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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장규열 한동대 교수해를 넘기며 가슴 아픈 뉴스가 들려왔다. 입양한 어린아이를 때려죽인 양부모. 세상이 무너진대도 그럴 수는 없다. 그럴 만한 까닭은 도무지 안 보인다. 대학까지 나온 부부는 둘 다 목사님 자녀라고 했다. 교육과 종교는 어디까지 무너져야 하는가.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치지 못하는 학교와 교회는 어찌 입을 다물었는가. 개인의 잘못이라 비난하며 성찰없이 혀만 차고 말 터인가. 안타깝고 불쌍한 건 정인이의 어린 생명뿐일 것인가. 언론이 다루는 수다한 이슈들처럼 짧은 동안만 후루룩거리고 말지는 않을까. 피어나 보지도 못하고 한 아이의 온 세상이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아동학대.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따르면,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신고접수된 사례들이 2001년에 2천105건이었다가 2018년에는 2만4천604건에 이른다고 한다. 열 배도 넘게 증가한 셈이다. 신체학대, 정서학대, 성학대, 방임과 유기 등으로 구분되지만 정인이의 경우는 매우 복합적인 학대를 겪은 일이다. 부모가 아이들을 대하고 어른이 어린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문제는 없을까. 아동학대 경우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데이터는 우리 안의 인식이 나아지기 보다 부정적인 방향을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그러는 것일까.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 일일까. 폭력의 모습에 경악함을 넘어 아동학대를 근절하기 위하여 무엇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스페인 교육자 프란시스코 페레르(Francisco Ferrer)는 ‘권위에 의한 어떠한 억압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모든 폭력에 반대하였다. 그 어떤 선한 명분을 가진다 해도 아이에 대한 폭력은 나쁜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권위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인 교육을 주창하였으며, ‘폭력의 배제’가 교육의 방법이자 목표여야 한다고 했다. 우등생과 열등생이 존재하지 않으며, 수학을 잘 하거나 미술을 잘 할 뿐이라고 했다. 경쟁으로 휘몰아가는 교육에서 협력으로 함께 일어나는 교육을 선언하였다. 교육의 장에 서 보기도 전에 폭력으로 스러져간 생명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언론이 ‘아동학대’ 이슈를 붙들고 있는 데서 한 자락 희망을 본다.해결책언론(Solutions Journalism). 뉴스는 선정적, 충격적, 부정적이어야 한다고 인식하여, 보여주고 드러내는 데만 집중하는 언론행위는 독자를 피곤하게 한다. 2008년 미국 AP(Associated Press)의 발표에 따르면, 젊은 독자들이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고 휘발성이 높은 언론보도를 회피한다고 하였다. 오늘 독자들은 여러 이슈들에 대하여 시민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 사회가 제시할 접근방법은 무엇인지,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솔루션을 향한 지향점을 제안하는 언론행위를 기다린다.어린 생명의 희생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 아동폭력만큼 비열한 행위도 드물다. 교육과 종교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법과 제도는 어떻게 정비해야 하는지, 사회와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2021-01-06

이야기에 내일을 건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포항은 어떤 도시일까. 포항을 떠올리면 사람들은 어떤 상상을 할까. 거친 바다, 딱딱한 철강, 투박한 말씨, 거친 느낌 등이 아니었을까. 그랬던 포항이 바뀌어 간다. ‘문화도시’로 지정되었으며 ‘축제도시’로 풍성한 이야기를 담는다. 폐철도를 따라 만들어낸 철길숲은 도시에 숨길을 트이게 하였다. 바다와 육지, 도시와 사람이 함께 호흡하는 지역으로 다시 태어나는 중이다.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의 배경이 되어 전국적인 관심도 자아낸다. 포항은 산업경제도시에 더하여 문화관광도시로 변모해 간다.‘철강 다음은 무엇일까.’ 도시는 같은 질문을 십 년도 넘게 던지고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나라의 기간산업을 일으키는 토대를 만들며 분주했던 도시는 새로운 도약대를 찾느라 상상력과 창의를 모은다. 지역이 이제는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철강을 모티프로 사람을 모았다면 앞으로는 무엇을 테마로 흥미를 끌고 모여들게 할 터인가. 어떤 이야기가 있어 청년들에게 가슴이 뛰는 기회의 문을 열어줄 것인가. 문화를 주제로 노력을 기울인 끝에, 포항은 ‘경북콘텐츠기업 육성센터’를 유치하였다. 지역문화와 콘텐츠를 기르면서 안정적인 창업환경을 만들라는 명제를 짊어지게 되었다.숲길과 함께 물길도 트인다. 육지와 바다를 잇는다. 포항시는 도시하천의 복개 구간을 걷어내 생태하천을 만들 계획이다. 학산천, 두호천, 양학천과 칠성천의 옛 모습을 회복하여 이미 조성된 도시숲과 함께 시냇물과 숲이 도시에 어우러지는 자연환경을 되찾을 것이다. 천혜의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가 더할 나위 없이 버무려지는 흔하지 않은 지역이 되어갈 모양이다. 포항뿐 아니라 경북 전역에 이런 트렌드를 나눌 거점이 되어 나라의 문화지형에도 기여하게 될 터이다. 지나온 길이 가지는 의미가 깊을 뿐 아니라 미래지향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지역의 내일에 높은 기대가 걸린다.보이는 물건에 승부를 거는 시절은 저물어 간다. 보이지 않는 이야기에 내일을 거는 방향이 보이지 않는가. 끝내 손에 쥐는 물건이 있다고 해도 그를 움직이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콘텐츠기업을 기르겠다는 뜻은 이야기를 찾아내어 영향력과 경제성을 함께 만들어가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포항은 이제 상상력에 미래를 걸게 되었다. 바닷사람들의 거친 숨소리에서 이야기를 찾아야 한다. 철강을 다듬던 기억에서 이야기를 드러내야 한다. 고을마다 배어있는 옛날이야기의 가치를 다시 발견해야 한다. 센터를 세우지만, 이야기를 찾는 일은 사람들의 몫이 아닌가.콘텐츠에 기대를 걸지만, 문화로만 승부하지 않는다. 산과 바다, 사람과 이야기, 문화와 기술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나아가야 한다. 힘들여 잡은 기회로부터 구체적인 성과가 일어나도록 필요한 사람도 잘 찾아야 한다. 콘텐츠가 살아나는 길목에는 글로벌시장을 겨냥하는 열린 안목도 갖추어야 한다. 포항과 경북은 소프트파워를 창작해내는 거점이 되어 세계로 다가가는 중이다.

2020-12-30

늘 그래야 했던 연말은 없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12월은 늘 그랬다. 가까이 어울렸던 사람들과 떠나가는 한 해를 아쉬워하며 모이느라 바빴다. 오래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도 새해에는 자주 보자고 한 잔 기울이며 따뜻했다. 망년회와 송년모임이 줄을 이었고, 도시의 불야성은 아쉬움과 희망을 번갈아 목격하였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뜻을 담았다지만, 왠지 언제나 피곤한 뒤끝을 남기는 연례행사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보면 새해 첫 달의 절반쯤이 지나고 있었다.둥둥 뜬 느낌으로 지나가는 한 달. 가까워도 서먹해도 한자리에 모이면 들썩이는 분위기에 해가 저물어가는 한 달. 마지막 한 달은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도 했다. 이 땅에서 버티려면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들뜨고 설레며 즐길 만도 했다. 그러는 사이, 마음으로는 가장 가깝다면서 어쩔 수 없이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 연말연시 지치고 피곤한 몸과 마음을 겨우 추스르며 돌아보게 되는 가족. 으레 그곳에 있거니 해서일까 흥분도 기대도 별로 없는 가족. 아니 진짜로 바쁜 사람들은 새해 아침에도 돌아보지 않는 가족. 그랬던 가족과 함께할 기회가 왔다.코로나19. 모두를 ‘힘들게’ 하는 이 녀석이 희한하게도 ‘선물’도 한 자락 가지고 왔다. 근데 우선, 힘들다. 감염될까 아슬하슬하여 힘들다. 함부로 나다니지 못해서 힘들다. 정겹게 만나지 못하여 힘들다. 동네 가게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힘들다. 학교를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힘들다. 맨 앞에 서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힘들다. 그 틈에 정치가 끼어드는 것도 힘들다. 백신과 치료약은 어디쯤 오는지 살피면서 힘들다. 멀리멀리 떠나고 싶은 역마살이 힘들다. 힘들고 힘들어 코로나19가 얼른 지나갔으면 하지만, 애틋하게 돌아볼 식구들이 있어 따뜻하지 않은가.우리의 뉴노멀에는 ‘가족’이 들어가야 한다. 밖에서 바쁘다고 안을 돌보지 않았던 공허함을 없애야 한다. 말로는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라면서도 한없이 쫓기며 아내와 가족에게 무심했던 과오를 되짚어야 한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야 한다. 코로나19 탓에 아니 덕에 가족과 마주 설 시간이 길어지게 생겼다. 잃어버린 망년회와 송년모임을 투덜거릴 게 아니다.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겨울엔 접었으면 한다. 더 많이 만날 가족들에 집중하는 세모(歲暮)가 되었으면 싶다.스위스의 사상가 힐티(Carl Hilty)는 ‘바다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풍이 몰아쳐야 하는 것처럼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병의 홍수와 태풍같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고 했다. 인간다운 인간은 누구일까. 저 넓은 밖을 헤아리며 선한 일을 펼치는 인간다움도 귀하지만, 날마다 삶을 나누는 가족과 따뜻한 가슴을 함께 하는 인간다움이 먼저가 아닐까. 병을 통해 인간의 무지와 한계를 깨닫는다면, 이제는 가족과 함께 마음과 생각을 나누는 연말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 2020년의 세모는 가족의 소중함을 새롭게 새기는 따뜻한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코로나19가 지나간 다음에도 가족은 오래오래 남아야 한다.

2020-12-23

코로나블루

장규열 한동대 교수한 해가 저문다. 이제 곧 10대뉴스를 간추릴 터이다. 단연 1위는 코로나19가 아닐까. 설 명절 즈음에 찾아온 바이러스는 모든 뉴스를 삼켜버렸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보이지 않는 힘에 먹히고 말았다. 누구의 탓이냐 묻는 손가락질이 끊이지 않는다. 병걸려 죽으나 굶어 죽으나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절규마저 들리지 않는가. 만나고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관계와 소통이 낯설고 힘들다. 어렵고 고단한 언덕을 넘게 하는 즐거움을 이제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개인도 사회도 무섭게 가라앉은 한 해가 아닌가.국민의 건강은 정치가 아니다. 겨울로 들어서며 코로나19 상황이 더욱 어렵다. 최선을 던지며 막아내려는 의료진과 보건당국이 있다. 확진자 숫자에 흔들리기보다 일상의 안정을 유지하며 방역에 힘을 보태야 할 터이다. 정치와 이념이 간섭할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인구대비 확진자수와 사망자수에서 OECD 평균을 현저히 밑돌며 뉴질랜드 바로 다음으로 우수한 성과를 보이는 중이다. OECD 평균으로 보자면, 한국은 지금보다 수십 배의 확진과 사망기록을 가졌어야 한다는 게 아닌가.당장 오르는 숫자에만 주목하여 비난의 화살을 던지면, 국민과 사회를 불안하게만 하지 않을까. 자료와 통계를 기반으로 우리 방역의 토대를 보다 견실하게 구축하도록 주문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라와 국민이 더욱 안정적으로 위기를 관리하도록 견제하며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언론도 사실에 입각한 분석과 보도를 통해 국민들 간의 소통과 이해의 범주를 넓혀가야 한다.방역의 어려움은 경제도 흔든다. 사회적 거리두기 3단계 격상이 당장이라도 필요해 보이지만, 서민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생각하면 신중해야 한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경제적 타격을 보듬고 위로하며 어려움을 이겨낼 슬기를 발휘해야 한다. 소상공인과 밑바닥 경제를 위한 적극적인 정책 지원이 필요하며 개인도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난관을 이겨내는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야 할 때이다.짧지 않은 기간을 두고 진행되면서 지속적인 어려움이 정서적으로도 영향을 미쳐 우울에 이르는 코로나블루(Corona Blue)현상이 보고된다고 한다. 힘든 일에 버겁다 못해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거나 부적절한 결정에 이르는 가족이나 이웃이 없도록 살펴야 한다. 사회적 공동체에 있어야 할 상생과 협력의 안전망이 오히려 든든해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2020년은 이렇듯 허망하게 저무는가 싶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다투느라 왠지 중요한 가닥들을 놓치지 않았을까도 걱정이다. 하지만 국민의 건강만큼 중요한 게 다시 있을까. 세상의 모든 영화를 눈앞에 두고도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개인이든 국가든 건강을 지키는 일만큼 기본이 없다. 정치와 사회와 문화와 경제에도 건강한 의식과 건강한 소통이 생명이 아닌가. 나라다운 나라를 세워가는 일도 건강이 받쳐줘야 가능하다.나라경영의 모든 가닥에서 건강하지 않은 구석들을 두루 살펴 회복에 이르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한다. 코로나블루는 가라.

2020-12-16

큰 다리 놓는 법

장규열 한동대 교수영일만대교는 들어설 수 있을까? 십 년도 넘게 논의하고 검토하며 지역에 필요한 일로 확인하였다. 중앙정부의 30대 프로젝트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하였던 일이 이제는 예산의 문제로 주춤거린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교통정체를 해소할 방안이면서 관광효과도 기대된다는 게 아닌가. 산업도시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영일만항 물류의 흐름을 확충하고, 글로벌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터이다. 동해안고속도로가 연결되면 국토의 동쪽 허리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핵심통로의 역할도 기대된다. 지역 내 교통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나라의 도로환경에도 기여할 대목이다. 관광자원의 확보는 물론 국제적으로 자랑할만한 글로벌 미래자산 가치마저 느껴지지 않는가.내년도 국가예산으로 영일만대교 설계를 위한 20억원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예상되는 소요경비에 비하여 턱없이 적은 금액으로 보이지만, 국가가 일의 필요성을 다소라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한다. 지역에서 이와 관련하여 책임있는 인사들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언론을 통하여 듣는 것처럼, 주로 같은 정당 소속 인사들과 접촉하며 호소하는 일은 효과 면에서 제한적이지 않을까. 정치권과 재계 일반에 접촉의 폭을 획기적으로 넓혀야 하는 게 아닐까. 실질적인 영향력이 확인되는 정치권 인사들과 재정과 국토관리을 다루는 정부 기관을 두루 아우르는 소구력도 발휘해야 할 터이다. 필요한 민자(民資)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는가.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재계와 기업들을 설득하여 참여를 유도하는 노력도 함께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큰 계획의 틀을 다시 잡아야 한다. 영일만대교가 지역과 나라에 왜 필요한지 그 타당성을 보다 분명하게 확인해야 한다. 다리를 놓은 다음 누리게 될 기대효과와 미래가치도 다시 살펴 확정하여야 한다. 지역이 우선 확신을 가져야 누구를 상대해도 설득이 가능할 것이 아닌가. 영일만대교는 시위와 데모로 인정받을 규모가 아니다. 조사와 분석, 기획과 설득의 모든 과정에 보다 신중하고 치밀한 접근과 대응이 있어야 할 터이다. 프로젝트의 규모와 지역에 미칠 영향과 효과를 생각하면, 다른 그 어떤 과제에 비하여 매우 의미있는 족적을 남길 수 있는 ‘큰 다리’가 아닐까. ‘글로벌포항’의 지향성을 고려하면, 국제적인 맥락에서 참여와 투자를 유치해 보면 어떨까.도시의 위상과 지역의 문화가 새발전의 기틀을 찾아야 한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기대하기보다 우리 안에서 긍지와 희망을 찾아야 한다. 내연산에서 솟아올라 구룡포로 흐르는 지역의 기운을 시민들의 삶에 잘 연결해야 한다. 영일만대교는 외형으로 훌륭한 자원이 될 뿐 아니라 지역의 자긍심을 한층 솟구치게 하는 모멘텀이 되어야 한다. 바다와 길을 잇는 ‘큰 다리를 짓는 일’에 지역의 관심과 기대가 더욱 모아야 한다.윈스턴 처칠이 이렇게 말했다는 게 아닌가. ‘비관적인 사람은 모든 기회에서 문제에 매달리지만, 낙관적인 사람은 모든 문제에서 기회를 발견한다.’ 영일만대교는 우리의 기회가 아닌가.

2020-12-09

코로나 수능

장규열 한동대 교수2020년은 어떻게 기억될까. 눈부신 문명을 쌓아 올리던 가운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의 공격으로 온 세상이 얼어붙었던 한 해. 치솟는 감염자 숫자에 마음을 졸이며 삶의 가닥들이 쪼그라들었던 일 년. 사계절을 건너고도 꺾이지 않는 기세 앞에 다음 세대마저 위태로운 오늘. 코로나와 함께 수능의 아침이 밝았다.우리만큼 대학입시에 목숨을 거는 나라가 없다. 수능시험이 헤드라인 뉴스가 되는 나라. 사찰과 교회에서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부모. 하루의 승부에 인생을 거는 수험생 자신. 고등학교 졸업생이 대학 신입생 정원보다 적다는데도, 대학을 가기 위한 경쟁은 잦아들지 않는 모습. 초중고 공교육이 대학입시로만 향하는 습관과 제도. 대학을 나와도 취업전선에 일자리가 사라진 사회. 누구도 정색하고 따져 묻지 않는 수능. 정부와 학교, 가정과 사회는 길들여진 나머지 문제의식마저 실종된 느낌이다. 코로나의 습격으로 교육의 모습이 몇 달째 일그러진 끝에 수능은 다가오고 말았다.일정을 연기했던 뒤라 더는 양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또다시 기승을 부리는 바이러스와 정면대결을 하듯 수능을 치러야 한다. 수험생에게 미안하다. 대학 간판이 그 어떤 안정적인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는 터에 나어린 고등학생들이 입시의 질곡을 아직도 겪는 일은 구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선생님에게도 미안하다. 사람 만드는 교육을 기대하며 교사로 헌신했을 당신이 대입 성공을 기준으로 일과를 지내게 만든 일도 구태가 아니고 무엇인가. 학부모에게 미안하다. 당신의 ‘나 때’만큼 대학이 일생을 보장하지 못하는 걸 뻔히 함께 보면서 아직도 당신의 자녀들을 대학입시에 매달리게 하는 일도 구태가 아니면 무엇인가.세상은 빛의 속도로 바뀌는데 수능은 거북이처럼 제자리걸음이다. 먼저, 수능을 학생들 간에 ‘실력’을 평가하고 비교하기 위한 시험에서 해방하여 대학교육을 받기 위한 최소 기준과 소양을 확인하는 ‘인증’ 시험으로 전환해야 한다. 일 년에 단 하루 제공하는 시험에 그의 일생이 달린 듯한 분위기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수능을 건강하고 교육적인 틀 안에 들어오는 인증시험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수험생도 학부모도 부적절한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그런 다음, 일 년에 단 한 차례 제공하는 일정 관행도 수정해야 한다. 학생들이 편안하게 준비하여 대학을 향한 꿈과 비전이 무르익었을 적에 시험에 응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기회를 여러 번 제공하여 유연하고 자유로운 인증시험으로 자리를 잡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그런 후에, 대학 입학을 위한 최종 선발은 대학이 책임지고 자율적으로 진행하도록 바꾸어 갔으면 한다.코로나 수능. 기억에 남을 오늘 시험에서 수험생들이 각자의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기를 기원한다. 보고 듣는 것처럼, 나라와 사회에는 바꾸어야 할 일들이 태산처럼 쌓여있다. 수능의 폭풍이 지나간 후에, 세상을 어떻게 바꿀까 기대하며 구상하는 젊은이들을 캠퍼스에서 만나고 싶다. 코로나는 지나가겠지?

2020-12-02

뉴노멀은 비정상일까

장규열 한동대 교수코로나19의 기세가 다시 거세다. 겨울로 들어서며 멈추지 않는 환란의 물결에 세계가 얼어붙었다. ‘이 또한 지나갈’ 터이지만 그런 다음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비대면과 마스크는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손씻기와 거리두기는 비정상인가 정상인가. 정상과 비정상을 견주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리는 뉴노멀에 익숙해져 버렸다. 코로나19가 물러간 다음에도 관성처럼 우리에게 머물게 될 낯선 환경이 보이기 시작한다.비대면 온라인 수업에 익숙한 대학생들은 대면 오프라인 강의를 열어도 강의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듣자 하니, 학생들은 기숙사와 인근 마을에 거의 돌아왔다는데 대면과 비대면 중에서 선택권을 가진 학생들은 비대면 강의를 선호한다. 수십 명이 등록한 강의를 비대면으로 제공하면 겨우 두세 사람이 강의실에 들어온다.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도 이내 기운이 빠져 비대면으로 돌아가기 일쑤라 대학공동체는 서로 만나지 않는 온라인소통으로 돌아가고 만다.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아니면 뉴노멀인가. 넓은 교정의 건물들과 건물들을 가득 채운 강의실들은 이제 그 역할을 다한 것일까. 무릎을 맞대고 지혜를 모으며 담론과 토론을 이어가던 대학의 모습은 수명을 다한 것일까. 이를 비정상으로 여겨, 코비드19 이후에 이전으로 돌아갈 기대를 아직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착각과 환상이 아닐까.‘비대면 온라인’은 방역의 필요를 넘어 여러 영역에서 ‘삶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대학만 그런 것도 아니다. 재택근무는 정상 근무형태로 자리를 잡았으며 작업공간에 대한 이해도 변모하였다. 다국적기업에만 해당되던 글로벌인력 아웃소싱은 누구에게나 새로운 기회로 다가오는 중이다. 과거에 묶여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 수도 있고, 변화를 바로 읽어 역동적인 미래를 열어갈 수도 있다. 변화를 거꾸로 읽으면 또 다른 실패에 이를 뿐이다. 만나지 않는 사이버교회 개념을 당겨 수용하여 더 많은 이들을 끌어모으는 사람들이 있다. 디지털환경이 제공하는 초연결사회는 이전보다 확장된 영역을 불러다 준다. 모든 존재가 지역적이었던 이전에 비하여 하찮은 존재도 글로벌이 되는 지평이 열린 게 아닌가. 뉴노멀도 극복할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활용할 것으로 볼 것인지는 당신에게 달렸다.교육의 지평은 언제나 넓다. 다음 세대는 배움의 마당에 항상 넘친다. 바뀐 환경이 더 나은 교육을 돌려줄 것인지도 대학과 교수, 학교와 교사에게 달리지 않았을까. 낯선 환경을 익숙한 토대로 바꾸는 비결도 선생님들 손에 들려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교육과 연구, 봉사와 소통에 씨줄과 날줄로 어우러지도록 만들어내는 일에 우리 교육은 운명을 걸어야 한다. 다가온 뉴노멀을 비정상으로 여겨 코로나19가 지나기만 기다리는 오류는 없어야 한다.세상이 바뀌면 교육도 바뀐다. 학생도 바뀌고 학교도 바뀌며 배우고 가르치는 일상이 바뀐다. 교육이 세상을 앞질러 바꾸기를 기대한다.

2020-11-25

교회와 절에는 무엇하러 가는데?

장규열 한동대 교수사람에게 종교는 무엇일까. 살아가는 나날이 버겁고 힘들어 숨구멍이라도 찾는 마음이 아닌가. 힘들게 하는 세상에 눌리고 지쳐 피난하듯 찾는 게 아니었을까. 일상에 쫓기며 살다가 그래도 그 한순간 하늘이 내게 찾아오는 기쁨을 맛보는 경험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종교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이 쫓는 욕심을 벗어야 하고 세상이 재촉하는 경쟁도 그만 두어야 한다. 사찰과 교회는 모두의 피난처여야 하고 평화와 기쁨이 솟아오르는 샘터여야 한다. 종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하늘을 향해야 하고 이 땅의 버거움을 이기고도 남아야 한다. 무소유를 다짐하고 날마다 내려놓아도 이웃을 생각하며 넉넉한 심정이어야 한다.한동안 서점가를 풍미하였던 베스트셀러 ‘긍정의 힘’을 쓴 미국 목사가 있었다. 열심히 믿으면 당신도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그의 ‘번영신학’은 교계의 대표저술이 되어 성전 마당을 가득 채웠다. 어느 스님이 세상의 평균을 넘는 안락한 처소를 자랑하며 미디어에 등장하였다. 푸른 눈의 다른 스님이 그 모습을 정면으로 공격하다가 이내 생각을 돌이켰다고 한다. 우리는 무엇을 본 것일까. 사찰과 교회를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어느 자락에서 세상과 다른 선한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웃과 세상을 위하여 덕이 되고 복을 끼칠 다짐은 어디서 해야 하는 것인지. 세상을 딛고 일어서 성공에 이를 욕심을 종교에서 배운다면, 어려운 이웃과 세상은 어디에 기대를 걸고 희망을 찾을 것인지.종교는 달라야 한다. 세상과는 반대편에 있어야 한다. 세상이 주지 못하는 위로가 있어야 하고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용기를 얻어야 한다. 지고도 이길 힘이 생겨야 하며 이웃을 바라보는 배려와 공감을 배워야 한다. 눈을 부릅뜨고 거두는 성공을 겨누기보다 어려워도 함께 누리는 평화에 길들여져야 한다. 세상을 향하여, 꼭 그리 살지 않아도 풍성한 천국과 극락을 경험하는 기쁨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내려놓고 나누며 살아도 집착하고 경쟁하며 사는 일보다 풍성한 날들이 가능함을 배워야 한다. 불가는 ‘오욕락(五欲樂)’, 즉 인간의 욕심을 충족하여 누리는 즐거움을 경계하였다. 어차피 시시각각 변하여 정신을 병들게 하고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는 게 아닌가. 기독교가 돈을 ‘일만악(一萬惡)의 뿌리’라고 규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번영신학과 기복불교는 종교의 본질에서 한참 어긋나 있다.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며 이웃과 함께 애쓰고 노력하는 가운데 선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즐거움을 깨우치고 싶다. 그리하여 개인의 삶에도 미움과 시기는 사라지고 사랑과 평화가 피어오르는 여정이 찾아왔으면 한다. 개인의 성공만 바라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상생을 흡족해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한 사람 영웅의 성공 서사를 기다리기보다 여러 사람이 함께 호흡하는 마을이 돌아와야 한다. 본질을 회복한 종교가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아주기를 고대한다.

2020-11-18

태평양 건너 어디선가 본 듯한

장규열 한동대 교수미국 대선이 막을 내렸다. 시민들은 선거로 참여하며 민주적 결정과정에 할 일을 다 하였다. 다만, 승자와 패자를 최종 가늠하기에 법적이며 정치적인 판단이 필요할 모양이다. 마지막 진통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이미 가라앉는 듯한 미국의 국격에 또 한 차례 흠집을 내는 결과를 빚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험한 대선의 길목에서 주목받는 사람이 있다.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 여성이자 흑인이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혈통을 가지고 있어 바뀌어 가는 미국의 저변 시민 인구층에 넓은 지지세와 소구력을 확장하였다. 마흔다섯 대통령을 배출해온 미국에서 최초로 그런 배경을 가진 부통령이 될 모양이다.미국에서 모든 여성이 투표에 참여하게 된 것은 놀랍게도 1965년이었다. 1920년에 여성참정권이 시행되었지만, 남부 흑인여성들에게는 거친 인종차별과 함께 참정권이 제한되었다. 해리스가 성적, 인종적, 문화적 차별의 벽을 딛고 오늘의 자리에 오른 일은 가히 역사적이다. 그가 ‘이것이 처음이지만 마지막은 아니어야 한다’고 말한 것도 미국이 나아가는 길에 주시해야 할 부분이다. 선거의 승리를 놓고 CNN 앵커 밴 존스(Van Jones)는 ‘이제야 아빠 노릇하는 게 쉬워졌다’며 눈물을 흘렸다. 백인경찰이 흑인남성의 목을 눌러 숨지게 했던 조지플로이드(George Floyd)사건이 있었다. 공분을 자아냈던 한마디 절규 ‘숨쉴 수 없다(I can’t breathe.)’는 그 뿐 아니라 모든 흑인들이 날마다 겪는 차별과 혐오였다며 이제야 벗어날 가능성이 보인다고 하였다.미국에서 아시안은 누구인가. 인도 출신 어머니를 둔 해리스 덕에 아시안아메리칸에 대한 관심도 높아갈 터이다. 아시안들은 상대적으로 명석하고 출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여겨진다. 미국 주류사회를 겨냥하며 살아가는 아시아 출신 이민자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우리정부는 해외교포 정책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교민들이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유지하며 일등시민으로 살아가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해리스가 말하는 ‘다음 기회’에는 한국 출신 누군가가 반드시 성공의 닻을 올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여야 한다.미국이 바뀌어 간다. 밖에서 보아도 부끄러울 만큼 분열과 단절의 벽을 쌓아 올리던 미국이 조금씩 변할 모양이다. 실제로 바뀌려면 이긴 사람들이 잘 해야 한다. 졌다는 일로만도 상처가 깊을 ‘절반의 미국’에게 상생과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바이든 당선자가 선언했듯이 ‘우리가 서로 반대편에 서 있었지만 한 번도 적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살려내야 한다.우리는 어떤가. 나라 안에 보이는 분열과 차별, 단절과 균열을 어찌해야 하는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한다 한들, 하나가 되지 못하는 국민은 좋은 나라를 만들 방법이 없다. 우리가 겪었던 유사한 경험을 태평양 건너에서 다시 목격하는 오늘, 우리는 우리의 다짐을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2020-11-11

고단한 삶은 축제를 꿈꾼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세상이 힘들다. 삶이 버겁다. 어렵고 고단한 날들이 이어지면, 나만 생각하게 된다. 난관과 질곡에서 탈출할 생각에 붙들리면, 함께 사는 이웃을 잊어버린다. 친구와 가족마저 서서히 남이 되고만다. 급기야 나만의 감옥에 갇히게 되면 살아 버티는 일조차 고난이 된다. 인류가 살아온 자취가 길고 다양하지만, 개인의 삶이 언젠들 즐겁기만 하였을까. 사람 인(人)에 보이듯 사람은 서로 기대어 살아야 한다. 내가 오늘 지나며 누리는 일상의 자락들 가운데 나 혼자 만든 일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더불어 살아야 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동체를 확인해야 한다. 똑똑한 인류는 묘수를 발견하였다. 공동체를 다시 확인하고 즐거움을 함께 경험할 기회를 찾아내었다. 축제.축제는 혹 낭비가 아닐까. 이렇게 어려운데 막대한 예산까지 사용하는 축제는 시간과 돈과 노력을 헛되이 쓰는 게 아닐까. 축제의 의미를 오해하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뜻을 잘못 세우고 운영에 미숙하여 실수가 있을 수는 있어도, 우리네 삶에 축제는 필요하다. 누구든 살아가는 가운데 축제의 순간을 맛보아야 한다. 개인의 삶에도 늘 힘들기만 하면 어찌할 것인가. 이따금씩 숨구멍이 생기고 먹구름이 걷혀야 살아갈 힘과 용기를 경험하는 게 아닌가. 잿빛 하늘이 파란 창공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어야 한다. 자신만 탓하며 늪처럼 가라앉던 나날에도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있었음이 보일 때면 공감과 배려가 피어오른다. 공동체는 부활하고 개인은 다시 시작할 용기를 추스른다.지역 축제는 소중하다. 다만 코로나19 상황과 미래사회를 내다보며 축제의 접근방식과 운영형태가 바뀌어야 한다. 비대면을 강조하면서도 시민의 참여를 유지하는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 한다. 최근 포항스틸아트페스티벌에서 ‘스틸아트투어앱’을 적용하여 흥미를 가진 개인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일상 속의 축제로 만든 일은 주목할 만하다. 디지털 뉴미디어 환경에서 온라인과 비대면이 일상의 요소가 된 이상, 축제도 예외일 수 없다. 포항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단계적으로 시도하여 하이브리드 축제를 실현한 일도 앞서가는 시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다양한 소셜미디어를 활용하여 문화민주주의에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들이는 노력과 수고가 보다 강화된 홍보와 마케팅으로 더욱 발전해 가기를 기대한다.축제도 변해야 한다. 관객관람형에서 시민참여형으로 진화해야 하며 아날로그 일변도에서 디지털을 강화한 하이브리드 형식으로 발전해야 한다. 축제의 결실은 모두 참여하는 시민이 누려야 한다. 고단한 일상에 숨통을 틔우는 정점이 되어야 하고 도시가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예전처럼 축제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는 축제기획팀장의 고백은 시민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겠다는 다짐으로 들린다.무료하고 힘들던 일상이 축제 덕에 확 바뀌었으면 한다. 힘든 세상에 다리가 되는 축제를 만나고 싶다. 축제가 살아나면 지역이 솟아오른다.

2020-11-04

미워하여 행복할 수 있을까?

장규열 한동대 교수당신은 잘살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잘사는 것일까. 부귀영화를 누리며 만수무강하는 삶, 모두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을까. 1975년에 62세였던 기대수명이 오늘은 83세가 되었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1975년에 600불을 겨우 넘겼었는데 오늘은 3만불에 육박하고 있다. 스무 해도 더 오래 살게 되었으며 오십 배나 더 많이 버는 셈이 아닌가. 그 어떤 잣대로 견주어 보아도 손색이 없는 국격을 지니게 된 오늘, 우리는 행복한가 다시 물어야 한다. 겉으로 보아 모자람이 없는 조건 속에서 어째서 우리는 아직껏 만족하지 못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일까.어느 산사(山寺)에 큰불이 났다. 까닭을 찾고 보니 어느 여인의 방화였다고 한다. 다른 종교를 믿는 그는 우상을 섬기는 절간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게 아닌가. 미움으로 가득한 그 마음으로 남의 종교를 말살할 작정이었는가 보다. 사회 규범과 법적 통제가 있어 제어할 수는 있겠으나, 우리 종교계는 이런 혐오범죄에 어떤 의견을 가지는지 궁금하다. 종교는 미움을 가르치는가 아니면 사랑을 가르치는가. 종교가 혐오를 바로잡지 않는다. 미워하고 배척하는 태도를 종교만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진영을 갈라 싸우는 일에 능한 정치는 백성들을 자기편에 세우기에만 최선을 던진다. 날마다 지지율을 확인하며 세를 불리기에 집중하느라 나라의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정치도 혐오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미움은 자란다. 시간이 지나며 혐오의 수렁은 깊어가고 표현의 강도는 짙어진다. 미워할 까닭을 배우고 익히며 다지고 훈련하여 행동에까지 이른다. 진행 중인 미국의 대선판에도 혐오와 테러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급기야 해외 공관들에게 선거 전후에 있을지도 모를 폭력사태에 대비하라는 훈령이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미국 사회가 어떻게 치유와 회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혐오의 늪에 빠진 개인은 위태롭고 미움에 물든 사회는 위험하다.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 전에 사회적 각성이 있어야 한다.국민은 피곤하다. 정치와 종교가 만들고 퍼붓는 사회적 혐오에 지친다. 정치가 편안한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부끄럽다. 종교가 평온한 개인을 회복해 주리라는 희망도 허망하다. 남 탓에만 익숙한 ‘내로남불’이 식상하고 자신은 돌아보지 않는 ‘후안무치’에도 기가 질린다. 부귀영화와 만수무강을 누리면서 선진국에 살아도 행복하지 않은 까닭이 혹 ‘미움’ 탓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좀 부드러운 시선과 따듯한 마음이 필요한 게 아닐까. 각자의 부족함과 허술함에 겸허하며 남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일에 나서야 하지 않을까.그동안 부수고 깨뜨려 정복하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면, 이제는 보듬고 다독이며 함께 쌓아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완전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며 완벽한 사회는 지구상에 없다. 주어진 환경에 오늘의 최선을 함께 던져야 한다. 미워하여 행복할 방법은 없다.

2020-10-28

이래도 되는 것이냐

장규열 한동대 교수우리는 어떤 나라를 기대했을까. 누구든 자신의 자리에서 성실한 일상을 이어가면 부족하지 않은 삶이 가능해 이웃과 함께 좋은 날들을 만나게 되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넉넉한 삶은 아닐지라도 사회의 어두운 구석이 사라지고 어울려 살아가는 일에 그늘이 드리우는 일은 만나지 않는 나라가 아니었을까. 천박한 자본주의에 더는 휘둘리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기대하지 않았을까.세상은 희한하게도 그렇게만 돌아가지 않는다. 한때, 어느 여인의 딸이 대학에서 특혜를 받았던 일에 분개해 대학생들이 분연히 일어서지 않았던가. 대학교수들이 수천만원씩 집어삼키는 비리를 저질렀다는데 대학생들이 저항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없다. 뉴스가 전하는 지도층의 부패와 타락을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어느 국회의원에게 몇백만원 선물한 것은 너무 적으니, 하루저녁 천만원 술접대를 하고 수천만원 명품백을 돌렸다고 한다. 수억원 뇌물이 오갔다는데, 시민들은 감각이 마비됐다. 언론보도의 행태에 따라 ‘어느 편’이냐를 읽고 있을 뿐 사안의 심각함은 눈치챌 겨를도 없다. 돈에 약하고 유혹에 휘둘리는 건 오른쪽왼쪽이 없다. 정상인가 아닌가.부패와 타락은 문제인가 아닌가. 아니 그 교수들과 저 인사들은 차라리 성공한 게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을 부끄러워 않은 게 잘못이란 말이냐. 더 벌어 모은 게 배아파 하는 소리라면 차라리 당신도 성공하지 그랬냐. 그게 정말 그럴까. 일상에 쫓기듯 살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사람들이 나라에는 차고 넘친다. 영세자영업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이주민들, 장애인들, 취업준비생들…. 몇십만원 재난지원금에 숨통이 트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수고에 합당한 대가로 살아가려 해도, 삶을 지탱하기에는 그 숫자가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판에, 당신들이 누리는 접대와 뇌물은 정당한 일의 대가인가 아닌가. 당신이 어느 편이냐 묻지 않는다.도덕과 윤리는 무용한 것일까. 보통 사람들이 순종하며 잘 따르게만 하려고 ‘도덕과 윤리’가 있었다면 차라리 모두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모두 정글의 짐승이 되어 사투라도 벌여야 하는 게 아닐까.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이제는 누구보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도덕율과 윤리의식을 요청해야 할 터이다. 교수와 의사, 법조인과 경제인들에게 높은 윤리기준과 깊은 공동체 의식이 필요해 보인다.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으로는 사회가 따뜻해질 방법이 없다.선진국이 된다 한들 도덕이 무너진 나라는 거부하고 싶다. 부족하여도 가슴이 넉넉한 사회가 돼야 한다. 다짐이 살아있으면 모자란 것은 채울 수 있다. 무엇이 많아도 그 집에 심성이 무너지면 금세 빈털터리가 되고 만다. 깨끗한 나라가 되기 위해 ‘도덕재무장’ 운동이라도 벌여야 하지 않을까. 이대로는 어렵다. 다음 세대에게는 맑은 나라를 물려줘야 하지 않겠나.

2020-10-21

당기는 힘은 지역에 있다

장규열한동대 교수도시는 사람을 끌어당겼다. 국토면적 대비 도시면적은 겨우 16.7%이지만, 전체 인구의 91.8%가 도시에 산다. 특히 수도권의 인구집중 현상은 심각함이 도를 넘어, 전체 인구의 49.8%가 몰려 거주한다. 1㎞ 당 강원도에는 90명이 거주하는 반면, 서울에는 같은 면적에 무려 16,034명이 함께 산다. 어느 곳이 살기 좋을까. 질문을 바라보는 인식과 태도에 따라 답은 천차만별이겠으나, 일단 차이는 극명하게 보인다. 지역에서 청춘을 보내는 대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졸업 후에는 거의 모두 지역을 떠날 기대를 품는다. 모두 서울로 도시로 이주해 버린 지역에는 노인들만 남아 명맥을 겨우 유지한다.국토균형발전이라고 불렀다. 벌어진 일은 지방을 도시처럼 만들어 내는 게 고작이었다. 도시기능을 지역 환경에 적용하는 수준을 넘어, 획일화된 도시화를 진행하는 동안 지역 특성은 사라져 버리는 ‘문명의 지우개’를 경험하였다. 도시마다 거의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지역마다 있었던 풋풋하고 색다른 모습들은 점차 사라져가는 게 현실이 아닌가. 목포와 삼척은 어떻게 다른가. 군산과 포항은 무엇이 다른가. 원주와 나주는 무엇이 다르다 할 것이며 수원과 경주는 다른가 같은가. 동네마다 변하고는 있지만 모두 같은 얼굴로 바뀌어 가는 게 아닌가. 남다른 스토리와 특별한 풍습이 독특한 방언을 타고 사람들 사이에 나누어지는 우리의 모습을 다시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이 서울로만 이해되는 게 아니라, 부산과 인천, 광주와 춘천도 수도권 못지않은 흡입력을 가지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지역이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중앙의 결정과 지원에 의존하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침 대통령이 이제는 지역부터 역동적으로 변화해 가는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지역 주도로 창의적 발전모델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상상력은 지역에서 분출되어야 한다. 밖으로부터의 시혜에 기대는 발전모델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용솟음치는 창의가 있어야 한다. 동네마다 문화가 있고 마을마다 옛이야기가 있다. 고향냄새 가득한 먹거리가 있고 그곳에만 있는 볼거리가 있다. 도시로 몰려가느라 잊었던 기억을 다시 살려낼 소재가 지역에는 한가득이다. 바다와 산, 들판과 하늘은 도시에 없다. 풀벌레 소리 가득한 캄캄한 밤이 없으며 도란도란 익어가는 함께 사는 느낌도 수도권에는 흔하지 않다.도시화에 지친 현대인의 진정한 회복은 지역에서 일어나야 한다.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의 열쇠는 치밀한 지방화(Localization)에 있다고 한다. 지역을 다시 발견해야 한다. 지역에 모두 맡겨야 한다. 새로운 것은 놀랍게도 늘 변방에서 나온다. 한국판 뉴딜정책에 방금 추가했다는 ‘지역균형 뉴딜’이 이번에는 지역의 추동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 과감한 지방분권을 지향해야 한다.지역이 살아나지 않고 나라가 반듯하게 설 방법이 없다. 서울공화국의 오명을 씻어야 한다. 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선다. 지방을 세워야 국격이 오른다.

2020-10-14

코로나19 덕에 배우는 게 다 있다

장규열한동대 교수미국이 혼돈을 겪는다. 대선을 코 앞에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 주말을 병원에서 지냈다지만, 완치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채로 백악관으로 돌아갔다. 국사가 중대하고 대선캠페인이 시급하다지만, 전 세계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따가울 수 밖에 없다. 팬데믹으로 알려진 대감염상황을 매우 대수롭지 않은 일로 규정한다거나 기본 방역수칙인 마스크착용 여부에 관해서도 그는 매우 부정적이다. 퇴원하여 관저 앞에 서서 그는 마스크를 ‘시원하게’ 벗는 상직적 제스추어를 연출하였다. 그래도 되는 것일까? 이런 모습들이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이성적으로 제시된다면 몰라도, 누가 보아도 정치적인 계산에 따른 행동이므로 시민들에게는 극심한 혼란만을 초래하는 일이다.코로나19는 물러갈 것인가. 2020년이 마비되었다. 세계적으로 3천500만 명을 감염시킨 이 바이러스는 100만이 넘는 사람들의 생명을 앗으면서도 여전히 기세가 등등하다. 미국뿐 아니라 지구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보건정책을 정치성향과 섞은 나머지, 정상적인 예방과 방역에마저 이념적인 프리즘을 들이대면서 편견과 주장을 하면 어떤 결과까지 맞을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정도가 도를 넘어 국민 앞에 선 지도자가 저처럼 자극적이며 선동적인 행태를 반복하면 국민이 얼마나 불안할 것인지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저런 모습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지 않은 것으로 안심할 수 있을까. 엇비슷한 태도가 빌미가 되어 국민건강에 위기를 초래할 위험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일까.코로나19로부터 의외로 많이 배운다. 민주시민이 정책과 집행에 대하여 얼마나 깨어있어야 하는지를 깨우치는 중이며, 정부는 국민의 반응에 어떤 진정성으로 답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중이다. 건강을 직접 위협하는 소재이다 보니 관심도 높고 반응도 빠르다. 그 영향에 있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해당하는 일이라 온 국민이 이해당사자인 셈이다. 위기상황이 진행되는 가운데 해결책을 함께 모색해야 하므로 정치적인 계산이 끼어들 틈이 그리 없어 보인다. 진영의 논리로 편을 갈라칠 양이면, 자칫 코로나19 피해가 눈덩이가 되지 않겠나. 그런 위험을 미국의 모습에서 이미 보고있는 셈이다. 저들이 잘 극복하길 바라지만, 국민들 사이에 골이 저렇게 깊어서야 정치도 방역도 회복이 어렵지 싶다. 우리에겐 타산지석이 아닌가.코로나19가 가져온 뉴노멀에는 ‘표현방식’도 들어있다. 광화문과 서초동의 기억이 엊그제인데 어느 틈에 비대면과 언택트가 들어와 앉았다. 강의와 교육도 온라인과 디지털을 매개로 하는 바에야 집단의사의 표현방식도 달라져야 하지 않겠나.어려울 때 발전하였다. 성가셔야 뚫고 나간다. 코로나19로 힘들어진 세상에 편을 갈라 이길 방법이 없다. 아무리 힘들어도 남을 무찌르며 헤쳐갈 길이 아니다. 당략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라, 정책으로 이겨내야 한다. 오늘, 방역은 정치보다 중요하다. 홀로 영웅이 되기보다 함께 위기를 헤쳐가야 한다.

2020-10-07

남자들에게만 맡겨둘 세상이 아니다

장규열한동대 교수‘세상은 남자들의 작품이다.’ 프랑스 작가 시몬느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가 남긴 말이다. 세상이 남자들의 관점으로만 해석되고 구성되며 운영되는 일을 꼬집었다. 세상이 그렇게 된 까닭을 설명하려 하지만, 그 어느 설명도 가당치 않다고 했다.미국작가 캐롤라인 페레즈(Caroline Perez)는 그의 책 ‘보이지않는 여성(Invisible Women)’에서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의 입안과 수립과정도 남성중심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에 점령당했다고 했다. 기초자료로 사용되는 통계치들도 ‘여성의 존재’를 간과하는 경우가 허다해 여성이 거기에 있었음조차 무시되곤 한다는 것이다. 교육과정설계, 도시계획입안, 정책수립과정 등에 있어 여성의 시각이 누락되지 않아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최근 작고한 미연방대법관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가 남긴 일화가 있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그에게 기자가 물었다. ‘아홉명 정원 대법원에 여성대법관이 몇 명 앉아야 공정한가?’라는 질문에 그는 ‘아홉명 전원’이라고 답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같은 질문을 뒤집어 ‘아홉명 전원이 남성이라면 같은 질문을 했겠느냐?’고 되묻는다. 남성이 지배하면 당연하고 여성이 들어서면 이상하다 여기는 생각부터 잘못된 것이 아닌가. OECD는 노동임금수준의 성별 간 차이를 발표한다. 회원국들 평균 여성이 남성에 비해 13% 덜 받는다는데, 한국은 단연 그 격차가 추종을 불허하는 1위로 34%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존재가 되외시될 뿐 아니라 그 가치마저 저평가되고 있음이 아닌가. 남녀 간에 물리적으로 다른 것을 인정하더라도 인격과 인권 면에서 무시되고 소외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교회는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주요교단 하나가 ‘여성이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성경 어느 곳에 남자만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적혀 있는지 모를 일이다. 세상이 저렇게 변했는데, 남자 목사들끼리 모여앉아 저런 결정을 하는 배포가 놀라울 뿐이다. 아니 세상이 변하기 전에 이미 당신들의 대표 선생이었던 바울 사도가 ‘남자와 여자가 예수 안에서 하나임’을 선포하였던 일은 무시해도 되는가. 그런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어디로 흩어질 것인지 두렵지도 않은가.여성 가수 한 사람이 어렵게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에 성폭행을 당했었노라고. 수많은 날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지내왔음도 고백했다. 오늘도 폭력 앞에 무너지고 있을 다른 여성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세상에 자랑거리가 많아 보이는 나라에서 이 같은 야만이 아직도 존재한다니 경악할 따름이다.무시당하고 값싸게 취급되며 폭력까지 감내할 양이면, 우리의 누이들에게 이곳은 선진국일 수가 없다. 갈 길이 아직 먼 숙제들은 이제 여성만의 몫이 아니다. 그동안 누리면서도 몰랐거나 무심했던 남성들이 깨어날 차례가 아닌가. 인류의 나머지 절반이 세상을 구할 수 있도록 소매를 걷어야 하지 않을까.

2020-09-23

지금처럼 해서는 내일이 없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물고 뜯고 할퀴고 상처낸다. 싸우기를 좋아하는 백성인가. 대유행 감염병의 와중에도 다툼에 그침이 없다. 서로를 향한 삿대짓과 욕사발에 지치지도 않는 것일까. 상식과 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 어른이든 아이든 너는 누구편이냐는 눈치부터 살핀다. 편에 따라 모든 게 다 틀리든가 무조건 다 맞는다. 절반이 절반을 포기하는 사회. 주장과 고집만 무성한 사이에 사람들 심성만 고약해져 간다. 어른이 사라졌을까. 모두 한 쪽으로만 치우쳤을까. 경제도 나아지려면 한참 멀었지만 살림이 나아진다고 주변이 고요해질 턱이 없어 보인다. 코로나19도 끝내 물러가겠지만 분위기가 흉흉하긴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디서부터 병들었을까. 어떻게 고쳐볼 수 있을까.의인은 없다.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이미 이천 년 전 성경이 고백한 바가 아닌가. 날마다 누군가를 콕 집어 나쁜 놈을 만들고 싶지만 돌아보면 나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마다 상대방 탓을 해 보지만 같은 숙제로 속을 끓였던 건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편을 갈라 열심히 싸워보지만 홀로 반추하면 내 그림자도 만만치 않다. 상대방의 구석진 모습을 밝혀내고 싶었지만 내 속의 어두움이 내내 뒷꼭지를 어지럽힌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오늘 모두의 모습이 아닌가. 이건 ‘신이 세상을 벌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벌하는’ 중이 아닐까. 모두의 문제를 상대의 문제로만 주장하는 못된 버릇을 이제는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쁜 버릇은 편을 가르지 않는다. 누구도 그 버릇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상천지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세상을 구해보겠다던 하나님의 음성이 신음처럼 들린다.나라가 조용해질 방법은 없는가. 국민이 편안해질 방법은 없는가. 오늘을 하염없이 탓하기보다 내일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스웨덴의 10대소녀 그레타툰베리(Greta Thunberg)는 인류가 초래한 기후변화가 내일을 살아야 하는 미래세대에게 끼칠 악영향을 짚어내며 오늘 기성정치인들의 나태함과 안일함을 꼬집고 있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만 몰두하는 어른들의 게으름을 지적하였다. 내일을 생각하는 책임이 모두에게 있음도 짚어내었다. 한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지구일병구하기’를 진행 중이다. 어른보다 아이가 나아보인다. 세상을 구할 힌트는 오늘보다 내일에서 찾아야 한다. 편갈라 싸우는 오늘보다 힘모아 건져낼 내일이 참으로 무겁다.오늘의 다툼도 내일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당장의 이익에 집착하는 동안 내일을 향한 방법을 찾을 길이 없다. 속시원하게 한 방 먹이는 집요함으로는 세상이 한 발짝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 어떤 문제도 우리 모두의 문제다. 남의 편만 틀린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나만 맞는 일거리도 천지에 없다. 조금씩 더 겸허해지고 조금씩 더 내려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려울 때마다 끝내 구해내었던 보통사람들의 국난극복유전자에 다시 기대를 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처럼 해서 내일을 구할 방법은 없다. 우리의 내일은 모두에게 달렸다. 한 사람도 예외는 없다.

2020-09-16

초인은 없다 일등도 아니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현실은 늘 못마땅하다. 세상은 언제나 불공평하다. 삶은 날마다 버겁다. 허덕이며 지나는 모든 질곡은 광야가 아닌가. 시인 이육사(李陸史)는 그래서 백마를 타고오는 초인을 기다렸을까. 보통사람들은 그래도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라고 때마다 표를 던진다. 기대만큼 일상이 호전되지 않아 기대는 다시 실망이 된다. 하필 감염병이 돌아 행동도 자유롭지 못한데 뜬금없는 ‘일등’소리를 듣는다. 일등은 과연 초인이었을까. 당신이 아니면 세상은 하염없는 나락을 헤맬 것인가. 일등만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한때는 그랬다. 아니 그래 보였다. 뛰어난 지력이 놀라운 성장과 함께 성취에 이르면 눈부신 열매도 거두는 듯하였다. 세간의 관심이 먹고사는 데에 머무는 동안 세상의 일등들이 이끌어 여기까지 온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허세와 과장도 결과를 보면서 용인하였다. 그늘에서 이름없이 도왔던 손길들도 그들의 출중함을 탓하지 않았다. 부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자신들도 묵묵히 일로 보여주므로 공연히 시비하지 않았다. 너무 오래 그래 왔을까. 급기야 일등들이 스스로 ‘일등만 해야한다’고 주장하는가 싶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다.자만은 위험하다. 자신을 세상보다 높은 자리에 올린다. 더 배우거나 깨우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현실에 안주하여 생각할 필요를 막아버린다. 더 배우지 않게 하고 상상력을 차단하며 남과 함께 하는 협력의 창을 닫아 버린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테오그니스는 ‘신은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은 사람에게 자만심을 선물로 준다’고 하였다. 세상도 바뀌었다. 일등을 조건없이 인정하고 순순히 따르는 사람은 이제 없다. 당신에게서 진정성과 공감능력을 확인해야 한다. 세상은 일등의 자만심에 기대지 않는다.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역사 가운데 위기에 봉착했던 인류를 ‘창조적 소수자들(Creative minories)이 구해왔다’고 하였다. 광야에서 달려오는 어느 초인이나 일등의 기억만 고집하는 수재들이 아니라 공동체의 미래를 놓고 함께 공감하며 걱정하는 집단지성을 의미하였다. 인류문명은 외부의 공격에 무너지는 게 아니라 내부의 몰락으로 붕괴한다고 하였다. 우리 내부의 일그러진 모습을 직시하는 창조적 소수자들이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이념에 기초한 편 가르기에 몰두해서 될 일이 아니다.일등만 바라보는 세상이 아니다. 초인을 기다리는 국민도 없다. 함께 어우러지며 더 나은 내일을 열어가야 한다. 둔하고 더디어 굼뜨게 행동하는 인간이 인류의 위기를 이제는 절감하며 움직여 가도록 코로나19가 온 게 아닐까. 시대의 지성과 보편적 양심이 깨어나도록 재촉하고 있다. 어떻게 가야 할지는 모두에게 달렸다. 앞에 선 몇 사람에게 재촉할 일이 아니다. 애를 안 쓰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어째서 편만 가르고 있는 것일까.누구를 기대할 것인가. 무엇을 기다릴 것인가. 세상은 바꾸어보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2020-09-09

힘내라, 방송!

장규열한동대 교수안 그래도 어렵다. ‘혼돈의 시대’라 여겨질 만큼 오늘 현실은 소용돌이친다. 세기를 건너오며 인쇄매체와 방송매체라는 단순한 구조를 가졌던 미디어환경이 급변하였다. 신문, 잡지, 텔레비전과 라디오였는데 어느 틈에 매체환경이 폭발하더니 이제는 모두 디지털 온라인으로 수렴해 간다. 4차산업혁명으로 향하는 길목에 터진 코로나19의 현실은 미디어의 역할을 더욱 증대시켰다.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뉴노멀의 사회환경은 기대보다 빠르게 다가온다. 비대면 기조의 사회활동, 재택근무로의 업무환경 변화, 온라인으로 전개되는 교육과 문화, 인공지능이 몰고오는 직업구조의 격변. 정보전달과 여가활동에 있어서 더욱 확장될 온라인과 디지털 소통은 미디어가 가질 영향력의 지평을 한층 넓혀갈 터이다.방송은 특별하다. 다른 전통미디어들이 기존의 틀을 대체로 유지한 채로 어려움을 겪는다면, 방송은 존재형식과 시스템구조 자체가 심대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기술진보와 함께 다변화된 방송구조는 광고시장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쳐 수익성 확보에도 진통을 겪는다. 내용면에서 허위조작정보 가짜뉴스와 왜곡된 정보의 범람을 막아내는 일에도 방송의 할 일이 즐비하다. 그럼에도 방송을 향한 국민적 기대는 여전하여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길에 특별재난방송을 끊임없이 전개하는 등 사회적 기여를 멈추지 않는다. 주요방송사가 시행한 최근 조사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 관련 정보를 52.4%의 국민들이 방송을 통하여 전달받고 있다고 한다. 격변과 기대 가운데 ‘방송의 날’을 맞는다. 기념하기보다 숙고해야 할 일이 숙제로 다가오는 오늘이 아닌가.방송은 공공재다. 사회적으로 신뢰할 만한 정보를 전달할 책임이 있고 그에 따른 문화적 영향력도 지대하다. 영국 BBC의 토니 홀 사장은 ‘소셜미디어와 가짜뉴스가 분열을 만들어내며 극단적 대립을 추동한다’면서 ‘방송의 공공적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높여야 한다’고 하였다. 수익성의 확보와 함께 공익에 기여하는 콘텐츠로 승부해야 한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보다 큰 기대와 과제를 안게 된 미디어, 특히 방송에 사회적 책임을 다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소명이 주어졌다. K-방역과 함께 향상된 국격을 안팎으로 확인하고 알려낼 과제도 방송이 맡아야 한다. 글로벌시장에서 우리 K-콘텐츠가 차지할 몫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방송의 형태와 시스템, 법령과 규제, 콘텐츠와 글로벌지향 등 어느 한 영역도 멈춰서지 않는다.변화를 읽어야 한다. 뉴노멀은 노멀이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따라가기보다 앞서가는 방송의 모습을 만나고 싶다. 코로나19가 앞당긴 다른 세상에서 더욱 높아진 미디어에 대한 도전과 기대 앞에 우리 방송이 희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방송소비자 국민들도 방송을 통한 ‘콘텐츠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눈에 불을 밝혀야한다. 정부는 방송이 나라와 국민에게 좋은 커뮤니케이터가 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여야 한다. 방송과 미디어가 당면한 과제와 기회 앞에 미래를 당겨올 다짐을 해야 한다.

2020-09-02

지금은 아니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답답해 보였다. 경북 안동 시골마을의 내과 의사였던 외할아버지는 늘 같은 모습이었다. 개인병원이었지만 ‘신내과’는 오늘날 동네 보건소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랑방 같기도 하였다.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의술 이야기’ 가운데 가장 신통하다 생각했던 한 자락이 있다. ‘전쟁통에도 병원 표식 빨간 십자가를 붙인 앰뷸런스는 폭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을 살리는 자동차이므로.’ 어린 마음에도 의술과 의사를 존경스럽게 여기는 세상의 생각이 느껴졌을까.전쟁 한가운데가 아닌가.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하다. 유엔(UN)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티에레스는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와 전쟁’을 선포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 빌 게이츠도 ‘이미 예견되었던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고 하였다. 뉴욕시장 앤드루 쿠오모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싸우고 있는 중’이라 표현했으며, 영국의 보건상 매트 핸콕도 ‘모든 것을 걸고 싸워 이겨야 하는 전쟁’이라 하였다. 위기를 거쳐오면서 보여준 우리 의료진의 노력과 수고가 돋보였다. 그들이 흘리는 땀 덕분에 K-방역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나라의 국격도 한층 향상되었다.어려운 싸움 복판에 들려온 의료계 파업 소식은 충격이다. 국민은 영문도 모르고 어려움을 겪을지도 몰라 혼돈스럽다. 주장과 주장이 부딪히는 걸 보며 얼른 판단하기 쉽지않다. 의사를 더 많이 기르면서 공공의료를 강화하겠다는 생각의 틀은 보이지만, 준비 없이 졸속으로 진행하는 건 위험하다는 반론이 팽팽하다. 정부도 보다 세심하게 알리고 기획하며 입안했어야 했다. 정부의 업무개시 명령까지 받은 의료계는 어찌해야 할 것인지. 의료공백은 평시에도 허용할 수 없지만, 오늘같은 전쟁터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다.히포크라테스 선서에 ‘나는 환자의 건강을 최우선하여 고려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국민의 건강이 경각에 달린 오늘, 최우선에 두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했으면 한다. 나라가 가진 의료정책상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는 다음다음 문제가 아닌가. 전문적인 영역에서 심도있는 숙고와 토론으로 해결책을 도출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여도 탈이 날 터이고 집단행동으로 무엇을 끌어내어도 문제가 아닌가. 한 걸음씩 물러서는 용기를 발휘했으면 한다. 코로나19부터 물리쳐야 한다.의사들을 믿는다. 섣부른 정책 추진이 의료 전반에 미칠 부작용을 우려하는 당신들의 진정을 믿는다. 정부를 믿는다. 모자라는 의사숫자를 확충하고 공공의료의 기틀을 세우겠다는 보건당국의 진정을 믿는다.지금은 아니다. 코로나19로 어지러운 판에 혼란만 더할 뿐이 아닌가. 몸도 마음도 지쳤을 국민을 좀 편안하게 해 주시라. 주장으로 부딪힐 게 아니라 정책으로 겨루어 주시라. 행동으로 을러댈 게 아니라 이성으로 맞서 주시라. 의료는 남의 일이 아니라서, 국민도 주시하고 있음을 명심하시라. K-방역과 K-의료에 대한 신뢰를 믿어주시라.

2020-08-26

모두의 책임이다

장규열한동대 교수말복이어서 그랬을까. 광복절이 뜨거웠다. 국권을 찾았던 뜨거운 감격을 기념하는 한편, 나라를 걱정하는 이들이 광장을 채웠다. 문제는 코로나19. 겨울 끄트머리에 찾아왔던 감염병은 봄과 여름을 건너 가을을 넘보고 있다.전세계 188개국에서 하루에 20만명도 넘게 감염시키면서 2천만을 상회하는 확진자를 낳고 80만에 육박하는 사망기록을 남기고 있다. 지리한 터널을 언제 통과하려는지 아무도 모른다. 광복절 광화문집회가 촉발한 감염확산 위험은 이전의 경우보다 심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라의 건강이 경각에 달렸다.코로나19가 몸을 다치게 하겠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로는 사회의 건강도 이만저만 해치는 게 아니다. 미국이 코로나19 방역에 실패하는 까닭은 국민의 건강문제를 정치적 담론으로 몰아온 대통령의 실수로 보인다. 정치적 격론 속으로 빠져든 감염병을 대통령 본인은 물론 미국의 정치권도 도무지 건질 바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거야말로 타산지석이 아닌가. 코로나19가 정치적 편가르기의 소재가 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소동이 다 지나고 혹 결산에 이를 때에 공과 과를 가늠할 일이 있을지라도 지금은 방역에 집중하여야 한다. 백척간두에 섰을 방역당국의 심정은 어떤 모습일까.틀린 말은 아니다. 교회가 문제다. 신앙의 본질보다 정치적 담론으로 물들이며 집회를 주도한 목사의 책임이 크다. 부적절한 주장과 언변으로 신자들을 오도하고 호도해 온 목사와 교회에 대하여 분명한 판단과 의견을 제시하지 못했던 한국교회에도 책임이 있다. 교회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웃을 돌아보고 사회의 건강을 살피는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 교회가 믿는 이들의 신앙적 성장을 도우며 사회적 책임을 공유하게 되면 오늘 이 사건은 교회의 건강도 회복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방역은 정치가 아니다. 오른편 왼편으로 갈라 다툴 일인가. 코로나19를 막는 길에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을 까닭이 없다.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다가도 모두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등장하는 ‘국난극복 DNA’를 발휘해야 할 때가 아닌가. 이념의 차이를 딛고 국난을 헤쳐왔던 기억을 되살리면, 편갈라 싸웠던 이슈들은 오히려 헐거운 과제들이었다. 정말로 어려운 문제 앞에 겨레는 언제나 하나가 되어 솟아오른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K-방역’이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지나는 난관이 또 하나의 결실이 되는 역사를 남겨야 한다.모두의 책임이다. 모두에게 닥친 코로나19이며 함께 지나가야 할 관문이다. 누구를 탓하여 무엇을 얻으려는가. 차이를 극복하고 어려움을 이겨낼 좋은 시험대이다. 대선을 앞두고 헤매는 미국이 있다. 총선을 거뜬히 치러낸 한국이 있다. 이겨내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구호와 선동에 휘둘리지 않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생각에 따라 편갈라 다툴 일은 따로 또 많다. 코로나19가 지나간 뒤에는, 겨레의 마음도 건강해 지지 않을까. 세계가 보고 있다.대한민국, 파이팅!

2020-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