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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등록일 2022-12-22 18:05 게재일 2022-12-23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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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

내가 걸어온 시대는 전쟁의 불길과

혁명의 연기로 뒤덮인 세기말의 한때였고,

요행히도 나는 그것을 헤치고

늙은 표범처럼 살아남았다.

수많은 청춘들이 누려야 할 기쁨조차

누리지 못한 채 꽃잎처럼 떨어지고

거룩한 분노가 캐터필러에 짓밟혀

무덤으로 실려갔을 때도 나는

집요한 운명에 발목 잡혀서

마지막 잎새같이 대롱거렸다.

손을 놓아야 한다!

서커스의 소녀가 어느 한순간

그넷줄을 놓고 날아가듯이

저 미지의 세계로 제비 되어 날아가며

고독한 포물선을 그려야 한다.

그것이 내 마지막 고별의식이 되기를 바라면서…. (부분)

한 노시인이 살았던 역사엔 핏자국이 찍혀 있다. 혁명과 세기말, 수많은 청춘들이 캐터필러에 짓밟혀 흘린 피. 그런데 청춘들이 죽어 가는데도 시인은 ‘집요한 운명에 발목 잡혀서/마지막 잎새같이’ 삶을 지속했다고 회고한다. 시인은 이제 그 운명에서 손을 놓고 청춘들이 묻혀 있는 무덤가로 ‘서커스의 소녀’처럼 어느 한순간에 날아가려고 한다. 그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자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이 될 ‘순간’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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