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올 수 없다면움직일 수 없는 내가 가야지대지에 뿌리내린 꽃일 망정나는 날개를 가진 너를 포획하리라나비야,내 모든 고통의 무게를 지양하는마다가스카르나비야눈물로 응집된 가슴의 꿀을 파먹고일말의 연민도 없이 떠나버린네가 올 수 없다면대지에 단단히 발 묶인내가 가리라향기로 만든 덫을온갖 바람에 실어 보내며은밀한 봄밤엔너를 기다리리라릴리향의 어지러운 덫에마술처럼 걸려든 너를포획하리라시인은 나비 사냥꾼을 꽃으로 설정하고 있다. 릴리향 같은 꽃의 향기는 자유로운 나비를 꼼짝없이 사로잡게 된다는 것이다. 날개를 가진 나비는 자유로운 영혼을 의미하는데 대지에 뿌리 박은 꽃의 향기가 나비를 사로잡는 사냥꾼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시 세계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시인
2021-02-04
형씨,맹동지절(孟冬之節)에 강건하십니까,안부를 여쭈면서 몇몇 가지 좀 알아보고 당부도 드리려 합니다형씨 고향은 중국 우한(武漢)인 것은 익히 알고 있는데 혹시 본향(本鄕)이 서울이신가? 예전 육이오동란 끝나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드럼통을 자르고 두들겨 만든 택시가 대한민국이 자랑스레 만들어 낸 명품이라고 서울 한복판에서 무한 인기로 굴러다닌 적이 있어서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요. 그리고 당신이 요즘 오지랖 넓게 설레발치며 온 세계를 휘젓고 돌아다니는 꼬락서니를 보니 원래 당신 태생에 문제가 많아서인 것 같기도 하오.‘武漢‘이 뭐요? 아 주먹잽이로 경우 없이 휘두르기만 할 줄 아는 건달배를 이르는 말 아니요? 그리고 또 결례의 말씀이다만 당신 생김새도 영 마음에 안 들어요.(….)전 세계적으로 창궐해 수많은 인명을 상하게 하고 모든 것을 무너뜨리며 공포에 떨게 하는 코로나19를 의인화하고 희화화하여 서간문 형태를 빌려 쓴 기발한 작품이다. 펜데믹으로 엄청난 폐해를 끼치고 있는 괴질 코로나19의 소멸과 무너진 일상의 회복을 간절히 염원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2-03
죽은 사람이 살다 간 남향(南向)을 묻기 위해사람들은 앞산에 모여 있습니다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소년들은 잎 피는 소리에 취해 산 아래로 천 개의 시냇물을 띄웁니다. 아롱아롱 산울림에 실리어 떠가는 물빛, 흰나비를 잡으로 간 소년은 흰나비로 날아와 앉고 저 아래 저 아래 개나리꽃 피우며 활짝 핀 누가 사는지?조금씩 햇빛은 물살에 깎이어갑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리도 깎이어 물 밑바닥에 밀리는 흰 모래알로 부서집니다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흰 모래 사이 피라미는 거슬러 오르고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그대를 위해 사람들은 앞산 양지쪽에 모여 있습니다양산 양지쪽에 모여 죽은 이들의 무덤을 남향받이로 모시는 산골짝 사람들의 장례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외딴 산골짝의 이 조촐한 제례를 보여주며 시인은 흰 모래 사이의 피라미와 죽은 이들이 환생한 흰나비를 등장시키며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초월하는 시인 정신을 펼쳐보이는 것이다. 아득하고 진지한 장례풍경을 본다. 시인
2021-02-02
눈발이 가득히바람에 불려간다허공이 거대한 모슬린천처럼하얗게 겹쳤다 펼쳐지고겹쳤다 펼쳐지고그 너머로 나무들이나타났다 사라졌다위태롭게 껌벅인다나무가 악기인 것은지워지지 않으려 온몸으로 울기 때문이다나무들이 우는소리능선을 넘어온 산을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이룬다나무가 악기인 것은지워짐과 지워지지 않음을 넘어전력을 다해 울기 때문이다눈 갠 하늘 아래기진한 나무들이 하얗게 얼어붙었다녹아내린 눈이 가지 끝에 고드름으로 달려 흔들리며풍경 소리를 낸다나무가 악기인 것은소리의 끝에서 무심하기 때문이다시인은 나무의 울음을 들어 존재의 세 가지 양상을 들려주고 있다. 자기 존재의 정립을 위해 온몸으로 우는 나무, 더 나아가 가기 확인과 확산을 위해 전력을 다해 우는 나무, 나머지 하나는 소리의 끝에서 무심한 나무에 대해 말하면서 인간이 추구하는 존재적 열망과 냉혹함과 초월의 정신세계를 일러주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2-01
더러는 마음만 분주하여 스쳐 지나온 길이그리울 때가 있다, 힘겹게 넘어선 고개를 되돌아가땀 젖은 몸 세워놓고 바라보면금세 초록물 드는 생각이 앞서 걷고 있다그러나 무엇인가, 돌무덤을 지나 산등성이 꺾어 돌면세간의 무쇠 같은 고난이 이곳까지 따라온 것일까하지만, 나무들은 미풍에도 숨이 찬 듯산골짝마다 제 푸르름을 끌고 가 풀어놓는다지나온 길은 늘 희미한 잔광으로 남고한없는 서성거림으로 일렁대는 추억의 바람무늬그 그리움 끝에 텅 비워진산과 나 사이의 경계는 풍화되는 돌 틈에 있다이렇게 먼 손짓으로나 흔들어 깨우면서혼곤하여 앙상한 마음의 풍경화녹림(綠林) 짙어 가는 세월 속 푸른 가지를 들어숨겨진 길 하나 들춰내는 것인가무쇠 같은 고난의 세상살이, 절벽처럼 일어서는 절망의 시간 속을 걷더라도 인간은 가슴 속에 푸르른 숲을 보듬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시인의 말에서 푸른 희망을 본다. 시인
2021-01-31
녹빛 바람 팔락거리며낮은 수면을 건너면수억 년 엎드린 언어의 기억들가만히 촉수를 세우네미생물 생명체해오라기 먹이 늪으로가지런히 정리되고 부화된 부리샛노랑 무채색이네먹이사슬에 채집되지 않은곱디고운 눈빛들억겁 세월을 견디며알포로롱 밀어처럼춤추게 하네개망초 꽃언덕 저편 촉수 푸른 숲말캉말캉 길을 내며 어깨 걸고 가네창공에 푸른 깃발 하나 내 거네창녕의 자연 생태 늪인 우포늪에서 시인은 영원의 시간을 읽어 내고 있음을 본다. 그 속에서 수억 년 엎드린 생명의 언어를 발견하는 시인의 시안이 참 밝다. 억겁 세월을 견디며 철마다 변함없이 생명의 새순을 내밀며 푸르게 어우러지는 생명연대에 가 닿은 시인의 눈길도 마음도 푸르기 이를 데 없다. 시인
2021-01-28
처마 밑에 버려진 캔맥주깡통, 비 오는 날이면밤새 목탁 소리로울었다. 비워지고 버려져서 그렇게맑게 울고 있다니버려진 감자 한 알감나무 아래서 반쯤썩어 곰팡이 피우다가흙의 내부에 쓸쓸한 마음 전하더니어느 날, 그 자리에서 흰 꽃을 피웠다그렇게 버려진 것들의쓸쓸함이한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사소한 풍경, 그 속의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속에는 시인의 생에 대한 인식의 틀이 숨겨져 있다. 버려진 캔맥주 깡통, 목탁소리, 버려진 감자 한 알, 시인의 시선이 가닿은 것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쓸쓸히 팽개쳐진 것들이다. 이런 소외된 것들의 그 쓸쓸함이 세상을 끌어가고 있다는 시인의 말에 깊이 동의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바퀴는 크고 아름답고 힘센 것들에 의해서만 굴러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시인
2021-01-27
사막에서만 모래무덤이 발견되는 게 아니다길바닥에 누워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미이라, 신의 은총인가, 형벌인가… 썩지 못한미이라, 물을 뿌리면금세 부풀어오를 종이 조각한 겹의 피부지금을 굳이 후생(後生)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이곳을 사막이 아니라고말할 수도 없다사람들은 사막을 건너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간다이미, 사막을 건널 수 없다는 걸알고 있는 이들이 있다 예정된 패배의코스를 가는 자들이슬픔과 기쁨이 여기에 있다사막의물결치는 모래바람이모래산을 움직이기에 앞서 또 사람들을 부른다시인이 설정하는 공간으로서의 사막은 실제의 사막이 아니다. 절망과 좌절, 패배와 불모의 환경들이 끝없는 갈증과 욕망이 생산되는 삶의 현실을 사막이라 비유하고 있다. 삶의 형태와 방향을 왜곡해가는 현대사회에서 그 불가항력의 삶의 조건들을 헤쳐나가겠다는 시인의 극복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시인
2021-01-26
비 때문에때로는 안개 때문에눈앞의 현재를 보지 못한다두렵고 겁이 나는 순간들 지나고드러내는 실제는걱정보다 두려움보다반가움이다비 때문에마음을 닫고 돌아서다때로는 너 때문에 귀를 기울인다두렵고 겁이 나는 순간들 지나고남겨진 혼자라는 실제침묵보다 고요보다설레임을 깨닫는다비나 안개 같은 장애물 때문에 실체를 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그것 때문에 실체적 진실 혹은 본질을 발견할 때도 있다는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면 시인의 존재 인식의 틀을 발견한다. 대상에 대해 진심으로 다가가고 깊이 궁구하면 한 눈에 인식되는 것도, 많은 것을 품고 있는 속도 훤히 볼 수 있다는 시인의 역설에 깊이 동의한다. 시인
2021-01-25
누가 또 나를 열고 들어온다무거워진 나를새벽부터 개밥바라기별 뜰 때까지피곤에 젖은 나를 열고 들어와다시 문을 열고 있다문밖에 쌓여가는 어둠만큼내 안에도 길어지고 깊어지는어둠을 밟고 다닌다저 문을 열고 나가면 나도열어 들어갈 문이 있을까그 안에 한 사나흘 누운 채푸르게 일어서는 비를 바라볼 수 있을까문밖으로 가을 편지를 써서 날려 보낼 수 있을까길어 올리지 못한 말의 타래 들을건져 올릴 수 있을까끝없이 문을 열고 나가 새로워지려는 시인의 열망을 본다.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세상에 부대끼며 상처 입은 자아를 치유하려는 시인은 문이라는 매체를 설정하고 그것을 열고 나감으로 진정한 자유와 해방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을 역설하고 있다. 문은 닫힘과 열림이라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지만, 시인은 그 문을 열고 나가 여러 굴레에 묶이고 갇혀 있는 자아를 초월하려는 간절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시인
2021-01-24
나는 평면, 지도에서 익힌 거리였다높이를 알려주지 않는 정보원을 둔 게 잘못이었다저장한 가따가나 몇 마리가 머릿속 어디서 길을 잃고느린 속도로 번역되어 다가오는어긋나게 내 옆을 지나가는 풍경이 있었다새로 거기 나를 그려 넣어야 했나, 넣었나?나는 아직 이 거리의 문법을 모른다난바다 가까운 마을에는 바람이 늘 제집처럼 드나들고땅거미가 찾아올 때쯤 밭고랑 같은 골목길에돌아가라 돌아가라어김없는 하오의 사이렌이 울었다지도가 일러주는 이국의 거리는 낯설기 짝이 없다. 시인은 이방인이 되어 ‘三田’이라는 곳의 풍경에서 어색한 심사를 토로하고 있다. 친근함보다는 낯설고 어색한 이국의 거리에서 그곳의 ‘문법’이라 일컫는 이국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시인의 심사가 함축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시인
2021-01-21
나 언제나 너를 잊지 않았듯이너 또한 나를 잊지 말아라헛된 세상 물결 속에 힘든다 해도내가 너를 사랑 하듯이너의 사랑도 누구에게나 주어라봇물처럼 터지는 저 푸른 강 건너그리운 그 나라로 갈 때까지너의 마음을 다해 정성을 쏟아라복된 꿈은 그저 생기는 게 아니다너가 갈망하는 흔들림 속에서 자라는 것언제나 마음을 단정케 하여바르게 일어서는 법을 익히고무엇이 정직한 생각이었는가를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시간을 가져라새벽 4시 15분내가 다시 너에게 온다 해도너가 나를 알지 못한다면그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모른다그 언제 너는 깨어나 진정 나를 알겠느냐시인이 제목으로 특정하는 새벽 4시 15분은 아침이 밝아오는 여명의 시간이다. 하루가 열리는 시점이며 고요한 가운데 무언가 꿈틀거리는 역동의 시간이기도 하다. 허공의 목소리를 빌어 마음을 단정케 하고 정직한 생각을 하며 새로운 출발을 위한 자기를 성찰하고 다짐하는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1-20
그는물에 닿으면 반드시 녹는다그러나젖은 제 몸의 향기를 지극히사랑하는 까닭에한순간의 생이뜬금없는 거품일지라도오래전세상 눈뜨기 전부터 키워 온제 몸의 향기를흐르는 물에아낌없이 게워낼 줄을 안다비누는 물에 풀어져 자신의 향기와 몸을 다 주고 지워져 간다. 시인은 인간에게도 근원적으로 비누처럼 남을 위한 희생의 속성이 내재돼 있다고 믿고 있다. 인간이란 비누 거품처럼 한순간에 지워지고 없어져 버리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존재지만 남을 위해 헌신하며 희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비누를 들어 역설하고 있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1-19
뿌연 안개 휘돌아 삼동로 덮고부스스 눈곱 턴 사내들꿈속 헤쳐 나온다밤새 움츠르던 날개가볍게 세우고영축산 적멸보궁수천 년 잠든 부처흔들어 본다삼보일배하는 스님손안에부처가 들고,마침내물속 유영하던 고기떼들저마다하나의 소원 이룬다영축산 아래 천년고찰 통도사 적멸보궁 앞에서 시인은 천 년의 시간을 읽고, 삼보일배 하는 스님의 정진을 바라보며 치유라는 화두 하나를 건진 시인의 시안이 깊고 그윽하기 짝이 없다. 스님의 손안에 부처가 들고 물고기떼가 유영한다는 시인의 기막힌 상상력과 통찰력이 돋보이는 시다. 시인
2021-01-18
당신을 만지지 않아서 내가 노래하는 건 아니죠내 노래는 당신의 얇은 피부 밑을 흐르는혈관 같은 것, 손대지 않아도 노래는당신의 심장에서 나와 심장으로 돌아가죠당신을 만지지 않아서 내가 노래하는 건 아니죠내 손은 당신의 심장을 기억하고그래서 언제나 둥근 허공을 어루만지고노래는 손가락 끝에 맺혀 있어요당신을 만지지 않아서 내가 노래하는 건 아니죠내 입술이 만들어내는 소리의 동심원들이당신을 만나 내게로 돌아오고 있어요들숨과 날숨 사이, 거기 그렇게 당신이 있어요시인이 말하는 당신은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이지만 시인에게는 기억을 추스르고 기억을 솟구치게 하는 매우 중요한 대상이다. 우리 한 생애의 길에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무어라 규정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고 힘을 주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시인
2021-01-17
썩어가며 꿈을 자주 고쳐 꾸다가비늘이 굳어지고 눈물은 말라갔다앙다문 울음은 물큰한 내음을 어룽지며알싸한 맛을 키웠다새까만 새끼들이 썩어가는 세월을 발라먹는 동안옹근 심줄도 연골도 삭아매끄럽고 탄력 있는 성명들은어미 애비라는 시큼한 이름으로 남았다비린내 나는 근력은 곰삭아푸른 시간도 함께 부패되고지느러미는 항해를 잊었다이제 붉은 맛으로 혀를 찌르고온몸으로 물살을 불러목구멍을 쏘리라물길은 지워지고 비좁은 바다로 흘러가리라뜨거운 바다 네 가슴속에서물결 치리라저문, 지친 하루를 피어 올리고타오르는 석양처럼 붉게 태우리라어두워진 속을 확 밝히리라소멸하는 순간 가장 빛나는홍어가 곰삭아 가는 과정을 리얼하게 보여주며 시인이 의도하는 것은 뭘까. 자신을 온전히 썩혀서 주저앉을 때 비로소 매콤하고 알싸한 특유의 맛을 품은 홍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소멸하는 순간 가장 빛나는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리라. 진정한 실존적 가치에 이르기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역설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1-14
어디를 가도 출발하기 전과 다름이 없다나는 도착과 동시에 제자리로 되돌아와 버리는 지병이 있다언제나 똑같은 자리로 환원되는 떠남가고 오는 것이그저 한가지인길고도 오랜 생(生)힘겨운 우리 인생에 망명지가 있을까. 어디를 가도 거기가 거기고, 언제나 똑 같은 자리로 환원되는 떠남이라는 시인의 육성에서 길고도 힘겨운 생이 길을 느끼게 해준다. 어디에도 망명지가 없는 우리네 한 생에 대한 허망함의 인식 속에는 극복을 위한 발버둥이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
2021-01-13
내가 맑고 고요한 강을 노래하고돌아서면, 강은붉은 홍수의 강이 되어 웃고 있다내가 절망의 시를 쓰고돌아서면, 시는맑은 별빛이 되어 나를 보고 있다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건시시각각 죽어가고 있기 때문나 아닌 나와의 다툼에서찾을 수 있는 나,힘겹게 걸어온 걸음들이오히려 다정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스스로 만든 틀 속에 자세를 잡고돌아보면, 나는전혀 다른 모습으로 저만큼 가고 있다맑고 고요한 강이 붉은 홍수의 강이 되고, 절망의 시가 맑은 별빛이 된다는 시인의 말에는 우리가 방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현대인들은 사랑과 그리움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성숙한 실존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
2021-01-12
한번 성질 내면온 산 다 뜯어먹어도 시원찮지만지금 그 성질 많이 눌러놓고 있지슴베 곧은 조선낫 들게 갈아이 산에서 번쩍저 산에서 번쩍온 산기슭 뻐들어가는 칡넌출 후려가면낫 얇은 까끄랑 왜낫들감히 따라들 어림도 못하지(….)밀어 깎는 풀낫 갈대 베는 벌낫담배 귀 따는 담배낫백정들 눈물로 고리 짜던 버들낫반달 같은 논배미의 반달낫물음표의 옥낫 왼손잽이 왼낫안 쓸 때 녹 낄라 조심조심숫돌에 매우 갈아 기름 먹여 걸어두게배고플 때 무깎기 제격이듯더부룩한 삼팔선 풀 깎는 날 꼭 있으리니농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인 낫에 대한 나열이 눈물겹다. 원죄처럼 타고난 농투성이들의 힘겨움이 시 전체에 배어 있다. 삶의 간난(艱難)이 태산 같은데 낫으로 그 운명적인 가난을 베어버릴 수 없이 안고 살아온 세월을 푸른 날로 지켜봐 온 것이리라. 시인
2021-01-11
아침 산에 아버지가 있다억새풀 볏짚 냄새에도 아버지가 있다가을 들판에서까시래기 날리며 타작하던 냄새가 아버지가 누워계신 산에서 난다욕심 많은 아버지는 살아생전그 냄새마저도이 산에 데리고 왔다내 등에서 아버지 냄새가 난다아버지의 소소한 욕심 같은 것이내 몸에서도 흐른다내 몸엔 아버지가 있다어느덧 나도 중년의 억새풀이 되어쉰내 풍기던 아버지같이한 개비 담배연기에 청춘이 간다하산 길에 마주친 장 씨 영감그 몸에서도 아버지 냄새가 난다하회탈이 된 얼굴잘 익은 웃음, 잘 익은 슬픔이 보인다소나무 고목 밑둥치 같은허물어져 가는 육신을 이끌고혼자 쓸쓸히 경로당을 지킨다말없이 엎드린 바위는하고 싶은 말 다 뱉지 말고아끼며 살라 한다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말씀 하신다억새풀밭에서 아버지를 만났다이 땅의 모든 아버지들에게서 억새풀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닐까. 시인은 생에 대한 애틋함과 서러움 같은 것을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 다 뱉지 말고 아끼며 살라’ 하신 말이 가슴팍에서 눈물로 흘러내려 가슴 먹먹한 아침이다. 시인
2021-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