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
내가 걸어온 시대는 전쟁의 불길과
혁명의 연기로 뒤덮인 세기말의 한때였고,
요행히도 나는 그것을 헤치고
늙은 표범처럼 살아남았다.
수많은 청춘들이 누려야 할 기쁨조차
누리지 못한 채 꽃잎처럼 떨어지고
거룩한 분노가 캐터필러에 짓밟혀
무덤으로 실려갔을 때도 나는
집요한 운명에 발목 잡혀서
마지막 잎새같이 대롱거렸다.
손을 놓아야 한다!
서커스의 소녀가 어느 한순간
그넷줄을 놓고 날아가듯이
저 미지의 세계로 제비 되어 날아가며
고독한 포물선을 그려야 한다.
그것이 내 마지막 고별의식이 되기를 바라면서…. (부분)
한 노시인이 살았던 역사엔 핏자국이 찍혀 있다. 혁명과 세기말, 수많은 청춘들이 캐터필러에 짓밟혀 흘린 피. 그런데 청춘들이 죽어 가는데도 시인은 ‘집요한 운명에 발목 잡혀서/마지막 잎새같이’ 삶을 지속했다고 회고한다. 시인은 이제 그 운명에서 손을 놓고 청춘들이 묻혀 있는 무덤가로 ‘서커스의 소녀’처럼 어느 한순간에 날아가려고 한다. 그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자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이 될 ‘순간’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