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흥해 냉수리고분 답사기
백고무신…. 학창시절 한강을 점령한 순서(백제, 고구려, 신라)를 외우던 암기비법(?)이다. 5세기 중국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는 갑자기 남하 정책으로 대외 노선을 변경한다. 북위(北魏), 양쯔강 일대 한족과 화평했던 고구려가 굳이 정복전쟁을 펼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신라 진흥왕이 한강으로 진출하기 6세기 중반까지 강(江) 일대를 차지했는데, 당시 고구려 국경은 충남 당성군(唐城郡·남양만)에서 충북 진천에 이르고 있었다는 게 학계 정설이었다. 그러나 1992년 포항시 신광면에서 발견된 냉수리고분은 이런 기존 학설을 뒤집는 것이어서 역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무덤 형식이나 부장된 유물들이 모두 고구려계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강 일대에 그친 줄 알았던 고구려 강역이 중원을 넘어 신라 턱밑에까지 칼끝을 겨눴다는 사실에 학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6세기 흥해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냉수리고분 속으로 들어가 보자.
냉수리고분, 고구려계무덤서 볼 수 있는 ‘이실’양식에 ‘부뚜막형’ ‘반형’토기 출토
‘영주 순흥리고분벽화’의 뚜렷한 화풍도 긴밀한 정치적·문화적 연결성 보여줘
“‘고구려 경북 진출설’… 다양한 사료와 반론 등을 통한 학계의 학문적 정리 필요”
◆6세기 고구려는 한강-중원-대전까지 진출
영남대박물관에 가면 ‘고구려강역도’(高句麗疆域圖)가 있다. 6세기 고구려가 어디까지 남하했는지 알 수 있는 지도로, 당시 지명과 고구려 지명을 병기하고 있다.
지도에는 당시 충남 남양-진천-청하를 연결하는 동서라인을 고구려 영역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 지배 범위를 한강유역으로 한정한 기존 학계의 견해를 뒤집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도 보고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연기읍지’(燕岐邑誌)다. 이 읍지엔 ‘개소문’성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연개소문은 천개소문(泉蓋蘇文), 개금(蓋金), 개소문 등 많은 별칭으로 불렸다.
읍지엔 ‘소문산성’ 기록이 세 군데나 나타나 이곳이 고구려와 백제의 접전지였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고구려가 서울(한강)을 훌쩍 넘어 충남 일대까지 세력을 펼쳤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최근 대전에서 발견된 ‘월평동유적’의 토기도 관심 대상이 되고 있다. 이곳 토기들은 저온에서 구워 갈색을 띠고 바닥이 평평한 전형적인 고구려 토기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청림문화연구소의 박승규 원장은 “최근까지 사학계에서는 고구려 강역을 한강 즉 차령산맥 이북으로 비정해 왔지만, 최근 고구려의 군사력이 대전, 연기군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료, 유물들이 많이 보고되고 있다”고 말했다.
◆냉수리고분에서 고구려계 유물 출토
냉수리고분은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 위치해 있다. 도음산(384m)의 서측 자락과 용천저수지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모두 7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고분이 위치한 곳은 안강 방면에서 동해로 통하는 길목으로 이곳은 고대부터 중요한 교통로로 기능했다. 즉 삼국시대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가 동해안과 북쪽 산악지대로 진출하는 길목이었다.
냉수리고분은 1992년 도로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됐다. 당시 조사단은 신라 수도였던 경주와 50km 이상 떨어져 있고 주변에 뚜렷한 유적지도 없어 지방 토족(신라계)의 수장급 무덤으로 여겼다.
무덤 양식도 신라의 무덤 양식 즉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형태를 띠었기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덮개석이 들어올려 졌을 때 뜻밖의 광경이 펼쳐졌다. 연도(羨道) 부분에 측실(側室·곁방) 이라고 부르는 ‘이실’(耳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석실은 고구려계 무덤에서만 주로 나타나는 유적이다. 고구려는 초기에 적석총(積石塚) 묘제를 주로 사용했지만 4세기 이후 곁방이 있는 다실묘(多室墓) 등으로 변천했다.
출토된 유물들도 연구원들의 관심을 끌었다. 묘제에 이어 부장품들도 고구려와의 교류 흔적을 잘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학자들의 주목을 끈 건 ‘부뚜막형 토기’. 이 토기는 고구려 토기 양식을 대표하는 유물로 주로 의례, 제례용으로 널리 쓰이던 양식이다. 조리기구를 부장함으로써 ‘저 세상에서도 배불리 먹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쟁반, 소반 모양의 ‘반형(盤形)토기’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출토된 반형토기는 3중으로 겹쳐진 형태로, 이 역시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다.
발굴에 참여했던 한 연구원은 “신라 영토로 여겨졌던 경북에서, 그것도 한강과 수백km 떨어진 흥해에서 고구려계 유물, 유적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설명했다.
◆영주 순흥리고분벽화도 고구려계 유적
6세기 ‘고구려의 경북 진출설’과 관련해 영주 순흥리고분벽화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85년 발견된 순흥리고분에서 고구려 화풍이 뚜렷한 벽화가 발견되었다. 당시 언론은 ‘신라영토에서 고구려 벽화 발견’ 제목으로 대서특필하며 세기적 사건에 열광했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이 펼쳐지던 시기 학계에서 고구려는 남한강을 따라 중원(中原)에서 신라와 전선(戰線)을 형성했다고 보았다. 이 기록은 ‘중원고구려비’에서도 잘 나타나 고구려의 군사 주둔 범위가 충주-청주-단양 일대에 미치고 있음이 확인됐다.
그러나 순흥리에서 고구려계 벽화가 발견됨으로써 고구려 군사 접경이 중원을 뛰어넘어(훨씬 남하해) 경북 내륙까지 미치고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당시 고분을 발굴했던 이명식 전 대구대 교수는 “순흥리고분의 벽화 화풍이 고구려 영향을 받은 흔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며 고구려와의 긴밀한 정치적, 문화적 연결성을 확인해줬다. 벽화 소재인 산악도(山岳圖)도 고구려의 덕흥리고분, 무용총의 소재와 비슷해 이 학설에 무게를 실어줬다.
◆‘고구려 경북 북부 지배설’ 학문적 모색 필요
고구려 묘제, 고구려 양식 토기, 고구려풍 벽화가 발견됐다고 해서 모두 그 지역이 고구려의 영토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시 점령과정에서 생긴 과도기적 사건일 수 있고, 양국간 교류 과정에서 나타난 문화현상일 수도 있다. 삼국사기 등 사료에서도 이와 배치되는 기록도 많이 보이고 반론도 만만찮다.
당시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에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은 다양한 사료에 나타나지만 이를 정치적 지배로까지 해석하는 건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당시 6세기 대외팽창기 고구려는 신라, 백제 일부지역을 선(線)적으로 지배했을 뿐 면(面)적 통치에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전·충남지역, 경북 내륙에 이어 동해안 지역까지 고구려의 흔적이 많이 보이고, 비슷한 시기에 고분, 벽화, 부장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북방 흔적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이를 단편적인 사실(史實)이나 문화현상으로 치부하기에 무리라는 지적도 있다.
6세기 고구려 강역은 대체 어디까지일까. 중원인가, 대전·충남인가, 영남 내륙, 동해안인가. 이제 학계가 가설을 넘어 학문적으로 정리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글·사진=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