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여행지로 각광받는 유명한 산은 물론 우리가 생활하는 주변 이름 없는 조그만 산에도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어간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푸르게 높아진 하늘 아래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데이트 하는 젊은이들의 환한 얼굴이 정겹다. 중년들은 그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본다.
가을은 누가 뭐래도 ‘생각하고, 고민하는’ 계절이 아닐까? 그래서다. 오래전 선현들은 이때를 독서하는 시간으로 쓰라고 조언했다.
‘활자’보다는 ‘영상’에 익숙한 MZ세대들은 아무래도 책 읽기보다는 영화 보기에 익숙한 듯하다. 인간이란 시대의 변화와 처한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러니, 독서 대신 영화 관람을 선택하는 이들을 나무랄 이유는 전혀 없다.
사람들은 시기와 감정 상태에 따라 영화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진다. 더위가 짜증을 유발하는 여름엔 시원한 액션영화나 오싹한 공포물이 인기고, 슬프거나 우울한 날엔 고전 로맨스영화를 찾게 된다. 그렇다면 가을엔 어떤 영화가 어울릴까? 앞서 말한 것처럼 생각할 거리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조금은 묵직한 주제의 영화가 좋지 않을까.
다양한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영화를 찾아보기 쉬워진 시대다. 아래 소개하는 영화 2편을 만나며 사색하는 가을 속으로 들어가 보는 건 어떨지.
‘신과 인간’ 진지한 질문 던지는 ‘에이리언: 커버넌트’
인간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온 것일까? 누군가의 피조물일까, 그게 아니면 수만 년에 걸친 생물학적 변화의 산물일까? 존재와 실존에 관해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한 명 예외 없이 떠올렸을 의문이다.
인간이 창조된 존재인지, 진화의 과정에 있는 고등한 생물인지를 놓고 벌어진 설왕설래는 인류역사상 가장 뜨겁고 주요한 논쟁 중 하나였다.
이른바 ‘창조론-진화론 논쟁’. 수많은 신학자가 이 논쟁에 끼어들어 창조론을 옹호했고, 자연과학자인 다윈(Charles Darwin)과 라마르크(Jean Lamarck)는 탁월한 연구 성과로 진화론에 힘을 실었다.
수 세기에 걸친 인간 세상 화두였으니, 문학과 영화에서도 이 두 가지 학설이 갈등하고 충돌했던 것은 불문가지다. 학구적 정열을 간직한 시인이나 소설가 또는, 영화감독은 자기 뜻을 문학·영상으로 정리해 독자와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이런 문제적 작품들은 한쪽의 찬사와 동시에 다른 한쪽의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인간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AI 월터(마이클 패스벤더 분). 리들리 스콧 감독은 AI를 창조론 옹호의 영화적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미 40년 전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디스토피아가 된 미래사회와 인간의 형상으로 제작된 리플리컨트(복제인간)가 겪는 혼란과 갈등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리들리 스콧. ‘에이리언: 커버넌트’ 역시 이전 작품들과 유사한 철학적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지고 있다. 이 영화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작 ‘프로메테우스’와 여러 측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어찌 보면 후속편으로도 읽힌다.
영화의 도입부. 인간과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AI인 월터가 자신을 만든 사람에게 묻는다.
“당신이 나를 만들었다면, 당신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요?”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이에 관한 답변을 생략한 채 전개된다.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답을 찾아보라”는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프로메테우스’는 아주 멀리 떨어진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DNA가 지구의 단세포생물을 만들어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는 진화론을 정면에서 부정하며 창조론의 손을 들어주는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더불어 논쟁을 부를 소지가 다분한 영화적 설정. 리들리 스콧의 창조론 옹호와 지지는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도 연속해 드러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을 외부적 환경변화에 한없이 무기력한 동물로 묘사하고, 우리가 통상 인간의 특질로 이해하고 있는 동정심과 합리적 결단력을 AI에게 부여하는 장면 등을 통해서다. 여기엔 “진화의 결과가 이 정도라면 참혹하지 않은가”라는 환멸의 질문이 깔렸다.
리들리 스콧 정도의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라면 갑자기 튀어나온 우주 괴물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유치한 권선징악의 결말이 아닐 것이란 정도는 영화팬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에 이은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그 예상도 훌쩍 뛰어넘어 무겁고 난해하기 짝이 없다.
여든다섯의 영화감독, 이제는 ‘철학자’로 불러도 좋을 리들리 스콧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클래식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에이리언: 커버넌트’의 결말을 통해 자신이 변하지 않을 창조론자라는 걸 보여준다. 그게 어떤 장면이냐고? 그걸 말해주면 영화 보기가 너무 싱거워지지 않겠나.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 한 가지. 합리와 과학을 신뢰하는 유럽에서 태어나 생활해온 리들리 스콧이 합리와 과학에 더욱 근접한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에 경도된 이유는 뭘까? 그가 독실한 종교인이라서? 그게 아니면,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나이이니 곧 만날 신(神)과의 우호적 관계 설정을 위해서? 노감독은 영화 안과 밖에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 ‘에이리언: 커버넌트’는 재론의 여지없이 ‘사색의 가을’에 맞춤한 영화다. 답을 찾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을 해야 하니까.
담담한 카메라에 담긴 괴물들의 세상 ‘소리도 없이’
미세한 감정의 일렁임, 사소한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몸뚱이 피를 닦고 자루에 넣어 땅속에 묻는 사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를 술 섞은 음료수 먹여 장기매매 브로커에게 판매하는 사람. 유괴를 생존을 위한 비즈니스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
세상의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을 행위가 분명함에도 위와 같은 일들은 어제도, 오늘도 있어왔고, 내일도 행해질 것이 분명하다. 싫어도 부정할 수 없다.
때때로 현실은 어떤 공포영화보다 끔찍하다. 그런데, 이런 세속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도 침착함과 평정심을 지킨다? 쉽게 이르지 못할 경지. 이는 ‘소리도 없이’가 주목받는 영화인 이유다.
몇 년 사이 개봉된 어떤 한국 영화와도 닮지 않았다. 답습과 반복의 흔적이 없다. 그래서다. 돌올하고 이채롭다. 신인 감독이 보여준 기대 이상의 연출력.
거기에 멀쩡한 인간의 얼굴을 하고 끔찍한 짐승의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조연 배우들의 연기가 일품이다. 주연 유재명과 유아인에게 결코 밀리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은 세칭 ‘열린 결말’이라 해석의 가능성이 다양하다. 그랬기에 영화에 관해 이렇다, 저렇다 입을 대는 관객들이 많았다. 좋은 영화는 많은 이들이 논쟁에 참여하게 하는 법.
‘소리도 없이’는 법 없이 살 수 없을 듯한 착한 사람들이 법을 어기며 나쁜 짓을 하며 지내다가, 개입되기 원하지 않던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착하고도 나쁜’ 어른 둘 사이에 ‘선악의 포지션이 불분명한’ 열한 살 아이가 끼어든다.
그때부터다. 영화는 기존의 상식과 보편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의외의 결말을 향해 질주한다. 스토리는 치밀하고, 전개는 정교하며, 앞서 말한 것처럼 배우들의 연기는 핍진하다.
상업적 할리우드 스타일을 답습하는 한국 영화가 가진 약점 중 하나가 과잉이다. 관객이 흥분하기 전 연출자가 앞서 흥분하고, 울거나 웃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울어라” 혹은 “웃어라” 먼저 옆구리를 찌르거나, 뺨을 친다. 이래서는 감동에 가닿을 턱이 없다.
‘소리도 없이’의 가장 큰 미덕은 감독이 먼저 흥분하거나, 감정 과잉에 빠져 오버하지 않는다는 게 아닐까 싶다. 어떤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도 홍의정 감독의 카메라는 정중동(靜中動) 담담함을 지킨다.
물론 ‘소리도 없이’의 모든 게 다 좋지는 않다. 몇몇 장면에선 앞뒤의 인과가 흐릿하고, 영화에서 벌어진 일의 수습 과정을 납득할만한 설명 없이 건너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흠결은 전체의 맥락에서 보여준 큰 장점에 비하면 그야말로 소소하게 느껴질 뿐, ‘영화 보는 즐거움’을 깨뜨리지 못한다. 가을 밤, 진지한 표정으로 혼자 보기 딱 좋은 작품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