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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과 5·18

등록일 2024-05-16 19:32 게재일 2024-05-17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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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수필가·시조시인

어제가 5월 16일이고 내일은 18일이다. 1961년 5월 16일에는 군사정변이 있었고, 1980년 5월 18일은 광주에서 대규모 민중시위가 일어난 날이다. 지금은 5·16을 쿠데타로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공식화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자를 혁명으로 후자를 폭동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형식상으로 볼 때 5·16은 성공한 쿠데타였고 5·18은 진압이 되었으니 실패한 셈이었다. 그 두 사건에 대한 역사적·객관적 평가는 관련 당사자들이 아직도 일부 생존해 있고 논란이 없지 않아 진행 중인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고, 허정내각과 개헌을 거쳐 장면내각이 수립되었지만 국정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10개월 동안 무려 2000여 건의 데모가 발생하고 연인원 100만 명이 넘게 가담을 했다. 매일 7∼8건의 데모가 일어난 셈인데, 교사의 전근을 반대하는 국민학생들의 데모가 있는가 하면 국회의원이 뺨을 때렸다고 경찰들이 데모를 했다. 심지어는 데모를 그만하라는 데모도 있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각종 언론매체들도 사회혼란에 일조를 하고 있었다.

그런 혼란의 와중에 일어난 것이 5·16 군사정변이었다. 박정희 소장과 육사 출신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로 장면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그들이 결성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발표한 ‘혁명공약’은 대강 이러했다. 반공을 국시로 하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것,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는 것, 국가 자주경제를 재건하고 민생고를 해결한다는 것, 통일을 위한 실력을 배양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 후에 들어선 박정희 정권은 위의 공약들을 충실히 이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소장과 노태우 9사단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12·12 사태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런 사태에 반발해서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광주시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항쟁을 한 것이 광주민주화운동이다. 시위가 격해지자 투입된 군 병력의 과잉진압으로 부상자가 생기고, 격분한 시위 군중들이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을 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5·16과 5·18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조사와 자료와 평가가 산적해 있지만, 아직은 관련·이해 당사자들이 상당수 생존해 있는 상태여서 주장과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한 나라의 역사는 격류도 있고 소용돌이도 있는 강과 같다. 그리고 그 속에는 온갖 것들이 섞여들고 부침하기 마련이다. 아무튼 식민지배와 동족상잔을 겪은 세계 최빈국이라는 초라한 강줄기가 지금은 세계 10위권의 대하가 되었다. 더 이상 좁은 틀에 갇혀 아옹다옹할 게 아니라 보다 원대한 시야로 역사의 향방을 통찰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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