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카와 슌타로 (요시카와 나기 옮김)
솔직히 말해서
책은 흰 종이로 있는 게 좋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푸른 잎이 우거진 나무로 있고 싶었다
그러나 벌써 책이 되고 말았으니
옛날의 일을 잊어버리려고
책은 자신을 읽어보았다
‘솔직히 흰 종이로 있는 게 좋았다’고
검은색 활자로 쓰여 있다
나쁘지 않다고 책은 생각했다
내 마음을 모두가 읽어준다
책은 책으로 있다는 게
조금 기뻤다
책은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종이로만, 나아가 종이로 되기 이전인 나무로 존재하고 싶었다고. 인공화 이전 존재로 있고 싶었던 것. 하나 “벌써 책이 되고 말았”으니, 이제 책은 자기 위에 쓰여 있는 글자-내 -를 읽어본다. 그러자 그는 “내 마음을 모두가 읽어”주는 일이 나쁘지 않다고 느끼고는, 자신이 “책으로 있다는” 걸 비로소 긍정한다. 여기서 ‘책’을 시인, 책의 활자를 시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