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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생곡 만드는 것이 숙제죠”

연합뉴스
등록일 2017-09-05 21:04 게재일 2017-09-05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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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 데뷔 30돌 소극장 공연<BR>12일부터 서울서 한달간 진행

가수 김종서(52)는 시나위·부활 등 국내 대표 록밴드의 발자취에 등장한다. 1990년대 `대답 없는 너`, `겨울비`, `플라스틱 신드롬`, `아름다운 구속` 등의 히트곡을 낸 솔로 가수지만 1987년 시나위 2집으로 데뷔했으며 부활의 초대 보컬로도 활동했다.

유명 밴드가 반할 3옥타브 라 샵(#)까지 치닫는 하이톤의 보컬이지만 그도 마포대교 아래서 목소리를 틔우겠다고 모기에 뜯겨가며 노력하던 시절이 있었다.

김종서가 데뷔 30주년을 맞아 이달 12일부터 10월 9일까지 서울 종로구 동숭동 SH아트홀에서 소극장 콘서트를 열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대표곡에 섞어 들려준다.

발자취란 뜻의 `트레이스`(Trace)란 공연 타이틀에는 20대부터 현재까지 김종서의 30년을 함께 여행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최근 SH아트홀에서 인터뷰한 그는 “소극장 공연은 오랜만으로 이 무대가 내 음악 활동에 다시 시동을 켜줄 새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며 “노래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함께 드라마적인 요소를 더해 공연을 준비 중이다. 기획하면서 잊고 있던 옛 생각들이 많이 났다”고 말했다.

서울 서대문구 한성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종서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은 신중현의 장남이자 유명 기타리스트 신대철이 이끄는 시나위의 보컬 오디션이다.

고교 졸업 후 밴드를 하고 싶었던 그는 “`내가 설마 되겠어?`란 생각으로 경험 삼아 오디션을 봤다”며 “시나위가 공연을 앞두고 보컬이 나간 상태였는데 난 풋내기음악 마니아였고 멤버들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나와 수준이 안 맞았다”고 떠올리며 웃었다.

시나위 공연을 마친 뒤 수준 차를 느낀 그는 목소리를 단련해 다시 컴백하겠다는 마음으로 당시 살던 아현동 인근 마포대교 밑으로 매일 걸어가 소리를 내지르며 연습을 했다. 그는 “스무 살이었는데 그때 강한 성대를 만드는 기초가 된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이후 그가 음악 초석을 다지는 시기가 찾아왔다. 1980년대 중반에는 캠퍼스 그룹을 넘어 하드록, 헤비메탈을 지향하는 밴드들이 생겨났다. 그는 대학교 밴드 `검은 진주`로 한 옴니버스 공연에 섰고, 당시 파이널 밴드는 기타리스트 김태원이 이끄는 디엔드였다.

“공연이 끝나고 김태원 씨가 절 찾아와 `함께 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죠. 디엔드는 섬세하고 완성도 있는 밴드였어요. 제가 들어가면서 팀명을 부활로 바꾸고 초대 보컬로 활동했죠. 커버곡을 주로 했는데 레드 제플린, 퀸, 딥 퍼플, 스콜피언스의 곡들을 소화할 하이 톤의 보컬이 몇 없었어요.”

부활은 앨범도 내지 않은 밴드였지만 신문에 소개됐고, 숭의음악당에서 만석으로 공연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1년간 부활에서 활동한 그는 하드록에 대한 로망으로 1집이 나오기 전 밴드를 나왔고, 1년가량 음악만 들으며 칩거했다. 그러자 방황하던 그에게 신대철은 다시 시나위 합류를 제안했다. 그렇게 탄생한 앨범이 `새가 되어 가리`가 수록된 시나위 2집으로 가요사에서 타협 없이 정공법으로 만든 최초의 헤비메탈 앨범으로 꼽힌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2집 이후 다시 시나위를 나온 그가 `절친`인 서태지를 만난 것은 시나위 4집(1990년)에 다시 합류하면서다.

“4집 때 시나위를 재점화해보자는 연락을 받고서 못다 피운 꿈을 이루고 싶었어요. 고등학생이던 서태지가 4집에 합류해 베이스를 쳤죠. 연주력이 좋았어요. 저와는 모든 기호가 같을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비슷했죠. 음악 얘기도 하고 RC(원격조정 완구)도 만들며 둘이 매일 어울렸어요. 시나위에서 서태지란 좋은 친구를 얻었죠.”

그러나 시나위는 4집을 끝으로 잠시 해체했고, 김종서와 서태지는 1992년 솔로와 그룹 서태지와아이들로 각자의 길을 걸어 큰 성공을 거뒀다. 시나위 시절 만들어둔 곡이 많았던 김종서는 1992년 `대답 없는 너`와 `지금은 알 수 없어`가 수록된 1집을 내 크게 히트했고, 1993년 2집의 `겨울비`, 1994년 3집의 `세상의 눈물 마를 때까지`, 1995년 4집의 `플라스틱 신드롬`, 1996년 5집의 `아름다운 구속`까지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러나 최근 KBS 2TV `불후의 명곡`에서 1997년 전성기가 끝났다고 `셀프 디스`를 한 것처럼 그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록이 침체기를 맞고, 아이돌 그룹이 대거 등장하고, 방송 환경이 변화하면서 차츰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다.

물론 시절 탓만 하고 있진 않았다. 그는 2000년대 중반 디지털 음원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자 9집(2005) 이후 `아버지`, `별 이야기`, `아프다`, `날개`, `홈`등의 싱글을 꾸준히 냈고, 2007년부터 1년가량 예능과 드라마에 도전하는 변화를 꾀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현재에서 잘할 수 있는 것을 찾는 성격이어서 못 견딜 만큼의 슬럼프는 없었다고 했다. 실제 그는 2010년을 넘기면서는 발성을 공부하며 배움의 시기를 보냈다. 2012년 오페라 아리아에 도전하는 프로그램인 tvN `오페라스타` 출연도 계기가 됐다.

“2010년대 들어 소리에 답답한 부분이 있었는데 성악을 배우면서 머리를 딱 치는 게 있었어요. 기초 발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소리에 대한 슬럼프가 있었는데 배운 자와 안 배운 자는 위기 때 나타나요. 본격적으로 4년가량 발성을 배웠고, 지금도 간간이 레슨을 받으러 가죠. `오페라스타`를 전후해 이탈리아 유학파인 학교 은사님에게서 배웠는데 1990년대보다 지금의 소리가 훨씬 나아요.”

그는 “보컬 트레이너가 범람하지만 이론은 같아도 잘못된 교육 방식이 많다”며 “클래식을 기반으로 해서 보컬을 체계적으로 총정리한 교본을 내고 싶은 꿈이 있다. 영상 콘텐츠와 책을 동시에 만들어보고 싶다”고 설명했다.

현재진행형 뮤지션답게 새로운 포부도 더했다.

그는 “`대답 없는 너`가 가수 인생에서 무척 고마운 곡인데 앞으로 제 인생곡을 만드는 것이 숙제인 것 같다”며 “한 달간의 소극장 공연을 기점으로 제게 많은 변화가 있을 것 같다”고 기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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