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 하나였는데어쩌면 저렇게선을 그을까냇가 얕은 물이 먼저얼어붙으면곁을 스치는 물에상처를 낸다소스라쳐 놀란 물들이 함께얼어 붙는다얼음은 점점 깊고 넓어지고중심은 아프면서 흐른다피를 흘리면서마음을 졸이면서그래도 생명을 키우기 위해더 깊이 흐른다언젠가 얼음이쩡쩡 큰 울음 울며 깨어질 때자신을 버리며 안겨 올그때에도물은 말없이 흐른다어깨 토닥이며하나 되어 흐른다물과 얼음의 원형질은 같다. 물의 분신이 얼음이다. 그런데 시인은 얼음이 물에 상처를 입히고 물은 얼음 아래서 상처를 받으며 흐름을 이어간다는 말을 하며 인간 세상의 관계에 대해 생각게 하고 있다. 파생된 현상이 본질을 뻔하게 하거나 꺾을 수 없다. 본질은 어떤 외적인 영향에도 변하고 않고 꿋꿋이 존재의 속성과 원형을 간직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시인
2020-11-10
(….)그는 하얗게 질려 방바닥에 쓰러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창밖은 캄캄하고 하늘엔 붉은 별들이 둥둥 떠다닌다 그는 간신히 일어나 통에 담긴 알약을 씹으며 집안의 창문들을 잠그기 시작한다 화장실과 목욕탕 사이의 창문과 거실 구석의 창문도 모두 잠근다 방으로 돌아와 커튼을 열어본다 창고 옆에는 빈 의자만 남아 있다방바닥에 누워 이불을 덮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마당을 바라보니 창고 옆 나무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는 현기증을 느끼며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조심스레 잠을 청하지만 천장에 붙어 있는 시퍼런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그의 두 눈을 내려다본다타자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한 애씀이 시 전체에서 느껴진다. 타자의 간섭이나 통제, 침입은 자신을 억누르고, 뺏어가 버린다고 느낀 시인은 집안의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잠그고 방바닥에 눕지만, 천장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눈이 있음을 느끼고 공포는 극에 달하고 있다. 타자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시인의 몸부림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20-11-09
소리 내지 말고눈물 흘리지 말고한 사흘만 설산처럼 눕고 싶다걸어온 길돌아보지 말고걸어갈 길생각할 것도 없이무릎 꿇을 것도 없이흰 옷 입고 흰 눈썹으로이렇게 가도 되는 거냐고이대로 숨 쉬어도 되는 거냐고이렇게 사랑해도 되는 거냐고물을 것도 없이눈빛 속에 나를 널어두고 싶다한 사흘만설산이 되고 싶다하얗게 눈덮힌 설산은 인간들의 더럽고 불순함이 섞여들지 않은 고요하고 청정한 평화 공간이다. 사느라고 아옹다옹 거리며 더럽혀진 심신을 설산에 들어 훌훌 벗어버리고 진정한 정화와 힐링을 누리고 싶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때묻지 않는 깨끗한 무욕의 세계를 열망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11-08
그때 아버지의 말은누구보다 우리 집 형편을 잘 알아서과로에 몸살 난 몸으로도 억척으로 일했다새벽길 나서던 아버지 시름 떨치는 콧노래에도긴 말총, 엉덩이 실룩 잘도 장단 맞추며마차가 삐걱거리도록 과적을 하여도묵묵히 투정하나 없이 넘던 고개새벽녘 별빛과말의 눈매와 아버지의 눈시울은서글서글하니 한 식구처럼 닮아서아버지 재촉하던 말발굽 자국이화인(火印)처럼 날아와 박혔다아버지 몸살이라도 날라 치거나엄살이라도 앓아누우면어머니 대리 마부가 되어 새벽 마차를 몰았다한 때 필자와 포항 지역문학운동에 함께한 적이 있는 시인은 진솔하고 참된 사람이다. 시인의 어린 시절 아버지는 마부(馬夫)였다. 아버지의 말은 날랜 말이 아니라 짐을 실어나르는 말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주인에게 묵묵히 순종 순응하며 살아온 말은 아버지의 가난하고 궁핍했던 한 생과 함께한 부지런한 말이었다. 어쩌면 아버지도 말이었는지 모른다. 가족이라는 짐을 등에 지고 묵묵히 생의 길을 걸어간 말이었는지 모른다는 시인의 인식 속에 이 땅의 아버지들을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시인
2020-11-05
뱀이여, 네가 원죄로 철철 우는 붉은 밤네 울음을 채찍으로 들고 나를 후려쳐라온몸에 감기며 벌겋게 남겨 주는 살점 묻어난뱀 무늬로 원죄로 우는 너만큼 나도내 죄를 울며불며 붉은 밤을 건너고 싶다걸어온 날을 뒤돌아보면원죄로 우는 것보다 더 울어야 하는더 아파해야 하는 나인 것을울음의 채찍으로 피 걸레가 될 때까지끝없이 나를 내려쳐라, 참혹에 거림없이 이르게지금은 붉은 밤의 시간, 원죄로 울기 좋은 밤너만 울고 나는 울지 못하는 밤이어서너만 아프고 내가 아프지 않은 것이더 살 떨리고 뼈저린 일이기에 뱀이여울음의 거대한 채찍을 쇠사슬처럼 들고서 쳐라휘청거리다 맥없이 내가 쿵 넘어지게끝없이 후려쳐라, 사정없이 후려쳐라, 뱀이여원죄로 철철 우는 붉은 밤은 인간 실존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원죄 때문에 울부짖는 뱀처럼 살아오면서 지은 죄를 크게 뉘우치며 울고 싶다는 시인 성찰의 목소리를 듣는다. 지나온 삶의 과정이 모두 죄였다고 고백하며 우는 울음이야말로 시인의 생에 대한 깊은 반성과 관조의 자세가 아닐까. 시인
2020-11-04
사포강 지나 죽천 솔밭엔새벽 5시면 문을 여는 텃밭 마트가 있다추수감사절 장 보러어머니와 함께 마트로 간다오늘은 조금 늦게 문을 열었지만청경채와 무, 배추는 신선하다마트로 바뀌는 텃밭이 마트의 신개념 마케팅은바리바리 담아 주는 마음텃밭 마트로 오세요감사하는 마음만 가지고 오세요무엇을 사든 값은 지불되었으니까요삽시간에 몰리는 봉다리들감사 편지들이 싱싱하게 딸려온다사포강은 포항 양덕지역의 신도시 형성으로 지워져 버린, 죽천 솔밭을 지나 영일만으로 흘러드는 작은 하천이었다. 죽천이 고향인 시인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사포강가 솔숲 언저리 텃밭에서 신선한 푸성귀를 키웠던 행복했던 시간을 들려주고 있다. 필자는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의 착하고 정직한 성품과 텃밭은 참 닮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풋풋하고 신선한 채소를 거두며 감사하는 맑은 물기 어린 깨끗한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
2020-11-03
만전춘별사 속 연인들이삼동 꽁꽁 언 얼음 위에댓잎자리 깔고 누워도‘이 밤 더디 새오시라’는수사 하나 없어도 노래가 되는당신께 드리는통음(通音)고려속요인 만전춘별사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중의 하나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고려가요는 몇 편이 안되는데 그 중에서 남녀의 사랑을 제재로 하는 작품들이 네 편 정도 있다. 그 작품들은 당시의 노골적인 성문화를 짐작케 하는 노래이다. 시인은 이러한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고려속요를 들어 왜곡되고 비뚤어진 현대사회의 성문화를 야유하고 비판하며,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을 옹호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시인
2020-11-02
길게 늘어선 차들 사이에서 점점 느려지던 버스가아예 멈춰버리자의자에 조용히 붙어 있던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의자는 자꾸 엉덩이를 들었다 놓고손가락들은 목과 뒷덜미를 긁고모가지들은 아무리 기웃거려도 움직일 생각 없는 창밖을연신 두리번거린다꿈쩍도 하지 않는 버스를 움직여보려는 듯발들이 동동 구른다땅바닥에 굳게 붙박인 나무와 건물이계속 달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이 모든 게 핸드폰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입들은 핸드폰에게 야단을 치고 짜증을 퍼붓는다속도의 단맛에 중독된 유리창이수전증처럼 덜덜 떤다엔진은 곧 폭발할 듯 으르렁거리지만근질근질한 바퀴는 터질 듯한 공기를 꾹 누르고 있다고장 난 버스 속에서 벌어지는 재미난 풍경 하나를 본다. 시인은 현대인들의 중독에 대한 금단증상을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속도에 중독된 인간의 움직임이란 결국 무정물인 버스라는 기계의 움직임과 같아졌다는 것을 풍자하고 있음을 본다. 시간을 주체적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시간의 노예로 전락해 버린 현대인들의 서글픈 초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인
2020-11-01
꽃잎에 송알송알 맺혀 꽃말에 귀 기울이는 물방울풀잎 위 고요히 안착하여 스스로를 빛내는 영롱한 물방울스며들거나 깐깐오월 돋은 별이면 증발할 것만 같은, 번지거나 명지바람이면 합쳐서 흘러내릴 것만 같은 한순간, 순간!이윽고는 얽박고석 위 얼룩으로 남는 물. 방. 울.꽃잎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며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이 품은 생명감을 예찬하는 동시이다. 시인의 발상이 발랄하고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다. 아무 사심 없이 자연현상을 바라보는 어린아이 같은 순진하고 깨끗한 시심을 펼쳐보이고 있다. 시인
2020-10-29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나는 나의 가장 가난했던미소 속으로 사라진다어느 목마른 저녁거리에서내가 늘 마시던 물은내 눈물까지 데리고 땅속으로 사라지고날마다 내 가슴속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새는부러진 내 날개를 데리고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이제는 쓸쓸한 저녁 바닷가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수평선과 함께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의 모든 꿈조차꿈속으로 사라져캄캄한 서울종로 피맛골 한 모퉁이취객들의 밤의 발자국에 깊이 어린별빛들만 사라지지 않고 홀연히술에 취한다가난과 결핍으로 삶이 힘겹고 어려웠지만 인간다움을 잊지 않은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본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움 속에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서글픈 현실을 반성하며 가난 속에서도 작은 희망을 잃지 않은 지난 시간을 옹호하고 있는 시인의 따스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10-28
(….)하나님은 얼마나 무서웠을까하나님이 키운 그 나무 그 열매 다 따 먹은저 여자가 두 다리 사이에서붉은 몸뚱이 하나씩잘라내게 되었을 때아침마다 벌어지는 저 하늘 저 상처저 구름의 뚱뚱한 붉은 두 다리 사이에서빨간 머리 하나가 오려지고 있을 때( 저 피가 내 안에 사는지 )( 내가 저 피 속에 사는지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저 여자뜨거운 몸으로 서늘한 그림자 찢으며걸어가는 저 여자저 여자의 몸속 눈창고처럼 하얀 겨울 속에는끈적끈적하고 느리게 찰싹거리는 붉은 피의 파도물고기를 가득 담은 아침바다처럼새 아가들 가득 헤엄치네산부인과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상상력을 가미해서 보여주고 있다. 산모와 신생아와 산모의 늙은 어머니, 아이를 낳는 모성의 다리를 가위로 표현하고 출산의 행위를 가위로 무엇을 오리는 것으로 표현하는 시인의 상상력이 이채롭다. 가위로 탯줄을 자른다는 것은 새로운 생성과 단절을 의미한다. 즉 새 생명의 탄생과 산모의 오랜 고통을 단절시킨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10-27
엄마의 입안엔 누구도 드나들 수 없는 동굴이 있다어느 날 수저질 느슨한 엄마고기를 씹지 못하신다고름 뿌리로 남은 이, 하나 둘 셋.빛도 바람도 없이 습기만 눅눅한십수 년 불 들이지 않은 검은 아궁이그 깊은 자궁을 들여다본다청상 시절 중심이 흔들린 때 있었다털어놓으시던 엄마차암 의젓한 이였는데, 차마 니들을 두고 갈 수 없어서…풀이 자랄 수 없는 동굴허나 칠 남매는 엄마의 살을 뜯어 먹고 자란육식동물이었으니내일 당장 죽더라도 오늘 맛나게 드시고 가시요!나의 완력에 썩은 뿌리 뽑아낸 엄마비로소 곤한 잠에 드신다내가 발견한 동굴은 고작 세 개뿐몸 어딘가 숨겨놓은 동굴이 또 있는지 나는 모른다시인은 굴곡진 한 생을 살아온 어머니에게는 숨어 있는 동굴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동굴은 어머니의 여성성이 내재된 곳이다. 누구도 들어가 볼 수 없는 어머니의 정체성이 숨겨져 있는 곳이다. 시인은 7남매를 낳고 이제는 늙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어머니의 한 생을 기리는 것이다. 시인
2020-10-26
하늘에 잠자리가 사라졌다빈손이다하루를 만지작만지작 하였다두 눈을 살며시 또 떠 보았다빈손이로다완고한 비석 옆을 지나가보았다무른 나는 금강(金剛)이라는 말을 모른다그맘때가 올 것이다.잠자리가 하늘에서 사라지듯그맘때에는 나도 이곳서 사르르 풀려날 것이니어디로 갔을까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여름 우레를 따라갔을까후두둑 후두둑 풀잎에 내려앉던 그들은하늘에서 잠자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존재는 때가 되면 존재를 지운다. 이 시에서 나와 잠자리는 동일시 돼 있음을 본다. 잠자리의 행방이 묘연한 것처럼 나도 언젠가 바람처럼 사라져 어디론가 지워져 갈 것을 말하며 불교의 ‘금강’이나 ‘비석’처럼 경고하고 강인한 존재에 대비시켜 ‘무른 나’라고 말하며 인간의 나약함과 유한하고 순간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20-10-25
성모 마리아가 낳은 건머리에 꽃단 썩지 않는 해골내가 낳은 건24시간 군불 지피는 아궁이둘은 썩 잘 어울린다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예수와두레박을 타고 올라가는 인간누가 서로를 못박았을까예수는 고통받는 지상으로 내려오고, 나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대립시키면서 시인은 신성과 세속의 경계를 근접시키려는 의도를 내보이고 있다. 제도적인 억눌림에 묶여 있는 여성성의 해방을 위한 단호한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10-22
더 저질러야 할 과오가내 안에 무수히 자라고 있다감히 말하거니와 나는울음과 남루와 공복이 적자(嫡子)요부재와 열등과 눈물의 제자였다너무 오래 상실을 살았고풍문으로 세계의 운명에개입해왔다. 세상에 대한 모든혐오는 왜 그처럼 단단한가밤이면 부쩍이 오래된 혐오를 할퀴고 싶다시인은 밤이면 왜 손톱을 깎는다고 할까. 손톱은 여성들의 의식 속에 자라나는 저항의 도구이면서 자의식의 상징이기 때문이리라. 손톱은 자칫 공격적이고 불온하거나 위험한 매체로 인식되기 때문에 그런 인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톱을 깎는 것은 아닐까.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억압과 강요에 대한 거부의 표현으로 손톱을 인식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의 여성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성찰의 시정신이 잘 표출된 작품이다. 시인
2020-10-21
(….)보여 주기보다묵묵히 그 배경이 되어주는 것들아름답게 사는 길은보이는 듯 보이지 않게 사는 것이리라가장 쓸쓸하게 배경이 되는저 이름 없는 꽃들처럼세상에는 그런 별들도 있다이 밤, 그 배경이 되어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시인의 말처럼 이름 없는 꽃들이 세상의 배경으로 피어나는 것처럼 자신의 존재를 남에게 드러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동행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는 외로움과 소외감이 어찌 없겠는가. 시인의 시선은 그 쓸쓸함이나 외로움이 더 빛나는 것이라 여기며 거기에 마음이 가 있음을 본다. 시인
2020-10-20
저녁 밥상을 물린 뒤, 우리는 고요해졌다 형은 바닥에 눕고 누나는 벽에 기대었다 어머니는 다림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간장 간을 맞출 때는 생 계란을 띄워보면 안단다 가라앉으면 싱겁다는 거고 계란이 떠서 꼭 백 원짜리 동전만큼 뵈면…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천천히 생 계란처럼 떠오르는 시간이었다 개들마저 낯선 사람의 발소리에도 짖지 않았다 해가 하루하루 더 짧아지는구나 싸락눈 내리는 소리가 뒤란에서 들려왔다 누나는 이불을 당겨 발을 덮었다 밥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나는 입이 심심했다 문밖으로 어둠이 혼자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늦가을 저녁상을 물린 식구들은 저녁의 평온하고 고요함에 젖어 아무도 말이 없다. 어머니의 말씀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지만, 가족들은 어머니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이리라. 안온하고 따스한 가을 저녁, 식구들 사이에 흐르는 말 없는 평화와 가족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따스하게 스미는 것을 시인은 잔잔하고 정겨운 필치로 읽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10-19
죽은 금붕어는 어항 물 위에 뜨고금붕어의 영혼은 죽은 금붕어의 머리 위에머문다. 식목일에 씨앗을 뿌린채송화와 봉숭아는 새싹으로 돋아나고우리는 정원으로 꽃구경하러 간다어린 딸은 죽은 금붕어를 병원으로데리고 가자며 보채고, 나와 아내는아들과 함께 패랭이꽃에나비가 잠시 머물다가 날아가는모습을 보고 있다소박한 가정의 일화를 소개하며 봄날의 따사로움 만큼 훈훈한 사람 사는 얘기를 들려주고 있다. 죽은 금붕어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아이와 정원으로 꽃을 보러 가야 한다는 자신의 모습 속에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마음과 따스한 봄날을 가슴 가득 담아내려는 시인의 모습이 그림처럼 곱고 따스하게 그려진 그림 같은 작품이다. 시인
2020-10-18
정작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눈 밝고, 귀가 예민하던 그때는 너무 젊어서보는 것마다 모두 또렷한 사실로듣는 소리마다 명증한 진실로 받아들이기에급급했다눈이 침침해지고 귀는 점점 어두워지고 나서야비로소 세상 생각을 조금 하게 되었다살며 겪은 세월이라고는 하지만잘 보이지 않고 잘 들리지 않으니까이리저리 더듬으며 앞뒤를 가리게 되었고,더 귀를 기울여 무슨 소리인지 헤아려야 했다그런데도 아직 보고 듣는 어느 것 하나온전한 분별에 이르지 못한 채고작 남은 기억에나 기대어서겨우 하나에 하나를 견주고 있으니,얼마나 둔하고 어리석은가?이제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말하기조차부끄럽고, 또 부끄럽다청춘의 시간은 귀와 눈이 밝아 예민하게 반응하며 자신감도 있었고, 어떤 일을 결행하는 일에도 속도와 힘이 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나이 들어 감각이 예전 같지 않음을 부끄럽고 부끄럽다고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진솔하고 겸허하다. 세월에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한 생을 돌아보며 성찰하고 반성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10-15
하루를 찍어낸다조각칼이 지나간 곳에 산이 솟는다칼끝이 지날 때마다 길이 생기고사람이 태어나고 꽃이 핀다내가 원하는 건아직 귀가하지 않은 누군가의불 꺼진 창문을 돋을새김하는 것찢어질 듯 얇은 달빛 한 겹 스며든 지상하얗게 떠오른다강가의 물억새가 바람 부는 쪽으로 쓰러진다목판 위에 올려놓은 하루 한 장먹물과 먹물 사이에서 불빛이 새어나온다아주 조금 희미해져 있거나몰래 흠집을 가지고 있는하루, 온통 칼자국 투성이다깊게 패인 곳이 더 선명하다온종일 조각칼로 산, 길, 사람, 꽃을 새겨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고 있음을 본다. 목판화를 하며 느낀 것들을 서정적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제목인 ‘모노타이프’는 단 한 장의 종이에만 판화를 찍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귀가하지 않은 외로운 누군가의 저녁을 위해 따뜻한 배려와 사랑이 스민 칼끝, 따스한 시인의 눈빛을 본다. 시인
2020-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