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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역

등록일 2022-04-10 18:12 게재일 2022-04-1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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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향림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다 낡은 환상만 내다놓은 나무 의자들

공허가 주인공처럼 앉아 있다.

 

그 발치엔 먼 데서 온 파도의 시린 발자국들

햇살 아래 쏟아낸 낱말들이

실연처럼 쌓이고

우우우 모래바람 우는 소리,

먼저 도착한 누군가 휩쓸고 갔나 보다.

 

바닷새들이 그들만의 기호로

모래알마다에 발자국들 암호처럼 숨겨놓고 난다.

 

낯선 기호의 문장들이 일파만파 책장처럼

파도 소리로 펄럭이면

일몰이 연신 그 기호를 시뻘겋게 염색한다.

나무 의자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정동진역 풍경은 백지처럼 ‘공허’하다. 너무 공허해서, 정동진역의 존재 자체가 원래 없었던 환영 같아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 풍경은 파도와 바닷새들이 찍어놓은 발자국들로 인해 해독되어야 할 책으로 변전한다. 발자국들은 그 누군가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흔적, ‘낯선 기호’다. ‘일몰’에 “시뻘겋게 염색”당하는 그 기호는 시인에게 어떤 그리움과 슬픔을 뜨겁게 불러일으킨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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