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들녘에 코스모스 꽃이 한창이다. 철없이 서둘러 핀 것도 있었지만 지금부터가 제철이다. 누기 일부러 심고 가꾼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고 자라 꽃피운 야생화다. 요즘은 하도 예초기로 자르거나 제초제를 쳐대는 바람에 들판 한가운데는 논둑에 풀이 자랄 새가 없는데, 용케도 살아남아 꽃을 피웠으니 더 반가운 일이다. 물론 코스모스 혼자서 초가을을 펼치는 역할을 맡은 건 아니다. 이삭이 팬 억새도 있고 쇠어가는 쑥대와 망초도 있다. 도랑가의 여뀌와 물옥잠도 한 몫을 한다. 그것들의 배경으로 높푸른 하늘과 누렇게 벼들이 익어가는 들판이 있어 한 폭의 초가을 풍경을 완성한다.
코스모스 꽃이 곱게 핀 초가을 들길을 걸으면서 나는 한 이름 꽃다발을 받아 안은 기분이다. 사람들은 특별히 좋아하거나 존경하는 표시로 꽃다발을 선사하지 않는가. 그것을 받아든 사람은 물론 존경받고 대접 받았다는 생각에 흐뭇하고 행복해지는 것이고. 이 가을 들녘 한복판에서 나는 뿌듯한 행복감과 존재감을 느낀다. 높푸른 하늘과 황금빛 들판, 온갖 풀꽃들이 나를 둘러싸고 환영하고 축복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림없는 소리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내가 그렇다는데 구태여 누가 말리는가.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있지만, 대자연의 일부가 된다는 건 더없이 마음 편한 일이다. 혼자서 아등바등 할 것 없이 자연의 섭리에 맡기면 되는 것이다. 복잡다단한 세상사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소외감으로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자연의 품에서 위안과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사람의 의지나 욕심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 자연이다. 그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어리석은 일이고 절망하고 괴로워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이것은 결코 무기력한 비관주의가 아니다. 자연에는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비관하거나 절망하는 법이 없다.
이 가을, 삼라만상이 모두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는데 유독 사람들만 정처가 없는 것 같다. 한 떨기 풀꽃이나 벌레 한 마리, 단풍잎 하나에 비해 나는 과연 무엇이고 어떤 모습인가. 사람을 사람에게 물어서는 정확한 답을 들을 수가 없을 터이다. 자연에서 멀어진 만큼 핑계와 구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가을 들판 한가운데서 높푸른 하늘과 풀꽃들에게 물어보는 나가 참 나일 것이다.
반성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이 있지만, 반성의 주체인 자아조차 상실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돈이든 권세든 탐욕을 쫓아가다 자신을 잃어버린 군상이 우글거리는 세상이다. 특히나 정치꾼들은 거의 예외가 없는 것 같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비열하고 파렴치할 수 있는지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일말의 자존감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자신을 거짓과 사악의 구렁텅이에 팽개칠 수는 없는 일이다.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은 함부로 처신하지 않는다. 불의나 탐욕에 빠져들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자신을 더럽히고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을 들길의 코스모스가 일러준다. 너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존재이니 반드시 제몫을 해야 되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