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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

등록일 2024-05-23 19:13 게재일 2024-05-2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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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날마다 산책을 하는 이 들판은 지금 모내기가 한창이지만, 예전 같으면 보릿고개의 막바지인 보리누름이다.

녹음이 시작되는 초여름에 삼베를 널어놓은 것처럼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은 이제 보기 드문 풍경이 되었다. 부족한 식량을 채우려고 논에도 이모작으로 보리나 밀을 갈았다. 그것을 베어서 타작을 하고 벼를 심어야 하기 때문에 연중 가장 바쁜 농번기가 바로 이맘때였다. 학교마다 가정실습이란 명목으로 휴교를 해서 아이들까지 일손을 돕게 했다.

겨울을 나고 봄을 거쳐 초여름에 이르는 보리밭 풍경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그와 함께 아낙네들이 보리밭의 김을 매는 모습, 보리를 베고 타작하는 광경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절구통을 뉘어놓고 보릿단을 태질해서 떨어낸 낱알을 도리께로 몽글리던 보리타작도 사라진 풍습이 되었다. 그 때 불렀던 ‘옹헤야’ 같은 농요는 문화유산으로나 남았다. 우물물에 만 보리밥에다 풋고추나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던 점심도 옛날이 되었다.

한 술의 쌀밥이 입에 들어오기까지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간다는 벼농사도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다. 소를 몰아 쟁기질과 써레질을 하고, 일일이 손으로 모를 심고 김을 매고, 낫으로 베어서 탈곡을 하던 모든 과정이 기계화 되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모를 심던 풍경 대신 이앙기 몇 대가 두어 주일이면 드넓은 들판의 모내기를 다 해치운다.

들판에 울려 퍼지던 모심기노래도 사라지고, 많은 사람들이 논둑에 둘러앉아서 참이나 점심을 먹던 풍경도 없어졌다. 여남은 살 누이가 젖먹이 동생을 업고 들판까지 젖을 먹이러 오던 것도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이다.

농사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매기였다. 보리밭 콩밭 김매기가 주로 아낙네들의 일이라면 벼논의 김매기는 남자들의 일이었다. 그만큼 힘이 들기 때문이다. 보통 세 벌은 매어야 하는데, 한여름에 뙤약볕에 열손가락으로 논바닥을 긁어서 김을 매노라면 볏잎에 온통 얼굴이 긁히고 베적삼을 땀으로 적시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참 편리하게도 모를 심기 전에 제초제를 뿌려서 아예 잡초가 나지 않으니 벼논의 김매기도 사라진 풍경이 되었다.

벼논에서 사라진 것은 잡초만이 아니다. 그 흔하던 물방개, 소금쟁이, 장구애비, 물자라, 게아재비, 물장군 같은 물벌레들이 사라지고 종아리에 달라붙던 거머리도 사라졌다. 밤 들판의 반딧불이가 사라진 건 벌써 옛날이고 미꾸라지와 개구리도 드문 존재가 되었다.

시멘트로 된 수로에는 미꾸라지가 살 수 없고 땅속에서 월동을 하는 개구리도 트랙터 로타리작업 등으로 멸종 위기에 놓인 것이다. 여름 들판을 부지런히 날아다니던 제비도 보이지 않고 메뚜기나 여치 같은 풀벌레도 눈에 띄게 줄었다.

현대화된 기계영농으로 사람의 손이 거의 안 갈 정도로 벼농사가 수월해지고 쌀이 남아돌 정도로 풍족해진 것은 좋지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은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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