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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것들의 앞품

등록일 2022-03-24 18:40 게재일 2022-03-2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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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주일

저 그리움이 내 성소다

능선을 굽혀놓은 고갯마루 서낭당

물길 굽혀 흐느끼는 여울목의 망부석

그 성소 앞에서 등허리 굽힌 사람은

등고선의 품을 일구며 사는 신

신들이 탯줄 같은 골목을 따라 집으로 돌아간다

한 장정이 훔쳐보는 옆집 우물 쪽으로 골목이 휜다

장정이 고개 감춘 곳에 내 얼굴을 드러내 본다

보리쌀 씻던 처자의 젖이 내 얼굴을 품어 안는다

나는 젖니를 오물거리며 신의 젖능선을 경작한다(부분)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고 땅에 엎드려 등을 굽히고 있는 사람 모두에서, 그리고 그 굽은 등이 만들어내는 ‘등고선’-굽은 ‘능선’, ‘여울목’, ‘탯줄 같은 골목’ 등-에서 시인은 신의 존재를 발견한다. 그리움의 성스러움을 인식한 시인은 이제 자신이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그리움의 성역을 이루고 있는 몸의 ‘앞품’에 안겨, “젖니를 오물거리며” 삶을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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