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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碑銘

등록일 2021-09-23 18:30 게재일 2021-09-2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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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환

발바닥에 묻은 먼지를 턴다. 발등에는 마른털이 누웠고 무릎에다 받쳐준 긴 뼈는 휘었다.

 

아직 걷고 있는 사람은 오래 걸을 것이다. 며칠이 저물도록 느리게 걸어서 어둑한 들녘을 지나간 다음에는 어느덧 종적이 깜깜할 것이다.

 

올해에 죽은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소식이 끊겼다. 없는 이의 안부를 묻고 간 사람이 있다.

 

나는 남아서 어금니와 손톱을 씻는다. 돌이킬 수 없는 한때였다. 종잇장인 듯 바삭대는 손바닥과 부러질 듯 야윈 손가락 몇 개를 여러 해째 움켜쥐고 있다.

 

찬비 내리고 (중략)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우리는 죽음을 살아가는 모순을 견뎌내야 한다. 위의 시의 화자는 “야윈 손가락 몇 개를 여러 해째 움켜쥐고” 있으면서, 아직 어떤 이의 삶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비가 죽음으로 채워지고 있는 죽은 이의 삶을 장엄하게 승화시킨다. 이와 함께 비는 비탄을 대신하여 울음을 이 세상에 뿌리면서, 운명을 견디어내는 강인함으로 살아 있는 이의 삶 역시 끌어올린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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