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수
선운사 동백, 그 상처 붉게 붉게 절며 당도하는 곳
가마미 바닷가에 한 사내 서 있었네.
가마미 바닷가에 폭설이 있었네.
폭설이 있었네. 그렇듯 죄 말하고 나서
저 긴 수평선, 긴 수평선에 걸쳐 오래 자고 있네.
폭설과 잠 사이, 발언과 침묵 사이의 가늠하기 힘든 시공간 속에 시가 놓여 있다. 의미와 무의미, 시간(역사)과 무시간 사이에서 이 시는 진동한다. ‘한 사내’, ‘폭설’, ‘가마미 바닷가’와 그 ‘수평선’은 실제 대상이 아니라 시의 시공간 속에, 즉 행의 발언과 행간의 침묵 사이에 존재한다. 하여, 그것들은 무로부터 드러나는 존재자들이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무에서 솟아나는 존재자들을 통해 시의 경이를 역설적으로 경험한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