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 나에게 날짜를 세어준다어느 날 내 심장 속으로 콱 들어와 방 한 칸,집 한 채나는 방 안에 누워 있고, 방은 내 심장 속에서뛰고 있다 방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다옥탑의 문 앞까지 계단이 시간을 끌어올리고 있다계단이 가쁜 숨을 몰아 검은 발자국들내 목구멍까지 끌어올리는 날, 아침심장마비로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방,날짜도 세다 말고 멈춰버릴 방,월세도 못 내고 굳어버릴 방,썩어 소리 없이 지워질 방,위의 시에 따르면, 시인의 심장은 ‘집 한 채’와 같으며, 그 ‘집-심장’ 속엔 ‘방 한 칸’이 “콱 들어와” 있다. 마음속의 방이라고 할 이 심장의 방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지만 뭔가 위험하다. 가만히 놔두면 심장마비로 멈춰버리고는, 굳어버리고 썩어 지워질 수 있는 옥탑방. 이 방이 멈추지 않도록 ‘노크’해야 한다. 계단이 “검은 발자국들”을 남기며 숨 가쁘게 “시간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일 테다. 문학평론가
2023-03-15
돌담 사이로 바다가 보이네소라고둥의 집을 짓고 사는 이여바다는 앞마당에 와서아무 말 없이둘러만 보고다시 돌아가네어부의 집은 고깃배처럼미끄러지네좀더 기우네어부는 자신이 사는 집도 바다와 관계한다. 바다가 그의 집 앞마당까지 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어부는 고독한 사람이다. 바다가 “둘러만 보고/다시 돌아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바다와 그는 섞이지 않는다. 저 어부는 시인을 의미하기도 할 테다. 바다라는 세상에서 시를 낚는 사람. 그렇다면 시인의 집은 고깃배다. 그에게 다가오지만, 그와 섞이진 않는 세상 위로 미끄러지면서 기우뚱거리는 시의 집은. 문학평론가
2023-03-14
모든 안식일의 나자는 할머니 코에 손가락을 대보기도 한다얻어 온 햄스터의 이름을 지으며 울기도 한다강아지를 처음 데려온 날강아지의 죽음을 계산해보기도 한다나는 매일 안식을 취한다감당할 수 있을 만큼 분할된 고통 속이다안식일은 노동을 쉬면서 신께 기도를 드리는 날이다. 반면, 유혜진 시인에게 자신의 ‘모든 안식일’은 죽음을 생각하는 날이다. 그날 시인은 할머니의 살아계심을 “코에 손가락을 대보”며 확인하거나 햄스터의 이름을 지으면서 그 짧은 운명에 눈물을 흘린다. 또는 강아지가 죽을 날을 계산하기도 한다. 시인에게 안식이란, 저렇듯 일부러 일상 속에서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고통을 감당할 수 있도록 분할하는 일이다. 문학평론가
2023-03-13
외로워서 숲에 들어와낙엽 되어 앉아 있을 때맑은 눈 맞추며앉아 있던 박새포르릉떠나버린 나뭇가지만져보니따뜻하다나뭇가지에서 외로이 떨어져 낙엽이 된 시인. 하지만 외로운 이에게도 눈을 맞추는 존재자가 있다. ‘맑은 눈’을 가진 하늘 위 저 박새가 그것이다. 이 박새와 마주하기 위해서는 홀로 숲에 들어와야 하리라. 물론 저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박새는 얼마 뒤 시인 앞을 떠나버릴 터이나, 나뭇가지에 체온은 남겨두는 것. 시인은 자신이 떠나온 나뭇가지를 만지며 그 따스한 체온을 느낀다. 하여, 우리의 삶은 외롭기만 하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문학평론가
2023-03-12
어두어오는 城門밖의 거리도야지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다엿방 앞에 엿궤가 없다양철통을 찔렁거리며 달구지는 거리 끝에서 江原道로 간다는 길로 든다술집 문창에 그느슥한 그림자는 머리를 얹혔다이 시는 4개의 연을 통해 4개의 장면이 잘 정제된 표현으로 묘사한다. 각 연은 어두운 색조로 채색된 듯한 느낌을 주며, 묘사 대상들은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들이다. 성 바깥이라는 제목부터가 어떤 소외감을 느끼게 해준다. 1연의 “어두어오는 城門밖”이라든가 2연의 “엿궤가 없다”라는 시구는 사라짐, 상실감과 관련된다. 3연의 이주자의 달구지와 4연의 기생의 그림자는 서러움을 불러일으킨다. 문학평론가
2023-03-09
이제는 누가 와야 한다산은 무너져 가고/ 강은 막혀 썩고 있다/ 누가 와서/ 산을 제자리에 놔두고/ 강물도 걸러내고 터주어야 한다물에는 물고기 살게 하고/ 하늘에 새들 날으게 하고/ 들판에 짐승 뛰놀게 하고/ 草木과 나비와 뭇 벌레/ 모두 어우러져 열매 맺게 하고우리들 머리털이 빠지기 전에/ 우리들 손톱 발톱 빠지기 전에/ 뼈가 무르고 살이 썩기 전에/ 정다운 것들/ 수천 년 함께 살아온 것/ 다 떠나기 전에누가 와야 한다소설가 박경리의 시집 ‘우리들의 시간’(2000)에 실린 시다. 기후 위기 등으로 생태 문제의 심각성이 강조되는 요즘이지만, 박경리는 예전에 이미 “수천 년 함께 살아온 것/ 다 떠나기 전에” “누가 와야 한다”며 절박하게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모두 죽어 사라지기 전에 누가 와서 자연을 자연 그대로 존재하도록 되돌려야 한다는 것. 그런데 ‘누가’는 누구인가? 자연의 본성을 회복한 우리 자신 아니겠는가. 문학평론가
2023-03-08
흙탕물이 흙탕물 그대로 있기를 바란다(…)흙은 물을 만나 더러운 흙이 되는 게 아니다물은 흙을 만나 흐린 물이 되는 게 아니다흙탕물이 튀어서 내 마음이 더러워진 적은 없다한때는 분노와 증오의 붉은 흙탕물이 되어내가 썩어간다고 생각했으나이제는 흙탕물이 흙탕물 그대로 있는 게 아름답다모내기를 끝낸 저 무논을 보라물은 흙탕물이 될 때 비로소 흙에서 어머니를 만난다흙은 흙탕물이 될 때 비로소 물에서 모를 키운다 (부분)흙 속에 잘 묻히기 위해서는 흙과 섞이는 것을 더러워하거나 “내가 썩어간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흙탕물에서 모는 자라난다. 흙과 섞여 있을 것, 흙과 계속 “서로 사랑하고 미워”할 것. 흙이 세상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세상 속에서 그대로 살아나가는 것. 시인은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깨끗하고 순수한 무엇에서 오지 않는다. 세상과 뒤섞여 세상의 비료가 될 때 아름다움은 발현된다. 문학평론가
2023-03-07
늘 걷는 산책로 옆에 새가 엎드려 있다설마 알을 품는 건 아니겠지, 죽은 새일까들춰보니 구더기와 풍뎅이들이 우글거린다그가 안간힘으로 품어낸 아수라,속으로부터 썩어들어가며먹여 살린 우주,스스로 무덤이 된안으로부터의 부활 (부분)“스스로 무덤이” 돼 벌레들이 살 수 있는 우주를 마련해줄 때, 죽음은 “속으로부터 썩어들어가며” “안으로부터의 부활”을 이루어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우주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갱신된다. 모든 죽음이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부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자들을 위해 죽은 자신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즉, 죽음을 통해 사랑을 실현할 때 부활은 이루어진다. 이 사랑이 바로 ‘신의 사랑’일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3-06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그럼에도 불구하고,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부분)시인은 위의 시에서 제시된 ‘가능주의자’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미래가 꽉 막혀 있는 우리 시대에는 저항의 시가 더욱 필요하기에. 여기서 저항은 정권에 대한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 삶의 가능성을 교묘하게 봉쇄하고 있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다. 시인은 이를 위해 우리 사회 내부의 숨겨진 비참과 상처를 드러내면서 몸소 아파하는 동시에, 지금 여기의 삶과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문학평론가
2023-03-05
티끌 같은 화염의 순간도시간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번민혁명도 파국도시간이 앓는 그림자다비애 같은 어쩌면허공에 방전되는 번개 같은그러나 창밖에 겨울비가마지막 이파리를 부르고가는 사람과남는 사람 사이에서과거는 먹구름미래는 눈보라그리고 오늘은,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불가해한 숲!시간에서 불이 타오를 잠재성을 읽는 것, 그것은 “허공에 방전되는 번개”를 붙잡는 일이리라. 나아가 그 번개의 방전이 “마지막 이파리를 부르”는 겨울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 그것은 불꽃에서 시간의 그림자를 투시하는 것이다. 번개가 방전되고 있는 허공의 “오늘은, 웃음과 울음이 뒤섞”이며 용해되고, 그렇게 슬픔과 고통, 사랑과 투쟁이 용해되고 있는 허공은 “불가해한 숲”으로 현현한다. 문학평론가
2023-03-02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오히려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만큼보여주면서 멀어져 가지만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는 만큼보여주지 않으면서 가까이 다가온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늘 내 귀밑머리에 앉아 있다보이지 않는 사상이 늘 내 가슴속을 차지하고 있다 시인은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은 “멀어져 가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선명하게 보일 때가 있다”고 말한다. 시는 어떤 대상의 보이지 않는 면을 보기 위해 마음을 다할 때 형성된다. 시 쓰기란 보이지 않는 것, 잠재해 있는 것이 우리 삶과 세계를 지탱하고 형성하는 힘임을 시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다. “보이지 않는 사상”과 “보이지 않는 바람”이 마음과 감각을 저변에서 형성하고 있음을 인식하듯이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3-03-01
현미 잡곡밥, 청국장, 도토리묵, 마늘, 고추 장아찌를 곁들인 저녁을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엄마와 함께 소양, 해지는 들녘을 걸었다가팔랐던 내 마음도 어느새 평평해졌다엄마가 살아왔던 이야기들이 벼이삭처럼 자라는 해지는 들녘이었다차랑차랑 벼이삭을 흔들며 단내 나는 바람이 불었다고단하고 쭈글쭈글했던 엄마 삶이 조금씩 펴지고 있었다엄마 손은 고즈넉했으나그 손을 오래도록 잡고 있으면문자로 요약될 수 없는 따뜻함이 느껴졌다난 이 따뜻함에 기대어서로 품고 스며드는 시간 속으로 가고 싶었다평평한 들녘에 어머니와 함께 평평하게 손을 잡고 걷는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 주름으로 각인된 고단했던 시간들을 이야기해준다. 이야기들을 건네면서 “쭈글쭈글했던” 시간들은 “조금씩 펴지”며 들녘의 “벼이삭처럼 자라”나고, 시인의 마음은 그 들녘처럼 “어느새 평평해”진다. 어머니의 이야기들은 시인의 마음속에서도 자라난 것, 어머니의 이야기-문학-도 이삭처럼 평평한 세계에서 자라나는 생명인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27
오랜 정원의 마술사는 더 이상마술을 하지 않는다그늘을 빌려와 그림자로 시체놀이를 한다모두가 액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그는 변기를 미술관에 걸어두었다미술관 앞에서 한 여인이 오줌을 눈다시인은 현대 미술 전시회에 변기를 걸어둔 뒤샹의 일화를 빌어 와서, 현실 자체가 되는 예술을 보여준다. 뒤샹의 변기는 액자 속에 갇혀 있지 않고 현실 자체를 구성한다. 그렇기에 그 ‘예술품’에 한 여인이 오줌을 실제로 눌 수 있었던 것. 그런데 그 변기가 남성 소변기였음에도 오줌을 누는 사람은 여성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예술과 현실 공간이 전복된 저 미술관에서는 성의 상징적 질서 역시 전복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26
아이 손을 잡고 광장에 나가지 못한다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해서네가 죽어도 나는 살아야 해서기약 없는 먼 훗날을 몽땅 끌어당겨서라도지금 살아야 해서 촛불을 들 수 없는나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납땜 냄새 찌개 냄새 땀 냄새에 찌든 수척한 감정들이운명처럼 들러붙어 빠져나가지 못하는나는 파란색일까 까만색일까 붉은색일까재갈 물린 길을 따라 무작정 걷는 여자의 시간내가 여자를 입었는지 여자가 나를 입고 있는지나를 찾아 출구를 더듬거리며 오늘을 걷고는 있다만여자라는 시간은 제자리걸음나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부분)위의 시는 “지금 살아야 해서 촛불을 들 수 없”는, 광장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닥치는 일을 해야” 하는 여성들에 주목한다. 그녀들은 세상이 광장의 촛불에 주목할 때도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사회는 그녀들을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것처럼 취급하며 가시화하지 않는다. 각종 일을 하지만 존재성이 박탈당하고 있는 그녀들의 삶에 대해 시인은 “재갈 물린 길을 따라 무작정 걷는 여자의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문학평론가
2023-02-23
그늘 한 점 없이 달아오른 하오언젠가 정물이 되어 버릴이 풍경의 말미를 생각한다길과 건물과 구조물은 점점반듯해지고 인부들의 근력은발아래 그림자와 비례할 것이다짧아지는 속도를 쫓다가길어지는 시간을 따라 지쳐 가겠지번듯해지면 번듯해질수록번듯한 곳에 남겨지지 못할 사람들그렇게 쫓겨난 늙은 노동자가더 물러설 곳 없는 철탑에 올라뜨겁게 타들어 가는 목숨의 말미를움켜쥐고 있다뜨거운 여름날 ‘하오’, 공사판 인부들이 반듯한 길과 건물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노동하면 노동할수록 “인부들의 근력은/발아래 그림자와 비례”해 약해지면서, 결국 그들은 공사판에서 쫓겨나게 될 터이다. 그렇게 인부들의 삶은 자신들이 속하지 못할 번듯한 세계를 만드는데 소모되며, 결국은 “더 물러설 곳 없는 철탑에 올라”, “목숨의 말미를/움켜쥐고” 자본에 마지막 항의와 생명의 요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22
전화기는 쉴 새 없이 복음을 뱉어내느라 바쁘다대문 밖은 위험합니다가족도 조심하세요기쁨을 기쁨이게 하는 말씀은 이제 없다천당도 지옥도 말 한마디로거침없이 만들고 지웠지만예수도 부처도 전염병은 어쩌지 못한다니과학을 신봉하라백신, 또, 하나의 신이 탄생하고 있다‘코로나 사태’가 마무리되고 있다. 이젠 코로나 사태로 무엇이 일어났고 변화되었는지 성찰할 시간이다. 표성배 시인은 하나의 신이 탄생했다고 진단한다. 그 신은 ‘백신’으로 상징되는 ‘과학’이다. 어느새 백신이 모든 것의 해결책으로 믿어졌고, 사람들은 백신에만 의존하기 시작했다. 그 신은 ‘기쁨’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 불안을 파고드는 경고와 죽지 않으려면 백신을 믿으라는 무서운 ‘복음’을 전할 뿐이다. 문학평론가
2023-02-21
변방에서 울리는 은은한 종소리를아무도 듣지 않는다변방에서 쏘아 올린 사랑의 로켓을아무도 보지 않는다변방에서 폭죽처럼 터지는 꽃향기를아무도 맡지 않는다변방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자신이 중심의 감옥에 갇혀 있는 줄 모른다‘변방’에 있는 이들 중 다수가 중심에 들어서기를 욕망한다. 그들은 기필코 중심에 들어가리라고 마음 먹고 이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변방을 벗어나야 할 곳으로 여기니 변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있을 수 없다. 중심에 들어선 이들 또는 원래 중심에 있었던 이들 역시 변방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들에 관심 없다. 시인은 이렇듯 중심에 마음이 묶여버린 이들이 “중심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꼬집는다. 문학평론가
2023-02-20
서로를 보면열이 오른다 자취방 창가로 불어오는 여름높이 들어 잔이 넘치도록 마시는 여름거리에 쏟아지는 여름이마음을 와락 적신다어느 날은 햇살 아래 빛나는 너의 웃음이여름이구나내가 사랑하는 것이 이러한 여름이라 얼마나 다행인지우리의 여러모로 비슷한 일상이뜨거운 시절이라는 사실을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 기억하자이 여름이 우리의 첫사랑이니까이제 시작이니까너와 함께 있으면 내 삶이 다 망쳐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그래서네가 좋아최백규 시인은 여름을 사랑한다. 여름이야말로 사랑의 열기를 상징하기 때문이리라. 여름은 “햇살 아래 빛나는 너의 웃음”처럼 사랑스럽다. 여름날 “자취방 창가로 불어오는” 여름 바람은 사랑의 열기를 전해주면서, 잔을 “높이 들어” 술을 마실 때처럼 사랑에 취해 “마음을 와락 적”시게 이끈다. 하여, “거리로 쏟아지는” 여름의 “여러모로 비슷한 일상”은, 사랑으로 뜨거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다. 문학평론가
2023-02-19
가을의 말씀에는 은유가 없다.은유의 꽃이 사라지고은유의 잎이 떨어지고은유의 뿌리였던허기와 향기가 지워지고 나면원색의 하늘만 남아, 침묵의 하늘만 남아태초의 말씀,허공 가득한 바람으로그대의 한 생을 증언하고 있다.인간의 언어가 은유를 통해 탄생하고 작동한다면, 은유가 지워진 언어엔 무엇이 남을까? 시인은 “태초의 말씀”인 ‘침묵’만 남는다고 한다. 은유의 꽃, 잎, 뿌리가 모두 사라지고 난 후 남는 건 허공과 그 허공을 가득 채우는 바람뿐이다. 우리가 저 푸르른 가을 하늘의 허공을 보았을 때, 태초의 말씀이 침묵을 통해 들려온다. 그리고 그 ‘하늘-침묵’은 바람처럼 허공을 지나가고 있는 “한 생을 증언”해주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16
안녕이란 말 어디에서 왔을까소란스런 거리에 서서“안녕”이라고 나지막이 읊조리면꽃잎이 지고 하루가 저물어 가네얼마나 많은 별리들이 사람들 앞에 있었을까바람 속을 떠돌고 강물에 섞여 흘러갔을까“안녕”하고 뒤돌아서면적막에 묻힌 집 한 채떠오르고잊혔던 이름들 등불처럼 내걸리네안녕이란 말 어디로 갈까허공에 매달려 반짝이는이름들아불멸의 노래들아이별할 때 말하는 ‘안녕’이라는 말. 이 시에 따르면, 이 말을 “읊조리면” “소란스런 거리”에서도 적막의 공간이 열린다. 그 공간은 가슴 아픈 이별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곳이다…. ‘안녕’이 시적인 말이라는 것을 이 시를 읽고 새삼 깨달았다. 시적인 말이란 “불멸의 노래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그 노래들은 “잊혔던 이름들”이 내걸리는 ‘등불’을 의미하는데, ‘안녕’을 읊조리면 이 등불에 불이 켜지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