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원시족은 염소의 젖을 끓여먹지 않는다. 우유를 끓이는 행위를 생명을 앗아가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 모습을 어미염소가 목격하게 되면 더 이상 우유를 생산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지역 구분 없이 대부분의 원시족들이 가지는 공통된 생각이다. 이런 행위를 공감주술, 또는 감응주술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주술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 프레이져를 비롯한 인류학자들의 주장이다.
출애굽기 34장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십계명과 달리 “새끼염소를 어미젖에 삶지 말라”는 것을 마지막 계명에 포함하고 있다. “새끼염소를 어미젖에 삶지 말라”는 것은 다소 이해하기 힘든 생소한 계명이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어미의 젖은 새끼를 양육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만들어 내는 생명의 양식이다. 그 젖을 통해 어미와 새끼는 생명을 공유하여 이어간다. 그 젖에 새끼를 삶아 죽이는 것을 어미가 목격하게 되면 어미는 모든 생산 활동을 멈춘다고 믿었다. 결국 유목민들의 삶에 치명적 손상을 입히게 된다. 이 계명은 생명의 생산자가 되는 어미의 마음을 헤아려 교감하고, 공감하고, 생명을 공유하여 사회를 유지하고 존속케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우리 사회가 편향적이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서로를 적대시 하며, 공정성이 무너지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공감해 보려는 능력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있는 자가 없는 자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니 분배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금수저가 기회를 반칙으로 독점하니 공정성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남이 기쁠 때 같이 기뻐하고, 남이 슬플 때 같이 슬퍼하는 같은 감정을 가지는 ‘공감’은 ‘공유’를 불러오지만 남이 기뻐하는 일을 슬퍼하고 남이 슬퍼하는 일을 기뻐하는 반대 감정을 가지는 ‘반감’은 ‘공격’을 불러온다. 우리 사회가 ‘공유성’ 보다 ‘공격성’이 강한 것은 ‘공감능력’ 보다는 ‘반감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지고 편향적이 되어 가며 사회는 분열되고 서로 공격하게 되고 급기야 사회는 무너지게 된다. 그런 연유로 “새끼 염소를 어미젖에 삶지 말라”고 한 계명은 오늘 우리에게 꼭 필요한 생명연대를 위한 공감능력향상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시대를 비유로 말하길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생명연대의 공감능력을 향상 시켜 아름답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