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은 수레를 끌고 다른 사람은 우산을 씌워주며 나란히 걸어간다. 자신의 한쪽은 비를 맞으며 우산을 씌워주는 여인의 따뜻한 마음이 뜨겁게 다가온다. 수레를 끄는 노인의 느린 속도에 맞추어 함께 한참을 걷는다. 남을 위해 함께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몸은 비에 젖어도 마음은 따뜻한 선생님의 선행에 우리는 감동으로 물든다.
그동안 여당과 야당의 양보 없는 줄다리기로 피로감은 늘어나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우리의 삶을 더 팍팍하게 한다. 거기에 더하여 미국과 중국의 경제 패권 다툼은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경제를 힘들게 한다. 그런 가운데에도 정치가 권력만을 바라볼 때 서민들의 삶은 기댈 곳을 잃는다.
이제는 감정 노동자가 되어버린 교사는 점점 죄어오는 족쇄를 풀고자 거리로 나선다. 동방예의지국이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이제는 지나간 시대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상적인 교육활동을 방해하는 집요한 일부 학부모들의 요구는 교사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린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하는 교사들의 현실에 우리는 너무 무기력하다. 학생들의 잘못한 행동마저도 지적할 수 없는 교사의 오늘이 그저 참담하기만 하다.
방송과 신문은 연일 새로운 기사를 쏟아낸다. 신문 지면을 가득 메운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사건으로 채워진다. 하루를 살아가기도 벅찬 서민들에게 ‘묻지마 살인’, ‘성폭력을 위한 폭행과 살인’은 마음마저 움츠러들게 한다. 수없이 달린 감시 카메라를 피해 사건은 줄을 지어서 일어난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에 이어 일어나는 교사들의 잇따른 자살.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어린 학생들의 학교 앞 횡단보도 위에 드러눕기. 공공장소에서의 살인 예고는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가 됨으로써 각종 범죄의 학습장이 되는 느낌이다. 여기에 언론의 보도에 문제는 없는 것일까. 독자들이 보고 읽도록 만드는 자극적인 표현이 범행을 자극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선행 기사를 찾아보니 길에 쓰러진 응급 환자를 구조한 버스 기사,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조한 해군과 축구 코치, 꾸준하게 봉사와 후원을 아끼지 않는 인기 연예인들의 기사가 줄을 잇는다. 그들의 기사를 조금 더 비중을 두고 싣는다면 사람들의 관심도 늘어나고 선행도 늘어나리라 믿는다. 신문과 방송에 실린 기사는 우리의 시선을 선행으로 쏠리게 하고 우리가 남을 위해 도와주는 것을 친숙하게 만든다.
찾아보면 선행도 사건과 사고에 뒤지지 않게 많다. 물론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기사는 쓰기 나름이 아닐까. 선행이 다 같을 수는 없고 돈 많은 사람이 하는 선행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선행이 더 많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신문 지면을 아름답게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일 하나에도 소망을 품고 서로를 보듬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아닌가.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서민들이 더 많이 웃기를 빈다. 함께 사는 세상이 더 밝아지면 서민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나리니. 이번 한가위에는 이웃과 풍성함을 나누는 그런 명절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