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은 입춘이었다. 봄의 시작이고 한 해의 시작으로의 의미도 있다. 24절기 중 첫째, 주로 음력 정월에 드는 절기지만 올해는 아직도 경자년 섣달이다. 이렇게 정월과 섣달에 거듭 든다고 쌍봉춘(雙逢春), 또 ‘봄을 다시 만난다’고 재봉춘(再逢春)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이 해에 결혼하면 좋다는 속설도 있다.
입춘에는 대문이나 문설주, 기둥 등에 입춘첩을 써 붙이는데 올해도 졸필이지만 써봤다. 요즈음 나라의 상황을 보아서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라’는 국태민안(國泰民安) 등 큰 의미의 바람도 있지만 많은 글 중에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을 골랐다. 그런데 올해 입춘 절기가 드는 시간을 알아보니 자정이 가까운 밤 11시 59분이라 그냥 붙이려다가 시간에 맞추어 붙어야 효험도 있다고 해서 재미 삼아 기다렸다. 자정이 다 되어 현관문을 열고 나가 여덟 팔자로 정성껏 붙이고 ‘봄이 되면 크게 길하고, 따뜻한 기운을 받아 좋은 일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고 마음으로 빌었다. 조용히 들어와서 따뜻한 녹차 한 잔을 마시니 가슴에 봄이 드는 듯 훈훈해진다.
예전엔 각 지방마다 재미있고 뜻있는 의례와 행사들이 많았다지만 요즘 세태에는 절식 하나 정성껏 마련해 먹는 집도 드물 것 같다. 옛 궁중에서는 파, 냉이, 부추 등 맵고 신 맛의 채소들로 만든 오신반(五辛盤)을 수라상에 올렸고, 민간에서는 눈밭에 돋아난 햇나물을 뜯어다가 무친 입춘채(立春菜)를 먹었다고 한다. 마침 집에는 아내가 구해온 싱싱한 산미나리가 한 묶음 있어서 새싹은 아니지만 감식초에 무쳐 막걸리 한 잔 마시며 ‘봄이 드는 계절’을 맛보았다.
옛날 의례에는 흙으로 만든 소나 나무로 만든 소로 잡귀를 쫓고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고 하는데 올해가 마침 하얀 소띠해라 큰 마을 잔치라도 벌였으면 좋겠지만 집합금지의 어려운 시기이니 마음으로나마 우직한 소들의 뚝심을 품고 역병을 쫓아버려 주기를 다짐해보자.
입춘에 맑고 바람 없으면 풍년이 든다 했는데 중부지방에는 눈발이 날렸고 기온은 영하권으로 내려갔지만 여기는 바람 없는 조용한 날씨여서 다행이었다. 보리 뿌리를 뽑아 보아 뿌리가 많으면 풍년이고 적으면 흉년이라는데 부근엔 보리밭이 없으니 멀리 호미곶 청보리밭에 가서나 알아볼까.
기계면 시골집에도 입춘첩을 붙이려고 갔더니 화단에는 노란 납매가 피어있다. 섣달에 피는 꽃이라 납매(臘梅)라고 했겠지마는 나에게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꽃이다. 능수매화는 아직도 겨울잠인데 남쪽 지방에는 매화도 핀 모양이다. 오는 길에 봄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려고 창포동 마장지 못을 둘러 보았더니 버들강아지가 하얀 솜털을 부풀리고 있는 물가에 청둥오리 한 쌍이 정답게 물을 가르고 있었다. 집 베란다의 사랑초는 겨울에도 연분홍 꽃을 피우고 있지만 동양란 몇 포기는 잘 가꾸어 주지 않은 탓인지 아직도 꽃대를 올리지 않고 있다.
이제 정녕 봄은 오리라. 엄청난 질병의 엄습에 움츠렸던 몸을 털고 기지개를 쭉 켜고 화창한 봄날을 맞자. 그리고 이번 설날에는 두루 세배는 못 다니겠지만 가까운 자식들의 큰 절을 받았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