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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마리 강아지 아키

등록일 2023-04-05 18:25 게재일 2023-04-06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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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손주들은 나를 아키 할머니라 부른다. 원래 손주들 집에 있다가 우리집으로 온 강아지 아키 때문이다. 아들이 결혼 전 동물보호센터에서 아기때 입양한 후 10년을 기른 갈색 푸들, 그래서 이름도 아키(일본어로 가을)라 지어 잘 지낸 놈이었다. 몇 년 전 고양이가 들어오게 되는 사정이 생겼다. 아키가 베란다로만 숨어 나오지 않았다 한다. 우리집에 데려올 때 울며불며 이별을 서러워하던 손주들이었다. 집이 가까우니 자주 보러오면 된다고 겨우겨우 달래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아키가 온 후론 할머니 집에 오는 걸 아키집에 간다고 하며 좋아하더니 급기야 우리 부부는 아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다. 뭐 어떠랴….

아키는 까도녀 베리를 배려해 뭐든 스스로 기꺼이 이순위를 자처한다. 먹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 곁자리조차도 베리보다 후순위다. 순위매김을 해야 다툼이 없다지만 아키는 스스로 양보하는 것이 제 몸에 익숙한 듯보인다. 산책할 땐 어쩜 그리도 보폭을 잘 맞추는지, 한두 발자국 걷고는 쳐다보며 눈을 맞추고, 몇 발자국 걸은 후 또 올려다 쳐다본다. 집안에서도 늘 나만 따라다닌다. 나는 종종 그런 아키를 다정아키라고 부르곤 한다. 잠잘 때도 내 곁에 오려고 틈만 나면 침대에 올라 내 발치에 자리를 잡곤 한다. 거실로 쫓으면 제 전용 의자에 올라누워 세상 불쌍한 포즈로 잠을 청하곤 하는 아키다. 우리가 소파에 자리 잡으면 베리가 먼저 제 자리를 정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빈 옆자리로 말없이 와 앉는다. 차를 탈 때도 그렇다. 같이 뒷자리에 앉히면 베리는 어김없이 냉큼 앞자리의 조수석으로 뛰어와 내 무릎에 앉는다. 베리가 부러운가 낑낑대던 아키는 이내 잠잠해진다. 말없이 얌전히 쓸쓸하고 고독한 뒷자리의 시간을 혼자서 감내한다.

베리가 아픈 후엔 베리에 대한 배려가 더 애틋해졌다. 베리의 기저귀를 갈 때면 안쓰러운 듯 가까이 와서 냄새 맡고 몸을 핥아준다. 까칠한 베리도 싫지 않은 듯 몸을 내어주는 것 같다. 베리가 입원했을 땐 식음을 전폐하여 병원에 면회다녀온 후에야 식욕을 되찾은 정말 다정도 병인 아키였다. 그런 아키가 지난 주 몹시 화가 났다. 실제 화가 난 건진 모르겠으나 난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 모두의 집에 가서 풀뽑고 꽃씨 뿌린다고 하루를 머물다 왔다. 이름을 불러도 꼼짝않고 반기지를 않았다. 늙은 베리는 그렇다치고 아키가 이상했다. 고개를 외로 꼬고 쳐다보질 않아 몸에 이상이 생겼나 걱정했다. 지난밤 돌아오지 않은 걸 후회할 정도였다.

아키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내 발치께에 뉘였다. 밤새 같이 잤다. 이튿날 아침 아키는 평소의 발랄함을 되찾았다. 잠에서 깨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덥석 안긴다. 앞다리를 어깨에 얹고 얼굴엔 제 얼굴을 갖다대어 마구마구 혀를 내민다. 눈을 마주치고 짧은 꼬리를 격렬히 흔든다. 역시 다정한 아키는, 정에 약한 아키는, 그놈의 정 때문에 마음 상해 삐쳤던 거였다. 그 후로는 모두의 집에 갈 때마다 둘 다 데려간다. 비록 뒷자리의 고독일지언정 함께 있는 것이 아키에겐 더 좋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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