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 혼돈, 재난, 참사, 고통….
아직도 끝나지 않는 코로나바이러스로 공동체는 여전히 와해 중이다. 덧붙여 포항은 지진으로 인해 마음의 회복이 안 된 상태에 코로나로 2차적인 심리적 가해를 입다가 힌남노 태풍 피해로 또 한 번 예기치 않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태원 핼러윈 참사 등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나 재난이라는 트라우마에 노출되어 있다.
트라우마에 종속되어 갈 것인가? 아니면 극복할 것인가? 모든 사람이 극복하고 싶을 것이다. 극복을 위해서는 집단적, 사회적인 재난대처 매뉴얼과 개인적인 자기 치유 방안이 필요하다. 집단 재난대처 매뉴얼이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가의 문제점도 떠안고 있다.
황산(뉴스트리 칼럼니스트, 지식큐레이터)은 sns에서 ‘모리스 블랑쇼’의 재난의 글쓰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재난은 다른 말로 바깥의 경험이라고 한다. 나의 바깥으로 내던져서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상태다. 바깥의 경험은 추방당함의 경험이다. 삶으로부터 추방되고, 세계로부터 추방되고, 경계선 바깥으로 내던져서 자기 존재의 바닥을 잃어버린 자가 되는 경험을 말한다.’
재난은 사람을, 작가를 글쓰기로 몰아간다고 그는 말한다. 이는 내면의 감정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이처럼 재난은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는 상태인 공황장애로 나타나며, 이는 트라우마로 인한 대표적인 정신적인 스트레스의 발현이다.
‘카오스(재난, 고통)가 네 안에서 말하도록 내버려 두라’
블랑쇼는 동요에 자신을 내맡기라고 강조한다. 우리나라의 정서와는 상반된 부분이 있다. 예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에게 “괜찮아! 이미 지난 일이야. 잊어버리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라며 애도할 시간을 배제하고 한시라도 빨리 감정을 억누르라고 요구한다. 애도의 시간이 필요한데도 빨리 훌훌 털고 일어나기를 바란다.
오랫동안 트라우마를 연구한 피터 레빈 박사는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선천적인 지혜는 이미 우리 자신 안에 내재돼 있다”며 자가 치유로 신체 기반 치료법을 말한다. 글로든 그림이든 나의 감정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첫 번째 방법이라는 얘기다. 이는 예술이 주는 자기치유력과 연관된다.
그러다 보면 자신만의 반복적인 텍스트가 나온다. 그 텍스트 안에는 빅 트라우마(Big Trauma)가 있기 전 나도 모르는 스몰 트라우마(small trauma)가 보일 것이다. 그 스몰 트라우마들을 방치한 것이 쌓이고 쌓여 빅 트라우마가 되는 것이다.
두통을 호소하거나, 가슴이 답답하다거나, 심장이 너무 빨라져서 숨을 쉬기 힘들다거나, 또한 잠을 자지 못하여 불면증을 경험한다거나 하는 다양한 몸의 반응은 나를 돌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함을 알리는 신호다.
뭉크의 그림 ‘절규’에서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는 두려움과 삶에 대한 절규다. 이는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을 통해 보았던 그의 트라우마를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명화를 통해서도 내가 가진 죽음의 문제와 세상의 두려움을 은유적으로 직시하며 치유해 갈 수 있다. 그림이나 예술이 가진 치유성을 경험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이다.
고대 철학자인 세네카는 “우리는 죽는 날까지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동시에 죽는 법도 배워야 한다”라고 했다. 매일매일이 삶과 죽음의 연속이라는 표현과도 상통한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방법으로 현대사회에서 경험하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자기 치유 방법으로 경험해보길 바란다.
또한 현대를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가진 슬픔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회가 죽음에 대해, 상실에 대해, 슬픔에 대해 애도할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나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다.
/서종숙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