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시끄러웠다. 아래층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망치를 치고 두드리는 뭇소리까지 들려왔다. 공사를 한다는 말을 들었기에 현장을 보러 갔다. 유리 슬라이딩 문 안에서는 벽면의 타일을 깨고 이젠 쓸모없어진 장식물을 부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닥엔 자재가 뒹굴고 꽉 닫힌 공간으로는 먼지가 빠져나가지 못해 뿌옇게 고여 있었다.
안쪽을 들여다보자 나이든 늙수그레한 인부 한 사람과 러시아계의 노동자 두 사람이 제대로 마스크도 하지 않고 등산용 스카프로 대충 입을 가린 채 먼지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입구에 작업을 지시하는 사장님을 잠시 불러내서 “마스크라도 좀 드릴까요?”라고 의견을 제시하자 “저들도 숨쉬기 힘든데 일이 빨리 진척이 없어 짜증을 내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가변 벽 너머 창문이 있으니 일부를 부수면 먼지가 빠져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옆방으로 가서 밖으로 난 창문을 힘껏 열어 젖혀두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에 다시 가서 보니 먼지는 좀 가라앉고 가변 벽이 부서져 뼈대만 남은 채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작업하던 인부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부서진 벽의 잔해 등을 실어 나르고 식사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카페가 있던 자리도 이용의 목적이 달라지니 남김없이 벽면과 장식이 부서지고 사라진 상태였다.
올여름 시 낭송을 야외에서 한다며 간 원성왕의 무덤인 괘릉이 생각난다. 작은 연못이 있던 자리를 돌로 메워 그 위에 묘를 만들었는데 물이 자꾸 배여 나와 왕의 시신을 땅에 놓아둘 수 없어 허공에 매달아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래서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부른다는 설화이다. 그 능 앞의 무인상과 문인상은 정교한 조각이 훌륭해 여러 예술작품에도 제법 인용이 되곤 한다.
그 무인상의 부리부리한 눈매와 곱슬한 머리를 보아 신라와 활발하게 무역을 하던 때 흘러들어온 페르시아 사람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한다. 손에 든 긴 칼을 보면 신라왕의 호위무사를 하겠노라 달려온 용병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인상의 뒷모습을 보니 주머니를 차고 있다. 이국땅에 가서 돈을 벌어 오겠노라 고향을 떠나온 상인이었을까를 상상해본다. 그들이 아마도 안강읍에 위치하는 흥덕왕릉의 호위무사로도 간 모양이다. 신라인에 비해 덩치가 크고 단호하면서 부리부리한 눈매가 신뢰를 주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그들이 보디가드를 했다면 왕도 훨씬 편하게 눈을 감고 이승을 떠나지 않았을까. 저승에 간 후까지 왕을 호위하는 무사로 곁에 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1960년대에 서독으로 갔던 많은 이들이 떠오른다. 광부와 간호조무사들이 그 험한 곳에서 살아남아 당시 대통령을 만나 눈물 흘리던 모습은 늘 마음의 한구석을 무겁게 만든다. 시체를 알코올로 닦거나 병원에서 모두가 외면하던 가장 더럽고 힘든 일을 해야 했던 이들과 컴컴한 탄광 속에서 이빨만 하얗게 드러내고 웃던 이들. 탄광의 저주인 진폐증에서 그들도 자유롭지 못했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사람들은 살아 숨 쉬고 있다. 영하의 날씨에도 새벽 노동은 이루어지고 한여름 폭염에도 공사는 진행될지니, 우리의 삶이 영속적이듯이 노동의 하루도 그렇게 이어진다. 새벽 어두컴컴한 도로의 길섶에 버스가 선다. 그곳에서 벗어난 외국인노동자들이 어둠과 함께 걷는다. 그들만의 언어로 피곤한 밤을 견딘 동료들과 대화가 깊다. 이제 따뜻한 잠자리에서 편안한 아침을 맞길 바라는 마음으로 옆을 스친다.
카페가 사라진 자리로 종합 검진실이 자리 잡을 것이다. 새롭고 환한 의료 환경이 제공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바닥은 무엇으로 채워질지 광고 간판은 어떤 걸 사용할지 얼마 후 이전 개업하게 될 새로운 공간이 먼 곳에서 달려온 낯선 사람의 손에 의해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나의 삶도 두 손이 만들어낸 하나의 생(生)이란 건축물이다. 한 사람의 건축물이 매일 새롭게 만들어지고 사라지며 인간의 역사가 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위해 잠시 무인상을 닮은 노동자들의 안녕을 마음으로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