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는 달리면서 비워지고 광활한 하늘에서 어두운 얼굴들이 다가온다코민테른 자금을 싣고 모스크바에서 베르흐네우딘스크까지 금괴상자 위에서 교대로 잠들던 한형권, 박진순, 상해로 자금을 운송하고 고륜으로 되돌아와 잠깐 북경에 다녀온다는 말 한 마디 흘리고 고비 넘어 고비, 모래와 흙먼지 속으로 쫓겨 가다 백당에 잡힌 이태준, 그 뒤에 그림자 같이 붙어 있는 마자알, 이태준이 죽어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북경 성내 술집을 드나들며 의열단을 찾아 헤맨 마자알, 그대에게 의열단은 무엇이었는가.시인은 황량한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달리며 가슴 아픈 일화를 떠올리고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혈혈단신으로 이국땅을 떠돌아다닌 그들의 헌신과 순국의 애사를 담담히 얘기하고 있다. 광복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못한 애국지사들의 외로운 넋을 기리고 위로하는 시인의 절절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10-13
꾹꾹 눌러 담은 된장을 싼다붉은 감잎에 장아찌를 싼다방금 짜온 참기름과멍석에 널어놓은 마른 고추도 쓸어 담는다투 둑 모과 떨어지는 소리담 너머 콩꼬투리 터지는 소리평상에 앉아 노는 햇살이며발치에서 낑낑대는 강아지 눈빛이며배 밭에 까치 소리도 담는다열어 놓은 현관문 앞에서늙은 보자기엔 싸놓은 것도 많은데펼쳐놓은 가슴을 닫지 않는다가을처럼 저무는 나를 담고놓아 주지 않는 어머니어머니에게는 여백이 없을지 모른다. 그 여백마저 모두 자식들에게 주는 것이 이 땅의 어머니가 아닐까. 가을날 어머니는 딸자식에게 이것저것 가을을 담는다.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언제나 어머니는 어머니의 모든 것을 담아 보내는 것이다. 어머니의 한 생을, 생의 진액을 다 짜서 자식에게 보내는 것이다. 거룩한 본능이 아닐 수 없다. 시인
2020-10-12
쿠웅,속에서 무엇이 스러졌다. 건들지 않고 사나흘 놔두면 놈은 일어나 나를 충동질 할 것이다. 그런데 기척이 없다. 그는 이제 나를 괴롭히지 않을 작정인가. 내 속에 무덤을 만들고 죽어버린 걸까.갑자기 한 번도 보지 못한 그가 보고 싶다. 나의 모멸과 학대를 감내하며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해온, 흉측한 그, 여기까지 나를 멱살 잡고 끌고 온 지겨운 짐승…두 눈으론 볼 수 없는 괴이한 형상물오늘부터내부에서 부패의 냄새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내부에 귀 기울여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죽은 것 같다)놈의 감옥 서까래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모멸과 학대를 참아내며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해온 시인의 몸속에 가두어 둔 짐승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인 자신의 의식이고 욕망이 아닐까. 때로는 분열된 자아의 대립과 갈등으로 힘들었던 때도 있었으리라. 그래서 분열된 자아에서 벗어나서 일체된 자아로의 환원을 염원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10-11
한겨울 속에 여름, 한여름 속에 겨울한 뿌리 속에 꽃과 잎(….)활짝 핀 다음에야 나도 진다지기 위해 만개했었다목적도 없는 왕네 안의 눈보라 속에서쉬었다가 다시 피어나고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첩첩의 꽃이라 하는 순간끝, 종을 치는구나꽃이 피는 것은 지기 위해서 만개하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에는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본다. 첩첩의 꽃이라고 하는 순간 이미 끝이고 종을 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만사가 아니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이런 운명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태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시인의 생을 관조하는 깊은 시안을 느낄 수 있는 시다. 시인
2020-10-07
외로워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침묵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붉게 타오르면서도갓 맑은 풀잎 하나 태워버릴 수 없는 화염외로운 침묵으로 바라보아야그것이 불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저 화염은외로워야침묵해야읽을 수 있는 가을 초대장낙엽, 그 문장을 읽을 수 있다침묵과 외로움에 깊이 빠져봐야 가을의 초대장을 받을 수 있고 가을을 느낄 수 있다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붉고 아름다운 가을에서 화염과 영혼을 느끼는 시인은 낙엽이라는 문장을 읽어내기 위해 더 깊이 침묵해야 하고 더 간절히 외로움에 처해보라고 말하고 있다. 시인
2020-10-06
마음 끝까지 키를 세우네 일어서네 그대일어서서 참으로 빈 마음일 때 아아 몸 눕히네그대 더운 몸 눕히네해 종일 그리운 언덕은 안중에도 없는지발아래발바닥 아래소금으로 드러누워 반짝일 뿐이네봉두난발 일상을 향해젖은 발 하나 들어 올리면매운 발바닥 선한 얼굴이핏발 선 나를 가만히 보네핏발 선 내가 가만히 보네볼수록 순순한 소금 빛 지느러미들그러나 그대 말하지 않네일몰이면 왜 이리 무수한 칼날로 나를 덮치는지그대 말하지 않네깜깜할수록 더욱 눈부실 뿐이네노을이 깔리며 저녁으로 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시인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다. 바다는 마음도 몸도 하나인 ‘소금으로 드러누워’ 반짝이는데 자신은 마음만큼 몸도, 몸만큼 마음도 따라주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헤매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방어진 바다는 늘 변함없이 거기 그 모습으로 일렁이는데 지금 나는 어디로 가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 이르는 시인을 본다. 시인
2020-10-05
너무나 많은너무도 빨리 쉽게 스러져 간다햇살에 마르는 아침 이슬처럼서산에 지는 산골 마을의 해처럼깊은 밤 뒤척이던 지난 꿈들이오늘은 비누 쪽에 이는 거품으로 뜬다부글대며 터지는 공기 방울 속에서사람들은 꿈을 보았다고 한다황홀한 아름다움을 보았다고도 하고아득한 그리움을 가꾸기도 한다거품에 싸여목소리 높여여기가 삶의 중심이라고 외치기도 한다먼지보다 가벼운지나고 나면 허망한그러나 오늘 사람들이 한사코 매달려 있는그것거품은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허망함의 대명사가 아닐까. 시인은 우리 생의 많은 부분의 실제는 거품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음을 본다. 거품에 싸여 목소리 높여 아옹다옹 살다 보면 아름답다고 믿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거품만 남는다는 것이다. 먼지보다 가볍고 허망한 것을 좇아 정신없이 따라가고 매달리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질없는 짓인가를 깨닫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10-04
저 빛은 은달고기 가슴팍에 쌓인 백도의 은유, 플랑크톤 웅숭거리는 뼈마디에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노래할 것이니, 파도 모퉁이에서 세이렌과 소통하다 구름이 걷히면 그 맑고 고움으로, 동해바다 도루묵어도 더듬지 않고 쉬이 그물코를 피하고, 깊이 더 깊이 꿈꾸다 심연으로 스며들어 굴풋하게 빛나는 건 밤바다 대장 같지 않은 행동 휘청거리는 어부의 골 깊은 이마주름에서 행 가르듯 어둠을 찢고 골차게 부풀어, 푸르게 창궐하여, 사근진으로 주문진으로 흐린 뱃길 더듬지 않을 것이니, 기뻐하자.오래전 필자는 울산에서 원양어선 선장으로 일하면서 시를 쓰는 이윤길 시인을 만나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야말로 마도로스의 멋과 낭만이 넘치는 사내였고 해양 시인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 시도 그가 항해 중에 바라본 보름달을 보며 느낀 바다 사나이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시다. 맞다, 텅 빈 바다에 가득 쏟아지는 보름달 빛은 은달고기 가슴팍에 쌓인 백도의 은유다. 시인
2020-09-28
겨울로 가는 버스입니다어서 오르셔요낯선 행려, 행려자들너울너울 꽃천지, 붉은 꽃무릇까지도우리 설움, 사뤄 오르는 삭은 잎사귀도호올로 앉아 우는 귀뚜라미모진 고립에피폭된 시간들도수런거리는 색깔들도차가운 여울물 열며태백의 품으로 돌아가는각시붕어 쉬리 미유기눈 맑은 소리들도하얗게 길 떠나는 억새꽃들도시인이 말하는 겨울로 가는 버스를 타고 싶어지는 아침이다. 그 버스에는 고운 가을 풀꽃들도, 귀뚜라미도, 울긋불긋 불타는 단풍들도, 쉬리 미유기 각시붕어 같은 눈 맑은 물고기들도 타고 있다. 하얗게 강둑을 떠나는 억새들도. 시인은 하얗게 눈 내리는 겨울을 향해, 깨끗하고 순정함이 소복 소복 내리는 설국(雪國)으로 가고 싶은 것이리라. 시인
2020-09-27
방에 있으니 사방 벽이 나를 가두어벽을 밀고 거실에 나왔다그곳에도 벽들이 나를 막아서서마당으로 도망치는담장이 높이 서서 가로막아숨이 갑갑해서 대문 밖으로 탈출했다가슴이 후련해서발이 가자는 대로 돌아다니다 보니사방에 어둠이 덮이고제도의 벽, 인습의 벽, 관습의 벽보이지 않는 벽이 나를 가로막았다집으로 돌아오니낯익은 벽들이 나를 반겨포근히 감싸주고 쉬게 해주었다나를 보호하는 방어막임을 깨달아편히 잠들 수 있었다벽은 밖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기도 하지만 사방으로 가두어 단절시켜버리는 감옥과 같은 것이 아닐까. 벽에 갇혀 살면서 갑갑함을 느껴 밖으로 탈출해보지만, 밖은 또 다른 벽들이 산재해 있어 밖에서 다시 갇히는 꼴이 되기 일쑤다. 그래서 오히려 방에 돌아와서 자기를 가두는 벽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자유를 느끼는 시인의 고백을 듣는다. 깊이 동의해보는 아침이다. 시인
2020-09-24
나는 본다 창밖의 여자를 본다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여자담뱃불 붙이던 여자리어카 끌고 가는 여자짧은 머리카락 여자골프채 가방을 든 여자검은 상복을 입은 여자반바지를 입은 여자긴 머리 묶은 여자짙은 선글라스 낀 여자모자 쓴 여자어디서 한 번 만난 것 같은 여자수락산서 만난 미친 여자중랑천 산책길에 또 만난 여자눈앞에 어른거리는 여자시인이 나열하는 여자들은 그의 욕망이 비친 여자들이다. 그 여자들을 자신의 시선으로 보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욕망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욕망의 눈을 가지고 여자들을 보는 시인을 시인의 내면에 있는 자아가 그것을 바라보는 구조로 시가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시의 제목이 ‘면벽’이 아닐까. 시인
2020-09-23
저 나무가 수상하다‘아름다운 그대가 있어세상에 봄이 왔다’나는 이 글귀를한겨울 광장에서 보았다스멀스멀고목 같은 내 몸이싹을 틔울 모양이다광화문 광장에서 시인은 ‘아름다운 그대가 있어 세상에 봄이 왔다’라는 글귀를 보고 스멀스멀 다가오는 봄을 느끼고 있다. 고목같이 낡고 고루해져서 예민하게 봄을 느끼진 못할 만큼 나이를 먹어도 꽃샘바람 씽씽 불어오는 광장에서 노 시인은 가슴 가득 밀려오는 봄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9-22
하늘 파아란 가을 한낮 멀리 감 익어가는 소리에 엄마 생각이 나요들일 마치고 돌아오시는 엄마 손에 빛깔 고운 단풍잎과 은행잎, 감잎이 자주 들려 있었지요덕분에 어린 시절 제 책갈피마다 어여쁜 꽃잎들이 꿈을 꾸고 그 꿈을 따라 저도 붉고 노란 꿈을 꾸기도 했고요어느 해 원피스 사 달라는 절 달래느라 만들어주신 감꽃 목걸이,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살며시 가슴에서 끄집어내어 목에 걸어본답니다감이 익어갈수록 그리움도 깊어만 가요 감꽃 닮으신 엄마, 늦가을에 남장사 감잎 지는 소리 들으러 함께 가요 사르락, 발밑에 떨어진 감잎을 밟으면 해질녘 노을빛 얼굴로 들에서 돌아오시던 엄마의 발걸음소리도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감나무에 얽힌 어머니와의 추억을 얘기하는 시인의 목소리가 참 따스하다. 엄마의 한 생은 꼭 감나무를 닮았다. 노란 꽃잎을 피우는 봄이면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주고, 푸른 감나무 그늘은 어머니의 사랑과 닮았다. 가을날 주렁주렁 감이 익으면 어머니의 사랑은 그지없이 달고 그윽하다. 시인은 그런 어머니의 헌신과 사랑을 서정적 필치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9-21
오랫동안 근처에 머물며근처를 많이도 베껴 썼다어중간한 시간을 펼쳐놓고 가까이 다가가지도멀어지지도 않고 그 부근에 얼쩡대고 있다어머니 근처에는 다시 어머니가 있고겨울 근처에는 시린 북벽(北壁)과대학사 투명 유리 모서리가 있다나도 누군가의 희미한 근처로 머물러 있는 것일까근처에 독한 에스프레소와 순정한 사랑이 있고근처의 근처들 늘 거기 그렇게 편하다때로는 단추로 잠겨져 있기도 하고푸른 화살표가 가리키는 안쪽에 서 있기도 하는 것인데수많은 근처들연두 새 물 뒤집어쓰고또 다른 근처로 남겨지고 있다우리네 한 생은 누군가의, 무엇인가의 근처에 머무르는 삶이 아닐까. 중심에서 멀어져 있고 무언가 결핍의 상태로 근처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평생을 변방에서 주변인으로 살아온 필자의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자칫 패배주의에 젖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가파르지 않고 편안하고 평평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족하고 있다. 시인
2020-09-20
나는 오랫동안 내 몸에서억만년 전의 붉은 꽃씨와발자국화석과 퇴적지층을 보았습니다이젠 마른 덤불로 굴러다니는고생대의 물길을 넘으면서오아시스를 찾아 일주일씩 버티면서상늙은이 낙타가 된 나는이제 내 몸에서실밥과 구김살과 단추 구멍만 한 창문을 봅니다창문 밖에는 단추 같은 애기 낙타선인장으로 꽃 피고 있습니다뱀도 추억도 까치발로 걷는 이 사막여행에서저에게나 내게나생은크고 붉은 단추입니다붉고 붉은 단추입니다하루 같은 억만년을 잘 여미는억만년 된 오늘 하루를 잘 여미는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지나온 시간들이 마치 사막을 건너는 낙타와 같은 삶이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본다. 그의 상상력을 따라가다 보면 생의 근원에 대한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생은 크고 붉은 단추라는 시인의 말을 곱씹어 보는 아침이다. 시인
2020-09-17
꽃잎이 바람에 흔들렸다과녁에 꽂힌 화살이 흔들리고땅이 인위적 유발 지진에 흔들리고임플란트로 심은 치아가 흔들리고미세먼지 가득한 시야가 흔들리고십일월 늦은 하오의 발걸음이 흔들리고너의 생각이 흔들리고새삼스레 중심이 흔들리고참인 명제의 진실이 흔들리고당신에의 믿음이, 또한 나의 사랑이 흔들리고뿌리 내린 일상이 흔들리고내가 흔들리고마침내낙엽에 기댄 바람마저 흔들렸다흔들리지 않으며 피는 꽃은 없다는 시를 쓴 도종환 시인의 시가 생각나는 작품이다. 세상의 일들이 그리 녹록치 않다. 사는 일들이 험난하고 힘든 과정들의 연속이다. 시인은 그런 혼돈과 어지러움이 얼마나 우리를 흔들어 놓는지를 온 몸으로 느끼며, 그런 흔들리는 세상을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시인
2020-09-16
손차양 너머로 구월은 다시 와서자욱하던 잡목림 저만치 성글어지고나무들 흰 정강이가 조금 더 야위었다여울목은 깊어져 물소리 낮아지고잠자리 가만 앉은 목이 긴 꽃대궁엔꽃씨들 까만 약속이 저 혼자 여무는 소리아득하던 것들 문득 환하게 뵈는 오늘어지럽던 내 시에도 긴 수식어를 지우고깨끗한 형용사 하나 기도처럼 앉히고 싶다풍성한 신록의 성장(盛裝)을 벗는 9월의 숲을 바라보며 시인은 조금씩 버리며 야위어가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소담스런 결실을 위한 마련이고 준비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9월, 깨끗한 생명 연대들의 가을 노래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문학에의 정진을 다짐하는 겸허한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09-15
소백 준령 우람한 황악산길걸어보니 만행일레겹겹이 산 어깨 위서쪽 하늘 얼굴을 가리고산은 산끼리 어깨를 맞대고나무는 나무끼리하늘 뜻을 가늠하고 있는소백 준령 묵묵한 산 세상천년 노송 숲길 끝나를 씻는 도량(道場) 있네솔향기 목탁소리뉘우침도 바래가며청솔빛 쑥국새 울음 끝머리떠오르는 저 별을 보며걸러지는 별무리 보며소백산맥 줄기의 황악산 뻗어 내린 산길에서 시인은 새와 나무와 천년 노송의 말에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음을 본다. 꽃 한 송이 나뭇가지 하나에도, 천년을 살아가는 노송에게서도, 별빛따라 흐르는 절집의 목탁소리에서도 시인은 깊고 그윽한 생명의 소리를 듣고 아름답고 고운 생명의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시인
2020-09-14
스무 해 훌쩍 지나 시장통 걷는다그때 그 할머니 지금도 할머니인 채그때 그 술잔 내놓는다그때처럼 주문하면 바로 시장 봐다가파전 부치고 생선 굽는다메뉴판도 인정도 그때 그대로하긴 뭐 이십 년 세월쯤이야저기 저 밀양상회 할매 어물전 오십 년저기 저 시장식당 할매 국밥집 사십 년여기저기 더하면 천 년도 훌쩍이라지허기진 가슴들이여 이리로 오시라먼저 가신 어매아배 장마당 나와 있고흘러간 그때 그대로가 여기 있으니시인의 회한과 그리움이 시 전편에 녹아있고 정겹다. 먼저 가신 이들을 그리워하며 자신도 언젠가 떠나고 먼 훗날 누군가가 자신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장마당에 스며 있는 따스한 사람의 온기들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9-13
낮에 방에 들어와책 속에 가구 밑에 숨죽이다가밤에 어지러이 날뛰던 바퀴여밤에 방에 들어와이불 위에 송장헤엄 치던 내가너희들이 돌리던 그 세계가 낯설어붙잡아 죽인 밤이여낮과 밤의 공생(共生)돌아가던 바퀴 멈추고밤을 잡아 죽인 나는 뜬눈으로온 밤을 밝힌다방에 들어온 바퀴벌레를 죽인 느낌을 표현한 이 시는 미물이지만 생명을 죽인 것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자연 속에 생존하는 아무리 미미한 존재라도 그 나름의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생명 존중 의식을 읽을 수 있는 시다. 시인
2020-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