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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스플린

“그보다 더 추하고, 더욱 사악하며, 더욱 더러운 괴물이 있다. 비록 몸짓은 크지 않고, 큰 소리도 내지 않지만, 그는 한 번의 하품으로 세상을 삼켜버릴 수 있다. 그 괴물의 이름은 권태다.” 샤를 보들레르가 ‘악의 꽃’의 서시 ‘독자에게’ 마지막 부분에 남긴 구절이다. 위 구절은 근대 문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선언으로 평가받는다. 탐욕과 살인, 위선과 음란보다 더 위험한 것이 ‘권태’라는 그의 진단은 처음에는 과장처럼 들린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을 돌아보면 보들레르의 통찰이야말로 현대인의 정신세계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은 욕망과 권태 사이에서 흔들리는 진자와 같다”라고 했다. 욕망을 충족하면 만족할 것 같지만, 곧바로 권태라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괴롭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심심해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보들레르의 권태는 쇼펜하우어의 무료함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단순한 무료함도, 심심함도 아니다. 존재의 중심이 텅 비어 있는 상태이다. 살아있지만 왜 살아있는지 모르는 상태, 목표는 있으나 의미를 상실한 상태, 군중 속에 근본적으로 고독한 상태를 의미한다. 쇼펜하우어의 권태보다 훨씬 음울하고 병적인 정서인 셈이다. 보들레르의 권태는 우울, 무력감, 공허함이 뒤섞인 감정, ‘스플린(Spleen)’이다. 이유 없는 우울, 존재의 피로, 세계에 대한 혐오, 자기 자신에 대한 권태, 죽음에 대한 은밀한 동경이 스플린이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군중 속을 걸으며 현대인의 영혼을 보았다. 사람은 넘쳐 나지만 고독하다. 쾌락은 넘쳐 나지만 공허하다. 문명은 진보하지만, 삶은 의미를 잃어 간다, 이때 영혼을 짓누르는 검은 안개가 바로 스플린이다. 그의 시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이, 무거운 뚜껑처럼, 신음하는 정신 위에 내려앉을 때···.” 영혼 위에 납덩이가 올려진 상태이다. 스플린은 권태가 앓는 병이다. 지금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손바닥 위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며, 평균 수명은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 과거 왕족조차 누리지 못했던 물질적 편리함을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 우울, 불안 속에서 자살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 하며, 끊임없이 무료함과 공허함을 호소한다. 풍요 속에서 왜 불행한가? 보들레르는 ‘여행’에서, 인간이 끊임없이 새로운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이유를 묻는다. 인간은 늘 어딘가 다른 곳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직업, 새로운 권력, 새로운 부를 찾아 떠난다. 그러나 그 여행의 끝에서 발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권태 역시 함께 따라온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항상 따라오는 존재가 권태다. 삶은 권태라는 지옥 여행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권태가 없으면, 재미가 있겠는가. ‘권태라는 악’ 속에 서 피어나는 꽃이 우리네 인생이다. 권태가 없으면, 우리의 삶도 피지 않는다. 권태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그 한계 속에서 의미를 창조한다. “내 삶의 정원으로 오라/ 아름다운 꽃과 맛난 술이 넘쳐 나는 나의 정원으로./그러나 그대 권태가 오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공봉학 변호사

2026-06-08

사거리 절 잔치

절은, 자신을 내려놓거나, 대상을 존경하거나, 신을 섬길 때나. 감사의 표시를 할 때 보통 행하여진다. 수양, 존경, 신앙, 감사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고귀한 행위이다. 절에 대한 4가지 앙꼬를 떠올리면, 절은 아무 곳에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구걸을 위하여 절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몇 년에 단 한 차례. ‘선거철 절’이 그것이다. 이런 귀한 절이 선거철이 되면 마냥 넘친다. 평소에는 절을 받는 자들이 이때는 절을 하는 자들이 된다. 그들은 나를 향해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한 표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며 머리를 조아린다. 내가 가진 ‘한 표라는 대단한 권력’ 앞에 잠시 무릎을 꿇는 것이다. 받고 싶지 않은 절이지만, 그것도 나를 향해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그들은 나를 통하여 자신을 수양할 이유도 없고, 나를 존경할 턱도 없고, 나를 신처럼 경배할 리는 더욱 없다. 감사의 절은 내가 그들에게 한 표를 던져주었을 때 사후에 받는 것이므로, 표를 던지기 전이라 감사의 절을 받을 수도 없다. 설혹 절하는 그들에게 나의 한 표를 던졌더라도, 선거판이 끝나면 그들의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절을 받은 사후의 대가는 특이하다. 당선된 자들은 임기 내내 절을 돌려 받아 수십 배로 회수한다. 남는 장사다. 낙선된 자들은 다음 절판이 벌어질 때까지 자신이게 표를 주지 않음에 대한 서운함으로 원망의 세월을 보낸다. 괜히 찜찜하다. 사실 나는 그들의 절을 받을 준비가 전혀 안 되어있다. 받을 마음이 없다. 아니 받기도 싫다. 내가 받고 싶은 것은 그들의 절의 각도, 절의 횟수, 눈물의 양이 아니라, 정책의 내용, 문제 해결 능력, 도덕적 책임, 공적 기록이다. 평소에는 ‘내가 옳고, 내가 최고요, 내가 적임자’라고 외치는 그들이, 선거철만 되면 ‘제가 부족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읍소한다. 말투도 ‘내’에서 ‘저’로 바뀐다. 그들의 절은 자신을 내려놓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더욱 올려놓기 위함이다. 평소에는 원수처럼 지내던 사람조차도 한 표를 준다면 부처님 저리 가라다. 절의 방향은 아래인데, 그들의 마음은 위를 향한다. ‘한 표라는 신’을 경배하는 그들이 벌이는 사거리 신전은 수행자들로 넘쳐난다. 그들의 가사 장삼은 붉은색, 파란색, 하얀색 등등으로 형형색색이다. 교차로 신호의 색깔이 바뀌면 그들의 절의 방향도 달라진다. 언제 이러한 일사불란한 예의와 존경의 파티가 있었던가! 참으로 대단한 수행도량이다. 공자님께서 이 광경을 보면 ‘참으로 예가 대단하구나’ 하고 감탄하실 일이다. 공자님의 지고지선인 인의 결정판 극기복례의 생활 현장이다. 설날 세배를 드리던 순간의 절, 자신을 내려놓기 위하여 구슬땀을 흘리는 절, 신을 경배하기 위하여 몸을 낮추는 절은 신호등이 지휘하는 사거리 판에서는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가짜 수행자들에게서 절 한번 받았다고 나의 소중한 권한을 허투루 행사할 일이야 없겠지만, 인공지능이 인류를 이끌고 갈 이 시대에 벌어지는 사거리 광경은 참으로 가관이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도 모르고···. /공봉학 변호사

2026-06-0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 아홉 번째에서, 우리의 삶에 대하여, “한 번/ 단 한 번/ 우리도 한 번뿐이다/그리고 다시는 없을 이 한 번”이라고 노래한다. 그는, “다시는 오지 않을 이 삶을 그대는 충분히 사랑했는가”라고 이 노래를 통해서 묻고 있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우리의 삶에 대하여,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삶을/너는 다시 한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악마의 입을 통해 속삭인다. 그는,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삶을 사랑할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다. 단 한 번뿐이라면 삶은 그리 무거울 이유가 없을 것이요, 영원히 반복된다면 삶은 그리 가벼운 그 무엇이 아닐 것이다. 릴케에 의하여 깃털처럼 가벼워진 삶과 니체에 의하여 바위처럼 무거워진 삶 사이에서 고민한 책이 전 세계인의 애독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쿤데라에게 있어서 ‘존재의 가벼움’이란 그저 단순히 가볍고 자유로운 삶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불확실성과 허무를 가리키는 말에 가깝다. 인간의 삶이 단 한 번뿐이라면, 삶을 다시 살아 볼 수는 없다. 한번 선택하면 끝이다. 다시 실험해 볼 수도 없고, 비교해 볼 수도 없다. 쿤데라는, ‘단 한 번뿐인 삶이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리허설 없는 연극이자, 단 한 번의 공연으로 끝나는 인생. 그렇다면 무거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참을 수 없다는 쿤데라는, 책의 시작에서 느닷없이 존재의 무거움, 니체의 ‘영원 회귀’를 소환하여 ‘단 한 번의 존재’와 대비시킨다. 책의 구절은 대충 이러하다. “한번 생각해 보자/모든 것이 우리가 경험했던 그대로 반복되어야 하고, 그 반복 자체도 끝없이 반복되어야 한다면?/ 영원 회귀의 사상이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우리의 삶은 그 무거운 짐 위에서 비로소 충만을 얻는다/ 그러나 무거움은 정말로 끔찍한 것이며, 가벼움은 찬란한 것인가?/ 한번은 없는 것과 같다/ 단 한 반만 존재하는 것은 전혀 존재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영원 회귀와 삶의 일회성을 대비한 것이다. 한 번뿐인 삶은 반복 되지 않으며, 절대적 의미도 확실하지 않다. 불확실하고 덧없으며, 그러므로 깃털처럼 가볍다. 가벼움은 불안이다. 불안은 견딜 수 없는 것,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존재의 가벼움을 견딜 수 있는가. 그렇다고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면, 그것도 견딜 수 있는가. 하지만 어쩌랴. 삶은 가벼움이라는 날줄과 무거움이라는 씨줄로 짠 옷인 것을. 꽃이 슬픈 이유도 다시 피지 못할지 모르기 떄문이고, 사랑이 눈부신 이유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기 떄문이다. 이 덧없음 때문에 삶은 찬란한 것이다. 지금의 슬픔, 실패, 수치, 사랑, 병든 몸, 외로웠던 새벽들이 끝없이 되돌아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삶을 긍정해야 된다. 다만, 가벼움을 견디지 못해 현실을 감상으로 덮어버리는 의식의 마취 상태 속으로 도망쳐서는 안된다. 순수한 사랑, 정의로운 혁명, 고귀한 인생 따위의 가짜 무거움 “키치(쿤데라가 가벼움을 견디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 낸 가짜 무거움’이라는 뜻으로 사용한 용어)를 조심하자! /공봉학 변호사

2026-05-25

공봉학의 인문학 이야기..서양 철학은 붓다의 각주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라는 말이 있다. 플라톤(고대 그리스철학자·기원전 428년~348년)은 소위 ‘이데아론’으로 유명하다. ‘감각세계 뒤에는 영원하고 완전한 본질이 존재 한다’라는 것이다. 세계는 이데아를 복사한 것에 불과하며, 이데아에 충실한 복사본일수록 그 가치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 순위를 나열하자면, 최고는 이데아, 다음은 이데아를 복사한 복사본, 다음은 복사본의 복사본 순서이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Idea-Copy-Copy of Copy이다. 이데아가 ‘체리 따봉’이다. 이데아와 멀어질수록 그 가치는 떨어진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복사본의 복사본은 단순한 복사본조차도 흐리멍텅하게 만드는 거의 쓰레기 수준의 그 무엇인 셈이다. 플라톤은, ‘시를 쓰는 시인은 복사본의 복사본의 역할을 하는 자’이므로 없어져야 할 존재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하여 반기를 든 철학자가 있다. 플라톤에 있어 가장 비천한 것인 최후의 복사본은 복사본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진짜라고 주장하는 들뢰즈(프랑스 철학자·1925년~1995년)가 그다. 들뢰즈는 플라톤을 비판하는 것에 평생을 바쳤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최후의 복사본은 영어로는 simulacrum, 불어로는 simulacre(시뮬라크르)이다. 들뢰즈의 철학적 핵심 개념인 최후의 복사본인 ‘시뮬라크르’라는 불어식 발음이 일반적이다. 플라톤에게 노비 신분 취급을 받던 시뮬라크르는 들뢰즈에 이르러 왕으로 신분이 상승된다. 들뢰즈는 복사본의 전제로서의 원본인 이데아를 부정한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복사본은 스스로 생성된 것일 뿐, 원본으로부터의 복사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플라톤의 시뮬라크르는 원본에서 복사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르게 생성되는 것으로 ‘차이’를 본질로 한다. 원본의 부정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중세 교부철학의 밑거름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화된 것이다. 이데아론은 진리 체계와 현상계를 나누어 서열화함으로써, 이데아와 복사본들에 대한 ‘권력의 서열화’를 초래하였다. 이데아를 장악한 자들은 권력의 정점에서 온갖 영화를 누린다. 진리 체계가 서열화되어 있으므로, 그 체계 사이에는 억압과 폭력의 개입은 당연하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타락한 가짜 시뮬라크르를 복권하여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는 존재로 파악하므로써 권력의 서열화와 서열화된 권력 간의 폭력을 비판하였다. 지중해 연안에서 플라톤이 이데아를 외치고 있을 때, 동양의 인도에서는 모든 것은 변하며, 고정된 실체는 없다고 선언한 자가 있었다. 그가 붓다이다. 그는 이 세상이 아닌 저 세계에 원본 같은 불변의 그 무엇은 존재 하지 않으며, 우주를 주재하는 신 브라흐마의 속성인 아트만은 없다고 선언하였다. 세계는 원본에서 복사된 그 무엇이 아니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을 뿐이라는 연기론을 주장하였다. 절대를 부정하고, 오직 현실이 실재이며, 나머지(이데아조차도)는 모두 환·망·공·상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들뢰즈와 붓다의 교설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들뢰즈가 붓다를 읽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붓다를 웃긴 남자 플라톤. 그의 철학이야말로 붓다의 각주일지도 모른다. /공봉학 변호사

2026-05-18

나의 이름은 고독

언어의 탄생과 함께 나의 이름도 생겼다. 나의 이름은 고독. 사람들은 나를 힘들어하였다. 내가 태어날 때 ‘외로움’도 함께 태어났다. 외로움과 나는 닮았다. 사람들은 나를 외로움으로 착각했다. 외로움은 사람들이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리 떼처럼 끈덕지게 사람들 주위에서 배회하였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초대받기 전에는 사람들 주변에서 질척거리지 않았다. 하지만 외로움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나를 멀리했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은 나를 초대해 주었다. 그들이 나에게, ‘너는 외로움이라는 외피를 뒤집어쓴 멋진 친구야!’라고 속삭여 준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는 삶을 살았던 사람 A가 있었다. 그는 건강과 가정 모두 탄탄했고, 사교 모임과 취미로 일상이 바빴다. 그럼에도 그는 알 수 없는 외로움에 힘들어하였다. 주변에는 맛난 음식과 사람들이 넘쳐났으나 그의 마음은 공허하였다. 만남이라는 광장에서 위선과 거짓으로 상처받았으며, 바르지 않은 타협과 양보를 강요받는 것이 싫었다. 그러던 A가 갑자기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A는 아내에게 말했다. “음식을 적게 먹으면 건강이 좋아지고, 사람을 적게 만나니 마음이 편해져” A의 아내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A를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A는 좋아하던 몇 가지 습관을 정리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이 A의 주변에서 썰물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그들의 빈자리를 A는 명상과 독서 그리고 산책으로 채웠다. 아내의 의구심 가득한 곁눈질에도 불구하고 퇴근 후 A의 고독한 여행은 계속되었다. 고독이라는 연료를 태우는 자동차가 이끄는 자유와 행복으로의 여행을. 나 고독도 처음부터 고독은 아니었다. 외로움이었다. 시작은 외로움과 함께 ‘혼자 있음’에서였다. 나와 외로움이 길을 가다 갈림길을 만났을 때, 외로움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소음의 길을, 나는 침묵의 길을 선택하였다. 외로움은 군중 속에서 사람을, 소음 속에서 인정받기를 갈망하다 지쳐갔다. 하지만 나는 자기 자신에게 모든 걸 간직할 수 있는 사람 속에서 평화를 찾았다. 외로움에 지쳐 사람들이 무너지는 도시를 높은 곳에서 나는 보았다. 나는 ‘혼자 있음’이란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외로움은 여기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안다. ‘혼자 있음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나와 함께 친구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이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선물일지 모른다는 것을. 나의 친구 A는 어느 날 ‘고독이 외로움에게’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한 통 썼다. 그 마지막 부분은 아래와 같다. “외로움아/ 사실 나 고독은 너의 오랜 미래야/ 사람들이 너를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기 시작할 때, 그때 너는 서서히 나로 변할 거야/ 어느 봄날 저녁 혼자 마시는 차 한잔 속에서/ 아무 연락도 오지 않는 밤 창밖의 바람 속에서/ 한 권의 책을 덮고 오래 침묵하는 순간 속에서/ 너는 조금씩 나로 자랄 거야/ 잊지 마/ 혼자는, 결핍이 아니라 그저 공간이라는 것을/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깊이라는 것을/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늦게 도착하는 평화라는 것을/ 굿바이! 외로움/” /공봉학 변호사

2026-05-11

나는 과메기로소이다

나는 본래 꽁치였다. 넓고 깊은 푸른 바다에서 나름 삶을 살고 있었다. 물 밖의 세상은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알 수 없는 것에 이끌려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차가운 고체 덩어리 속에서 나의 육체가 굳기 전까지 아주 잠시 공기와 햇빛이라는 지옥을 경험했다. 나는 얼음덩어리들 속에서 잠들었다. 그때 내가 죽었었다는 것, 그 죽음이 냉동 상태였다는 것은 바닷가의 어느 위판장 바닥에 내가 내동댕이쳐졌을 때 비로소 알았다. 공기와 빛의 세상, 땅이라 불리는 그 견딜 수 없는 지독한 세계에 나는 툭 던져졌다. 늙은 어부의 손수레에 실리기 전까지는, 내가 사람이란 종으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것과 장차 대단한 신분의 소유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바닷가 어느 초라한 집 마당 한 구석에 도착하였다. 소금기 가득 머금은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닥치는 곳이었다. 기다란 막대 위에 나의 종족들은 나란히 걸렸다. 바닷속의 적당한 수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한의 냉기 속에서 차갑게 굳어져 갔다. 어부는, 해풍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우리들의 몸을 가끔 어루만지면서 장차 오게 될 ‘부활’을 미리 축복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과메기로 거듭 태어났다. 어둠이 내리던 어느 날, 나는 동료들과 함께 이름 모를 소주방 탁자 위에 통째로 올려졌다. 배추와 미역, 약간의 마늘과 쪽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몸을 붉게 치장할 초장과 함께. 내가 올려진 탁자에 세 남자가 둘러앉았다. 있어 보이는 한 남자가 이슬이 2병을 주문한 뒤, ‘과메기는 통째로 먹어야 제맛이지’ 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소주방 주인이 아첨하는 말을 들어보면,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이 지역의 중요한 임무를 맡을 후보를 점지하기 위하여 큰 도시에서 내려온 거물이다. 나의 동료들은 주인의 가위질에 두 동강이 나고, 있어 보이는 한 남자의 억센 손아귀에서 갈기갈기 찢어졌다. 심장의 피와 같은 붉은 색의 시큼한 초장에 버무려져 속절없이 세 남자의 검은 입속에서 소주와 함께 섞였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을 때, 소주잔을 들던 셋 중 가장 높은 남자가 갑자기 결심한 듯 이렇게 외쳤다. “그래! 후보는 바로 너야!” 주인의 가위질이 멈추고, 나는 식탁에서 해방되었다. 큰 남자가 나를 추천한 이후로 나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 중에도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 지저분한 기름기, 역겨운 비린내는 고급 로션과 향수로 도배되고, 맛이 간 눈동자는 외제 선글라스 뒤쪽으로 갈무리되었다. 높은 남자는 나에게 말했다.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저것들이 뭐 아는 게 있나. 너는 향수 뿌리고 선글래스 끼고 유세장을 돌면서 주먹으로 허공을 향해 어퍼컷만 날려!” 인간들이 지도자를 뽑는 방식은 가관이었다. 꽁치 세계에서는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한판의 개그. 높은 분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일부 제정신을 가진 자들이 과메기를 지도자로 선출할 수 없다고 목에 핏대를 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는 당선되었고, 높은 분으로부터 칭찬도 받았다. 앞으로의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지만, 높은 분은 대답이 없었다. 인간들은 나에게 표를 던졌을 뿐 아니라 아첨까지 하였다. 그들에게는 내가 사람인지 과메기인지는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 /공봉학 변호사

2026-04-27

나는 강아지로소이다

나는 살 만큼 산 개다. 나의 주인은 중년을 살짝 넘은 나이의 남자다. 내 집은 주인집 대문 옆에 마련되어 있다. 딱히 집이라 할 것도 없다. 시중에서 파는 가장 싸구려 플라스틱 개 집이다. 타인의 관심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주인의 성품으로 보아 신분이 미천한 견공인 나에게 대궐 같은 집을 마련해 줄 리가 없다. 덩치에 비하면 공간이 협소하고, 비가 오면 빗줄기가 안으로 날아들어 몸을 더욱 웅크려야 한다. 거기에 비하면 주인의 집은 대단하다. 목줄에 메이어 왼 종일 바라보는 주인집은 넓고도 상쾌하다. 주인의 하루는 나름 분주하다.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이웃들의 중얼거림을 나의 밝은 귀로 엿들은 바에 의하면, 시민들을 위하여 뭔가 큰일을 하는 듯하다. ‘정치인지 행정인지 뭐 이런 것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인은 비교적 일찍 집에서 나서는 때가 많다. 휴일도 없이 분주하게 다니는 것 같다. 귀가 시간은 대부분 늦은 밤이다. 절반 이상은 술에 만취하여 들어온다. 어떤 때는 대문 앞에서 대리운전 기사를 붙들고 한참이나 무언가를 하소연하기도 한다. 주인이 술에 취하여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주인의 여자는 나처럼 으르렁거리면서 주인을 대할 때가 많다. 거실의 창문이 조금만 열려 있어도 나의 대단한 귀는 부부의 으르렁거리는 내용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들을 수가 있다. 대부분 주인의 지나친 행사 참여나 과도한 음주로 인한 가정의 유기를 문제 삼는다. 그때는 문득 나도 주인으로부터 버려지는 유기견 신세가 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이날도 어김없이 주인은 만취 상태로 귀가하였다. 그런데 거실에서의 으르렁거리는 행사가 있을 거라는 나의 예상이 빗나갔다. 주인이 여자의 손에 끌려 거실 밖으로 나온 것이다. 여자는 주인을 끌고 나와 나의 면전에 앉히고서는 뜬금없이 나를 겨냥해 손가락 질을 하고서는 주인에게 한마디 뱉었다. ‘얘는 술은 안 먹자나!’ 여자는 횡하니 집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겨진 주인은 술에 취해 동공이 풀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래 마누라 말이 맞아. 나는 사람들에게 중독된 사람이야. 누군가 부르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사람들이 나를 찾아주지 않으면 사는 것 같지 않아.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어. 사실은 ’정치 정‘자도 제대로 몰라. 그저 표를 좀 얻을 줄이나 알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야. 사람들이 치켜 세워주는 분위기 속에서 나를 죽이고, 시간을 허비해. 매일 행사요, 술이니 가족을 돌볼 시간도 공부할 시간도 없어. 졸업하고 책을 읽어본 기억이 거의 없어.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아는 것처럼 말하고, 그들이 원하는 걸 해 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전부 개소리야. 차라리 너가 나가서 짓는 것이 나을거야" 그러고 보니 주인의 고백은 진실한 것 같았다. 지금까지 주인의 소포 중에 책이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나에게 소포가 온 적도 없었지만. 이웃 주민들의 수군거림에 의하면 주인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개소리만 한다고 하던데, 이날 주인의 독백은 내가 짖는 것보다는 더 나은 것 같았다. 참으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위 글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패러디 한 것임) /공봉학 변호사

2026-04-21

무위(無爲)의 미학

무언가 ‘해야만 되는 것’이 사람이다. 우리는 해야만 하는 습관에 길들여 있다. 그렇다.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안심한다. 계획을 세우고, 결과를 점검하고, 부족한 것을 채워 넣어야 한다. 삶은 늘 더하기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모든 걸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를 해결하고, 관계를 정리하고,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고 믿는다. 몸은 움직임으로, 마음은 생각으로, 이리저리 바쁘다. ‘하지 않음’이란 것이 있다. 짊어지려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결과를 통제하려는 긴장에서 풀려나, 잠시 생각을 멈추고, 몸을 가만히 둔다. 행위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다. 행위의 밀도를 낮추고, 필요 이상의 개입을 줄이고, 결과에 대한 집착을 조금 내려놓는 것. 그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망아지처럼 시도 때도 없이 움직이는 우리의 몸을 한번 붙들어 메어 보자. 잠시도 쉬지 않는 우리의 생각을 한번 멈추어 보자. 몸을 고요히 하고, 생각을 쉰다. 아! 나는 정녕 단 한 번만이라도 완전히 움직이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단순한 정지가 아니라, 모든 것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상태, 그것이 하지 않음이다. 하지 않음은 게으름이 아니다. 적극적 작용이다. 무언가를 더하려는 습관을 잠시 내려놓고,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 해보자. 무위란 단순히 하지 않음이 아니라, 억지로 하지 않는 상태 즉, 자아의 개입을 멈춘 상태를 의미한다. 무언가를 할수록 오히려 어긋나고, 물러날수록 도리어 맞아떨어진다. 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하게 되는 이치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때 변화는 일어난다. 억눌려 있던 것들이 풀리고, 흩어져 있던 것들이 제 자리를 찾아간다. 엉킴이 풀리는 것이다. 자연도 이러한 방식으로 움직인다. 계절은 서두르지 않고, 꽃은 강요 없이 피지 않는가. 어떤 것도 억지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모두가 제때 도달하며, 인간의 삶도 다르지 않다. 통제하려는 태도는 긴장을 낳고, 긴장은 다시 왜곡을 부른다. 반대로 조금 덜 하려는 태도, 조금 비워두려는 태도는 삶에 여백을 만든다. 그 여백 속에서 새로운 흐름이 생겨나는 것이다. 무위는 포기도, 무력함도 아니다.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선택이며, 이미 진행하고 있는 작용을 방해하지 않는 태도이다. 철학이 아닌 기술이다. 이 미묘한 무위의 감각을 익힐 때, 우리는 비로소 삶과 충돌하지 않고 함께 흐르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순간,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무언가를 설명하려 애쓸수록 본질은 멀어지고, 붙잡으려 할수록 흩어진다. 잠시 매려 놓고 생각을 멈춰보자. 흩어진 시선이 모이고, 지금 이 순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미 충분히 존재하고 있는 세계로, 말 이전의 자리로, 존재만이 고요하게 머무르는 그곳으로. 그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진리가 궁금한가. 그러면 잠시 아무것도 하지 마시라. 그 자리에 진리가 현현할 것이니. 고요히 앉아 오직 호흡에 집중하여 ‘알아차림’ 하자. “나는 숨 쉰다. 고로, 존재한다.” /공봉학 변호사

2026-04-13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포항 주변 바닷가 길과 산속 길을 드라이브하는 취미가 생겼다. 주말 하루는 차를 몰고 바닷가로 산속으로 떠난다. 정원 마당 정리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집사람은 커피를 내리고, 나는 음악을 탐색한다. 덕성리 마을을 나서 곡강천 입구에 도달하기 전까지 약 5분의 시간에 우리는 그날의 드라이브 코스를 정한다. 바닷가로 갈 것인지, 산속으로 갈 것인지. 남쪽으로는 흥환, 구만, 대보, 구룡포, 양포, 감포, 전촌 쪽 바닷가로 갔다가 돌아오기도 하고, 오천, 진전 고갯길 넘어 기림사길, 불국사, 보문단지 코스로 가기도 한다. 안계리 사골동 넘어 양동마을 쪽도 남쪽이라면 남쪽이다. 서쪽 산속 길은, 기계, 죽장, 두마 쪽, 기계, 죽장, 청송길 쪽, 유계리, 경북수목원, 상옥, 가사리, 입암길 쪽, 장사, 달산, 옥계, 부남 쪽이 주로 가는 길이다, 북쪽 바닷길은 강구에서 대진항으로 이어지는 블루로드 길이 단연 으뜸이다. 블루로드 길은 영덕에서 노물로 들어가는 길도 좋다. 가장 많이 다녀본 코스는 장사, 달산, 옥계, 가사리 코스이다. 절경이다. 옥계길을 가다 보면 중간에 계곡을 가로질러 하옥으로 가는 길이 있다. 넘어가는 고갯길 일부가 비포장길이 있기도 하고, 길이 험하여 집사람이 무서워하는 코스이기도 하다. 계곡을 따라 하옥을 가로질러 상옥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아름답다. 상옥은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멋진 동네다. 상옥에서 나가는 길이 4곳이다. 가장 먼저 우측으로 청송 부남으로 가는 길이 있고, 좌측으로 청하 유계리로 넘어가는 길이 나온다. 거기 삼거리를 지나 조금 더 가면 우측으로 가사리로 넘어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길이 가사천을 따라 죽장 입암리로 가는 길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길이다. 상옥의 남쪽은 성법리를 지나 기북 오덕마을로 이어진다. 상옥에서 성법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가을에 단풍이 절경이다. 봄날 곳곳이 벚꽃의 향연이다. 지금은 단연코 영천댐 ‘벚꽃 백리길’이다. 기계를 지나 죽장으로 가는 길에 정자리를 지나 자동리로 좌회전하여 쭉 가면 된다. 한때 자양댐으로 불린 영천댐 벚꽂 백리길은 대한민국 최고의 벚꽃 길이다. 벚꽃 시즌이면 매년 집사람과 2번 이상 가는 명소이다. 정자리에서 내려가는 길도 좋지만,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코스도 좋다. 임고에서 죽장으로 가다가 충효리에서 좌회전하여 보현산 천문대 쪽 별빛마을을 돌아 나오는 길이다. 오늘 당장 커피 한 통 챙겨서 출발해 보시길. 물론, 차 안의 음악 중, 우순실의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는 필수다. ‘돌아보지 말아요/ 멈춰 서지 말아요/ 지난날들일랑 기억하지 말아요/ 떠난 내 뒷모습 정말 보기 싫어/ 그저 조금만 더 울고 갈께요/쳐다보지 말아요 생각하지 말아요/이렇게 가슴이 타버릴 줄 몰랐죠/ 뒤돌아 간들 무슨 소용 있나요/그땐 정말 내가 바보였나 봐/ 이젠 내가 철이 든 거죠/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바람결에 띄울까 지쳐버린 마음을/ 어느 벚꽃이 흐드러진 날에’ 볼륨 UP!! /공봉학 변호사

2026-04-06

왕과 사는 남자 이우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관객 1400만을 돌파하였다. 이 영화가 나오기 11년 전, 단종이 묻힌 장릉의 무덤 앞에서 엄흥도를 소환한 사람이 있다. 시인 이우근이다. 시인의 첫 번째 시집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첫 페이지에 ‘장릉(단종의 무덤)에서’란 시가 그것이다. 장항준 감독이 이우근 시인의 시를 보고 영화 ‘왕사남’을 만들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신기하게도 영화 ‘왕사남’과 시 ‘장릉에서’의 싱크로율은 거의 100%이다. 거두절미하고 시를 감상해 보자. “엄흥도는 생각했다/ 스스로의 불심검문이 가장 어렵고 가장 사소하나 가장 의로운 일은 들의 풀꽃처럼 지천에 널려 있어, 선택하지 않으면 시간을 비켜 가리라/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 짚신을 끌며 지게를 메고 자못 비장하지만 비루한 본성은 감출 수가 없었다/ 껍질을 벗고 나면 반상도 남루인 걸 주검에 꽃필 일이야 없겠지만 어린 생애는 그래도 빛을 잃지 않고 꿈길을 기웃거리다 내 곁으로 왔다/ 이것이 왜 나의 운명인가, 그의 어린 아내의 초조한 눈빛이 더욱 사무친다/ 아픈 것은 어찌 됐던 급한 대로 닦아주고 여며 주면 마음이야 편할 것이다/ 몸속의 피가 묽어지도록 비를 맞으며 개울을 건너는 것은, 취모검 위로 맨발로 걷는 듯 불의한 사람의 강을 건너는 마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에 동행하는 심정은 낯설고 황망하다/ 그러나 일말의 동정이 아니라 물려받은 유산이 대책 없이 착함이라/ 이만큼 살아온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작은 역사를 세우는 것도 별로 손해되는 일은 아니리라/ 어린 손의 한기는 그 생애만큼 차갑고 본성에 가까운 그리움에 지친 저 감은 눈은 이미 많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새벽이 오기 전에 저 어린 나랏님은 다른 세상의 문을 열리라/ 많은 이별에 지쳐 떠나는 길도 더디기만 할 것인즉 오히려 남은 사람의 슬픔의 몫이 더욱 비참하다/ 그것을 나는 아무도 몰래 가슴에다 묻는다/ 나 같은 아랫것에겐 변절도 사치, 애초 그 뜻도 몰랐다/ 엄흥도는 그렇게 생각했다”-이우근 시 ‘장릉에서’ ‘왕사남’을 보신 분들은 위 시의 주제가 영화의 전편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손의 한기는 그 생애만큼 차갑고 본성에 가까운 그리움에 지친 저 감은 눈’의 구절을 읽노라면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는 영화의 장면보다 더 애절하다. 이우근은 포항에서 태어나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에서 글과 사람을 배우고 튼튼하게 인생의 바닥으로 나섰다. ‘문학선’으로 등단한 이후 시집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을 내었다. ‘숙자는 힘이 세다’ ‘죽여 줄께요’ ‘라이더’ 등 그의 시에 숨은 주제는 모두 사람이다. 예금통장은 엄두조차 내질 못하는 사람들의 질경이 같은 삶들을 지고(高)는 아니더라도 지선(善)의 자리에 놓는다. 그의 시는 읽는 내내 아프다. 그러나 시가 끝날 때면 알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죽음 하나만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단종처럼 사는 남자. 시인 이우근이다. 헐벗은 광야를 지나 치유의 숲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공봉학 변호사

2026-03-23

불행해질 권리

헉슬리는 자신의 저서 ‘멋진 신세계’에서, 인간성이 거세된 몬드 총통에게 야만인 존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안락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신(神)을 원합니다, 시(詩)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善)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불행해질 권리를 원합니다” 1932년에 헉슬리가 집필한 대표적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는 기술, 과학, 쾌락, 통제가 결합 된 미래 사회를 통한 인간의 자유와 행복에 관한 본질을 질문한 책이다. 전쟁도, 빈곤도, 갈등도 없는 공동체는 모두가 똑같이 안정적이다. 모두가 모두를 위해 존재 하고, 개인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가 생기면 행복 약 ’소마‘를 먹으면 된다. 우울도 권태도 없고, 철학도, 종교도 필요하지 않다. 공포가 아닌 쾌락을 통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세계. 결국은 통제까지도 사랑하게 만든다. 자유, 비판, 고통을 포기하고 얻은 대가가 진정한 행복인지에 대하여 철학적 경고를 던진 책이다. 신세계의 미래는 어쩌면 현대판 기술주의의 세계일지 모른다. 민주주의의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기술주의‘는, 사회 운영을 기존의 정치제도가 아닌 기술에 맡겨야 한다는 사상이다. 정치인이 아닌 과학자, 엔지니어, 전문가가 사회의 운영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를 정치의 영역이 아닌 기술적, 합리적 관리 대상으로 보는 정치철학이다. 사회문제는 기술의 문제이며, 전문가가 데이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최적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본다. 기술주의는 20세기 초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한 후 1930년대에는 경제를 화폐 대신 에너지 단위로 계산하자는 소위 기술주의운동까지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충돌하면서 쇠퇴하였다가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면서 오늘날 다시 등장하고 있다. 데이터 기반 행정, 알고리즘 정책, 인공지능 의사결정, 중앙은행의 기술관료 통치들로 대표되는 기술주의 가버넌스의 등장이 그것이다. 민주주의가 이념, 선동, 분열, 감정에 의하여 파괴되는 장면들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하였다. 기술주의가 민주주의의 이러한 비합리적 요소에 의하여 흔들리지 않는다면. 경험과 전문성을 가진 엔지니어들이 과학적 합리성의 바탕에서 소모적 정치 논쟁을 뛰어넘어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문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인류는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까. 최근 ’미국을 누가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 중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팔란티어의 피터 틸이 기술주의의 중심에 선 자들이다. 이들은 기술을 신봉한다. 특히 틸은 민주주의는 더 이상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민주주의를 의심한다. 틸은 기술이 정치보다 중요하며, 현대 민주주의는 혁신을 느리게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이 권력으로, 데이터가 통치로, 알고리즘이 의사결정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기술주의로 전 세계를 하나의 운영체계로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보 권력의 집중과 알고리즘 통치는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와 충돌하게 된다. 헉슬리의 신세계와 틸의 기술주의가 묘하게 겹치는 시대가 왔다. 기술주의의 시대를 목전에 두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 내면의 병든 곳을 치료하는 약은 소마가 아니라 고통이요, 슬픔은 기쁨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공봉학 변호사

2026-03-16

인간 말종과 수정구슬

폭탄이 인간의 생각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인간 말종 트럼프와 네타냐후가 벌이는 이란 공격의 배후에는 인공지능 시스템 팔란티어(Palantir), 앤스로픽(Anthropic), 라벤더(Ravender), 가스펠(Gaspel)이 있다. 21세기 전쟁과 권력의 중심에는, 더 이상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정보와 그것을 해석하는 인공지능이 있는 것이다. 그 상징적 인공지능 기업들 가운데 하나가 팔란티어다. 팔란티어는, 소설 ‘반지의 제왕’에서 모든 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수정구슬’을 뜻한다. 피터 틸은, ‘데이터를 이해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팔란티어를 창업했다. 핵심 플랫폼인 고담(Gotham)과 파운드리(Foundry)를 통해 위성, 드론, 금융, 통신, 행정 데이터 등 수많은 정보를 하나의 ‘존재론적 지도(Ontology)’로 엮어낸다. 단순한 데이터 분석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관계와 구조를 모델링하는 작업 즉, ‘현실의 사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묻고 답하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문제 삼는다. 어떤 조직도, 변수를 가진 수많은 데이터를 종합하여 명쾌한 결정을 내리긴 쉽지 않다. 회사의 경우, 매우 복잡한 사업계획에 대하여 전 간부들이 몇 날 몇 일을 심사숙고하여 밤샘 회의를 하더라도, 그 결정이 실패할 확률은 여전히 높다. 만약 그 결정이 늘 90% 이상 정확하다면 회사는 망할 일이 없지 않겠는가. 수많은 데이터를 종합하여 각 데이터가 가지는 의미를 정확하게 분석한 다음 최적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수정구슬의 주장이다. 군사 영역에 있어서 수천 개의 목표물 가운데 공격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금융 영역에 있어서 수많은 거래 패턴을 분석하여 위험과 기회를 판단한다.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으며, 테러를 막을 수 있으며, 질병을 예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의 운영체계(OS)인 셈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으로부터 ‘의사 결정권’을 넘겨받은 시대가 왔다, 인간은 더 이상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경정을 ‘승인’하는 존재가 되었다. 지도가 없던 시대에서 지도가 탄생한 시대가 된 것처럼, 인공지능이 세계의 사건을 데이터 지도로 만들어 관계를 분석하고, 그 관계 속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계산하는 것이다, 데이터가 권력이 되는 시대에 이러한 플랫폼은 단순한 기업이 아니라, 사실상 세계의 구조를 해석하는 기관이 된다, 수정구슬 팔란티어는 단순히 새로운 기업의 등장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전환 신호이다. 오늘의 푸른빛 수정구슬이 빛을 잃더라도, 내일 또다시 붉은 빛의 수정구슬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데이터 플랫폼이 새로운 제국이 되려고 하려는 이 시대에, 두 인간 말종이 승인한 이란 폭격이라는 결과물을 전 인류가 두 눈으로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과거의 제국은 영토의 지배를 원했지만, 미래의 제국은 데이터 관계망의 지배를 원한다. 푸른 빛 수정구슬의 소유자가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 인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수정구슬의 신세계가 빛의 세계 일지, 어둠의 세계 일지 판가름 날 순간이 멀지 않았다. /공봉학 변호사

2026-03-09

매화

매화. 그 무경계의 향기. 열다섯 해 전 우리 가족은 층과 층 사이에 갇힌 사각의 콘크리트 박스를 떠나 산자락으로 몸과 마음을 옮겼다. 흙 내음과 새 소리로 아침을 맞이하였다. 엘리베이터 버튼 대신 흙 마당 길을, 베란다 화분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땅을 얻었다. 그때는 ‘이사’라고 불렀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었다. 위로 쌓이던 삶이 옆으로 펼쳐지는 그런 일이었다. 막내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수백년 째 내려온 학성 이씨 종가 집 터를 고르고, 집부터 지었다. 집을 짓고, 담장을 치고, 나무와 꽃을 심는 순서였다. 정원은 내 손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서두를 일이 없었다. 담장을 치고 큰 돌들을 여기저기 던져 놓은 후, 군데군데 소나무를 몇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나서 가장 먼저 마당에 들인 꽃나무가 매화이다. 정원은 시간이 쌓이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정원의 서사에는 거창함이란 없다. 나무를 심고, 꽃을 심고, 물을 주고, 가지를 쳐주면 그만인 일이다. 잡초를 뽑는 일조차도 즐거움이요, 운동이다. 그렇다! 정원은 반복의 기록이다. 아파트에서의 삶이 성취와 속도의 문법이었다면, 산자락의 삶은 기다림과 느림의 문법이다. 꽃은, 명령으로 피지 않으며, 물을 준다고 곧바로 응답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나는 내 나름으로, 그렇게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갈 뿐이다. 열다섯 해가 지나가는 동안 매화는 훨씬 단단해졌다. 줄기는 굵어졌고 가지는 단단해졌다. 해마다 같은 시기에 꽃을 피우고 향기를 드러내지만, 매년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어떤 해는 위로였고, 어떤 해는 설레임이었다. 올해는 향기가 유난하다. 뿌리 주변을 블록으로 덮어주어서 그런지 지난해보다 꽃이 더 풍성하고, 향기가 더 진하다. 늦은 밤, 달빛 아래서 집사람과 한참이나 이 녀석 근처에서 놀았다. 매화는 새해 정원의 첫소리이자, 그림이다. 향기가 소리가 되고, 향기가 그림이 된다. 겨울의 가장자리에서 피어나 봄을 재촉한다. 매화 향기는 소리보다 멀리 가는 노래이다. 성취의 표지가 아닌 견딤의 미학이다. 알 수 없는 깊이의 흙 내음을 이렇게 아름다운 향 기로 바꾸어 대지 위로 뿜어 올리다니!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피어나므로 경계가 없는 꽃이 매화이다. 겨울의 꽃도 아니고 봄의 꽃도 아닌 꽃. 겨울과 봄의 중간에서, 추위와 온기의 중간에서, 침묵과 향기의 중간에서, 바람과 고요의 중간에서 그렇게 피는 것이다. 안과 밖, 중심과 주변, 성공과 실패, 옳음 과 그름의 경계를 자신만의 향기로 지워버리는 꽃. 매화가 핀다 해도 겨울이 패배하지도, 봄이 승리하지도 않는다. 겨울이 봄을 초대하였음을 꽃과 향기로 알려주는 것이다. 옛 성현들은 매화를 군자의 절개로 여겨 추운 겨울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강인함을 칭송했다. 퇴계 이황은 ‘매화는 천하의 으뜸’이라 말하며, 그 청빈한 기상에서 학문의 길을 보았고, 선비들은 매화 가지 하나에도 인격의 표상을 새겼다. 경계에서 피어나는 무경계의 꽃. 그대가 담을 넘고 마당을 가로질러 열린 창틈으로 스며들 때, 나는 커피를 내리지 않겠 습니다. /공봉학 변호사

2026-03-02

행복은 예약을 받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좋은 순간들’이 있다. 이때,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해도 좋다. 행복을 정의할 순 없지만 ‘행복해’라고 말할 수 있음이 행복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아주 가끔씩 ‘이 순간이 행복해’라고 하지만, 내면의 행복은 아쉽게도 늘 먼 미래에 있다. 결코 맞이할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왜냐면 우리 모두 ‘파랑새 증후군’ 환자이므로. 행복은 향수와 같아서 자신에게 먼저 뿌리지 않고서는 남에게 향기를 풍길 수 없다. 도달해야 할 경지가 아니라, 지금 느끼는 상태이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은 없다. 행복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축적된 미세한 순간들의 감각이다. 삶의 여정에서 매 순간순간 경험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행복은 매 순간 내 몸이 우주와 교감하는 방식인 셈이다. 모닝커피 한잔의 향기, 퇴근길 노을, 지나치는 행인의 미소, 동료들과의 농담, 아내가 차린 조촐한 밥상, 행복이 아닌 것들이 없다. 행복을 추구하여 봤자, 그것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행복은 저기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이다. 그래서 행복을 좋은 ‘순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좋았던 순간들이 행복이었던 것을 몰랐던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가 좋았지’라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뒤늦은 중얼거림이 자신이 놓친 행복을 다시 찾아오지는 못한다. 행복을 미래로 예약하는 순간, 오늘은, 결핍이 된다. 행복은 예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장 경험만이 가능한 것이기에. 행복을 미래로 미루는 사람은 늘 조건을 기다린다, 건강해지면, 돈이 모이면, 아이가 크면···. 그래 봤자 삶이 이렇게 순서대로 진행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러한 조건이 갖추어진들 또 다른 조건이 기다린다. 행복을 목표로 정하여 둔 사람은, 그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 그 행복이 사라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행복은 추구할수록 멀어지고, 누릴수록 가까워진다. 추구함은 항상 긴장을 동반한다. 더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두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누림은 이완이다. ‘지금 여기’에 머무는 태도이다. 누린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태도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삶은 종종 결핍의 언어들로 가득하다. 아직 부족하다. 아직 멀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등등. 그러나 ‘행복을 누리는 삶의 문법’은 완전히 다르다. 지금 충분하다, 지금 숨 쉬고 있다, 지금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행복은 더 이상 미루어야 할 프로젝트가 아닌 것이 된다. 현대의 디지털 기술은 행복을 더욱더 복잡하게 이끄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을 끊임없이 비교의 장으로, 미래로 보낸다. 소셜 미디어 속에서 타인의 삶은 언제나 빛나 보이며, 행복은 지금 이 순간의 체험이 아니라, 미래의 전시가 된다. 자신의 행복을 즐기기에 앞서 타인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가슴에 담기에 앞서 카메라에 담는다. 파스칼은 인간이 불행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단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모든 불행은 방안에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공봉학 변호사

2026-02-23

침묵이라는 말

침묵은 들리지 않는 말이다. ‘침묵은 금’이라는 그럴싸한 경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은 언제나 의심받아 왔다. 대화 중 침묵은 단순한 소리 없음이 아니다. 침묵이 ‘말하지 않음’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로 이해되는 순간, 침묵 속에는 질적으로 다른 두가 지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독백적 침묵’과 ‘대화적 침묵’이 그것이다. 독백적 침묵은 상대의 말에 대한 회피, 무관심, 무책임의 태도이고, 대화적 침묵은 상대의 말에 대한 경청, 숙고, 책임의 태도이다. 독백적 침묵은 대화를 단절하는 침묵이다. 이 침묵은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미 결론을 내린 주체가 더 이상 응답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 때 나타난다. 겉으로 보면 말이 없지만, 실제로는 내면에서 독백이 멈추지 않는다. 상대의 말은 이미 무효화 되었고, 응답은 예정에 없다. 이 침묵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말 없는 선언이다. 더 들을 것도, 더 바뀔 것도 없다는 확신 위에서 유지되는 무거운 고요함이다. 이러한 침묵은 숙고의 시간이 아니라, 배제의 기술이다. 질문 앞에서 답을 말하지 않으며, 호소 앞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방패로만 사용한다, 단순히 말하지 않음이 아니라, 응답 가능성 자체를 제거하는 행위이다. 독백적 침묵은 대화의 거부이며, 언어의 윤리를 포기한 상태이다. 대화적 침묵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이 침묵은 말의 실패가 아니라, 말의 책임을 자각한 결과이다. 아직 충분히 듣지 않았음을, 아직 응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나의 말이 상대방에 의하여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다는 선언이다. 대화적 침묵은 열려 있는 상태다.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더 듣기 위해, 더 숙고하기 위해, 그리고 내 말이 불러올 결과를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 위한 선택된 침묵이다. 소위 ‘대화주의’의 창시자 바흐친(Mikhail Bakthin·러시아 철학자·1895-1975)은 “하나의 목소리는 아무것도 종결시키지 않으며,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최소한 두 개의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말은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인식 속에서 생겨난 절제의 기술임을 통찰한 것이다. 거울 없이는 그 잘난 콧잔등 하나 몰 수 없는 게 인간이다. 말은 언제나 타자의 응답을 전제로 할 때 의미를 갖게 된다. 타자의 응답을 전제하지 않은 말이 의미를 잃듯 침묵이란 말 또한 마찬가지다. 대화란 어떤 주제에 대한 결론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이다. 나의 침묵이 상대의 응답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는가는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응답을 상상하지 않는 침묵은 대화를 파괴한다. 사적 대화 중에서, 공적 담론의 장에서 끝까지 침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왜 말하지 않을까. 금과 돌이 쉽게 구분되듯 침묵의 정체 또한 쉽사리 들킨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침묵을 금으로 만들지 돌로 만들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공봉학 변호사

2026-02-09

빌어먹을 이 한마디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고? 그렇다면 사랑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할지 모른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기에. 사랑의 완성이 있을까. 아마도 그런 건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평생의 동반자로 맞이하는 의식을 치를 때, 우리는 이를 ‘결혼식’이라 부른다. 결혼식은, 결혼이라는 배가 ‘사랑의 실천’이라는 짐을 선적하고 이제 막 항구를 출발할 때 울리는 뱃고동 소리다. 현대의 결혼식은 늘 같은 장면으로 시작된다. 같은 음악, 같은 걸음걸이, 같은 색의 옷, 같은 멘트···. 사회자는 외친다. “오늘부터 신랑, 신부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너무나 익숙하고, 정겨운 이 외침에 우리는 단 한 줌의 의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동한다. 그래 맞아! 결혼은 두 사람이 비로소 하나 되는 것이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두 사람이 하나 되는 것이 진정한 결혼의 의미일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결혼 생활들이 침묵 속에서 흔들리는 것일까. 하나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식이 끝나면, 조명은 꺼지고 하객들은 모두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남겨진 두 사람은 이제부터 ‘결혼이라는 집’에서 각자의 리듬으로 새로운 하루하루를 산다. 생각의 방향도, 피로를 느끼는지 지점도, 침묵을 견디는 방식도 다르다. 연애의 시기에는 이러한 ‘다름’들이 매력이 되었지만, 결혼의 집에 들어서면 불편함으로 바뀐다. 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냐고, 뭐가 그렇게 피곤 하냐고 따져보지만, 결국은 각자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침묵한다. 하나 되어야 할 두 사람은 여전히 각자이다. 결혼의 집이 안락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그 빌어먹을 사회자의 멘트 때문일지 모른다. ‘오늘부터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말 한마디 이후로 두 사람은 하나를 향하여 여기까지 달려왔지만, 아직도 하나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두 사람이 하나 된다는 이 말이 진실일까. 거짓일까. 그 답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다 안다. 그 누구도 둘이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지구상 80억의 인간은 그저 다른 사람들일 뿐이다. 사랑의 결실이 이루어지는 숭고한 결혼식장의 신혼부부에게 가장 축복된 말이 ‘하나 되었다’라는 말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말은 결혼에 대한 최고의 찬사 그 이상이 되면 안 된다. 식장에서 터지는 축포처럼 ‘한 번만’ 사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축포 소리와 함께 사라져야 한다. 이 말이 결혼이라는 집속까지 숨어들면, 신전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혼은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겠다는 언약이다. 결혼이란 집은, 서로 다른 얼굴의 사람까지 편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피곤한 얼굴로 들어와도 괜찮고, 설명하지 않아도 쉴 수 있으며, 무방비 상태에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공간. 두 사람이 지은 신전. 그곳이 결혼이라는 집이다, 그 집에 대하여 칼릴 지브란 선생은 ‘예언자’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함께 서 있으십시오. 단,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됩니다. 신전의 기둥은 제각각 떨어져 서 있는 법. 떡갈나무와 삼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서는 자랄 수 없으니까요.”라고. 신혼집에 들어서는 신혼부부는, 이 빌어먹을 말이 신혼여행 가방 속에 숨겨져 있지 않은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공봉학 변호사

2026-02-02

진실과 허구에 대한 불편한 진실

진실은 복잡하지만, 허구는 간단하다. 진실은 불편하지만, 허구는 편안하다. 진실은 발견하기 어렵지만, 허구는 만들기 쉽다. 진실은 복잡하다. 단일한 원인이나 선명한 결론을 주지도 않는다. 진실 속에는 여러 조건과 맥락이 얽혀있고, 발견까지는 시간이 걸리며, 마주하게 되더라도 종종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무엇보다 진실은 불편하다. 책임을 요구하고, 믿어온 것들을 수정하라고 명령하며, 때로는 우리가 속해 있던 집단의 안락함을 파괴하기도 한다. 반면, 허구는 단순하다. 시작과 끝이 분명하고, 선과 악이 갈라져 있으며,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즉시 판별된다. 허구는 고통을 요구하지 않으며, 불편한 자기 점검 대신, 감정적 안정을 제공한다. 인간이 진실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반복적으로 허구를 선택해 온 이유이다. 진실과 허구는 ‘정보’라는 네트워크에서 작동한다.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저서 ‘넥서스’에서, 진실과 허구의 양면적 속성에 기반하여, 정보의 목표가 오직 ‘진실 발견’에 있다는 순진한 정보관을 비판한다. 정보네트워크 속에는 진실 발견 이외에 ‘질서유지’라는 매우 중요한 속성이 있음을 통찰한다. 정보의 주된 임무가 진실 발견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진실 발견에서 ‘지혜와 힘’이 나온다고 믿지만, 이건 매우 순진하다는 것이다. 진실 발견과 더불어 질서유지라는 정보의 작용을 문제 삼는 것이다. 질서유지에서도 힘이 나온다는 것이다. 정보의 두 가지 기능 중 진실 발견 보다 질서유지의 작용이 더 큰 작용을 하는 경우, 이때 작동하는 정보가 진실에 기반하는지 허위에 기반하는지가 문제이다. 서글프게도(?) 역사적으로 많은 질서유지 기능의 상당 부분은 허구에 기반해 왔다. 정보의 숲에서 진실 발견과 질서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특히 권력자들은) ‘질서유지를 위하여’ 정보를 사실 그대로 전달하는 것 이외에, 허구, 환상, 선전, 때로는 새빨간 거짓말도 이용한다. 정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고, 현실을 조작하기도 한다. 진실은 조작하기 어렵지만, 허구는 조작이 쉽다. 진실은 모순된 데이터들을 함께 포함하고, 단일한 감정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즉각적인 행동 지침을 제공하지 않는다. 반면에, 허구는 몇 개의 감정적 연결만으로 강력한 서사를 만들 수 있고, 그렇게 생산된 서사는 빠르게 확산한다. 오늘날 인간들은 더 이상 개별 사실을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연결된 정보 묶음, 즉 서사를 소비한다. 알고리즘과 플랫폼은 이러한 경향을 극대화한다. 복잡한 진실은 클릭을 유도하지 못하고, 불편한 진실은 공유를 방해한다. 반면, 단순한 허구는 감정을 자극하고, 분노나 위안을 제공하며, 즉각적인 반응을 끌어낸다. ‘넥서스’는 이러한 반응을 학습하고 더 유사한 허구를 추천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 허구의 연결망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허구가 강력해지는 이유는, 인간이 거짓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감당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허구를 따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고통 회피다. 진실은 개인에게 책임을 묻지만, 허구는 책임을 외부로 돌린다. 문제는 언제나 ‘그 들’ 때문이고, 나는 피해자이거나 정의 편에 서 있다. 진실보다는 ‘허구의 질서’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 질서가 진실하든 말든···. /공봉학 변호사

2026-01-26

편견

사람들은 편견 속에서 허덕인다. ‘그럴듯한 생각’처럼 보이지만, 정의라는 가면을 쓴 채, 괴로움이라는 달갑지 않은 속을 품고 있는 것이 편견이다. 편견의 사전적 의미는,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 충분한 근거 없이, 개인의 경험, 감정, 선입관에 따라 사물이나 사람을 한쪽으로 치우쳐 판단하는 생각이나 태도를 일컫는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의 두 가지, ‘공정하지 못하다’와 ‘한쪽으로 치우치다’ 개념 중,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정하지 못하다’ 에 이르면 편견이라는 개념의 속내가 복잡해진다. 공정하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편견 속의 괴로움을 들추기 전에, 공정하다는 것이 공정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인지 잠깐 살펴보자. 최근의 존 롤스, 로버트 노직, 마이클 샌달과 그 이전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홉스, 존 로크, 장자크 루소, 임마누엘 칸트, 존 스튜어트 밀 등의 고전 철학자들은 “정의란 무엇인가”를 탐구했으나, 시대적·맥락적 한계로 인해 완전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찾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이들의 정의에 관한 개념들은 그때는 맞았더라도 지금은 틀리는 것이다. 공정하다는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공정하지 못하다’라는 ‘편견의 한 조건’은 사전적 의미에서 제거되어야 할지 모른다. ‘공정하지 못함’이라는 조건을 편견의 세계에서 제거하면, 남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침’이다. 사실, 어떤 견해이든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다. 이것은 견해가 갖는 속성이기도 하다. 그렇다. 편견은 한쪽으로 치우친 견해다. 고로, 모든 견해는 편견이기도 하다. 그 견해가 비록 공정하다고 하더라도,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것은 편견이 되는 것이다. 견해는 드러내는 순간, 한쪽으로 치우치게 마련이고, 편견이 되는 것이다. 이런 편견이 왜 괴로움이 되는가. 그것은 치우침의 ‘계속됨’ 때문이다. 견해 자체가 어떤 조건 지워진 상황에서 ‘일시적 치우침(견해)’이면, 그것은 편견이 아니라, ‘지혜’일지 모른다. 한번 멋지게 써먹고 버리면 그만인 것을 끝까지 짊어지고 가는 일이 허다하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견해가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때, 편견은 ‘지혜라는 가면을 쓴 집착’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바른 견해일지라도 견해에 대한 집착이 계속되어 다른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그 견해는 괴로움이 되어, 나를, 나의 주변을, 힘들게 한다. 세상 만물이 변화하고 흐른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자, 인간사의 기본 도리이다. 노자의 ‘상선약수’,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그러하다. 고정되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변화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편견이 자신의 삶을 짓누르고 있지나 않은지. 편견 속에서 허덕이고 있지나 않은지. 편견의 노예가 되어 오늘도, 내일도, 여기서, 저기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지나 않은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밤낮없이 분노의 화살을 날리고 있지나 않은지. 하지만, 잊지 말자. 내가 쏜 편견이라는 분노의 화살은 상대에게 도달하기 전에 나의 심장을 먼저 관통한다는 사실을. /공봉학 변호사

2026-01-19

종이 내음

어린 시절, 새 책 내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잠잘 때도 껴안고 잠들었었다. 나에게는 몇 가지 냄새의 화석이 있다. 새 책,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보리밭, 해 그늘지는 늦여름의 논둑 길. 이 아이들이 ‘화석의 근거지’다. 프로스트가 홍차에 찍어 먹은 마들렌 향기의 추억처럼. 새 책의 종이가 나에게 선물한 ‘내음의 기억들’은 언제나 뜻밖의 경로로 나에게 들어왔다. 그렇다. 기억은 언제나 뜻밖의 경로로 들어오는 것이다. 기억은 스스로 길을 선택한다. 새 책을 펼칠 때 코끝을 스치는 종이 내음처럼 아주 사소한 감각의 틈을 타서 들어오는 것이다. 냄새는 과거를 설명하지 않지만, 대신 과거를 통째로 데리고 온다. 설명 이전의 시간, 해석 이전의 삶이 코를 거쳐 한순간 현재로 쏟아져 들어와 나의 현재를 흔든다. 과거에 대한 설명은 생략된 채, 현재의 나를 한순간에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새 책을 펼칠 때면, 글보다는 종이 내음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건다. 그 냄새는 비슷하지만, 매번 다른 시간을 불러온다. 조그만 시골집 툇마루, 학교 도서관, 비 오는 날 카페 창가, 그때의 공기, 마음의 온도, 사유의 감촉 같은 것들이다. 그런 내음들은 설명된 적이 없다. 그저 스쳐 지나갔다. 그때마다, 내가 살아왔고, 살고 있음을 느낄 뿐이다. 새 책의 종이 내음이 유난히 애틋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 책을 펼칠 때, 종이 내음을 먼저 나의 심연으로 초대한다. 내 몸속 내음의 화석을 깨우기 위해서다. 코끝을 지나 폐부에 깊이 스며들어 나를 깨우기 전까지는, 책의 저자는 아직 책의 밖에 있다. 내음의 화석이 깨어나면, 읽게 될 가능성의 설렘과 지나가 버린 시간의 그리움이 동시에 밀려오게 되는 것이다. 서점에서 방금 사서 가지고 온 책이나 택배 상자를 열어 처음 손에 쥔 책을 펼칠 때, 아직 한 줄도 읽지 않았음에도 ‘성스러운 종이 내음의 영접’이라는 멋진 통과의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새 책 종이 내음은 마치 오래된 내면의 서가를 조용히 열어젖히는 열쇠와 같다. 첫 장의 내음이 스치는 순간, 시간은 사유의 강물이 되어 거슬러 흐르고, 잊혔던 순간들이 은은한 향기와 함께 다시 태어나 우리 존재의 근원을 깨우게 되는 것이다. 전자책은 이러한 통과의례가 없다. 종이는 사라지고 글만 남은 세계. 더 이상 후각이라는 감각이 작동하지 않는 곳. 냄새라는 기억을 통해 더 이상 과거의 어떤 것도 소환하지 않는 푸른 피 종족이 전자책이다. 종이책은 종이의 내음만으로 나의 생명을, 나의 영혼을 일깨워준다. 봄날 아지랑이 피는 들녘 초록의 내음처럼,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 아래 자라는 벼의 뿌리에 정화된 논물의 내음처럼. 그렇다. 독서는 종이의 내음과 함께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멋지고, 아름답고, 생명 가득한 기억들을 떠올리고 싶다면, 향기를 맡을 일이다. 책을 들고, 봄날 초록의 언덕길을, 여름의 숲길을 걸어가면 될 일이다. 책을 읽지 않아도, 봄의 풀과 여름의 나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아도, 대지의 여신은 오직 향기만으로 그대가 살아 있음을 노래해 줄 테니. /공봉학 변호사

2026-01-12

지금 여기에

‘신이 존재 하지 않는 곳’에서 삶을 산다는 것. 그것은 어떤 것일까. 홀로 가는 삶. 평안이 약속되지 않는 삶. ‘누군가 전부를 책임지고 있다는 믿음’에 기대지 않는 삶. 그곳에선, ‘모든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도 의미가 퇴색하며, ‘결국은 잘될 거라’는 위로도 사라진다, 신의 부재 속에 남는 것은, 설명되지 않는 사건들과 그것을 겪어야 하는 몸과 마음 뿐. 신이 부재한 자리에 선 인간은 더 이상 우주의 중심도, 누군가의 계획 속에 배치된 존재도 아니다. 오직 조건과 조건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하나의 사건일 뿐. 신이 부재한 그곳에 선 자는, 중심도 아니고, 선택받지도 않았으며, 특별하지도 않다. 의미는 더 이상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신이 부재한 자리의 도덕은 더 이상 명령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감각, 말과 행동이 일으킬 파문에 대한 감수성 그 자체다. 이곳의 도덕은, 신의 감시가 사라진 자리의 빛남이요, 신의 처벌이 전제되지 않은 확고함이다. 보상이 전제되지 않으므로, 도덕이라는 감각은 더 섬세해진다. 신이 부재한 자리는 변명도 없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무책임이 아니라, 삶을 더 조심스럽게 만든다. 매 순간의 선택은 신에게 보고되지 않으며, 오롯이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영원히. 신이 부재한 삶의 불안은 의미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계를 통제할 수 없음에서 오는 떨림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 고통을 정당화하지도, 의미로 포장하지도 않는다, 신이 부재한 삶에서는 평안은 목표가 아니다. 그저 우연히 찾아오는 방문객일 뿐. 움켜쥠을 놓을 때, 설명하려는 욕망을 멈출 때, 세계를 평가하지 않을 때, 평안은 그 틈으로 스며든다. 신이 부재한 삶은 불확실성의 바다를 향한 항해. 근거(신) 없음의 근거 위에서 공존한다는 공감은, 신이 보증한 형제애보다 더 조용하고 현실적인 연대를 낳는다. 신이 부재한 세상의 사람들은 깨달음도 완성도 구원도 말하지 않는다. 신을 떠난 생각은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며, 신을 떠난 불안은 더 이상 해답을 구하지 않으며, 신을 떠난 의미는 더 이상 강박에 시달리지 않는다. 이야기와 해답은 필요 없다.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설명의 여백, 의미의 틈, 침묵의 공간을 자신으로 채운다. 자기 삶을 설명해 줄 타자를 더 이상 찾을 필요도 없다. 근거 없이 살 수 있고, 의미 없이 무너지지 않으며, 구원 없이도 평안을 경험할 수 있다, 잠시 움켜쥐는 손이 풀릴 때, 설명하려던 입이 닫힐 때, 세계를 그대로 두는 용기가 생길 때 평안은 온다. 누군가 기도할 때, 누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 금식할 때, 누구는 먹는다. 누군가 신의 품에서 놀고 있을 때, 누구는 사람들 속에서 논다. 누군가 신을 찾을 때, 누구는 자신을 찾는다. 누군가 구원을 찾아 떠날 때, 누구는 지금 이 자리에 머문다. 그대는 누구인가? /공봉학 변호사

202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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