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꼬리처럼 신기했지만가만히 보니 사슬 같아서 귀찮았다그러나깊은 산길을 혼자서 헤매다가문득 동행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우주에 오직 하나뿐인 내 별의가장 충실한 위성은, 빛이항상 나와 함께한다는 전언이었다이제 그와 함께아무리 험한 길도 도란도란 가겠다시인은 자기 긍정의 힘을 역설하고 있다. 자신에게 늘 따라 붙는 그림자를 보며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림자는 늘 빛과 함께 하는 것이고, 자신과 함께 늘 그림자가 공존한다는 평범한 이치를 깨닫고 아무리 험난한 생의 길을 가더라도 늘 그림자 같은 동행이 있고 함께하는 것들이 있어 두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생에 대한 긍정과 믿음이 바탕에 깔린 작품이다. 시인
2021-01-07
작은 집 하나 짓는다는 것은큰 산 하나 허무는 일이다도화도 꽃 버린 산비탈 허물고얼어 흐르지 않는 계곡 집채 같은 바윗돌도산 밖으로 밀어내는 일이다풀 향기에 간간이 뒤척이던 나뭇가지들 사이내가 언제쯤이 가난한 망설임을 벗고흔들리는 수없는 집착을 벗고작은 집 하나 이웃 나무처럼 세울 수 있을까내 몸에 긴 칡 줄기 서너 가닥펼쳐갈 수 있을까작은 집 하나 짓는다는 것은내게로 불어오는 바람의 창을 열두 번씩 여닫다가그 창의 문살이 되는 일이다그 문에 칡뿌리로 얽히는 일이다시인은 시업(詩業)을 작은 집 하나 짓는 것으로 비유하며 겸허하게 시업에 정진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음을 본다. 작은 집 하나 짓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른다. 거기에는 성실함과 철저함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리라. 시인은 그런 마음으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일으켜 세우고 열어가는 일이 만만치 않음과 열정과 정성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것을 자신에게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1-06
(….)몸 밖으로 쿡쿡 열매를 밀어내고 옥수수 늙은 수염을 몸빼처럼 펄럭입니다. 그 펄럭임의 대궁 속, 대처를 돌아온 자식이 세월도 바람도 아닌 그 깊은 속을 보고 싶어 까칠한 마디 슬며시 쥐였을 때, 나는 그만 대궁마다 가득한 어둠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상을 차린 어머니가 마당까지 나서 때 잊은 막내를 불렀지만, 나는 이미 어머니 캄캄한 몸속에서, 간간이 늙은 음성이 어머니를 빠져나가 햇살에 머리를 받고 스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한 옥수수 대에 여러 개의 옥수수가 올망졸망 달린 모습은 꼭 어머니가 여러 자식새끼를 둥치둥치 업고 서 있는 고달픈 모습을 떠올린다. 시인은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내고 텅 빈 몸으로 낡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옥수수 대에서 보는 것이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그 사랑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 땅 어머니들의 모습이다. 거룩한 본능이 아닐 수 없다. 시인
2021-01-05
그 한때산에서는 새소리들에서는 바람 소리를 내던감은사(感恩寺) 대종천둥 번개 치던 어느 날몽고군의 노략질에 몸부림치다가대왕암 부근에서 빠져 죽었다는그래서 물결이 일렁이면은은하게 울린다는그 이야기만 살아서 피가 돌고 (….)경주의 토함산과 함월산 자락을 적시고 감은사 아래로 흐르는 대종천에는 시인의 말처럼 대종에 대한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왜구들이 대종을 왜국으로 옮기다가 문무왕릉(대왕암) 주변 바다에 빠뜨렸는데 천년이 지난 지금도 비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심하게 치는 밤이면 바닷가 마을의 사람들은 바다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시인의 깊은 시안(詩眼)은 천년이 지난 지금도 바람 속에서 대종천의 그 종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
2021-01-04
꾹꾹 눌러담은 된장을 싼다붉은 감잎에 장아찌를 싼다방금 짜온 참기름과멍석에 널어놓은 마른고추도 쓸어 담는다투둑 모과 떨어지는 소리담 너머 콩꼬투리 터지는 소리평상에 앉아 노는 햇살이며발치에서 낑낑대는 강아지 눈빛이며배 밭에 까치 소리도 담는다열어 놓은 현관문 앞에서늙은 보자기엔 싸놓은 것도 많은데펼쳐놓은 가슴을 닫지 않는다가을처럼 저무는 나를 담고놓아 주지 않는 어머니모든 것을 다 줘도 아깝지 않은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을 읽을 수 있는 사모곡이다. 된장이며 장아찌며 방금 짜온 참기름이며 고추까지 보자기에 담는 어머니는 고향마을의 햇살이며 바람이며 하늘까지 한가득 넣어 정성껏 싸주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보자기에 소복한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이다. 시인
2021-01-03
절박한 슬픔을몰아내기 위한 처방전을 들고등대로 간다무표정한 얼굴을 풀고따뜻한 웃음으로 맞아준다때로는 경건하게 때로는 자상하게등대는 처방전에 맞게약을 지어준다약봉지를 건네주면서 한 마디 한다이 약은 평안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 준다고희망의 약은 있는 걸까. 시인은 절박한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희망의 약을 갈구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은 비바람 거센 물결을 맞으며 꿋꿋이 서 있는 등대에서 그 희망의 약을 발견한다. 캄캄한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에게 깜박이는 등대불은 안전한 데로 인도해주는 희망의 빛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늘 변함없이 희망의 빛을 쏘는 등대불이야말로 희망의 약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12-30
주물 끼얹은 듯불타오르는 단풍들너희는 죽음에 이르는 고빗사위에가을 호랑이를 빚어내려는가잘게 썬 빛깔과 짙은 어둠을 우려낸단풍들이 포효하려는가익돌근이 만들어 놓은 큰 입처럼발갛게 타는 노을, 불씨 한 줌 넣어 반죽하려는가몸을 옴나위할 수가 없다널룽널룽 벗어버린 호랑이 가죽이 땅에군데군데 늘어져 있다붉게 타오르는 단풍을 보며 ‘단풍들의 포효’라고 표현하며 놀랍게도 호랑이를 읽어내는 시인의 상상력이 이채롭다. 동물과 식물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상투적인 틀을 파괴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은 시공을 초월하고 자유로운 교감과 사고를 확장시켜나가며 붉게 타오르는 가을의 정취를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시적 에너지가 충만한 시인을 본다. 시인
2020-12-29
고운사 가는 길산철쭉 만발한 벼랑 끝을외나무다리 하나 건너간다수정할 수 없는직선이다너무 단호하여 나를 꿰뚫었던 길이 먼 곳까지꼿꼿이 물러나와물 불어 계곡 험한 날더 먼 곳으로 사람을 건네주고 있다잡 숲에 긁힌 한 인생을엎드려 받아주고 있다문득, 발밑의 격랑을 보면두려움 없는 삶도스스로 떨지 않는 직선도 없었던 것 같다오늘 아침에도 누군가 이 길을부들부들 떨면서 지나갔던 거다고운사 가는 길 외나무다리, 그 흔들리는 직선 위를 걸으며 시인은 직선의 단호함이랄까 엄혹함보다는 흔들리는 직선 위를 떨면서 걷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본다. 다리를 건너는 인간의 떨림과 흔들림을 온몸으로 받으며 잡목숲에 긁힌 인생들을 함께 흔들리며 떠는 직선의 외나무다리처럼 자기의 책임을 다하며 생을 건너가야 한다는 교훈 하나를 가만히 들려주는 것이다. 시인
2020-12-28
밤새 여우비가 다녀갔나 봐요은빛 물방울 세상이네요초록 바람이 살랑살랑 아침을 흔들어요자욱한 푸른 향기가 번지네요윗집 아이 쿵쿵 두 계단씩 오르고경비 아저씨 싱긋 웃는 눈가에포로롱 분홍 나비가 날아가네밤사이 잠깐 내린 여우비가 은빛 물방울 세상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매우 인상적이다. 생명감 가득 품고 열리는 아침을 묘사하는 시인의 눈빛이 참 맑고 환하다. 위층 아이의 쿵쿵거리며 뛰는 소리도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의 미소도, 포로롱 나는 분홍 나비처럼 평화로운 봄 천지를 열어가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12-27
어느새 뒷동산이 슬슬 걸어 내려와내 안으로 힘껏 쳐들어온다솔향기가 솔솔 진동한다참나무가 참되게 살라고 속삭인다어릴적 동무들의 이름을목메어 불러 본다야호야호 메아리가 귀청을 때린다(….)동무 동무 씨동무 보리가 나도록 씨동무초승달도 슬금슬금 눈물 흘린다시인은 이 땅의 참교육 실현을 위해 애쓰다가 교육현장에서 쫓겨난 전교조 해임교사다. 이 시는 교육현장에서 쫓겨나 낙향해 고향산천을 돌아보며 유년의 시간을 가슴 뜨겁게 불러내고 있음을 본다. 참되게 살아가라고 일러주던 참나무를 바라보며, 어린 시절 정겨웠던 친구들은 모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초승달을 바라보며, 참되고 올바른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다시 해보는 시인의 뜨거운 가슴을 본다. 시인
2020-12-23
먼바다를 보러 산엘 올랐는데산 아래 낮은 몸들이 어두워지고 있었다길고 낮게 뱃고동이 울었다그 울음에 이끌린 커다란 배 한 척이쭈글쭈글한 바다 속으로 들었다천천히 뱃고동이 한 번 더 울었다길고 낮은음을 가진 것들은 저토록 애달프게 울었다움푹한 배를 안고쭈글쭈글 터진 살갗을 안고목욕탕에서 내게 등을 내어주던어머니도 그렇게 한 번 우셨다아궁이 생솔가지 분질러 넣으며타닥타닥 생솔 타는 연기 속 그렁그렁 앉아어머니를 부르며 어두워지는 마당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낮게 낮게 우셨다딸애의 잠든 머리맡에서어둑한 낮은 소리로 밥 먹자, 밥 먹자 흔들어 깨우며 울었던어떤 날의 기억은 지독한 물비린내가 난다어두워지는 저녁, 아득하게 핀물비린내 속에서 혼자 낮게 울었다시인은 먼바다를 보러 산에 오르고 애달프게 우는 뱃고동 소리를 듣고 생을 생각했던 청춘의 시간을 들려주고 있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낮게 들리던 어머니의 울음을 가만히 들려주고 있다. 어머니의 등을 밀어주며 평생을 생솔 타는 연기 속 같은 힘들었던 간난의 삶을 운명이라 여기고 살아온 어머니의 한 생을, 그 낮게 낮게 울었던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시인의 붉은 눈시울을 본다. 시인
2020-12-22
마지막으로 패스워드를 입력하고주소에 엔터키를 치면모니터에 떠오르는 또 하나의 공간그 공간에도 비는 오는지빗속의 너는 자꾸만 멀리 달아나는데가냘픈 코드를 붙잡고덧없이 서핑을 반복한다세상은 거대한 월드 와이드 웹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서로 보이지 않는 올가미를 씌우며인연을 확인한다오늘의 검색 항목은 사랑자꾸만 자꾸만 달아나는 너를 좇아윈도우를 열어보지만결코 들어갈 수 없는 너의 빈사이버 공간현대사회의 비대면 사이버 공간에서 이뤄지는 익명성, 단절과 소외의 특성을 야유하고 고발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가상의 공간에서의 사랑의 허상과 공허함을 언급하며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비현실적인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시인정신을 읽을 수 있다. 시인
2020-12-21
갈색 가을 나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제 발등을 수북이 덮고 있는 가을 잎들을 본다. 한때는 천상(天上)을 향해 푸르게 치솟았던 젊음들, 또 한때는 뜨거운 태양빛을 향해 시리게 몸 뒤척였을 영혼, 그러나 이제는 너른 생각의 잎사귀가 되어 제 어미의 발등을 조용히 덮는다때로는 시련과 장애물이 앞에 놓여 있었지만 그것을 다 견디고 이겨내고 이제는 노년의 시간을 맞아 자신을 길러준 나무의 뿌리를 덮으며 자연으로 돌아가는 낙엽처럼 생의 마무리를 잘 준비하고 마련해가겠다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시인
2020-12-20
사월이 되면어김없이 편지가 옵니다분홍빛 고운 봉투그분이 보낸 편지입니다가슴이 설렙니다절절한 고백연둣빛 향기 빼곡합니다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붉디붉은 종소리가 들립니다짙붉은 피의 향기내 여린 영혼을 적십니다그분이 보낸 사월의 편지에는고통과 환희가 소복합니다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봅니다나를 향한 고요한 목소리영혼 깊숙이 스며듭니다나는 아직그분께 답장을 보내지 못했습니다조금만 더 조금만 더기다려 주십시오기도할 뿐입니다분홍빛 고운 봉투 속에 들어 있는 연둣빛 사월의 편지는 누가 보낸 것일까. 시인은 그가 신앙하고 있는 절대자가 보낸 고난의 핏빛 편지라고 고백하고 있다. 엄청난 수난을 감내하고 인류를 위해 끝내 죽임을 당하고 부활한 그분이 보낸 핏빛 편지다. 그래서 시인은 그 편지 속에는 고통과 환희가 소복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12-17
집이 우리를 떠나면 빈집이 된다우리가 집을 떠날 때도 빈집이 된다우리는 자주 떠나가려 하고떠나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한다그래서 집은 아직 빈집으로 있는데그래도 그리움이 조금은 남아 있다그러니 빈집은 완전 빈집 아니다그 속에는 아직 옛날 화려함이 남아있고빈방마다 그때의 화려한 꿈들이 들어 있어빈집은 결코 빈집만은 아니다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살고지붕 위에도 아직 참새들이 살고 있다그 옛날을 노래하며 집을 지키는데그래서 빈집은 아주 빈집이 아닌데도집은 지금 빈집으로 남아 있고하늘에는 빈 하늘만 남아있다경주의 원로 서정시인 정민호의 무욕과 달관의 정신이 스며 있는 시다. 한 때는 오순도순 사람들이 살았지만 그들이 떠난 집은 텅 비어 외롭고 쓸쓸하기 짝이 없지만, 시인의 눈에는 그 빈집이 빈집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직 삶의 화려한 흔적들과 꿈이 서려 있고, 잡초도 참새들도 그 집에 와서 살고 있으며 지붕 위에는 빈 하늘이 빈집과 하늘과 함께 살고 있다고 말하는 시인의 그윽하고 넉넉한, 따스하고 다감한 인간미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
2020-12-16
바람으로 스쳐 지났던 너꽃으로 만날 수 있길 기도했지그리운 무늬 지우며붉은 눈시울 강 휘어 돌 때에아린 심장 다독이며기억 저편 모퉁이에 묻어 두었지아슴히 접어둔 종이학오래된 서랍 속 빛을 삼킨청춘의 시간들밝은 이슬 홀로 핀 새벽은천 년의 해후를 꿈꾸었지문득 다가온 하늘구름 속으로 숨어든 연분홍 추억발갛게 익어버린 속살이눈물처럼 번지는 노을지는 저녁설레임,그 대책 없는 흔들림불갑산 상사화불꽃처럼 일렁이네상사화는 꽃과 잎이 서로 만날 수 없는 운명적 슬픔을 안고 피는 꽃이다. 시인은 이런 비화의 애련을 추억 속에 끼워넣으며 청춘의 시간을 꺼내 호명하며 아쉬움과 그리움의 정서를 얽어내고 있음을 본다. 눈물처럼 번지는 노을 저녁, 바람처럼 가버린 사람들, 인연들…. 그 아쉬움이 차곡하게 담겨 있는 오래된 서랍을 가만히 열어보는 것이다. 시인
2020-12-15
제 스스로 무너질 수 없다고꼿꼿이 직립해 있던저 마른 꽃대, 철컥자신을 가둔 녹슨 경계 오늘에야 허물었다동거인 김 노인도 젓깃불도 나가버린조등(弔燈) 없는 그 방에서열일곱 살 나풀거리며태평양 전쟁 해협으로 행방불명된 처녀출렁거리던 생의 비린내그 위병소 문짝에 날마다 목 매어도살아남아야 했던한 마리 새가 되어 비상해 본다제 청춘마저 낮설어 완강히 덫이 된 땅면사무소 호적계에출생신고 할 자식 하나 남길 수 없었던 여자오늘 처음으로 입술 연지 길게 바르고훨훨 종이꽃 되어 승천하였으리분명 이 땅의 호적 어딘가에 꼭 있을 것 같은일제 식민치하에서 강제로 끌려가 종군 위안부로 희생당하며 질곡의 생을 살다가 돌아가신 어느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전쟁의 비인간성과 제국주의 폭력을 고발하고 가슴 아픈 역사의 소용돌이를 아파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12-14
필자와 같은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김왕노 시인은 심성이 착하고 의지가 굳은 아이였다. 평생 기계처럼 일하며 살아온 어머니, 이제는 나이 들어 풀밭에 버려진 쓸쓸한 기계처럼 늙고 병든 어머니의 한 생을 연민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쓸쓸한 기계, 이 땅의 어머니들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의 모습이 아닐까. 그 쓸쓸한 기계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싶은 아침이다. 시인어머니 시간의 풀밭에 버려져 있다. 어둠이 와도 작동되지 않는 어머니, 엔진이 올라붙은 어머니, 풀에 가려 보일까 말까 한 어머니, 아무도 찾지 않는 어머니, 풀이 서걱거릴 때마다 기억의 뿌리가 흔들려, 살아온 날이 주마등 같이 지나간다는 어머니, 어머니 시간의 풀밭에 버려져 있다. 대량 생산의 틈바구니에서 과열되던, 과부하가 걸렸던 어머니, 노을이 밀려들면 한창때 만들어낸 눈물이며 사랑이며 노래가 그립다며, 어머니 저기 버려져 있다. 모타가 타버려 수리되지 않는 어머니, 한낮이 머물다간 자리가 벌건 녹으로 번진다는 어머니, 기름칠 제대로 되지 않는 어머니, 어머니 저기 혼자 버려져 있다.
2020-12-13
바람이 불고 부스럭거리며 책장이 넘어간다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을 노려보던 눈동자가터진다. 검은 눈물이 속눈썹을 적신다그는 빠르게 진행되는 바람의 독서를 막는다손가락 끝으로 겨우 책장 하나를 잡아 누르며보이지 않는 종이의 피부를 더듬는다그곳은 활자들의 숲, 썩은 나무의 뼈가 만져진다짐승들의 배설물이 냄새를 피워 올린다책장을 찢어 그는 입 안에 구겨넣고 종이의 맛을 본다송곳니에 찍힌 씨앗들이 툭툭 터져나간다흐물흐물한 종이를 목젖 너머로 넘기고 나서그는 이빨 틈 속에 갇힌 활자들의 가시를 솎아낸다검은 눈물이 입가로 흘러든다. 재빨리그는 다음 페이지를 찢어 눈물을 빨아들인 다음다시 입 속에 넣고 느릿느릿 씹는다입술을 오므려 송곳니를 뱉어낸다그의 이빨은 초식동물처럼 평평해진다다음 페이지를 찢어 사내는 송곳니를 싸서 먹는다검은 눈물이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다텅 빈 눈동자 속에 활자들이 조금씩 채워진다시인은 초식이라는 알레고리를 활용해 우리의 독서에 대해 깊이 파고들고 있음을 본다. 바람에 책장 넘어가듯 하는 겉 핥기 식의 독서를 경계하고, 철저하게 파고들고 탐색하고 음미하고 소화하는 초식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독서행위의 방향과 길을 제시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20-12-10
내 귀를 흔드는 것은바람이 아니다바람의 살갗 바람의 발가벗은알몸이 아니다내 귀를 흔드는 것은 얼마나 걸었을까발가락을 짓누르는 아프디 아픈티눈,티눈 속에 박힌 더 작고더 아픈 티눈,내 귀를 흔드는 것은지금도 가고 있는 그 발자국,평생을 이미지를 통한 존재론적 인식의 세계를 시로 표현해온 시인이 발바닥에 스며들어 깊이 뿌리박은 티눈을 모티브로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작품이다. 평생 자신을 흔들었던 것은 가파른 이념이나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티눈 같은 사소한 것들이었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겸허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