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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정밭 여름

등록일 2024-08-01 19:25 게재일 2024-08-0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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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묵혀둔 논밭이 더러 보인다. 한 뼘의 땅도 놀리지 않던 시절과는 달리 농지에 대한 애착이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물론 땅을 농토로 보는 것과 부동산으로 보는 것은 개념이 다르다. 순수한 농지로서의 땅은 이제 효용가치가 그다지 높지 않다. 옛날에는 논 열 마지기만 있어도 밥 굶을 걱정은 없었는데, 지금은 열 마지기(2000평) 쌀농사 지어봐야 순수익이 고작 378만원 정도라고 한다.

대신 열 마지기 벼농사는 그리 어렵지가 않다. 못자리부터 추수까지 전 과정이 기계화 되어 사람 손이 직접 닿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 대신 소득도 적어서 농사짓기를 달가워하지 않아 직불금이라는 것까지 주면서 장려를 하는 형편이다. 우리의 주식인 쌀의 재배가 자꾸 줄어 수입에 의존하게 되면 나중에 식량난에 처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지를 소유하고도 정당한 이유 없이 경작을 하지 않으면 강제매각 등의 벌칙이 가해진다.

아무리 옥답이라도 한 해만 묵히면 길길이 풀들이 자란다. 바람에 날아온 풀씨, 물에 떠내려 온 씨앗 등이 제초제의 박멸이 없어 발아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풀씨 중에 가장 이동이 자유로운 것이 쑥, 망초, 민들레 같은 국화과 식물이다. 씨앗에 솜털이 붙어 바람에 날리기 때문이다. 벼과 식물 중에도 억새나 갈대처럼 씨앗을 바람에 날리는 종이 있지만 묵혀둔 땅에는 쑥이나 망초가 선점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에 떠내려 온 피나 둑새풀 씨앗이 논을 점령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묵정밭의 식물 종은 다양한 생태계를 형성한다.

내가 지나다니는 들길 가의 묵정밭은 벌써 여러 종의 풀들이 어우러져 있다. 쑥과 망초, 개망초, 명아주, 고들빼기, 민들레, 지칭개, 보리뺑이, 여뀌, 피, 미국쑥부쟁이, 토끼풀…. 눈에 띄는 대로 세어도 십여 종이 훨씬 넘는다. 묵정밭에서는 주종이 따로 없다. 모두가 잡초의 누명을 벗고 당당하게 제 이름으로 산다. 영토 경쟁을 하면서도 결국엔 무성한 풀밭을 이룬다. 가장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인 셈이다.

인간의 손길을 벗어난 해방구인 풀의 공화국 앞에 가끔씩 발길이 머문다. 지금도 농부의 눈길로 보자면 마땅치 않겠지만 배고프던 시절에는 저렇게 묵혀둔 전답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한 마디씩 지청구를 했다. 당장 허기가 지면 멀리 내다볼 겨를이 없게 마련이지만, 지금은 배가 불러서 벼들이 잘 자란 논보다도 이렇게 묵혀둔 논에 더 눈길이 간다. 자연생태계니 환경보호니 하는 말들도 절대빈곤 앞에서는 무색해지는 것이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도 이 묵정밭 같으면 좋겠다. 각양각색의 풀들이 공존하지만 계절이라는 대의에 수렴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모습일 터이다. 통탄스럽게도 우리 국회는 전횡과 독단에다 횡포를 일삼는 자들이 점령하고 있다. 범법자들의 방탄을 위한 폭력배들의 소굴에 민생 따위가 안중에 있을 리 없다. 국민들의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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