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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을 기억하는 은행나무

등록일 2021-09-15 20:15 게재일 2021-09-16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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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생가 은행나무.

하늘 구름 몇 점 지상을 내려다보며 떠간다. 잠자리가 투명한 날개를 휘저으며 한낮을 유영한다. 잘 가꾼 들판에 바람이 벼들을 쓰다듬고, 노릇노릇 알곡이 익어간다. 세간리 은행나무에도 때맞춰 가을바람이 머문다.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몇 아름이나 될까, 홍의장군 곽재우 생가의 은행나무는 두 팔을 벌려도 다 안아 볼 수도 없다. 600년 살아있는 혼을 느꼈다는 것만으로 왜소했던 내 품이 넉넉해지는 것 같다. 잠시 너른 품에 안겨 살포시 눈을 감는다.

은행나무를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부른다. 나이가 수백 년에서 천 년이 넘는 고목이 많다. 그동안 몇 번의 혹독한 빙하시대를 지나면서 살아남았다. 은행나무는 덥거나 춥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살아갈 수 있다. 아무리 오래된 나무라도 줄기 밑에서 새싹이 돋아날 수 있게 한다. 또한, 잎과 열매에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어 외부에서 공격하는 물질을 느끼면 악취를 내뿜어 적을 물리친다.

은행나무를 돌아본다. 외침을 이겨내느라 둥치가 움푹 파여도 여전히 하늘을 떠받들고 섰다. 몸은 노쇠해도 잎은 무성하고 열매가 주렁주렁 열었다. 남쪽 가지에는 여인의 젖가슴을 닮은 유주가 볼록하게 돋았다. 저 유주에 빌면 아기를 준다는데, 은행나무의 영험을 믿은 까닭이다.

외침에 강하다고 해서 다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모진 삭풍이 휘몰아쳐도 꿋꿋이 견뎌야 한다. 대지를 태울 것 같은 가뭄이 들면 땅 밑으로 뿌리를 뻗고 또 뻗어 물길을 찾는다. 태풍에 가지가 부러져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자신을 치유한다. 묵묵히, 오롯이, 은행나무는 그렇게 조금씩 높이와 둘레를 키워 오늘의 아름드리가 되었을 것이다.

역사의 나이테를 읽다 보면 민초의 삶이 있고 한가운데 걸출한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이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민초를 위한 희망의 푯대를 세웠을 때, 우리는 그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은행나무 나이테에 기록된 장군의 이야기가 들리는 것 같다. 동무들과 고샅길을 뛰어다니는 것을 보았겠고, 골목대장 노릇을 하는 것을 보고 이 나라를 지킬 장수가 되리라 생각했겠지.

곽재우 장군은 마흔이 넘은 고령이었지만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고 홍의를 입었다. 창이 없으면 죽창을 들고 총이 없으면 활을 들고 왜병에게 저항했다. 은행나무 아래서 발화해 온 고을로 번진 함성은 이 골짜기에서 저 골짜기에 울렸으리라. 마을마다 아귀찬 백성들은 조상이 물려준 우리 땅을 지키려 뜻을 모았다. 그 승전고가 팔도로 울려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웠을 것이다.

은행나무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며 오래 산다. 오늘처럼 쏟아지는 여름 볕을 어서 피하라고 넉넉하게 그늘을 내준다. 뜨거운 햇볕을 다 토해내고 선선한 바람이 불면 노오란 색으로 갈아입고 쉼터를 마련한다. 노랗고 화사한 이파리들은 책 속에 납작이 엎드려 추억으로 남는다. 늦가을 은행나무를 보면 노란 성전(聖殿)같이 보인다.

 

영웅은 가도 정신은 살아있는 화석처럼 남는다. 장군을 위해 힘이 되고 그늘이 된 나무는 아직도 정정하다. 오랜 역사의 목격자는 곽재우 장군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충의(忠義)의 인물로 말년에는 초야로 돌아간 선인(仙人)이라고 전설한다.

 

贈李完平元翼 완평군 이원익에게 드림

 

心同何害跡相殊 마음만 같다면 행실 다름이 무슨 상관 있으리오

城市喧囂山靜孤 시중은 시끄럽기만 하고 산중은 고요하기만 하네

此心湛然無彼此 이 마음은 담담하여 시중과 산중의 구별이 없으니

一天明月照氷壺 온 하늘의 밝은 달이 깨끗한 마음을 비추리

이순혜​​​​​​​​​​​​​​수필가
이순혜수필가

생가에 들러 장군의 자취를 느끼다가 한시 한 수 받아 적는다. 시끄러운 세상을 벗어난 장군이 완평군에게 보낸 글이다. 초야로 돌아가 청빈하게 사는 선인(仙人)의 마음이 달빛처럼 비치는 것 같다.

생가를 떠나 충익사로 향한다. 마을을 나와 뒤를 돌아본다. 사백 년 전, 홍의장군의 호령 아래 의병들의 함성과 우렁우렁 충의의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충-의 충-의 충-의….”

아름드리 은행나무의 정신을 품고 오는 길, 장군이 남긴 위대한 흔적들이, 은행처럼 마음속에 알알이 맺힌다. 가을 곳간처럼 마음이 꽉 차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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