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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스웨터

등록일 2023-05-03 19:19 게재일 2023-05-0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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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며칠 전 옷장 정리를 했다. 작년까지는 철지난 겨울옷을 넣고 봄옷을 꺼내는 수준이었지만 올핸 과감한 정리를 해 보기로 했다. 최근 유행하는 미니멀라이프까진 아니더라도 안 입는 옷은 눈 딱 감고 버려야겠다고 굳게 마음 다졌다. 작년 안 입었던 옷, 작아 못 입는 옷을 추리고 분류하다가 문득 든 생각. 평소 회색, 감색, 검은색의 무채색 옷을 많이 입는 나였다. 그런데 진초록 블라우스와 면 블라우스, 초록색 긴 치마, 큰 체크무늬 녹색 셔츠, 잔 체크무늬 연록색 셔츠, 쑥색 원피스, 연두색 니트, 녹색 가죽자켓, 검푸른 롱패팅까지 녹색의 옷 참 많다. 내가 이렇게 녹색 계열의 옷을 많이 입었었나 갸웃거리다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초봄, 수학여행 때 엄마가 사준 녹색 스웨터.

집안 형편이 유족했던 3학년 때까지는 옷도 많았다. 철철이 옷 해 입힐 형편이 안 될 정도로 급격히 기울어진 가세 탓에 나는 3학년 때의 옷을 6학년 때까지 입었다. 6학년 어느 날 아침 전교 조회 시간이었다. 천 명이 훨씬 넘는 전교생이 넓은 운동장에 길게 줄 서서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듣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갑자기 6학년 6반 이정옥을 부르는 확성기의 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친구들이 너라며 눈짓하길래 엉겁결에 뛰어나갔다. 조회대 위에 올랐다. 무슨 표창장을 받았다. 그때의 내 심경은 영예로운 상장을 받는 기쁨도 자랑도 아니었다. 오로지 내 옷, 소매 짧은 보라색 옷의 팔 뒤꿈치를 넓적한 갈색 천으로 볼품없이 기운 옷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전교생이 모두 내 팔꿈치만 보는 것 같아 수치심만 가득했다. 전교생의 박수 소리도 비웃음으로 들렸다. 내려와 제자리로 와서도, 교실에서도 내내 부끄러워 슬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3년 내내 그렇게 기운 옷을 입거나 소매 짧아 내복이 삐죽 나온 옷을 입은 나를, 최근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도 기억할 정도로 난 가난한 아이였다.

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날 저녁, 엄마가 시장의 옷가게로 나를 데려갔다. 수학여행비도 어렵게 마련해 줬을 엄마였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엄마의 과감한 결심에 다소 의아해했지만 새 옷 입을 생각에 그저 신났다. 당시 유행하는 옷이 내 눈에 띄었다. 친구들이 많이 입고 있는 세련된 패턴의 스웨터였다. 엄마가 그걸 사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암말도 하지 않았다. 새 옷이면 됐지 유행은 언감생심이었다. 엄마가 신중에 신중을 기한 끝에 사준 옷은 녹색 스웨터였다. 목 부분이 흰색 레이스 처리된, 다소 심심한 패턴이지만 엄마가 골라 준 눈물겨운 옷이었다. 엄마는 내친김에 바지까지 골라 주었다. 3년을 입어 구멍이 크게 난 무릎에 더 크게 덧댄 천으로 기운 바지를 입고도 군말없는 딸을 보며 엄마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자꾸 눈가가 스멀거린다. 엄마가 옷을 고른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딸에게 어울리는 색깔? 옷의 가격? 옷장의 녹색 옷들을 보니, 아, 난 지금껏 녹색 스웨터를 골라 입힌 엄마의 안목과 선택을 무한정 신뢰하고 있었나 보다. 내일은 초록의 긴치마에 연록색 잔체크셔츠를 입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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