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16일 오전 10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고(故) 박태준 선생의 빈소. 이상득 의원(SD)이 문상을 왔다. 5분쯤 뒤에는 허화평 전 의원이 왔다. 나는 고향의 두 선배를 한 자리로 모셨다. 우리는 부담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다만 SD의 표정은 지쳐 보였다. 며칠 전 포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보좌관의 범죄에 대한 사과와 함께 `총선 불출마 의사`를 밝혔으니 아무래도 노인의 내면은 어지러웠을 것이다. 더구나 짧게나마 인생무상을 떠올리게 되는 곳이었다.
한참 지나 SD가 일어섰고, 내가 뵙자고 했다. 키 큰 노인이 키 작은 나를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포항에서 24년 동안 국회의원을 하셨는데 그렇게 지역 기자들을 통해 심경을 밝히신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풍파가 가라앉은 적절한 시기에 많은 시민들이 모이는 자리를 마련해서 고마운 마음, 미안한 마음, 정치를 떠났지만 고향을 위해 애쓰겠다는 마음을 밝히셔야 예의에도 맞고 좋은 풍속도 만들 것 같습니다. 물론 연설도 진정을 담아 명연설을 하셔야지요.” 잠깐 생각에 잠긴 노인이 뜻밖의 답을 내놨다. “당신이 준비해줘.”
이튿날 고인의 영결식을 마치고 열흘쯤 심신을 가다듬은 나는 오랜 친구들인 포항지역사회연구소(포사연) 회원들과 의논했다. `정치행사와는 달라야 하며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시간이 돼야 한다`는 내 제안에 모두가 동의했다. SD의 측근이라 알려진 포항시 의원에게는 전화로 설명했다. 남은 문제는 `적절한 시기`의 선택이었다.
포사연과 나는 SD의 권세와 무관한 사람들이다. 아니, SD의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는 시절에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건드린 사람들이다. 요즘 개그콘서트에서 `용감한 녀석들`이 인기를 누리는데, 우리는 전혀 주목받지 못한 `용감한 녀석들`이었다. 2008년 1월30일 `이상득 의원의 아름다운 용퇴를 촉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그로부터 두어 달포 지나 여당에서 `이상득 불출마 촉구 55인 서명`이 나왔는데, 그들은 비겁하게도 자신의 공천을 거머쥔 다음에야 공개적 집단행동을 했다.) 인터넷에는 여전히 살아 떠도는 그 성명서는 이러한 견해도 담고 있다.
“과연 이상득 의원이 6선의 지역구 의원이 되어야 친동생인 대통령의 권력을 제대로 포항발전에 활용할 길이 마련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한국 현대사를 돌아볼 때, 대통령의 고향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스러운 원리`로 작동되었다. 포항시민은 대통령의 친형인 6선의 막강한 권력자가 국회에 있으면 야당과 언론의 주목을 받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원리`의 작동에 방해가 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적중했다. `형님예산` `만사형통`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물론 그 성명이 물질적 이기심만 나무랐던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주장은, 이상득 의원이 유종의 미를 거두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포사연의 성명서를 뉴스에 다룬 언론은 오직 한 방송사였다. 거기서는 나를 라디오에 불러내서 길게 인터뷰도 했다. 나는 성명서의 내용을 한 자도 비켜가지 않는 생방송 발언을 했고, 예상한 대로 그것이 한 작가를 성가시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드는 뒷일을 불러왔다. 그때 포항의 신문들은 약속한 듯이 한 줄도 다루지 않았다. 신문사의 고유 권한인 편집권을 지키느라 외면했을까? MB정권의 인수위원회가 서슬 퍼런 때에 감히 `형님`의 심기를 건드릴 엄두라도 낼 수 있었을까? 그때 포항에는 `말`이 죽어야 했다. 참으로 말이 많은 도시에서 `말`이 죽었고 `말`의 죽음은 뒷날의 이른바 `영포라인의 수치스러운 몰락`과 포항시민이 착잡하게 지켜본 `SD의 불행`을 초래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SD 덕분에 잘 나갔다고 알려진 포항의 인물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SD 밑에서 MB 대선운동을 해준 직후에 혹시나 SD가 불출마를 선언할세라 “부의장님, 반드시 출마하셔야 합니다. 포항시민이 간절히 원합니다.”라고 아부를 떨었던 사람들, 속으로는 자신이 거머쥔 권세와 이권의 동아줄을 놓칠세라 발발 떨었던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평범한 시민의 눈에는 굉장히 좋아 보이고 높아 보이는 자리를 얻거나, 호가호위(狐假虎威)의 실세로 거들먹거리며 여기저기 `빨대`를 꽂거나, 물심(物心) 양면으로 고생만 시키더니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해댄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국회의원이 되겠다든 대통령이 되겠다든 헌법이 보장한 개인의 자유지만, 정의와 윤리의 눈에는 뻔뻔하고 가소로운 노릇이며, 포항의 양심에는 지겹도록 창피한 노릇이다.
SD의 불행과 포항의 불명예를 초래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던 그들의 일차적 책무와 도리는 더 늦기 전에 정치권이나 그 언저리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일이다. 차마 이권의 자리를 떠날 수 없다면 혼자 배불리 즐기든 끼리끼리 나눠먹든 역시 조용히 살아가는 일이다. 이제부터 포항시민은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고, 그들에게 조용히 살아가라는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살아온 그 `말`의 건강을 위해 포항 언론들은 자기 갱신을 서둘러야 한다.
언젠가 SD는 면벽의 날들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다. 고(故) 박태준 선생의 빈소에서 전광석화처럼 맺은 그 언약을 나는 잊지 않겠다. 긴 행복과 짧은 불행으로 이뤄진 한 노인의 삶에 `유종의 미`를 선물하고 싶은 것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결단으로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하지만 고향의 품에 안겨 그것을 이뤄도 좋다. 누구든 사람은 내면에 아름다움도 품고 있다. 미래의 어느 날에 포항사람들이 `SD의 유종의 미`를 위해 아름다운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을 자극하는 일은 문학과 작가의 책무 중 하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