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사물을 읽으려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세계는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사람들은 다만 자신들의 운명을 비는 자들이 되어 버렸다무당의 나라가 들어섰고미래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누군가가 종언이 왔다고 한탄했으나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물가에서 지나간 시대를 비춰주던 햇살만이아직도 이 세계를 포기하지 않고사물의 시대를 비추고 있었다 (부분)시인에 따르면, 지금 이 세상의 사람들은 “사물을 읽으려 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에게 “세계는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비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만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세계와 접속하지 않기에, 그들에게 미래의 세계는 관심사가 아니다. 하지만 세계는 세계를 포기하지 않는다. 저 ‘햇살’이 여전히 사물에 빛을 비추며 세계와 접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문학평론가
2023-02-14
늦은 산책을 하는데 손을 꼭 잡은 노부부가 앞서 걸어갔습니다.한쪽으로 심하게 기운 걸음으로손에 손을 의지해 중심을 기울이고한 손에 약봉지를 꽉 그러쥐고(중략)마주 잡은 노부부의 손을섣불리지나칠 수 없어더 느린 보폭으로 길의 주름 늘려가는데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는좁은 골목이 통째 느려져다시 출발선에 선 듯 느른하여뒷모습만으로도앞모습이 화평하였습니다. (부분)시인의 눈앞에서 느릿하게 걸어가는 노부부. 자신의 생명줄인 듯 “약봉지를 꽉 그러”쥔 이 노부부는, “중심을 기울”여 서로에게 의지하며 삶을 지탱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부의 ‘느린 보폭’이 ‘길의 주름’을 더욱 늘려 세계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삶의 황혼에 다다른 노부부가 역설적으로 이 세계를 “다시 출발선에 선 듯 느른”하게 하는 것인데, 이들의 뒷모습은 이 새로운 세계의 화평한 ‘앞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3-02-13
꽃은 시간 위에서 피어나고꽃은 시간 위에서 지네시간은 꽃이 되어 피어나고시간은 꽃이 되어 지네나는 당신 위에서 피어나고나는 당신 위에서 지네당신은 내가 되어 피어나고당신은 내가 되어 지네단순한 진술이 감동을 주는 경우가 있다. 네 개의 단순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위의 시가 그러하다. 시간 위에서 피어나고 지는 꽃. 꽃이 되어 피어나고 지는 시간. 이와 마찬가지로 당신 위에서 피어나고 지는 나. 내가 되어 피어나고 지는 당신. 이 단순한 대구가 깊은 존재론적 인식-세계와 우리가 사랑을 통해 존재하며, 그렇기에 삶은 아름답다는-과 함께 그 인식 덕분으로 발생되는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문학평론가
2023-02-12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것은숲속에 보이지 않게 숨겨놓았던제모습을 구겨지지 않게 펼쳐내려는단정한 날갯짓이지요나무가 바람에 흔들려주는 것은단정하게 다듬어놓으려는 제모습을헝클어지지 않게 풀어내고 있는욕심 버린 몸부림이지요바람에 흔들려주는 나무 앞에 서면몸 둘 바를 모르고 다소곳해지는 까닭은내 모습을 반듯하게 다듬어놓지 못한부끄러움 때문이지요.현대인은 점점 부끄러움을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에 시는 우리 현대인에게 종종 부끄러움을 일깨워주고, 그래서 사랑받는다. 윤동주의 시를 생각해보라. 어쩌면 시인은 자신에게서 부끄러움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 발견은 시적 형상을 통해 이루어진다. 위의 시에서 시인이 ‘바람’의 ‘날갯짓’과 ‘나무’의 ‘몸부림’이라는 형상에서 단정함의 윤리와 자신의 부끄러움을 찾아내듯이. 문학평론가
2023-02-09
복면의 사내외줄 그네를 타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밀대를 밀며 간다백색 점프다줄을 당기고 늦추며포름알데히드가 휘발중인 흰 사슴이 뛴다늙고 병든 비둘기가 추락하던 난간벌거벗고 시위하던 사내구급대원들이 산벚나무 두 그루 밑동까지 잘라공기 매트를 깔아주던 실패한 자살자가 사는 12층도 새하얗다.빛바랜 잡초도 흰 귀를 달고허름한 아파트는 사라졌다소문은 표백되고 (부분)‘도장공사’는 우리의 일그러진 일상에 가면을 씌운다. 가령 “벌거벗고 시위하던 사내”가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살아가는 ‘12층’을 ‘새하얗’게 변모시킨다. 일상의 본 모습에는, 난간에서 추락하는 “늙고 병든 비둘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추락이나 병의 고통 같은 죽음의 그림자가 검게 드리워져 있다. 하나 ‘백색 점프’를 통해 “허름한 아파트는 사라”지고 불길한 “소문은 표백”되는 것이 작금의 세상이다. 문학평론가
2023-02-08
스며든다는 건온 생을 걸려 닮아가는 일이다천천히 스며들어젖어드는 줄 모르고 있다가헤어질 때가 되어야 비로소흠뻑 젖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나로 물든 너를 바라보는 일이다그제야 마주 보고 깔깔거릴 수 있겠다그리고 웃는 얼굴로 인사할 수 있길Good Bye!시에 따르면, 스며듦은 “온 생을 걸려” 이루어진다. 하여 스며듦은 서로를 닮게 해서 상대방이 자신처럼 익숙해지도록 만들고, 우리는 서로 스며들어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스며듦을 발견하도록 하는 사건은 이별이다. 이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흠뻑 젖어 들어갔음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헤어질 때가 되어야 우리는 “마주 보고 깔깔거릴 수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07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아버지가어느날 내 집 앞에 와 계셨다현관에 들어선 아버지는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눈물부터 흘렸다왜 우시냐고 물으니사십 년 전 종암동 개천가에 홀로 살던할아버지 냄새가 풍겨와 반가워서 그런다고 했다아버지가 아버지, 하고 울었다아버지에게도 아버지는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일 수 있음을 잊고 산다. 아버지는 아버지이기만 하다는 듯이. 위의 시는 누군가의 아들로서의 아버지를 발견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아버지가 자신이 누군가의 아들이었음을 기억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 기억은 ‘사십 년’이 넘도록 스며들어 있는 특정 장소에 대한 감각-‘할아버지 냄새’를 통해 상기될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3-02-06
니코틴 때문이 아닐지 몰라내가 재떨이를 헤집는 이유뜨겁던 몸들퀴퀴하다생살에 비벼 끄던간절한 말들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깊이 빨아들인다입술까지 닿는 꽁초의뜨거움시에 따르면, ‘마흔’에는 꽁초를 찾는 삶을 살아간다. 아직 불태울 수 있는 것들이 남아 있는지 찾는 삶. 지금 재떨이에 ‘퀴퀴하’게 누워 있는 꽁초들은, 그래도 발갛게 뜨거웠던 삶, “간절한 말들”이 타들어 갔던 삶을 살았던 것들이다. 하나 그 말들을 “생살에 비벼 끄”게 되었던 것인데, 화자는 기어코 꽁초를 찾아 불을 붙인다. 그리고 이제야 ‘입술’까지 타들어오는 말들의 뜨거움을 생생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05
나는 완전에 가까운 그의 결단을지천명처럼 믿네그에게 하루 14시간의 작업이나단수(斷水) 같은 월급이문제가 아니었네위장병이나화장실조차 막는 금지도문제가 아니었네바늘로 졸음을 찌르며배고파하는 어린 여공들에게풀빵을 사준 일이문제였네내게 인정으로 배수진 치는 법을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최후까지 알려줄 것이네시인에 따르면, 전태일은 적개심이 아니라 다른 노동자 동료들을 연민하는 ‘인정’으로 배수진을 쳤다. 그 ‘인정’은 연민의 대상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도우려고 하는 마음의 일어남이다. 전태일의 ‘결단’-그의 죽음-은 그 인정이 더이상 밀릴 수 없는 최후에 다다랐을 때 이루어진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정은 죽음을 무릅쓰고 지켜야 할 근본적인 가치임을, 전태일은 시인에게 가르쳐주었다. 문학평론가
2023-02-02
우왕좌왕은 없다좌충우돌은 없다내 발자국은 없다 그러나 내 동선은 남는다너도 없다얼굴도 없다누군가 없는 네게 경고한다너는 그곳에서 살고 있으며너의 모든 경유지와 목적지는 기록된다지워지지 않을 너의 과오는 남는다진정한 휴머니스트의 세상이다 (부분)시인은 운전자의 필수품인 내비게이션이, 자동화되고 기계화된 우리 시대 삶의 양태를 상징한다고 본다. ‘좌충우돌’과 ‘우왕좌왕’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 삶의 내비게이션은 최적화된 삶의 양식을 지시하면서, 그에 따라 가게 되는 “경유지와 목적지”를 모두 기록한다. 지워질 권리는 허용되지 않는다. ‘휴머니즘’에 입각해 인간을 위해 개발된 ‘내비게이션’은, 어느새 인간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기계가 된 것이다. 문학평론가
2023-02-01
하루 종일 하늘이 무거웠다먹구름이 잔뜩 물을 들이켰는지한낮도 한밤중 같았다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고창문을 마구 흔들어 덜그럭거렸다문이란 문을 죄다 닫아걸었더니틈을 찾는 바람의 울음이 휘잉 휘이잉그 안에 내가 있는 것을 안다고불온한 목소리로 흔들어댔다들판에 배곯은 승냥이 울음 같은사랑이 두려웠다이름을 불러가며빙빙 도는데나는 여기 없는 척 숨을 죽이고악착같은 네 사랑을 믿지 않았다우리 마음에는 폭풍우가 잠재해 있다. 시인은 그 마음 속 폭풍우를 사랑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폭풍우의 전조는 마음에서 사랑이 일어나기 직전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방문을 “승냥이 울음 같은” “불온한 목소리로 흔들어” 대는 바람은 시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랑이다. 시인은 “네 사랑을 믿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슬픈 거짓말”이었다 문학평론가
2023-01-31
당신을 찾으러 길을 나섰다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지 못해길을 잃었다허기처럼 빛나는 이팝나무 꽃잎과옷소매에 묻어온 수크령들과눈 덮인 벤치에 앉아잠시 울었다당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했고나는 꼭 한마디 할 말이 남았지만늘 처음과 끝의 중간쯤에 나는 서 있었고돌아와그곳에 두고 온 신발을 생각했다시에 의하면, ‘당신’을 잃는다는 일은 살아갈 길을 잃는다는 일이다. 길 잃음은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당신을 찾으러 길을 나섰”을 때 일어난다. 기대와는 달리 “당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며 떠나버렸기에. 시인이 집에 돌아오더라도, 당신이 가버린 길과 집으로 오는 길 “중간쯤에” 그는 서 있는 것과 같다. “그곳에” ‘신발’을 두고 왔기에, 시인은 이젠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2023-01-30
늘어진 혓바닥은 자꾸 마르고말라서 침이 흐른다어디든 갈 수 있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멈취 서는 게 가장 두렵다이빨을 드러내며 짖어대던 때가 차라리 나았다두 눈은 이제 먼 곳을 바라볼 뿐발바닥은 보이지 않는다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도어디나 위험하다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서어디라도 보아야 한다아픈 시다. 한때 “짖어대던 때”도 있었지만 혓바닥은 질질 침 흘리며 말라가고, “두 눈은 이제 먼 곳을 바라볼 뿐”인 나이. 중년의 나이에 이르면, 돌아보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길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미 발은 부어있는데, “발바닥은 보이지 않”게 될 때다. 자신을 거들떠보는 이도 없게 되었지만, 그럴수록 “어디라도 보”면서 멈춰 서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심연에 빠질 위험이 있으니까. 문학평론가
2023-01-29
삶은 부사(副詞)와 같다고언제나 낫에 묻은 봄풀의 부드러운 향기언제나 어느 나라 왕자의 온화한 나무조각상에 남는 칼자국언제나 피, 땀, 죽음그 위에, 언제나 노래가태양이 몽롱해질 정도로언제나 너의 빛부사는 모습(형용사)과 행위(동사)를 꾸며주는 말이다. “삶은 부사와 같다”는 말은 행위와 모습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나타나는지의 양태가 삶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삶의 양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시인에 따르면, “언제나 피, 땀, 죽음”-‘칼자국’으로 남은 상처-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한편 “언제나 너의 빛”이 있다. ‘너의 빛’은 ‘노래-시’일 터, 이 시가 ‘피, 땀, 죽음’이 서린 ‘낫’의 삶에 “부드러운 향기”를 묻힌다. 문학평론가
2023-01-26
바닷가 돌집 아래슬픔끔찍했으나 오랫동안 지켜보았고울지 않았다바위는 먼 바다를 보고 있었다옆자리에 쪼그려 앉아노래를 불렀다끝이 없다귀 없이 멀리 가는 새야,돌아보지 말아라점점 멀어졌다모든 것이 베개처럼 평평해졌다모래밭에 모래꽃끝없이 펼쳐진 모래밭 (부분)사막처럼 쓸쓸하게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백사장. 바위마저도 “먼 바다를 보”며 노래를 부른다. 해안을 물들이는 바위의 그 노래는, 바다에 닿지 못하는 슬픔을 표현할 것이기에 저 풍경을 더욱 쓸쓸하게 만든다. 하여 “바닷가 돌집 아래”에 배어 나오는 슬픔을 시인은 ‘오랫동안’ 응시한다. 그리고는 끝없이 펼쳐진 슬픔이 끔찍해서 “멀리 가는 새”에게마저 “돌아보지 말”라고 말한다. 결별하는 연인에게 말하듯이. 문학평론가
2023-01-25
살구나무 그림자에 누군가의 마음이 어룽댄다꽃 진 살구나무에 봄의 정신이 있다고믿는다옛사람처럼살구나무 그림자에 내 다리를 얹어본다바람은 내 그림자만 떠내어 흔든다흔들리지 않는 살구나무 가지에봄의 정신이 있다 (부분)시인은 살구나무 그림자에 자신의 “다리를 얹”는다. 그러자 “바람은 내 그림자만 떠내어 흔”드는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흔들리는 것은 그림자이지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시인에게 일깨운다는 듯이. 이 일깨움에 따라 시인은 곧이어 ‘봄의 정신’은 “흔들리지 않는 살구나무 가지에” 있다고 선언하듯이 말한다. 모든 꽃이, 아름다움이 다 져버렸지만, 그 빈 가지에는 흔들리지 않는 봄의 정신이 현현하고 있다는 선언. 문학평론가
2023-01-24
그래,나는 벌써 트럭이야짐칸에 실을 게아무 것도 없는단잠에서 깨어나면수정 이슬 털고부릉부릉?새 힘을 내어디까지 가야 할지?알 수 없지만 나는?트럭이지 길을 따라 가다길에서 멈춰 설? 눈 앞에 다가서는?한 줄기 흰 길 (부분)트럭의 삶은 어떠한 삶인가? 정해진 시간에 맞춰 운행되는 기차와는 달리 트럭은 자유롭게 길을 돌아다닐 수 있다. 시인은 자신이 문득 트럭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자신의 “짐칸에 실을 게/아무 것도 없다”는 깨달음, 자신이 트럭처럼 “길을 따라 가다/길에서 멈춰 설” 운명이라는 깨달음이다. 시인은 길 위에서의 삶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내 앞에 다가서는/한 줄기 흰 길”에 서서 새 삶을 출발하려고 한다. 문학평론가
2023-01-19
바다 위에 뜬 달저물어 가는 달이 어둔 밤바다에 머물다 가기를 기다렸다이곳의 지명은 고요한 달이 바다에 떠오르던 기억을 잊지 않는다어느 곳에든 분명 끝은 있다닿을 수 없는 어느 달이 손끝 저만치에서나마 파랗게 흔들렸을 이 세상의 끝에서나는 한 걸음조차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어둠보다 어두운 것을 자꾸 건너다보려고 한다달의 뒤쪽이 밤바다에 비칠 때가 있다고 한다 (부분)시인은 달빛을 기다리고 있는 이곳이 바로 “이 세상의 끝”이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저 바다 너머 저물어가는 달의 마지막 빛을 보고자 하는 욕망이란 “어둠보다 어두운 것을 자꾸 건너다보려고” 하는 것임을 은연중 깨닫는다. 저물고 있는 마음에 담겨 있던 ‘기억’을 되찾는 일이란 저 바다를 둘러싼 어둠보다 더 어두운 것, 즉 이 세계에 빛을 비추는 달의 뒤쪽을 보고자 하는 욕망임을 이 시는 말해주고 있다. 문학평론가
2023-01-18
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그 반동 그대로 앉는다그 사람처럼 흔들린다흔들리는 것의 중심은 흔들림흔들림이야말로 결연한 사유의 진동누군가 먼저 흔들렸으므로만졌던 쇠줄조차 따뜻하다별빛도 흔들리며 곧은 것이다 여기 오는 동안무한대의 굴절과 저항을 견디며그렇게 흔들렸던 세월흔들리며 발열하는 사랑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누군가의 몸이 다시 앉을 그네시인에 따르면, 세상에 대한 ‘곧은’ 저항의 결연함은 흔들림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별빛도 흔들리며 곧은 것”이며 “흔들림이야말로 결연한 사유의 진동”이기에. 그래서 “흔들리는 것의 중심은 흔들림”이어서 흔들림을 통해 흔들림은 번져나가고 그렇게 사랑은 퍼져나간다. “누군가 먼저 흔들렸”을 삶의 체온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그네는, 그렇게 흔들리면서 사랑을 전달하는 매개체이자 매듭이다. 문학평론가
2023-01-17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강물을 보는 순간언제나 제자리를 지키는 물살하루 종일 읽어도 한 페이지도 넘길 수 없었던수만 개의 문장, 수만 개의 기호들이물속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래서 강물에 낚시를 담그고 있다사람의 시간을 버리고 물살의 시간으로 있는분침도 시침도 없는 시계가 좋다물고기의 비늘은 고정된 초침이라는 듯낚아 올린 물고기는 파닥거린다 (부분)시인은 물고기를 낚듯이 세계의 반짝이는 저 문장들과 기호들의 생생한 의미를 낚으려고 한다. 그런데 저 기호들의 반짝임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물살의 시간으로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물살의 시간’은 “분침도 시침도 없”다. 그 물살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물살의 흐름은 흐름 자체로 본다면 제 자리에 있는 것, 그 역설은 ‘사람의 시간’-시계 시간-으로부터 벗어나야 인식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2023-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