분, 버스를 이용해도 2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깔끔하게 꾸며진 전시실과 각종 문화체험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거기에 더해 한때 한국 금 생산량의 70% 이상을 채굴한 청양군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금광체험관 등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한국관광공사는 다음과 같이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을 소개하고 있다.
“백제시대 토기를 굽는 가마를 형상화하여 만들어졌다. 1500년 전 백제 가마터, 청기와, 최익현 유배도, 공자상 탁본, 황금복 거북이와 같은 5대 명품과 금광체험관, 농경문화체험관, 1960년대 추억의 옛거리 전시관, 한상돈 기념관, 유상옥 기증실, 정승공원으로 구성돼있는 박물관이다. 주말에는 토기 만들기, 나만의 컵 만들기, 백제의복 체험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백제는 기원전 18년 부여족 계통의 온조 집단이 현재의 서울 지역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다.
웅진과 사비는 백제의 수도였던 도시. 백제문화체험박물관의 청양역사실엔 웅진과 사비 시대 왕도 인접 지역인 청양에서 발굴된 도성 내 건축물인 궁궐, 사찰, 관공서에 사용된 기와와 전돌, 토기 등이 다수 전시돼 눈길을 끈다.
“백제의 문화가 가장 화려하고 왕성했던 웅진·사비 시기의 수도 배후 도시로서 도성의 건축물에 사용된 기와와 전돌, 왕실과 수도에 거주하는 이들의 사용한 토기 등을 생산해 공급한 장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던 곳이 청양군”이라는 부연도 이어진다.
이외에도 백제문화체험박물관 특별기획 전시실에선 등짐을 지고 조선 팔도를 오갔던 보부상의 유래와 흔적을 살펴볼 수 있고, 과거 1960~70년대 우리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공간과도 만날 수 있다. 부모와 자녀 세대가 함께 보며 이야기 나눌 소재로 그저 그만이다. 농경문화전시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 우리 땅에 존재했던 고대왕국의 하나인 백제의 역사가 궁금한 여행자라면 백제문화체험박물관에서의 시간이 즐거울 수밖에 없을 듯하다.
/글·사진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