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한 포기 없는 이 사막에서는, 함께 살아가야 할 미물들을 위해 뒷간을 따로 짓지 않고그늘진 모랫골에 스스럼없이 용변을 보는데 지린내나 악취가 전혀 풍겨나지 않습니다그 영양식 만찬을 먹기 위해 목마른 붉은 도마뱀과 전갈 한 쌍이 금방 찾아듭니다이 불모의 사막에서는, 그 누구와도 미워하고 시기하고 싸워 등 돌려 살 일 없답니다모름지기, 모두 뜨겁게 자신의 몸으로 나누며 사랑하고지금 더불어 살아있음을 겸허히 감사드릴 뿐이랍니다시인은 열사(熱沙)의 사막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와 넉넉한 마음, 혹은 서로 나누며 함께하는 아름다운 생존의 원리를 전해주고 있다. 사막 같은 극한 상황이 이어지는 현실 속에서 공동체의 안위와 공존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내하고 서로 사랑하고 함께해야 함을 넌지시 일러준 것이다. 극단적인 단절과 지독한 이기주의에 익숙한 우리 시대를 향한 경계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07-14
가냘픈 초승달이 안쓰러운지바로 옆에 개밥바라기별이 떠서같이 어둠을 밝히는 겨울 저녁이한결 따뜻하다지중해를 떠도는 난민 소년과이슬람 무장단체의 어린 병사들황량한 아프리카 초원에서도저 별을 볼 수 있을까집집마다 사람들 돌아와 모여 앉아따스한 저녁 불을 밝히는데모두 푸른 별 지구에 주소를 두고함께 살고 있을 뿐인데시인은 가냘픈 초승달의 외로움을 함께 해주는 금성(개밥바라기)을 바라보며 굴곡진 생의 언덕을 넘는 인생들, 정처 없이 떠도는 난민들, 소외와 가난, 묶임과 단절에 아파하는 이웃들의 삶을 떠올리고 있다. 시인은 이웃들의 삶에 무관심하고 무심하게 패싱해 버리는, 초록색의 아름다운 혹성인 지구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은근한 비판의 목소리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7-13
아직 잠들지 못하는 이 있다머리 부딪치며 파도를 몰고달려오는 광기진한 바닷냄새 몰고 오는 바람 같은 사람그대 잠들지 못한 저 바다의 가슴에달큰한 타액으로 애무하고 싶었다절망의 젖은 뭉치들깜깜한 밤에 궁글리며 몸부림치고핥으며 쓰다듬으며 가라앉히며들뜬 나의 바다우웅 방황하는 숲을 달래는해안의 숨은 이야기울먹이는 바다 속으로금시라도 까무라칠 듯 성난 바람은몇 안 되는 바닷가 마을을적막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시인은 갯냄새를 몰고 오는 거친 바람도, 더 센 물결의 광기도 잠잠하게 잠재우는 것은 바로 밤바다라고 말하고 있다. 밤바다는 욕망과 광기, 방황의 들뜬 삶의 소용돌이들을 고요하게 만든다고 쓰고 있다. 삶의 갖가지 굴곡과 엉킴과 소란스러움을 쓰다듬으며 가라앉히고 적막 속의 고요와 평온의 세계로 몰아넣어 주는 것이 밤바다라는 시인의 잔잔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07-12
그가 떠나면서 마음 들머리가 지워졌다빛살로 환하던 여백들이세찬 비바람에 켜질 당할 때그 폭풍우 속에 웅크리고 앉아절망하고 절망하고서 비로소 두리번거리는늦봄의 끝자락운동모를 눌러쓰고 몇 달 만에 앞산에 오르다가넓은 떡갈잎 양산처럼 받들고선꿩의 밥 작은 풀꽃을 보았다힘겹게 꽃 창 열어젖히고 무거운 머리 쳐든이삭꽃의 적막 가까이 원기 잃은 햇살 한 줌한때는 왁자지껄 시루 속 콩나물 같았던꽃차례의 다툼들 막 내려놓고들릴락 말락 곁의 풀 더미에게 중얼거리는 불꽃의 말이가슴속으로 허전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벌 받는 것처럼 벌 받는 것처럼꽃 진 자리에 다시 써보는뜨거운 재의 이름시든 화판을 받들고선병든 몸이 병과 함께 비로소 글썽거리는, 해거름!차례는 순서를 가리키는데, 꽃대에 핀 꽃잎의 배열이나 꽃이 피는 모양을 꽃차례라 한다. 쓸쓸한 시간과 엄동이라는 절망의 시간을 지나면 화사한 봄꽃들이 피고, 그 꽃들이 지는 늦봄의 끝자락에 괭이밥 작은 풀꽃은 피어난다. 자연의 순리, 차례를 지켜 피어난 것이다. 시인의 관찰력이 예리하고 섬세하기 그지없다. 시인
2020-07-09
들녘 끝으로 불빛들이일렬횡대로 줄지어 서 있는 만경평야이 세상 개울물을 잠방잠방 맨처음 건너는아이들 같구나너희도 저녁밥 먹으러 가느냐날 추운데 쉬운 일이 아니다 결코저 스스로 몸에다 불을 켠다는 것그리하여 남에게 먼 불빛이 된다는 것은나는 오늘 하루 밥값을 했는가못했는가 생각할수록 어두워지는구나만경 평야 저문 들녘을 건너 날아가는 새떼를 바라보며 ‘나는 오늘 하루 밥값은 했는가’ 라고 자문하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있다. 자기 몸에 불을 켜서 남에게 먼 불빛이 되는 새떼처럼, 안도현의 또 다른 시에 나오는 ‘연탄’처럼 세상에 조그마하나 보탬이라도 되는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옹호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07-08
바다는 우리의 것들을 밖으로 쓸어낸다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되치운다우리가 버린 것들을 바다 역시 싫다며 고스란히 꺼내놓는다널브러진 생각들, 욕망의 추억들, 증오와 폭력들의 잔해가 바랜 채 하얗게 뒤집혀지거나검은 모래 속에 빠진 채 엎어져 있다나사가 빠지고 못도 빠져나가 헐겁지만그것들은 우리 편도 아니다더욱 제 몸들 부스러뜨릴 파도 덮치길 겁내며몇 번이나 우리의 다리를 되걸어 넘어뜨린다여름 홍수에 그런 것들 거세게 바다 파고들지만바다는 이내 그 모든 것들을 제 바깥으로 쓸어 내놓는다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우리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되치워야 한다인간의 욕망이 생산한 쓰레기들을 시인은 ‘것들’이라 칭하며 이러한 욕망의 찌꺼기들을 여름 홍수에 얹어 바다로 떠내려 보내는 인간들이 얼마나 이기적인지를 고발하고 있다. 욕망의 추억들, 널브러진 생각들, 증오와 폭력들의 잔해가 검은 모래 속에 묻어버리는 인간의 이기적이고 오만함을 야유하고 비판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20-07-07
미군기지가 있으려고그 근처의 숲은계속 사람의 동네에까지 울창하다지금 나는 이 창 안에서저 밖을 이렇듯 살피고 있다오래된 홀트아동복지 건물 쪽으로언젠가 지나갔을 때가 생각난다저 안에서 이루어지는 흐름은저 안에서 안으로 흘러가고…나는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 같았는데바로 오늘의 눈과 손가락이저 밖의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쪽으로 따라가다가결국 만들어내는 고향의 초라한 모습어릴 적 떠나올 때에 비해또한 크게 다르지 않는 고향의 일….오래전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시인 고희림은 현실 문제를 치열한 대결의지로 현실 참여 시를 써온 시인이다. 고향 마을에 미군 기지가 생기면서 고향에서 쫒겨났던 시인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땐 기지가 들어서서 고향을 더 크게 만들어준다고 들었는데 이제 나이 들어 돌아와 보니 미군들의 클럽들이나 기지촌 주변에 들어찬 술집이 즐비한 풍경을 보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많은 여성이 성 매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치욕적이고 가슴 아픈 현실을 허탈한 심정으로 그려낸 것이다. 시인
2020-07-06
광화문 지하도 계단에 거지가 있었다하루도 자리를 비운 적 없는안면 주름살이 복잡한 나이 먹은거지였다삼복더위 여름 한 철 어느 날엔가사흘씩이나 거지가 눈에 띄지 않았다자리를 비웠어도 빈자리가 아닌 듯그 사흘 동안 양평인가 덕평 쪽으로식구들과 함께 피서 다녀왔다는앞에 빈 소쿠리를 만지작거리며꼬깃꼬깃한 삶을, 손금을 손바닥에펴보이며씨익 웃고 있던 검게 탄 맨얼굴내 마음에 빗금을 긋던 그 망설이던길목에시인이 제시하는 두 개의 풍경은 다소 해학적이기도 하지만 그 속엔 시인 현실인식의 틀이 비쳐 있다. 광화문 계단에 늘 보이던 늙은 거지가 삼복더위에 보이지 않아 내심 걱정하던 시인의 눈앞에 며칠 뒤 나타난 거지는 가족들과 피서를 다녀왔다고, 그래서 얼굴이 까맣게 그을렀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늘 동정의 대상이었으나 그런 인식의 틀은 틀린 것이라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생활을 하는 이웃이고 평행선상에 놓인 실존적, 존엄한 존재라는 인식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음을 본다. 시인
2020-07-05
눈썹 쏙 뽑은 듯감꽃이 져서 어쩌나 했더니감자꽃이 피었습니다감자꽃이 몽글몽글 피고토마토가 달렸습니다노란 토마토꽃 옆에상추꽃 시샘하고저 건너 밤꽃도 피었습니다개구리는 지가 뭘 안다고와글와글꽃도 아닌 걸 피웠습니다시인은 잇고 이어지는 릴레이 같은 풍성한 생명의 축제가 벌어지는 6월의 자연을, 그 아름다움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감꽃, 감자꽃, 토마토, 상추꽃, 밤꽃, 개구리 , 듣기만 해도 그 고운 생명의 불꽃들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생명의 꼭지들을 하나 하나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7-02
낮게더 낮게풀보다도 낮게흙보다도 낮게흘 속 벌레보다도 낮게벌레 속 물보다도 낮게낮게낮게더 낮게이 세상,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도더 낮게시인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더 낮추어야 진정한 안식과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세상을 향해 가만히 던지고 있다. 텅 빈 존개가 되어 외롭고 쓸쓸함에 빠지더라도 그것을 감수하고 더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어야 함을 역설하며, 그럴 때에 진정한 휴식과 안식과 평화에 이를 수 있다는 시인의 생을 관조하는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07-01
이 길, 천지에 기댈 곳 없는 사람 하나 작은 보따리로 울고 간 길그리하여 슬퍼진 길상수리와 생강나무 찔레와 할미꽃과 어린 풀들의이제는 빈, 종일 짐승 하나 지나지 않는환한 캄캄한 길열일곱에 떠난 그 사람흘러와 조치원 시장통 신기료 영감으로 주저앉나깁고 닦는 느린 손길골목 끝 남매집에서 저녁마다 혼자 국밥을 먹는,돋보기 너머로 한번씩 먼 데를 보는그의 얼굴고요하고 캄캄한 길시인이 말하는 깊은 풍경 속에는 외롭고 가난하고 슬픔에 빠져 소외된 노인이 앉아 있다. 슬픈 운명과 남루한 현실이 맞물려 인생살이의 힘겨움과 괴로움과 곤고함을 가슴에 안고 운명이려니 순응하며 살아가는 노인이 아닐까. 시인의 이런 소외된 인생에 대한 연민의 목소리가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아침이다. 시인
2020-06-30
막 거기서 나왔다는 사람들은그 안은 정말 대단하다는 표정과 그 안도별 볼일 없다는 표정을 함께 짓는다 하여사람들은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혹은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다는 건지 헛갈리게 된다막 거기서 나왔다는 사람들은그 안에서 오래 있었던 것처럼 아니원래부터 그 안에서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너도꼭 한번 가 봐라 막 거기를 나온 사람들은꼭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 얼굴은그 안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은 곳이 아니야꼭 그런 얼굴이다막 거기서 나왔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바쁘고 진지하고 엄숙하므로 농담으로라도거기에 대해 더 묻기도 어렵다시인이 말하는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만의 수준을 자랑하고 독점하고 과시하며 건방스럽고 배타적인 부류의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리라. 우리 삶의 도처에 이런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시인은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의 진영논리나 이해관계에 갇혀 매우 이기적이며 위선과 거짓에 익숙해져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병폐의 사회현상을 야유하고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시인
2020-06-29
아무도 들어가 보지 못했네사슴의 눈 깊은 눈16㎜ 영화 속에서 그를 만났네후끈 달아오른 아스팔트를 맨발로 걷는 그는두 손을 뒤로 깍지 끼었네 속옷만 간신히 걸친 채저항도 없이 엎드려서먼산바라기 하고 있었네이명의 군홧발들 총부리들 대검들 뎅겅뎅겅 목 부러진 꽃들그 비명으로 넘쳐흐르던 광주천이여!굴비 두름처럼 끌려간 친구 대신, 아비 대신금방이라도 후려칠 듯한 곤봉의 사내 대신어느 절정의 노래가빙의(憑依)의 몸으로 돌아왔구나시인은 80년 5월 광주를 담은 16㎜ 다큐멘터리 기록 영화를 보고 그 속에 나오는 사슴 사내가 계엄군의 곤봉과 대검에 짓이겨진 채 금남로 아스팔트 위로 끌려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 봄, 수많은 사슴 사내들이 질질 끌려가고 군홧발에 총칼에 상했다. 아물 수 없는 상흔을 간직한 채 죽어간 사슴들은 말이 없고,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피 흘리며 외치던 그들의 피 끓는 함성과, 뜨거운 눈빛만 영원히 저 푸른 바람 속에 들려오는 비극의 오월이 또 오고 있음을 시인은 다시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6-28
더운 햇살 올챙이 떼처럼 자글거리는 논바닥바짓가랑이 추켜올린 늙은이들모판 나르느라 정신없네요즘엔 기계모라 간편해졌다지만손품 발품 파는 거야 어디 갔을까누가 쳐다보거나 기차가 지나가거나 말거나왜가리조차 고개 돌리지 않네다음 역에서 내리고 싶지만 내리지 못하네오래전 무작정 올라탄 기차는지칠 줄 모르네경부선 기차를 타고 가며 시인의 눈은 창밖 농촌 풍경에 가 닿아 있음을 본다. 속도가 가속되고 정지불능이라고 여길 만큼 빠른 속도로 기차는 지나가는데 풍경 속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무심하리만큼 여유롭게 제 일에 빠져 있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이 두 가지의 상반된 풍경을 보여주면서 시인은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일까. 무섭게 달려가는 기차처럼 비정한 속도로 치닫는 현대문명이라는 기차를 멈출 수도 내릴 수도 없는 현대인들의 슬픔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
2020-06-25
소나기 후두둑 지나간 텃밭푸릇한 배춧잎에 들어붙어달팽이 한 마리 기어가고 있다제 몸보다 더 큰 집을보기에도 버거운 삶처럼꾸역꾸역 짊어지고 간다사람에게도 그런 껍질이 있다내 아버지,체구보다 더 큰 나뭇짐을 지고아침마다 산을 내려오셨다올망졸망 자식들,평생을 달팽이 껍질처럼 지고 산아버지의 집이었을까단 한 순간이라도소나무 푸른 그늘에서그 짐 내려놓고 쉬어본 적 있었을까배춧잎 위의 달팽이 한 마리어느새 저만큼 기어간다소나기 후두둑 지나간 텃밭에서 동그라니 집 한 채 지고 기어가는 달팽이를 보면서 시인은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다. 올망졸망한 자식새끼들 소복이 들어찬 집을 지고 아버지는 꾸역꾸역 버겁고 힘겨운 생을 살아오신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아버지의 등에 얹힌 집이었다가, 세월 지난 후 이제는 우리도 등에 무거운 집을 지고 가는 처지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네 한 생이 이러한 운명적인 굴레 속에 얽혀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
2020-06-24
늘 푸른 동해 넘실거리는수제선 따라 북으로아스라이 철조망이 돌아가네삼천리금수강산철조망으로 둘러치고집집마다 담장을 한 뼘씩 높여 놓고입으로만 통일을 노래하는 사람들가슴마다 철조망 키우며 돌아가네대보 가는 길 청 보리밭노고지리 한 마리 노골노골철조망을 넘나들며 노래하는데철조망에 갇혀 사는바닷가 사람들은 알지아이들은 왜,철조망을 흔들고발로 차고 기어오르는지우리나라 해안선에 삥삥 둘러쳐진 철조망은 분단 현실의 아픈 산물이다. 시인은 호미곶 가는 길의 아름다운 해안선에 흉물스럽게 둘러서 있는 철조망을 보며 통일로 가는 길에 놓인 이런 차갑고 흉물스러운 것은 걷어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깊이 동의한다. 휴전선 비무장 지대가 생태평화공원으로 바뀌고 아름다운 해안선이 우리에게 돌아올 날들을 간절히 소망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0-06-23
10층 베란다 양지바른 곳에 화분이 있다허브와 영산홍은 아내가 가져온 것이고난을 포함한 몇 개는 내가 들여놓은 것이다아내는 화분에 물을 주며 꽃을 바랐고나는 거름을 주며 문장을 찾았다영하로 내려가는 겨울이 올 때마다아내는 쿨룩거리는 감기 몸살로 화분을 잊었고겨울 지나며 베란다 삶을 견디지 못한몇 개의 화초들이 지상으로 내려갔다나는 베란다 창문 귀로 들어오는작고 작은 햇살을 꿰어화분을 이리저리 옮겼다살아 있음은산다는 일이 다옥한 모습으로 흔들리는 것임을베란다에서화분의 안부를 챙기며 배웠다밖과 안의 베란다 공간삶과 죽음 그 사이 햇살은 펑퍼짐하게 찾았다아파트 베란다에서 화초를 키우며 시인은 소소한 삶의 진리를 깨닫고 있음을 본다. 땅도 아니고 차가운 콘크리트 위 좁은 화분 속에서 엄동을 건너는 화초들에 내리비치는 햇살은 그야말로 생명의 소중한 끈 같은 것이 아닐까. 창문 귀로 들어오는 작고 작은 햇살 꿰어 화분에 옮겨주며 시인은 산다는 일이 다옥한 모습으로 흔들리는 것이라는 소중한 삶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리라. 시인
2020-06-22
전남 여천군 쌍봉면 주삼리 끝자락남해화학 보수공사현장 가면 지금도식판 가득 고봉으로 머슴밥 먹고유류탱크 밑 그늘에 누워선잠 든 사람 있으리이삼십 분 눈 붙임이지만 그 맛간밤 갈대밭 우그러뜨리던 그 짓보다 찰져신문쪼가리 석면쪼가리깔기도 전에 몰려들던 몽환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꿈자락 붙들고 늘어지다가도소혀처럼 따가운 햇볕이 날름이마를 훑으면비실비실 눈감은 채로남은 그늘 찾아 옮기던 순한 행일용직 노동자들이 점심시간의 틈새 잠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비록 그들의 삶은 고단하고 모양 없을지 모르나 그들에게는 꿀잠 같은 평화와 안온함이 있다. 시인이 보여주는 구체적인 그림 속, 기계와 한 몸이 되어 잠든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따스한 인간적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작품이다. 시인
2020-06-21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 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하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었다고 합니다.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 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어지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시인은 거룩한 본능이 그려내는 아주 감동적인 장면 하나를 건네고 있다. 환갑이 지난 아들이 아흔 넘은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누이면서 아버지에게 ‘쉬-’하고 오줌을 재촉하며, 어쩌면 어릴 때 지금의 그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안고 똑같은 ‘쉬-’라는 말을 들었는지 모른다. 소소한 그림 하나를 제시하며 뜨겁고 끈끈한 혈육의 정을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시가 아닐 수 없다. 시인
2020-06-18
남의 등가죽이나 베껴 먹는 치들에겐쉴 참에 담배 한 대가 아니예요손발 놀려 쉴 틈 없이 일하는일하지 않고서는 달리 먹고살 도리없는막노동꾼 흙노동꾼에게만그야말로 쉴 참에 담배 한 대지요공사판 자갈 더미 위에서든논두렁 밭두렁에서든쉴 참에 담배 한 대 태우며땀 절은 몸뚱어리 식히기도 하지요턱수염도 문지르고코도 휭 풀고아으, 고단한 몸 기지개도 켜면서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자신의 삶을 세워가는 노동자들의 건강하고 인간적인 모습들을 제시하고 있다. 시인은 남의 등가죽이나 벗겨 먹는 치들의 비열하고 비인간적인 면을 대립시키면서 삶의 진정성을 옹호하며 노동자들의 따스하고 인간적인 면을, 쉴 참의 담배 한 대라는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
2020-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