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팬들의 기억 속에서 불멸할 20세기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 분명한 알폰소 쿠아론(63·멕시코). 그는 영화 ‘이 투 마마(And Your Mother Too)’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산다는 건 파도타기 같은 거야. 겁내지 말고 물결에 몸을 맡겨.”
무언가가 되기 위해,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너무 애쓰지 말라고 사람들을 위로하는 알폰소 쿠아론.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시원스럽게 ‘파도타기’를 할 수 있는 여름이라고 한다.
이른 폭염이 닥친 한국. 덥다고, 아침에 입고 나온 셔츠가 땀에 젖었다고 과하게 스트레스 받지 말자. 어차피 매일 울어도, 매시간 웃어도 생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뿐인 것.
일찍 찾아온 여름 밤. 편안한 숙면으로 독자들을 이끌 영화 2편을 아래 ‘피서용 선물’로 소개한다.
짙푸른 바다가 그리운 시절이니 ‘그랑 블루’
푸르게 일렁이는 파도와 하얀 거품을 물고 자지러지는 포말, 원색의 비키니가 달리는 해변과 첫사랑의 기억인 양 붉게 멍드는 석양.
다장조의 동요 같은 도시의 회색 일상들. 잠시잠깐의 떠남이 그 단조로움을 얼마만한 힘으로 치유할지는 미지수지만, 누구나 바다로 가는 기차를 타고 싶은 목마른 초여름의 6월 말이다.
하지만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기 마련. 햇살 부서지는 낭만의 금빛 해변을 꿈꾸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리운 옛날 영화’ 뤽 베송의 ‘그랑 블루’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차갑고 서늘한 페루와 그리스의 바다 풍광을 배경으로 ‘인간이란 끊임없이 외로움과 싸우는 가여운 존재’라는 깨달음을 주는 슬프고, 그 슬픔 때문에 끔찍하게 아름다운 영화이기에 그렇다.
자크 마이욜(장 마르바 분)과 엔조 몰리나(장 르노 분)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다. 가난한 그리스의 해변마을에서 누가 깊이 자맥질하는가를 내기하던 철부지들.
영화는 그 철부지들의 성장과 좌절, 희망과 소멸을 ‘짙푸른 바다’의 색채와 구원의 여인으로 상정된 조안나(로잔나 아퀘트 분)를 통해 보여준다.
36년 전인 1988년. 프랑스 칸 영화제 오프닝 작품으로 상영된 ‘그랑 블루’는 36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하늘만큼 파랗고 광대한 심해(深海)의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이곳이 싫지만, 다른 저곳으로 갈 용기가 없는 인간들의 소심함을 다독이며 위로해왔다.
혼자선 외로움을 견딜 용기가 없고, 그 외로움을 나눠 가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여건과 용기마저도 없는 사람들. 그래서였을까?
“내 우주는 바로 당신이에요”라는 로잔나의 고백은 새벽녘 해미 같은 서늘함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적셨다. 영화를 본 늙은 시인은 자신의 젊은 날과 지나온 여름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너를 향한 그리움으로 바다는 내내 푸르렀다”고.
눈으로 보는 바다는 단지 아름다울 뿐이다. 파라솔 아래에서 밀어(蜜語)를 속삭이는 연인들, 모래성을 허물며 발가락을 간질이는 파도, 수평선 저편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별빛. 그러나 인간의 삶에 어찌 아름다움만이 있을까.
눈이 아닌 가슴으로 바라보는 바다는 막막함으로 우리 가슴을 막아선다. 맑은 서정시의 소재가 되고 고운 노래의 가사가 되었던 바다.
하지만, 그 푸르름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슬픔이 녹아있었던가? 세상사의 회한(悔恨)이란 인간에게나 바다에게나 마찬가지인 것을 나이를 먹어가며 알게 된다.
바다로의 떠남을 꿈꾸었지만, 떠나지 못하고 식은땀 끈적이는 도시에 남은 사람들. 떠난 사람들에게 ‘바다’는 분명 눈과 육체를 즐겁게 해주었을 것이다. 허나, ‘그랑 블루’를 통해 가슴과 영혼에 쌓인 일상의 묵은 때를 씻어내는 즐거움과 만족감은 영화가 플레이 될 커다란 TV가 방에 있는 우리들 몫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자크는 돌고래의 노래 소리만이 적요함을 깨는 심해로 사라진다. 죽으러 갔을 수도 있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은 아름다울 수도 있는 법.
라스트 신이 펼쳐지는 동시에 떠오르는 요절시인(夭折詩人) 한 명이 있었으니 박정만(1946~1988)이다. 박 시인은 죽기 며칠 전 딱 2줄짜리 시를 남겼다. 이런 것이다.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우리도 셔츠를 땀으로 적셔야 하는 지긋지긋한 여름을 피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 그곳이 심해건, 우주건, 또한, 피안(彼岸)이건.
무더운 여름밤 색다른 피서가 될 ‘마리 이야기’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 힘일까?
1871년 프랑스 파리. ‘파리 꼬뮌’을 눈앞에서 지켜본 시인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는 열일곱 나이에 조숙하게도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그로부터 100년이 훌쩍 지난 시대의 한국. 시인 허수경(1964~2018)은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란 제목의 시집을 낸다.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지난 후 애니메이션 감독 이성강은 앞서 언급된 두 사람의 말에 이런 진술을 덧붙인다.
“비록 상처와 슬픔으로 가득했을지라도 유년을 추억하는 것은 눈물겨운 아름다움이다.”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를 통해서다. 이미 성장한 관객들에게 ‘마리 이야기’는 추억한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새삼 가르친다. 그러나, ‘마리 이야기’가 더 큰 애정을 가지고 접근하려는 대상은 상처와 슬픔 속에서 자라난 어른이 아닌, 상처와 슬픔 없이 커가고 있는 ‘오늘의 아이들’이다.
괴이한 모습을 한 우주 종족을 싸움 붙여 레이저 광선을 난사하는 컴퓨터 게임도, 커다란 풍선이 천장에 매달려 돌아가고 그 아래에선 물놀이를 하는 놀이공원도 없던 아빠의 어린 시절.
‘대체 아빠는 뭘 하고 놀았을까?’라는 궁금증에 아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만하다. 아… 이걸 어떻게 말해줘야 하나? 온통 아스팔트 천지인 도시에서만 생활하는 21세기의 아이들에겐 맨땅에서 막대로 나무 조각을 쳐 날려 보내던 ‘자 치기’도, 하굣길 연탄 화덕에서 설탕을 녹여 만들어먹던 ‘뽑기’도 설명하기가 난감하다.
‘가족 애니메이션’을 표방한 ‘마리 이야기’는 이런 곤혹스러움과 마주친 아버지들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유년을 추억하는 아릿함’이 있으니까.
가난했지만 희망 또한 가득했으며, 겪어야 했던 슬픔만큼 기쁨도 곳곳에 숨어 있던 20세기 아이들의 유년. 아빠가 겪은 그 시절을 함께 겪어보는 동지의식을 아이들에게 선물하는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
바람 빠진 축구공을 차고, 구슬치기를 하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가난한 아이들의 바닷가 마을. 태풍으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 남우는 할머니와 엄마, 고양이 ‘요’와 함께 산다.
일찌감치 겪은 죽음의 체험은 남우를 우울하고 말수 적은 아이로 만들어버렸다. 곧 도시로 떠나게 될 유일한 친구 준호는 이런 남우가 걱정스럽다. 남우의 엄마를 짝사랑하는 경민 아저씨의 친절과 보살핌도 남우에겐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문방구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구슬을 발견한 남우에게 신비로운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환상 속의 소녀 ‘마리’와 산처럼 크고 구름처럼 부드러운 강아지 ‘몽’이 나타나 답답하고 짜증나는 현실에서 남우를 해방시키고 꿈의 세계로 함께 여행을 떠나는데….
앞서 랭보와 허수경의 말처럼 크건 작건 슬픔과 상처 없이 성장하는 사람은 이 땅에 없다. 그것은 아버지를 잃고 희망마저 잃은 남우만이 아니다. 궁핍과 결핍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 세대’에겐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지워지지 않은 생채기 하나쯤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
‘마리 이야기’는 바로 그 상처를 다독이고 위로하는 이성강 감독의 나지막하지만 따스한 목소리에 다름없다. 전체적인 화면의 주조를 이루는 나른하고 따스한 색감과 실사에 버금가는 배경의 사실성은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가난한 희망’과 ‘궁핍 속에서 자라는 꿈’을 키우던 시대로 아버지와 아이들을 여행시킨다. 상처와 슬픔도 성장의 자양분이니까.
어려웠던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건 즐거움의 기억만은 아닐 터. 상처와 슬픔의 기억도 성장의 자양분이 된다.
모자라고 부족한 것 하나 없이 크는 2024년의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모든 것이 모자라고 부족했지만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성장을 멈추지 않았던 어린 시절 아빠의 건강한 삶을 ‘마리 이야기’를 통해 일부나마 보여주는 것.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듯하다.
오늘 밤엔 에어컨과 거실의 형광등을 꺼보자. 그 어둠 속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마리 이야기’를 본다는 건 색다르고 의미 있는 피서법이 될 것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