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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미(吟味)하는 삶

등록일 2022-10-20 19:05 게재일 2022-10-2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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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세상과 인생에는 음미해볼 만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다. 애호가들은 한 잔의 차나 와인을 두고도 많은 것을 음미해낸다. 그것을 대하는 태도부터가 다르다. 눈으로는 빛깔을 보고 코로 향기를 맡으며 한 모금씩 머금어 천천히 삼키면서 맛을 음미한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깊고 미세한 맛과 향까지를 감지해 낸다고 한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오감만을 사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문학적인 식견이나 미학적 감성까지 더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볼 줄 알아야 느낄 수도 있다는 이치다.

음미할 거리로 가장 좋은 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다. 자연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고 무궁무진한 신비가 아닌가. 풀꽃 한 송이 벌레 한 마리에서부터 바람과 구름과 해, 달, 별 어느 것에도 무한한 경이와 감동을 음미할 수가 있다. 생존의 절대적인 조건인 자연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살만한 것이 된다. 특히나 이렇게 눈부신 가을날에는 삼라만상이 찬란한 광휘에 휩싸여 있다. 이럴 때는 무얼 음미하고 말 것도 없이 그냥 감격의 도가니에 빠져 있으면 된다. 어떤 미망의 그늘도 없는 환희의 생명이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맛나고 질 좋은 음식이라도 허겁지겁 먹어서는 그 진미를 충분히 느낄 수가 없다. 반대로 거칠고 맛없는 음식도 천천히 씹으면서 음미해보면 나름의 맛이 나기도 한다. 부질없는 욕심에 쫓겨 허둥지둥 살다보면 무엇 하나 제대로 음미할 겨를이 없게 된다. 혹자는 욕망의 성취로 얻은 부와 권력과 명예를 만끽하는 거야말로 제대로 음미하는 게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거품에 불과하다. 더구나 그런 욕망을 쫓는 사람들에게 안주(安住)가 있겠는가. 더 높고 더 큰 것을 쫓아가기 바빠서 차분히 음미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가장 흔한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란 사실을 곧잘 잊고 산다. 세상에 공기처럼 흔한 게 없지만 우리 목숨을 부지하는데 공기보다 소중한 것도 없지 않은가. 값나가는 귀중품일수록 없어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지만, 공기나 물처럼 흔한 것일수록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수라는 걸 잊곤 하는 것이다. 들판에 지천으로 자라는 잡초들이 생태계를 유지하는 주역이라는 것, 우리 생명이 필요로 하는 건 한 수레의 보화가 아니라 한잔의 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한사코 한눈을 파는 게 인심이다.

영적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은, 오직 들숨과 날숨의 호흡을 관찰하거나 걷는 것만으로도 종교적 깨달음에 이른다고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나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붙잡혀 현재를 놓치지 말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만으로 기쁨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음미하는 삶으로 바꾸고 싶다. 관찰이나 집중보다는 음미라는 말이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지 않는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은 객관이나 추상일 수가 없으므로. 음미든 집중이든 서둘러서는 안 된다. 몸과 마음을 열어 놓고 천천히 걸어가야 한다. 많이 가질수록 그 무게에 눌리고 높이 올라갈수록 위태로운 게 세상의 이치다. 이미 주어진 것만으로도 벅차고 넘칠 수 있는 것이 음미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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