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느 예능 프로에서 이경규가 어떤 어린이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자 이효리가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라고 한 말에 시청자들의 공감이 이어졌다.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 결과이고, 아무나 된다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영화 ‘청춘스케치’에서 레이나가 ‘23살에는 뭔가를 이루고 싶었다’고 하자, 친구 트로이가 ‘23살 때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아를 찾는 것’이라고 한 말도 이효리의 반문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전 근대사회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곳에서 붙박이로 살아서 나로 존재하기만 해도 나의 존재를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은 무엇인가가 되어야 하고 이제는 그것을 남에게 알려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얼마나 알려지느냐가 성공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심한 경쟁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나는 누구인가 하는 회의감과 괴리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무엇보다 ‘존재하기’가 절실해지고 있다.
그러나 존재하기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다. 트로이가 아무리 치즈버거와 커피, 담배 몇 개비, 그리고 약간의 대화로 충분하다고 해도 그런 삶이 지속가능하기는 어렵다. 이효리 역시 어떤 순간에는‘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살겠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인생에는 뭔가 이루는 것도 필요하고,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존재를 증명하는 일도 필요하다.
오랜 기간 서예를 연마한 동창이 시간이 갈수록 상 받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면서, 그래서 출품에는 아예 관심을 끊었다고 한다. 서예를 즐기는 순간 느낄 수 있는 온전하게 존재하기를 원할 뿐, 대회에 작품을 내는 일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존재를 증명하는 일에는 아무래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대상화하거나 수단으로 삼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작품을 출품하는 순간, 인격은 사라지고 등수라는 대상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종강한 EBS1의 ‘존재와의 대화’에서 심리학자 김정규 역시 존재를 회복하기는 해야 하지만 인간을 대상화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한다. 칸트 역시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목적 그 자체로 실존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써만 대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하여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도 인정한다.
‘존재를 증명하기’와 ‘존재하기’, 다 중요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비율로 하면 좋을까? 이 질문에 김정규는 삶에서 80% 정도는 인간을 대상화하고, 나머지 20% 정도는 존재하기로 하자고 말한다. 지나친 존재 증명도 문제지만, 존재하기에 너무 치우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은 아니지만, 굳이 회피하거나 거부할 필요는 없다. 셀럽의 한마디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자신의 형편에 맞는 비율로 균형 잡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