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성매매 집결지 65세 그녀의 이야기
22일 오후 기자는 영등포와 포항 등지에서 22년간 성매매를 하며 살아온 65세 한 여성을 만났다. 아래는 인터뷰를 통해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를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9세 때부터 시작한 식모살이
나는 성매매 여성이었다. 태어난 곳은 강원도 오지마을, 네 남매 중 둘째로 위로 오빠 한 명과 밑으론 여동생 한 명, 남동생 한 명이 있다. 우리 집은 처음부터 가난했다. 노름을 좋아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우리에게 빚만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를 원망할 틈도 없이 나는 대처(大處)로 식모살이를 떠나야 했다. 어머니의 장사를 돕기 위해서다. 그때 내 나이 겨우 9살, 나는 그 집 아기를 보살폈다.
지금 생각하면 아기가 아기를 키운 꼴이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7년을 꼬박 일했다. 남들 다 다니는 국민학교(초등학교)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식모 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엄마에게 돈을 보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또다시 큰 오빠를 따라 서울 변두리 봉제공장으로 갔다. 어렸을 때부터 옆집 바느질거리를 조금씩 맡아오며 밥을 얻어먹은 터라 곁눈질로 배운 손기술로 잠시 그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래도 돈은 늘 부족했다. 워낙 없던 살림이라 돈을 보내도 겨우 굶주림을 면할 정도였다. 결국 엄마는 23살이 되던 해에 나를 시집보냈다. 한 명이라도 군식구를 줄이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결혼 상대는 장사하는 집 아들이었다. 기구한 팔자는 타고난 것일까? 남편은 평소에는 멀쩡한데 술만 마시면 날 때렸다. 하루는 뺨을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고막이 나가버렸다. 그날부터 소리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더니 지금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의사는 일찍 병원에 갔으면 이 정도로 심해지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그땐 그럴 수 없었다. 남편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 남겨진 두 아이 때문에 원망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나는 더 큰 돈이 필요했다.
봉제 공장을 다니던 중 내 사정을 아는 동료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영등포 신세계백화점 너머로 가면 큰돈을 만질 수 있어. 정 급하면 그곳으로 가봐.” 나는 그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내 나이 서른살이었다.
강원도 오지마을 출신 65세 女
어릴적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7년간 식모살이·봉제공장까지
“큰 돈 번다”말에 성매매 첫 발
하루 많게는 손님 10명도 접대
자식에게 말 못하고 홀로 버텨
▲영등포에서 포항으로 오기까지
처음 내가 영등포에서 했던 건 ‘나까이’(호객꾼) 일이다. 나이가 많은 탓에 직접 성매매를 시키기보단 손님을 호객하는 역할을 준 것이다. 그 일도 쉽지 않았다. 돈도 많이 벌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빌린 돈이 있으니 견뎌야 했다. 선불금 2000만 원, 나는 2000만 원을 벌기 위해 5년 동안 일을 했지만 매달 10%씩 불어나는 이자 탓에 돈을 다 갚지 못하고 포항으로 내려왔다. 포항은 직접 성매매를 할 수 있어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갚아야 할 돈이 남아 있었지만, 자식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야 했기에 나는 또 업주에게 5000만 원을 빌렸다. 지옥 같은 22년은 그 5000만 원으로부터 시작됐다.
▲온갖 욕설을 들어야 했던 포항
포항 뱃사람들이 거칠다는 것은 영등포에서 일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루는 술을 마시고 온 남자 손님이 잠자리가 마음에 안 들었다면서 욕설과 함께 내 목을 졸랐다. 나는 속옷도 입지 못한 채 거리로 뛰쳐나왔다. 주위에 있던 여성들이 급하게 수건과 담요를 가지고 나와 나를 감싸 안고 업소 안으로 들어온 적도 있었다. 관계 가진후에 화대를 주기 싫어서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돈을 돌려받으려던 남성, 특이한 성적 취향을 강요한 남성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일들을 겪었다. 하루에 적게는 5명, 많게는 10명의 남성들과 관계를 가졌다. 남성들은 툭하면 나를 바보로 불렀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탓에 글을 읽을 수도 없었고 귀가 어두워 불러도 대답을 못했던 탓이다. 업주들은 이런 나의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일한 만큼 돈을 주기 시작한 것은 내가 달력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 하루에 받은 남자 손님들의 수를 세기 시작한 때부터다. 억울했지만 바보 같은 내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포항에 와서 성매매에 뛰어들어서야 업주들에게 빌린 돈을 다 갚을 수 있었다. 돈을 다 갚고 나니 업주가 오히려 나에게 20만 원을 돌려줬다. 위로금인지, 양심에 찔린 건지 모르겠으나 그날을 절대 잊지 못한다. 빚을 다 갚은 뒤에도 약 19년간 더 성매매를 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50대 초가 되니 점점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원래도 하혈을 자주 하긴 했지만, 자궁을 적출해야 할 수준까지 간 줄은 몰랐다. 나는 모아둔 200만 원을 들고 병원에 갔다. 병원에서는 보호자의 동의가 있어야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수술은 해야겠기에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연락해다. 그렇게 5년 만에 아들을 만났다. 아들을 본 순간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아들은 지금까지도 내가 성매매를 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알게 되면 나를 사람처럼 보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혼자 모든 시련을 견뎠다.
▲내 꿈은 공주방을 가지는 것
나는 57세에 성매매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집결지 주변에 여성상담센터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포항에 온 지 10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그곳을 방문했다. 그곳에 있는 상담 선생님들은 너무나 착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웃어주고 내 사연을 궁금해 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 착실히 공부했다. 1년간 낮에는 자격증 공부를 하고 밤에는 성매매를 했다. 1년의 피나는 노력끝에 기술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길로 나는 22년간 몸담았던 업소에서 짐을 싸서 나왔다. 업소를 나오기까지 큰 결단이 필요했다. 10년 넘게 함께한 동료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곳을 나왔다.
그곳을 떠나고서야 알았다. 집결지에 있는 동료들이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지를. 사실 이곳에 있으면 세상이 온통 3평 하늘처럼 보인다. 우물안 개구리가 되는 것이다. 떠나면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와락 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동료나 동생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하루빨리 그곳을 빠져나오라고. 너희가 보는 세상이 다가 아니라고. 사실 나도 이곳을 떠났지만 요즘도 마음이 답답해지면 여기있는 친구들과 이야기 하곤한다. 이곳은 어쩔 수 없이 나의 고향이자 친정같은 곳이 되었으니까.
성매매 집결지를 떠나 8년의 세월이 흐르고 지금은 중앙동 주변에 집을 얻어 살고 있다. 새벽 4시에 출근해 2시간 가량 차를 타고 농촌마을로 가 사과를 따기도 하고, 섬으로 가서 밭일을 돕기도 한다. 그래도 8년 전보단 행복하다. 아무도 나를 바보라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 꿈은 ‘공주방’을 얻는 것이다. “육십이 넘은 할머니가 웬 공주방이냐”고 하겠지만, 식모 생활하던 시절 주인집 딸의 방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얀색 레이스 침대에 분홍색 캐노피 커튼이 달린 방을 가지고 싶다. 모든 근심과 걱정을 벗어버리고 그방에서 고운 꿈을 꾸고 싶다. 오순도순 가족들과 모여사는 행복한 꿈을.
/성지영 인턴기자 thepen02@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