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대파밭에서

등록일 2022-12-05 19:40 게재일 2022-12-06 18면
스크랩버튼
임성용

주먹을 쥐었다 펴면, 꽃잎도 없이 흩어지는

구멍 숭숭 뚫린 한 움큼의 시절들

겨울이 오기까지 너는 무엇을 견디며 살아왔느냐

대파밭에 눈이 내리고 또 쌓이고

속이 텅 빈 것들, 그래서 살아있는 것들

새파랗게 뜬 생의 기력이 뿌리 끝까지 시들어지면

매끈한 속살 드러내고 가지런히 돌아눕기 전에

겨울, 대파밭으로 와서 총총 언 발로 서 있어야한다

저마다 품은 주먹을 꺼내 강고한 울음으로

얼어붙은 제 몸의 빛깔을 한번쯤 확인해야한다

차디찬 빈 속으로 일제히 기립하는 대파 줄기들

어지러워라, 문득 배 속이 투명해지는 저녁이다.(부분)

텅 빈 ‘대파줄기’는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을 상징하겠다. 이 줄기들이 “차디찬 빈 속으로 일제히 기립”한다. 강렬하고 새로운 이미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빈 속’의 이미지가 “투명해지는 저녁”이라는 이미지로 전환된다. 여전히 저러한 이미지가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빈 속’으로 “일제히 기립”할 날을 꿈꾸면서 얼어붙은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 땅 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이성혁의 열린 시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