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위기가 멈춰서는가 싶다. 단정하기 어렵긴 해도 지난 한 달 급하게 치닫던 확진자 증가세가 사뭇 안정되었다.에볼라(Ebola) 바이러스가 서아프리카를 휩쓸던 무렵, 놀랍게도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Bill Gates)가 ‘앞으로 지구상에 수천만 명이 한꺼번에 죽어 나가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이는 핵전쟁 때문이 아니라 감염병의 만연에 따른 일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예견한 내용의 상당 부분이 오늘 현실로 나타나고 있어 놀라울 뿐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바이러스와 유사한 상황이 앞으로도 다시 발생할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세계가 만난 코로나19 광풍은 아직도 거세다. 국내 지역감염의 위험은 여전하다. 신천지교회가 끼친 심대한 어려움이 잦아들면서 이제는 일반 교회들이 집단으로 모여 예배하는 일이 생각 거리가 되었다. 예배를 귀하게 여기는 믿음은 소중하고, 신앙의 자유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성경과 교리는 ‘안식일’을 잘 지킬 것도 명시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는 방역을 위하여 다중이 밀집해 모이는 일을 자제하여 줄 것을 권고한다. ‘방역의 필요’와 ‘신앙의 자유’가 충돌하는 것일까.학생없는 학교, 손님없는 극장, 불꺼진 무대, 한산한 길거리, 쓸쓸한 음식점, 차없는 도로들, 온라인 강의실…. 모두들 힘들지만 비정상을 견디는 까닭은 오직 한 가지. 코로나19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키려는 몸부림이 아닌가. 주일도 지키고 예배도 성심껏 올리시라. 다만, 치명적 감염의 위험을 피하자는 국민의 요청이 그렇게 부담이 되시는가. 누구도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다. 아무도 종교의 진정성을 배척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사람의 목숨과 사회의 안정을 해칠지도 모를 집단적 회합에 어쩌면 그렇게 목숨을 거는가.전쟁 못지않게 병균이 인류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했음을 기술하였던 제러드 다이어몬드(Jared Diamond)도 ‘바이러스의 가공할 공격에 적극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대비하여야 한다’고 경고하였다. 앞으로도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더욱 거세질 모양이다. 의료진과 연구진의 끊임없는 노력이 장기적인 해결책을 찾아낼 것으로 믿는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대응책 두 가지가 손씻기와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닌가. 학교와 일터가 구체적으로 서로 돕는데, 교회가 오히려 사회적 감염을 만들어 낸다면! 경제적 어려움이 실천에 장애가 된다면, 이를 사회적으로 지원할 방법을 모색하면 되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존재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삶을 위협하고 일상을 어지럽게 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힘이 되고 격려가 되어 등불을 밝히는 교회가 그립다. 말씀 가운데 칼날이 보여 섬뜩해지는 일은 그만 만나고 싶다. 함께 이기고 일상을 회복하려면, 교회도 바뀌어야 한다. 위기를 뚫고 일어서는 길에 예외는 없다.

2020-03-18

언론은 무엇을 먹고사는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엄마가 널 사랑한다고? 그거, 확인해!’시카고트리뷴(Chicago Tribune)지 본사 복도에 걸린 현수막이다. 누가 어머니의 사랑을 의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저 현수막은 언론이 하는 일 가운데 ‘확인하고 확인하는 일’ 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는 걸 강조한다. 생각 속에 그 어떤 확신이 있다고 해도, 사실로 확인하지 않고는 보도하지 말라는 것이다.‘확인은 모든 언론행위의 본질이다.’ 하버드대학에서 언론 관련 이슈들을 다루는 니먼재단(Nieman Foundation)이 보고서에 적은 한 줄이다.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이런저런 실수들이 혹 있을 수도 있겠으나, ‘확인’에서만큼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다짐이 언론인들에게 요청되는 바이다.신뢰는 어디서 오는가. 옥스퍼드대학의 언론연구소가 38개국 국민들의 언론신뢰도를 조사했다. 한국은 겨우 22퍼센트의 국민들이 언론을 신뢰할 수 있다고 답하여 최하위를 차지했다. 한국인의 거의 80퍼센트가 언론보도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 아닌가. 언론을 믿지 못하겠으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독자의 신뢰를 먹고 살아야 하는 언론이 시민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날마다 시간마다 보고듣는 언론보도를 시민들이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는 게 아닌가. 언론이 누리는 ‘언론자유’지수는 향상되고 있다는데,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한다면 누구의 책임일까. 한 영국인 프리랜서 기자는 ‘한국언론이 형편없다’는 혹평을 하면서, 부실한 출처확인을 지적하였다고 한다. 외국인의 눈에도 확인부실이 보인다면 누가 책임져야 하겠는가.언론뿐일까. 확인없이 쓰고 읽고 나누고 소통하는 일. 생각없이 받아들인 책임은 독자에게도 있다. 살피지 않고 나누고 마는 대중에게도 책임은 있다. 세상이 변한 줄 모르고 수동적으로 보도를 수용하는 일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언론이 또 다른 권력임에 틀림이 없으므로, 견제와 균형은 언론에도 적용해야 한다. 신문에 났거나 방송에서 보았으므로 그대로 믿어주던 시절이 있었다. 언론기관이 독자 대중의 눈과 귀를 좌우하던 시절이 있었다. 디지털과 온라인의 도래는 심대한 도전으로 다가와 바뀌지 않고는 배길 재간이 없다. 소문과 확신으로 써 내리는 기사는 사라져야 한다. 양심을 빙자하여 진영논리에 갇힌 기사는 그만 보고 싶다. 공정하고 투명하여 사안의 넓은 지평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길 바란다. 확인에 들인 노력을 확인하고 싶다.길은 본질에 있다. 언론은 독자의 신뢰를 먹고 산다. 힘있는 자들을 향한 매서운 감시와 분명한 견제를 실행하려면, 언론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코로나19 상황을 지나며 우리 언론이 보는 시각과 해외 언론이 평하는 바가 어떻게 비교되는지도 살펴야 한다. 확인을 생명으로 한 언론 보도와 느낌을 배경으로 한 소설 쓰기는 다를 수 밖에. 확인을 토대로 우리 언론이 시퍼렇게 살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확인이 사라지면 언론이 아니다. 언론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2020-03-11

불편하여 배운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모든 것이 비정상이다. 코로나19 사태가 많은 것을 집어삼키면서 일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그런 가운데 마음이 많이 쓰이는 부분이 교육. 초중고는 사상 처음으로 개학을 3주나 연기했다. 학교의 문이 열리면 ‘사회적 감염’의 위험이 급증할 것이므로 섣불리 개학을 당기기도 어렵게 생겼다. 개원을 미루고 있는 유치원들도 언제 어린이들을 다시 맞이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새 학기 학생들로 그득했을 대학교정도 쓸쓸하다.대학들은 사정이 그래도 조금 나아서 온라인 강의 등으로 수업결손을 보완하기로 하며 개강을 준비하고 있다. 필자가 일하는 대학은 일정은 미루지 않고 이미 개강했다. 강의는 물론 온라인으로.디지털 문명을 좋은 것으로만 여겨왔던 교수와 학생들은 온라인 소통이 얼마나 불편하고 제한적인 일인지 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강의하는 교수는 학생들의 반응을 보지 못해 답답하고 학생들도 교수에게 바로바로 응답하지 못해 갑갑하다. 쌍방향 소통을 기대했던 모두는 기대밖에 일방향으로만 이뤄지는 전달이 오히려 낯설다. 더불어 어울리고 대화하며 나누는 ‘교감의 다이나믹’을 잃은 교육은 기대했던 대학교육이 아니었지 싶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국민의 건강이 위협받는 상황이 아닌가. 멈출 수 없는 교육의 소명을 수행하는 대학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었을까. 활용가능한 수단을 최대한 가동해 소기의 교육효과를 거두려는 대학의 노력이 아닐까. 대학이 공을 들이는 만큼, 교수도 학생도 최적의 성과를 거두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교육은 멈춰 설 겨를이 없다. 모든 상황을 통해서 무엇이라도 배운다. 대학뿐 아니라 유초중등 교육을 포함한 모든 텃밭에서 학생들이 이번의 사태를 통하여 배우게 해야 한다. 사회가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내는지, 나라와 개인은 역경을 지나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치는 무엇이며 전문가는 누구이고 언론은 또 무엇이며 종교는 무엇인지. 영국 재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국가와 국민의 진정한 가치는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다. 교육의 진정한 가치도 오늘처럼 힘겨울 때 빛이 나도록 만들어야 한다. 불편하고 비정상적인 상황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지 가르쳐야 한다. 이웃의 소중함도 깨우치지 않을까. 눈물겹도록 최선을 던지는 전문가 집단이 있는가 하면 사사건건 시비만 거는 무리들도 있다. 감사와 배려의 뜻을 새기게 되며 차별과 혐오의 의미도 챙기게 된다.불편해 배운다. 손해보며 일깨운다. 온라인 강의가 부족하지만 이해하려는 눈으로 보면 오히려 감사하다. 코로나19로 만나는 온갖 어려움을 배려와 용기로 이겨내야 한다. 결산과 평가는 지나간 후에 매섭게 따지기로 하자. 지금은, 정부와 의료진의 노력에 마음과 행동으로 함께 했으면 싶다. 교육다운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선생도 학생도 함께 배우는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2020-03-04

정치와 선거는 내려놓기로 하자

장규열 한동대 교수가히 광풍이다.‘코로나19’가 온 나라를 삼켜버렸다. 깊은 우려와 함께 높은 관심이 치솟는다. 날마다 알려지는 확진자 숫자는 위험이 순간순간 내게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걱정하게 만든다. 대구와 경북은 초유의 위기를 만났고, 신천지와 대남병원은 진원이라는 의심을 산다. 초중고 학교들 개학이 연기됐지만, 일주일이 충분한가 의심스럽다. 새 학기를 앞둔 대학들도 개강을 미루거나 온라인강의로 대체하는 등 지혜를 모은다. 우리뿐 아니라 지구적 위기가 되어가는지 이란과 이탈리아, 급기야 미국에도 비상사태에 대비한다는 뉴스가 전해진다.사람은 가장 어려울 때 진면목을 드러낸다. 사회도 마찬가지. 오늘처럼 힘든 일을 만나니 보수든 진보든 이념의 향배가 그리 힘을 쓰지 못한다. 총체적 위기 앞에 정치적 경향성은 별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내고 만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 앞에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기보다 협력의 지혜를 모아가야 한다.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며, 해결책을 찾기 위해 생각을 집중해야 한다. 정략으로 혼돈을 거듭할 일이 아니라 전문성으로 문제를 돌파해야 한다. 중국에서 시작했지만 시급한 과제는 신천지가 아닌가. 대구와 경북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모든 일에 잘 대처하였는지 평가와 분석은 문제가 지나간 다음에 하기로 하자. 정부도 돌아볼 일이 있을 터이지만, 위기를 정략으로 대하는 당신이 더 문제가 아닌가.정치와 선거는 내려놓기로 하자. 문제 앞에 이념이 힘을 잃듯이, 건강과 생명 앞에 정치와 선거는 또 무슨 소용인가. ‘코로나19’를 넘지 못하면, 국민에게 그 어떤 희망을 전할 수 있을까. 캐나다의 정치인 마이클 이그나티에프(Michael Ignatieff)는 “세상에는 정치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많다”고 하면서 국민건강 과제는 정치적 담론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며 애쓰는 의료진의 전문성을 믿어야 한다. 신천지교회가 잘못 대처한 일을 종교의 자유에 연결하는 실수도 문제가 아닌가. 특정교단을 차별함이 아니라 그들이 혹 이 모든 감염과 전파에 기여하지 않았을까 우려함이 아닌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눈에 보이는 위험과 실수는 반드시 규명하여야 한다. 해결책을 모색하는 노력을 지원해야 하며, 불필요한 정쟁은 거두어야 한다. 언론도 의견의 차이에 집중하기보다 위기극복을 위한 해결책에 집중했으면 한다.위기는 지나간다. 어떻게 지나가게 할 것인지에 집중해야 하며, 지나간 시간을 붙들고 늘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어려움의 터널을 통과한 다음에, 또 닥칠지 모를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모든 잘잘못을 돌아보고 평가해야 한다.‘코로나19’의 가파른 언덕을 넘은 다음, 정치와 선거의 문을 다시 열었으면 한다. 주장과 의견에 휘둘리기엔 심각함이 도를 넘는다. 해결과 극복에 집중할 수 있도록 모두의 지혜를 모으기로 하자. 힘내라, 대구경북!

2020-02-26

기생충은 누구인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문화는 힘이 세다. 봉준호 감독이 만든 영화 ‘기생충’의 성공이 모두를 들뜨게 하였다. 아카데미 4관왕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남겨, 영화계뿐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자긍심에도 큰 획을 더하였다.수상의 영광이 높게 빛났던 만큼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의 그늘은 한참 깊고 서글프다. 반지하에 사는 한 가족이 신분상승을 위해서 반칙과 편법을 사용하면서라도 더 나은 삶을 낚아보려 한다는 스토리. 그런 와중에 자신들 뿐 아니라 더욱 힘든 상황에 몰린 또 다른 지하층 신분의 사람들과 얽힌다는 이야기. 영화는 이들을 누군가의 삶을 잠식하며 갉아먹는 기생충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오늘 세상에 펼쳐지는 경제적 불평등을 고발한다. 여기서 잠깐! ‘기생충’에서 진짜 기생충은 누구일까?기생충은 주인에게 기생한다. 우리 사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여 나라의 주인이 국민임을 선언한다. 국민은 잘 살고 싶다. 일상을 영위하며 굴곡없이 안전하게 살고 싶다. 국민의 삶이 순조롭게 나아가도록 소통하고 협력하며 방법을 찾아 실행에 옮기도록 하는 일을 소위 ‘정치’가 맡는다. 오늘 국민이 목격하는 정치는 어떠한가. ‘높은 사람들’이 되는 게 아니라 국민을 섬기는 심부름에 나서는 일이 아닌가.국민은 평안한 일상을 바랄 뿐인데, 정치는 어찌 이토록 시끄러운가. 탈당과 복당을 거듭하더니만 결국 옛 모습으로 보이는 게 정치의 현실이라니! 당신들의 생각 속에 당신의 주인은 어디에 있는가. 국민을 핑계삼아 욕심만 채우는 정치는 국민에게 기생충이다.언론.‘독자’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는 국민은 언론에게도 봉이 잡힌다. 사실과 사건들이 실제로 어떻게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독자를 언론은 제대로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특정 의견집단에 복무하며 사안을 들여다보는 틀을 만들어 내어, 사실이 왜곡되고 독자가 호도되지는 않는가. 독자가 적절하게 판단하려면 언론이 바르게 알릴 책임이 크다.작은 것이 부풀려 지거나 있었던 일이 보도되지 않으면 국민이 바르게 알 길이 없다. 벌어진 일들과 국민의 귀를 연결해 주어야 할 언론이 아닌가. 디지털과 온라인 언론환경에서 우리 미디어의 자리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 21세기 미디어가 수행할 역할과 소임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한다. 독자를 볼모삼아 편들기만 부추기는 언론은 독자에게 기생충이다.영화는 일그러진 모습을 고발하였다. 정치는 그 모습에 주목하여야 한다. 언론도 그 모습을 관찰하여야 한다. 보다 평등하고 보다 공정하며 보다 평온한 세상이 다가오도록 문화도 정치도 언론도 생각을 모아야 한다. 수상의 기쁨에 머물 일이 아니라, 누구든 기생하지 않고도 제 몫을 다 하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국민에 기생하는 정치와 독자에 기생하는 언론은 이제 모두에게 들켜버렸다. 본연의 자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도, 정치와 언론의 몫이 아닐까.

2020-02-19

세상이 바뀌길 정말로 원하시는지요

장규열 한동대 교수좋은 말이 듣기는 좋다. 금방이라도 살림이 나아질 것인가 꿈에 부푼다. 당신을 선택하면 우리네 인생에 꽃이 필 것인지. 정치의 계절, 사람이 모인 곳이면 낯선 이들이 명함을 돌리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허리를 굽힌다. 어디서 뭘 했는지 몰랐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인사를 하고 악수를 청한다. 우리 동네만 고약해서 그런가 했더니, 이건 전국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기성정치인도 지난 몇 년 간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없다. 새로운 얼굴들도 그냥 얼굴과 이름뿐이다. 때로 나이가 젊기는 한데, 그냥 어리기만 할 뿐 생각은 마찬가지다. 정치판에 나서면 그렇게 변하는 것일까. 싱싱한 모습은 오간 데 없고 무턱대고 들이대기만 배우는 것일까.좋은 소리에도 지쳐만 간다. 누구에게도 귀가 번쩍 트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 나물에 그 밥’은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변화, 혁신, 개혁, 통합. 누구나 들먹이고 언제나 듣는 소리가 아닌가. 변화를 하나같이 같은 모습으로 하겠다니. 통합을 했다는데 이제보니 이전의 모습이었다니. 국민이 바보인가. 유권자를 그렇게 해서 속일 수 있을까. 국민은 나라가 새롭게 변하길 원한다. 유권자는 살림이 정말로 나아지기를 바란다. 어떻게 바꿔갈 것인지 보여줘야 한다. 어떻게 나은 세상을 당겨올 것인지 드러내야 한다. 듣기만 좋은 공염불로 유권자의 선택을 기대하는가. 들리지 않는 당신의 계획은 언제 내어놓을 것인가. 유권자는 당신 목소리에 지쳐만 간다. 유권자는 당신의 ‘생각없음’에 이미 지쳤다.다른 목소리를 듣고 싶다. 다른 생각을 만나고 싶다. 다른 계획이 있어야 한다. 다른 꿈을 보여줘야 한다. 젊은 사람을 영입했다고도 들었고 새 사람을 맞아들인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냥 젊기만 하고 처음 본 사람이었을 뿐, 그들의 생각을 들어본 적이 없다. 청년들에게 어떤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인가. 새 사람이 펼쳐 낼 세상은 어떻게 바뀌어 갈 것인가. 선거에 이기는 방법으로 ‘정책’이 후순위라고 한다. 그게 말이 되는가. 유권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생각을 듣고 뽑기 보다 이름만 듣고 선출했다는 게 아닌가. 얼굴만 보고 선택했다는 게 아닌가. 선거에 나서는 후보가 바뀌려면 유권자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잘 듣고 판단해야 하고 잘 살펴 결정해야 한다. 나라가 바뀌고 살림이 나아지려면 ‘생각깊은 정책’으로 겨루어야 한다.극작가이자 배우였던 오손 웰즈(Orson Welles)는 ‘후보의 인기가 선거 결과를 갈라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미키마우스나 도널드덕을 뽑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이름과 얼굴 그리고 나이에 휘둘리는 선거는 그만 둬야 한다. 생각을 묻고 정책을 살피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유권자도 바뀌고 후보자도 달라진 ‘선거혁명’을 기대해 본다. 나라의 내일이 변화하고 우리집 살림이 정말로 나아지기 위하여. 선거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2020-02-12

어른도 춤추게 하려면

장규열 한동대 교수사회의 모습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바뀌어 간다. 다문화사회로 변화해 간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 온 어른들이야 본인의 결정에 따라 삶의 터전을 바꾼 것이지만 어린이들은 다르다. 영문도 모르고 부모를 따라왔거나 한국문화에 충분히 동화되지 못한 가정환경에서 자란다. 두 문화가 어린이들의 삶에서 충돌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제3문화 아동(Third Culture Kids)’. 완전한 한국문화도 아니고 분명한 다른 문화도 아닌 또 다른 환경에서 자란다. 필자의 아이들이 바로 그런 아이들이었다. 태어나 자란 미국에서 아빠를 따라 한국으로 옮겨와 지냈던 한동안의 시간은 쉽지 않았을 터. 이들이 기억하는 미국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이었을까.미국 학교에서는 무엇을 해도 ‘잘 했어, 정말 잘 했어. 더 잘해 보자’를 늘 듣고 자랐는데, 한국 학교에서는 무엇을 해도 ‘그게 뭐야. 틀렸잖아, 처음부터 다시 해봐.’를 듣는 게 일쑤였다는 고백. 늘 칭찬을 듣고 자라다가 이제는 손가락질만 겪으며 지냈다는 기억. 미국이든 한국이든 어느 선생님 눈에 학생의 서툰 솜씨가 눈에 찰 까닭은 없다. 하지만 어린이 쪽에서 생각해 보면, 학생은 지금 애쓰는 중이 아니었을까. 선생님 눈에 들기 위해서 노력한 결과가 오늘 그 모습인데, 칭찬과 격려가 아니라 핀잔과 질책이 쏟아진다면. 최근 미국의 한 연구진은 학교에서 칭찬이 질책보다 집중력을 30%나 높여준다고 했다.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격려와 응원은 학습과 학교생활에 동기를 불어넣고 추진력을 더해줄 것이므로.중국발 감염병 사태로 온 나라가 긴장하고 있다. 돌아오는 우리 교민들을 맞이하는 지역주민의 태도에 이념과 진영논리에 물든 혐오와 차별 메시지가 걷힌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민주정치에 견제와 균형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전하지 않고 미워하는 마음에 트집부터 일삼는 태도는 일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절망하게 할 것인가. 정말로 중요한 일에는 이념의 좌우가 힘을 잃는다. 해결해야 할 큰 과제 앞에 모두 한마음이 되어야 한다. 아프지 말아야 하고 얼른 나아야 하며 번지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닌가. 진보니 보수가 끼어들 틈이 없다. 문제해결을 위해 똘똘 뭉쳐야 한다.소통은 문제를 극복하려 함이 아닌가. 최선을 다하려는 이들의 노력에 이왕이면 격려와 칭찬이 쏟아져야 한다. 숙제를 풀기 위해 밤낮없이 애쓰는 손길에 마음을 보태야 한다. 낯선 환경에서 오늘 그 모습으로 최선을 던지는 아이들에게 칭찬이 필요했듯이, 처음 겪는 건강안보 과제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집중력을 높여 해결하도록 밀어줘야 한다. 결산과 평가는 반듯하게 하기로 하고, 과정에 들이는 수고에는 격려로 도와야 한다. 아이든 어른이든 더 잘하게 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미움으로 탓할 것인가 격려로 보듬을 것인가.

2020-02-05

당신의 오늘을 파괴하라

장규열 한동대 교수세상이 바뀌었다. 변화의 물결이 거세다. 디지털과 온라인은 이미 생활이 됐다. 인공지능은 생활의 지평에 변혁을 예고하고 있다. 불안정과 불확실이 오히려 상수가 됐다. 내일을 예측하고 미래에 대비하는 태도마저 이전과는 달라야 한다. 전통과 관습이 푯대가 됐던 어제와는 결별해 오늘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사이버 세상에는 정답이 실종됐다. 이전의 상식과 누군가의 권고에는 늘 물음표가 달린다. 트렌드의 유효기간이 짧아졌으며 유행의 속도는 상상을 넘는다. 이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새해를 맞으며 우리 자신은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세상이 바뀐 만큼 나는 변화하고 있는가.‘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을 주창했던 경영학자 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이 최근 별세했다. 방대한 경영 사례들을 통해, 진정한 미래가치를 열어가는 방법이 ‘파괴적 혁신’임을 증명했다. 현대 경영의 모든 영역에서 그런 방식의 변화가 상식이 되어간다고 했다. 조금씩 바뀌어 가는 변화로는 부족하다고 하였다. 정답이 없어진 세상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려면, 상식을 거부하고 격식을 파괴하며 새롭게 만들어가는 혁신을 불러와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시작된 현대경영의 트렌드는 2010년 이후에는 상식이 됐다고 했다. 파괴의 수준에 이를 만큼 오늘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파괴를 통해 혁신에 이르는 경영으로 의미있는 성과를 도모해야 한다. 완전히 다른 내일을 만들어 내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한다.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정치의 계절, 구호로만 변화를 외치는 정당들과 겉으로만 바꾸겠다는 정치인들이 차고 넘친다. ‘새정치’가 뭘 말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새롭다는 외침 가운데 옛 모습이 춤출 뿐, 변화와 혁신이 이처럼 공허하게 들릴 수 있을까. 풍성한 말들이 실제로 무엇을 바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어느 한 자락 바뀔 것으로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의 미래는 어디에 있는가. 세상은 빛의 속도로 바뀌어 가는데, 우리가 어제의 모습만 반복하고 있다면! 정치가 ‘변화’의 참뜻을 구부리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내일을 맞을 것인가. 이런 고답적인 정치환경이 혹 문화와 경제, 종교와 언론에도 나쁜 영향을 끼쳐, 누구도 진정한 변화를 도모하지 않고 아무도 바뀌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면!변화를 포기하면 내일이 없다. 과거를 반복하면 미래가 없다. 변화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 변하지 않고 살아남을 길은 없다. 변화를 위해 우선 부수어야 한다. ‘파괴적 혁신’은 경영뿐 아니라 삶의 모든 과정에 적용돼야 한다. 변화하기 위해 부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당신의 오늘을 파괴하지 않고, 내일의 변화를 만날 재간이 없다.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지름길은 먼저 파괴하고 앞서 변화에 이르는 게 아닐까. 당신의 오늘을 파괴하길 기대한다.

2020-01-29

생각이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힘들고 어렵다. 거친 세상에 버티고 서 있는 일마저 버거울 지경이다. 사람마다 삶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여기까지 오느라 허덕였던 굽이굽이가 보이지만, 앞으로 헤쳐갈 날들도 그게 어디 쉬울까.우리에겐 좁은 땅에 사람이 또 많아 어쩌면 곱절로 힘들었을까. 여유가 없고 위로가 없으며 칭찬이 없고 격려가 없다. 경쟁과 아귀다툼으로 가득한 끝에 혐오와 차별, 질시와 반목이 넘치는 세상. 정치와 종교, 언론과 교육에 화합보다 편가름이 주제가 되고 소통보다 단절이 화두가 된다. 갈라진 편들끼리 모인 집회에서 ‘우리가 이겼다’는 환호가 들리고, 생각이 다른 상대를 향해서 ‘얻어맞지 않은 게 다행’이란다.우리는 왜 그럴까. 힘이 없던 시절 남들이 갈라놓은 민족의 운명이 역사의 덫이 되었다. 남과 북이 헤어진 것이 이토록 질긴 질곡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나뉜 둘이서 다시 뭉치면 될 줄 알았겠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아버렸다.그런 처지는 마음에도 들어와 박혀 사람들의 생각마저 갈라놓았다. 세상은 이념의 벽을 넘어섰다지만, 한반도는 갈등의 굴레에 맴돌고 있다. 이제는 역사를 놓아줄 방법이 없을까. 겨레가 갈등에서 헤어날 방도가 없을까. ‘이게 나라냐’는 물음이 내 마음대로만 돌아가는 나라를 기다리는 것일까.이긴 편과 진 편이 끝도 없이 험담과 욕설을 날리는 나라는 정상국가가 아니다. 싸움에 이겨서 좋은 게 아니라, 정말로 나라가 잘 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생각이 달라도 같은 산을 오른다. 방법이 달라도 같은 방향을 겨냥한다. 그래서 만나고 겨루며 토론하고 협상하는 것이 아닌가.나만 언제나 맞고 상대는 항상 틀린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조절하고 수정하며 보완하고 협의하며 나아가야 한다. 완벽한 사상은 있을 수 없으며 다 틀린 생각도 불가능하다. 누구에게도 정답은 없으며 지혜는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다. 절대선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절대악으로 깔아뭉갤 일도 없어야 한다. 오른쪽도 귀하고 왼쪽도 소중하다. 새는 두 날개로 나르지 않는가. 서로 도와야 하고 함께 보태야 한다.좌우가 첨예하고 맞선 정치판에서 ‘우리는 어차피 한 편이 아니냐’라던 미국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의 생각이 보이지 않는가. 냉전이 물러간 세상에 우리만 무한경쟁에 시달린다면, 이젠 좀 겸허하게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같은 산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오르고 있었던 그 산이 다른 곳이 아니었음을 깨우쳐야 한다. 대한민국이 잘 되어야 하고 우리 국민이 행복해야 한다. 정치와 종교, 언론과 교육은 나라와 국민이 편안하고 행복한 길을 준비해야 한다. 다툼과 경쟁에 몰두하기보다 화합과 소통을 만들어내야 한다.나라 안에 대화가 통하고 격려가 넘쳐야 한다. 한 편이 쓰러지는 경기판보다 모두가 살아나는 한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같은 산’을 새기며 나아가야 한다.

2020-01-22

시운상승(市運上昇)

장규열 한동대 교수포항이 가라앉았었다. 지역 경기침체와 더불어 이 도시는 초유의 지진까지 겪으며 지난 몇 해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지진 진원지 흥해를 중심으로 한 도시의 북부 지역을 비롯하여 도시 는 몸살을 앓았다. 부동산 경기의 침체와 함께 전반적인 도시경제와 분위기는 활력을 잃었던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일까. 눌리고 낮은 기운이 도시를 감싸고 돌았다. 기다리던 새벽녘에 한꺼번에 햇살이 비취듯이 해를 넘기면서 좋은 소식이 도시에 들려왔었다. ‘포항지진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어 구체적인 활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도시와 지역의 재건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터이다.문화도시가 되었다. 수년을 공들여 준비한 끝에 포항은 ‘법정 문화도시’로 선정되었다. 지난 세월동안 지켜온 산업도시의 역할에 더하여, 지역의 이미지 기반을 ‘문화’로 이어가는 새로운 비전이 시동을 건다. 문화도시와 더불어, 포항은 ‘배터리도시’가 되었다. 포항에 설정된 규제자유특구에 ‘배터리 리사이클링 제조시설’을 유치하여 미래 먹거리사업으로 지정하였다. 철강이 과거산업의 쌀이었다면, 배터리는 미래산업의 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대통령이 축하하며 전한 메시지는 포항의 경제산업적 특성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기개를 언급하며 지역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즉, 경북에서 처음으로 삼일운동을 시작한 곳이 포항이며 한국전쟁 때에는 학도병들이 목숨으로 전선을 사수했던 보루였다는 것이다. 산업과 문화를 든든하게 담는 지역이 된 셈이 아닌가.수년 전에 한동대의 한 프로젝트 과목에서 포항시 ‘도시브랜딩프로젝트’를 과제로 수행하였다. 당시 학생들이 추천한 바에 따르면, 포항의 이미지를 ‘충전도시’로 차별적으로 브랜딩하여 디지털환경과 4차산업혁명에 걸맞는 도시로 만들어가자고 하였다. 마치 포항이 ‘배터리도시’가 될 것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는 대목이며, 실제로 배터리와 충전을 함께 활용하여 도시브랜딩의 새로운 모습을 개발해 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치고 피곤하여 배터리가 방전된 모습을 한 현대인들에게 충전과 회복을 경험하는 도시로서 포항을 마케팅하고 소개한다면! 관광과 도시 홍보에도 큰 기여를 할 소재가 아닐까 여겨진다. 충전도시와 함께 포항은 축제도시로서 강점을 가진다. 포항국제불빛축제가 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되어 지속적인 성공을 이어가는 중이다.터널을 지나 빛이 보인다. 포항에 새벽이 찾아왔다. 이제는 올라간다. 도시가 깨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문화도시, 충전도시, 배터리도시, 축제도시가 되어 날아오를 터이다. 올라가는 길에 혹 어려움을 겪는 이웃 도시들이 보이면 기꺼이 지혜와 슬기를 나누는 넉넉한 도시가 되어야 한다. 글로벌지평에도 손색없는 도시가 되어,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지역이 되어갈 것이다. 포항, 2020년은 포항에게 시운상승(市運上昇)의 해가 아닌가. 포항, 파이팅!

2020-01-15

그 한 마디의 치명적 약점

장규열 한동대 교수말들이 거칠다. 생각을 나누고 소통을 이어가려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지면을 채우는 언사가 투박하고 공격적이다. 부드럽고 유연한 언어를 사용하면 뜻을 충분하게 전하지 못하기라도 할 것처럼, 언중(言衆)이 만나는 표현들은 날카롭고 뾰족하다. 촌철살인(寸鐵殺人). 여러 생각을 짧은 한마디로 정리해 줬을 때 이렇게 부른다. 통쾌하기도 하고 속이 시원하겠지만, 그 한마디가 어떤 결과를 빚는지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감동하여 마음을 움직이기보다 칼날이 되어 마음을 다치게 했다면. 생각을 바꿔 새롭게 다짐하기보다 마음 문을 영영 닫아걸게 했다면. 대화와 소통의 문이 열리기보다 그 한 마디로 다시는 마주 대하지 않게 된다면.말로 겨뤄야 한다. 생각은 견주어야 하고 의견은 개진되어야 한다. 특히 나라의 앞길을 가늠하고 조정하는 일은 사리에 맞아야 하고 논리가 닿아야 한다. 부족한 이치를 막말로 이기고 모자라는 논리를 혐오와 단절의 표현으로 차단하면, 생각이 더는 나아갈 수가 없고 현실은 점점 힘들어만 간다. 속이 시원한 끝에, 속만 시원하고 말았다면 이는 소통이었을까 배설이었을까. 말로 한 펀치 먹이는 게 필요한 게 아니라, 생각을 모아 더 나은 소통의 장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말재주 좋은 그가 뱉어낸 한 마디가 상대에게 깊은 절망을 안긴다면, 말이 오히려 벽을 만들지 않았을까. 벽, 그것도 소통의 절벽이 생겨나지 않을까. 단절과 반목, 질시와 냉대는 그렇게 생겨나지 않았을까.칼처럼 깊이 박히는 표현을 고대하기보다 생각깊은 논변을 기대했으면 한다. 말을 하는 이도 촌철살인에 ‘속깊은 지혜’를 담기로 하고, 언론은 더 이상 ‘그 한 마디’에 기대지 않았으면 한다. 속이 시원해 이기는 게 아니라 소통을 이어가야 공동체가 일어날 수 있다. 촌철살인격 한 마디를 찾느라, 감정과 편견에 치우치면 이내 막말이 되고 공격적 언사가 되어버리지 않을까. 언론이 제목장사를 하고 종교가 폭압적 언사로 어지러우면 국민은 누구를 믿고 세상을 접할 것인가. 속 시원할 그 한 마디에는 전달효과도 물론 있겠지만, 치명적 약점이 도사리고 있다. 촌철이 살인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 되고 말 것인가. 말을 하려거든 누구를 이겨 올라서는 걸 넘어, 공동체에 유익한 뜻이 담기도록 유의할 일이다. 그 말을 받아 살피고 새기면 더욱 슬기로운 지혜가 솟아오르게 담론을 이어갈 일이다.‘주홍글씨’를 지었던 작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은 ‘단어와 문장은 쓰는 사람에 따라서 선이든 악이든 피어나므로, 문제와 희망을 함께 담는다’고 하였다. 조선의 한 시조는 ‘말로써 말많으니 말말을까 하노라’고 하였던가. 변화와 개혁을 실천해 가려면, 겨루고 벼룰 것은 결국 생각의 힘이다. 그 힘을 바르게 표출하기 위하여 심사를 가다듬어야 한다. 새 해, 정치의 계절에는 특별히 힘과 뜻을 담은 무게있는 말들이 잔치를 벌여야 한다.

2020-01-08

글로벌 浩然之氣

장규열 한동대 교수한국 사람은 탁월하다. 한국인의 우수함은 역설적으로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발견한다. 땅은 좁은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럴까, 나라 안에서 두각을 나타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비슷한 기량을 가지고도 외국에서 뿌리를 내린 이들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고 남들의 인정을 받는다. 시작은 물론 안에서 했겠지만, 밖에서 나래를 펼친 이들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하였다. 물이 좁아서 그럴까, 넓은 물을 겪게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 생각이 자유로와지고 시선이 더 먼 곳에 가 닿는다. 남들을 밟고 올라서기보다 나 자신을 갈고닦아 성숙하려 애쓰게 된다. 발을 딛고 선 곳만 바뀌면 사람이 달라지는 일이 정말로 가능한 것일까.아들은 공부를 못하는 아이였다. 아빠를 따라 억지로 국내에서 보낸 5년 여 동안 학교는 그를 포기하였다. 아니 본인도 자신을 놓아버렸다. 무엇을 해도 되는 일이 없었다. 선생님들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매일 받았던 미국 학교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늘 틀렸고 항상 잘못했으며 지적만 한가득 받아오는 게 학교생활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들려주는 응원의 목소리마저 가짜처럼 들렸으니까. 힘들고 지치며 재미없고 외로웠지만 달리 방법도 보이지 않아 그냥 그렇게 견딘 몇 년이었다. 그러다 혼자라도 미국으로 돌아가 볼까 생각하였다. 한번 해보겠노라고 아빠엄마를 설득하여 아들은 돌아갔다. 아들이 달라졌다! 안 되는 게 없었다.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놀기만 좋아해서 그런 걸 즐긴다고 핀잔을 들었던 연극활동으로 뮤지컬 주연을 겹겹이 도맡았다. 무엇을 해도 칭찬으로 가득했으며, 좀 실수를 해도 금방 수정하면 오히려 상을 받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분에 넘치게 졸업식에서는 대표연설을 하였다. 제목은 ‘우리는 모두 다르다.’ 대학을 다니며 기숙사 방에서 차린 카페는 수많은 친구들의 수다방이 되었다. 학교는 오히려 문제의 소지를 없애주며 격려해 주었다. 꿈을 키우켜 학교를 대도시로 옮겼다. 처음 뉴욕에 도착하였을 적에 ‘디즈니 스토어’ 임시점원으로 일했지만 지금은 ‘디즈니 뉴욕’ 정직원으로 회사가 만드는 뮤지컬을 전국에 마케팅한다. 스스로도 ‘꿈 속을 걷고 있다’면서, 애써 지핀 이 불씨를 더 키워가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던진단다. 아들의 긴 이야기를 짧게 적어 보았지만, 적어도 그가 겪은 미국과 한국은 참으로 다르다. 같은 사람 알렉스가 어쩌면 그렇게 다른 모습이었을까.사람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있지 않을까. 오늘 그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로부터 가능성을 찾고 내일을 보아야 한다. 그는 ‘오늘의 최선’이 아닌가. 거기서부터 쌓아 올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학교가 있고 부모가 있으며 선생이 있다. 가능성의 가닥이 꼭 학과목이어야 할 까닭은 또 어디에 있는가. 공부만 잘 하여 문제만 일으키는 어른이 얼마나 많은가. 멀리 보게 하고 깊이 생각하게 하며 폭넓게 담게 하자. 호연지기, 2020년에는 ‘글로벌 호연지기’를 심기로 하자. 알렉스, 파이팅!

2020-01-01

제발 그만들 좀 하시라

장규열 한동대 교수365일이 언제 다 갔을까. 새해 벽두에 꿈꾸고 다짐하였던 소망과 약속들은 어디에 있을까. 겨우 며칠 남은 이 한 해를 보내며 돌아보는 마음과 다시 바라보는 기대가 가득한 날들이다. 조용하고 뜻있는 시간이 필요한데 나라는 어찌 이렇게 시끄러울까. 소용돌이는 누가 만들었는가.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 것인지. 맨 앞에 선 이들이 저렇듯 싸움판이니 국민의 생각이 편할 날이 없다. 불편한 심사는 누가 잠재울 수 있을까. 누구 좋으라고 저러는 것이며 누가 평화롭게 만들 수 있을까. 저런 끝에 정말로 국민이 좋을 것인지. 저게 지나가면 나라가 평안할 것인지. 당신들이 위한다는 국민은 어지럽기만 하다. 당신들이 바란다는 나라의 평화는 누구 책임인가.놀랍게도 책임이 모두 그들에게 있다. 소란을 만들어 북적이는 것도 저들 때문이며, 잠재우고 평온하게 만들 사람도 바로 저들이다. 정치는 바로 그걸 해내야 한다. 정의상 정치는, 협상과 토론 그리고 법과 제도를 통하여 나라와 국민에게 안정과 질서, 평화와 복지를 가져와야 한다. 국민을 어지럽게 하고 실망스럽게 하면, 정치가 아니다. 정치에 나서면서 다짐하였던 첫 생각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언론. 취재와 보도가 없었으면 어둠 속이었을 국민들에게 전해주는 소식들이 참으로 귀하다. 그런 언론이 진영논리에 휘둘려 누군가의 심부름꾼을 자청한다면, 스스로를 죽이는 꼴이 아닌가. 사실을 토대로 진실을 전하며 국민들이 믿고 찾을 언론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가짜뉴스와 편파보도에 붙들리기보다 양심과 시대정신을 바로 세우는 언론이 되어야 한다. 국민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또 하나 집단이 있다. 종교. 평화와 화합이 아닌 분열과 다툼을 앞서 외친다면 이는 종교가 아니라 선동이 아닌가. 그만들 좀 하시라.올해의 사자성어가 공명지조(共命之鳥)라 한다. 함께 살아야 하는 운명공동체인 줄 깨닫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해친 나머지 모두 죽어 사라지고 마는 운명을 뜻한다는 게 아닌가. ‘이러다 다 모두 죽는다’는 각성이 있어야 한다. 생각이 같은 사람은 없다. 방법이 동일한 집단도 없다. 다른 것을 놓고 싸우는 틈에 본래 꿈꾸던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가 아닌가. 공명지조(共命之鳥)를 경계하며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이루어야 한다. 다르지만 평화롭게 해결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다투면서도 서로 ‘국민’을 위한다는 게 아니었는가. 길게 보아 어차피 국민을 위한 ‘한 편’이 되어야 한다.김민기가 부른 오래된 노래 ‘작은연못’이 남과 북이 갈라져 다투었던 기억만 아파하는 줄 알았더니, 오늘 들어도 찔리는 구석이 더러 보인다. 남은 며칠, 묵은해를 돌아보면서 마음을 가다듬었으면 한다. 정치는 초심으로 돌아가고, 언론은 본질을 생각하며, 종교는 해야 할 일을 생각하시라. 실망만 거듭해 온 국민을 좀 돌아보시라. 빼어난 국민이 지쳤을 때 보여주었던 무서운 손길을 기억하는가. 다르지만 하나일 수 밖에 없는 모두의 운명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한 팀이 아닌가. 평화로운 세모(歲暮)를 만나고 싶다.

2019-12-25

여성은 강하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탈출을 꿈꾼다고 한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우리나라 여성 80%가 ‘한국을 떠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여성이 가지는 지위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그들에게 억울함, 우울감, 상실감, 자괴감을 가지게 하여 다른 나라로 떠났으면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범죄피해에 대한 불안과 불공정성에 대해 느끼는 정도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크다고 한다. 어느 다른 곳들과 비교하기도 전에 우리 여성들에게는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일이 버거운 게 아닐까. 이제는 누구도 무엇이든 숨길 수가 없다. 나라의 울타리 안에서 그저 우리의 문화려니 하고 받아들이던 일들이 이제는 나라들 간의 비교가 얼마든지 가능하여 누구나 알게 되었다.둘러보니, 정반대도 있다. 핀란드의 수상으로 선출된 산나 마린(Sanna Marin)은 34세 청년이다. 여성이면서 젊다. 그가 만든 내각은 구성원 19명 가운데 여성이 열둘이다. 나라의 미래와 정책을 펼쳐가는 분위기와 방향이 느껴지지 않는가. 최근 구성된 영국 하원도 총원 650명 가운데 220명이 여성이라고 한다. 3분의 1을 넘는 숫자가 아닌가. 그 가운데 노동당 소속 의원들 가운데에는 여성이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이들 나라에서는, 여성이라는 까닭에 정부가 펼치는 정책과 관련하여 공연히 우울하거나 자괴감에 빠지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어떻게 이처럼 다른 것일까, 이 나라와 저 세상은. 여성들에게 이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자고 주장할 재간이 우리에게 있는가. 최근에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전 대통령도 한몫 거든다. 싱가포르에서 열린 어느 모임에서 ‘모든 나라에서 여성들이 지도자가 된다면, 우리는 참으로 멋진 세상을 만날’게 아니냐고 물었다. ‘여성이라고 완벽할 수는 없겠지만, 남성보다는 여성이 분명히 낫다’고 단언한 그는 ‘세상이 겪는 문제들은 남성이 권력을 너무 오래 잡고 있어 생겨난다’고까지 하였다. 저런 고백을 하는 남성지도자들이 늘어가면 세상이 더 빠르게 변하지 않을까.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리더십이 검증되면 세상에는 더 많은 여성지도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는가. 우리 사회는 여성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갈 것인가.우리 사회가 거칠다. 막말과 다툼은 일상이 되어버렸고 극한 대립과 양보불가의 구호로 멍들어간다. 불공대천이며 타도필승이다. 이게 정상인가 싶은 대치와 성벽이 늘어만 간다. 나라와 사회가 진정으로 소통하고 화합하며 회복하고 일어서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걱정이 앞선다. 화합의 정치와 소통의 언론은 보이지 않으며, 선동과 편가르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다.여성의 섬세함과 치밀함에 다음 기대를 걸어보면 어떨까. 전통과 문화에 사로잡힌 여성상을 벗고 새로운 지도력으로 옹골차게 다진 여성들을 만나고 싶다. 정책과 소통이 유연해지고 상식과 논리가 통하는 사회가 되려면 여성이 분발하여 나서야 한다.

2019-12-18

안전은 상식이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일은 왜 하는가? 땀흘리는 수고와 노력이 돌려주는 보람과 만족은 여러 모양을 하고 있다. 가족의 하루 하루를 지키는 가장의 흡족함, 성과로 만들어내는 기업의 든든함, 노력이 대가로 돌아오는 나만의 기특함, 일하면서 생기는 동료의식과 협동정신, 그리고 경제활동의 결과로 빚어지는 사회활동과 지역공동체. 일은 사람에게 경제적 가치를 확인하게 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문화적 소통구조를 만들어내며 사회가 유기적으로 돌아가도록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일하면서 보람을 찾고 일에서 나를 발견하며 일이 또 다른 일을 만들어낸다. 비판적 사고와 창의적 발상도 일이 있어야 가능하고, 사회와 국가에도 ‘즐거운 일자리’가 풍성해야 ‘나라다운 나라’도 만들 수 있다.잘사는 나라들의 모임인 G20 국가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웬일일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가운데 ‘산업재해사망율’이 또 1등이라는 것은. 경제수준이 비슷한 나라들 가운데 이를 다시 분석해 보면 다른 나라들보다 거의 세 배나 많은 사람들이 일하다가 죽어간다고 한다. 해마다 2천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하는 현장에서 목숨을 잃어야 한다면 이 나라는 과연 선진국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가. 하루에도 대여섯 사람이 일자리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런 일터를 ‘행복한 산업현장’이라 부를 수 있는가. 사망사고가 그 정도라면 크고 작은 산업현장 안전사고 탓에 다치고 병든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지.‘모든 사고는 예방이 가능하다.’ 전문가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관심과 투자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진단한다. 대기업들이 생산비용을 절감하고 위험을 외주화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안전은 누구에게 떠넘겨 해결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가 누구라도 모두 귀한 생명이며 일에서 보람을 찾으러 또 다른 의미의 ‘고객’이 아닌가. 노동으로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일이 보람찬 환경을 회복하여야 한다. 이익보다 생명이 소중한 경영철학을 세워야 하며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안전한 현장에서 일할 권리가 있다.안전은 상식이다. 불안한 일터에서 행복할 사람은 없다.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것도 부끄러울 판에, 그게 핑계가 되어 일자리가 위험하다면 이는 거의 범죄가 아닌가.유엔이 정한 ‘인권의 날(Human Rights Day)’은 각국의 기업들에게 노동인권을 보장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제도와 규제 때문에 ‘마지못해 돌아보는 안전’에는 빈 틈이 있게 마련이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공동체의 가치를 높이 생각하는 기업문화가 살아나야 한다. 안전을 상식으로 여길 때, 비로소 현장의 안전은 지켜질 터이다. 모두가 안심하는 일터가 보장되어야 한다. 안전이 여지껏 비상식이라면 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길은 멀고도 멀다.

2019-12-11

어린이의 나라는 없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나라를 잃었던 시절에 소파 방정환은 ‘우리의 미래는 어린 아이들에게 있다’고 했다. 작고 어린 꼬맹이들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없다는 생각에 ‘어린이’라는 표현을 지어주었다. 그런 어른들이 모여서 어린이를 위한 여러 활동을 한 끝에, 우리 정부는 1957년에 ‘어린이헌장’을 제정했다. 7개 조로 만들어진 헌장은 ‘어린이는 위험에서 맨 먼저 구출돼야 한다’라고 분명히 적고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얼토당토않게 어린아이들을 떠나보내고 슬픔에 잠긴 엄마아빠가 있다. 어린이보호구역임에도 과속 자동차에 치였다거나 언덕받이 비탈길에서 굴러내린 트럭에 변을 당한 아이들이 있다는 게 아닌가. 우리는 어린이를 위험에서 구출하고 있는가.어린이를 안전하게 지키는 일보다 우리에게 급한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정치인들의 다툼 마당에 얽히게 된 부모들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 어린이헌장이 전문에 적고 있는 대로, 우리는 ‘어린이들의 몸과 마음을 귀히 여겨 옳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힘쓰고’ 있는가. 사회복리와 민생문제를 정치논리의 거래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은 관련 당사자들의 마음을 힘들게 할 뿐 아니라 정치의 진행에도 그리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할 터이다. 아이가 당한 사고 앞에 누구라도 다른 핑계를 들이대면서 우선순위를 논한다면 당신은 참을 수 있을까. 눈물을 닦아줘도 모자랄 판에 엉뚱한 정치적 계산은 내려놓아야 한다. 어린이 안전을 위한 배려는 그야말로 ‘맨 먼저’ 해야 한다. 어른들 계산 탓에 아이들이 위험해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칠 안에, 유엔(UN)이 정한 인권의 날(Human Rights Day)을 맞는다. 올해는 특별히, ‘청소년’들이 각종 인권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게 하고 인권침해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도록 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어린이 인권에 대해서도 배려해, 어린이들을 위험과 폭력, 어려움과 문제들로부터 보호할 기준을 세운다고 한다. 각국의 정부들이 어린이들의 인권신장을 위하여 마음을 모은다고도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어린이들의 하루하루를 여러 위험으로부터 적절하게 보호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충분히 마련해 주고’ 있는가.필자는 한때, 우리에게 ‘어린이날’이 따로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한 미국 친구의 한 마디에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한국은 일 년에 단 하루를 정해 어린이날이라 하는가.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한국의 어린이날처럼 지내는데….’ 우리에게 어린이는 정말로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사람’인가. 어린이헌장은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그들의 안전을 놓고 흥정하는 꼴을 보지 않았는가. 어린이가 안심하고 즐겁게 자라나는 나라가 돼야 한다. 나라를 찾기 위해서도, ‘어린이가 잘 자라야 한다’고 했던 그 어른들의 마음을 되새겨야 한다.

2019-12-04

폭력, 차별, 야만

장규열 한동대 교수두 연예인을 떠나 보냈다. 젊디젊은 여성 재주꾼을 둘이나 잃고서 우리는 무엇을 바꿨는가.인터넷, 악성 댓글, 익명성…. 어느 한자락 직접 대응하기도 버거웠을 공격과 비난을 만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비참하였을까. 비겁하고 비열한 당신은 지금도 버젓이 숨쉬고 있는가. 꽃다운 딸이며 누이였을 그들의 넋을 보내면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안타까운 마음이 깊었겠지만,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빗장 하나쯤 마련하였는가. 떠나버린 한 생명도 세상없이 슬펐을 터에, 한 달 반도 못 채워 우리는 둘씩이나 잃고 말았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지 뾰족한 대안도 방지책도 나누는 이가 없다. 목숨이 얼마나 귀한 것인데, 그냥 각자 알아서 지키라는 말인가.유엔(UN)이 정한 ‘세계여성폭력주간(16 Days of Activism Against Violence Against Women)’을 지나고 있다. 열여섯 날 동안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의 비정함과 무자비함을 살피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 모양의 폭력에 적극 반대하기 위한 날들이라고 한다.특히 올해는 장소와 연령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성차별과 성폭행에 주목해 각종 캠페인을 벌인다고 한다. ‘미투(MeToo)운동’ 등을 통해 알려진 피해자들의 고통과 활동가들의 목소리 덕에 여성에 대한 폭력의 심각성을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인류의 절반을 그 나머지 절반이 우습게 생각하고 도구화하여 비참한 결과를 빚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개인적 수치와 사회적 낙인을 두려워하여, 굴욕적인 침묵으로 가라앉게 되는 일도 너무나 아픈 게 아닌가.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여성자살률 1위라는 오명도 쓰고 있다. 여성경제활동참여율도 조사대상 36개국 가운데 32위라고 하며, 성별 간 임금격차도 무려 36%나 되어 최하위라는 게 아닌가. 우리에게 여성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남성에 비해 턱없이 버거운 삶을 굽이굽이 넘는다. 소설도 읽었고 영화도 보았다. 그러고도 폭력과 차별을 마주하여 두려움과 처절함의 막다른 골목에 처한다면, 이는 비정함을 넘어 야만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 이상 참아내지 말아야 하고 이제는 힘들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 목소리를 내고 고발한들, 관련 폭력에 대한 처벌과 대응수준이 흡족하지도 않아 보인다. 경각심과 인식을 새롭게 하고 제도적 보완에도 함께 주목하여, 여성에 대한 폭력이 실효적으로 감소하도록 노력해야 한다.여성운동가 앤더슨(G.D. Anderson)은 ‘페미니즘은 여성을 강하게 만들려는 운동이 아니다. 여성은 이미 강하다. 단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야 할 뿐이다’고 하였다. 비뚤어진 눈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이 바뀌어야 한다. 여성 스스로 당당함도 회복하여야 한다. 전통문화가 잘못 전달해 준 시선을 돌아보아야 한다.여성과 남성이 차별과 폭력을 걷어내고, 맑고 밝은 길을 함께 다듬어 가야 한다.

2019-11-27

변화를 위하여

장규열 한동대 교수바뀌지 않을 수 있을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세월이 흐르고 사조가 바뀌며 세대가 변하고 세상이 달라진다. 아니 이미 변화했다. 당신은 십 년 전 당신이 아니며 생각도 그때와는 다르다. 좀 가만히 있으려 해도 가파르게 달라져 가는 세상이 그대로 두지 않는다. 조금만 눈을 떼고 있으면, 사물들의 모습이 어느새 몰라보게 바뀌어 있는 걸 발견하곤 한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많은 걸 바꾸어 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도 함께 바뀌어 간다.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이해와 각성에 이르기도 한다. 소통하고 관계를 만드는 방법도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스승과 제자, 상사와 부하, 남자와 여자, 위정자와 국민, 국가와 국가. 모두 다른 세상을 만나는 중이다.한국 기독교 내 가장 보수적으로 알려진 교단 신학교에서, 교수들이 성희롱적 발언을 한 사건이 발생해 물의를 빚고 있다. 여성의 성기를 자극적으로 언급하며 비하했는가 하면, 외모를 놓고 희롱하는 발언까지 있었다고 한다. 수업과 채플 등에서 성희롱과 성차별 발언이 있어, 학생들과 학교 당국이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고 한다. 성직자를 기르는 이들이 어떻게 그런 행태에 이르게 됐을까. 그들이 섬길 사람들의 가슴에도 상처를 입힐 뻔 하지 않았는가. 성경 구절이 혹 남녀를 구분하고 차별하며 여성을 가벼이 여기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했더라도, 오늘 바뀐 세상이 이를 부당한 것으로 바라보는 터에 어떻게 그 같은 옛 모습을 아직도 고수하는가. 보수(保守)라 하여 어느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수구(守舊)에 머물러야 하는가.진보라 하여 급진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듯이, 보수라 하여 수구를 고집하면 안될 일이다. 진보가 변화에 신중해야 하며, 보수는 변화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보수가 오히려 세상 변화에 민감해 바꾸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헤아려야 한다. 어차피 바뀌어 가는 세상을 멈출 수 없을 바에야, 보수가 변화를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보수의 생명은 그 변화를 어떻게 맞느냐에 달려 있다. 용도폐기에 이른 가치를 붙들고 고집하는 보수는 부끄럽고 처연하다. 생각의 틀을 시대정신에 걸맞게 빚어내는지 국민이 불꽃같이 살피고 있다. 이전과 다르게, 살피고 헤아릴 도구들은 국민의 손에 들려있지 않은가.여성에 대한 차별과 경시는 부당하다. 양성은 각각 특별한 존재로 인식돼야 하며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함부로 칭하며 가벼이 대하면 안 되고, 그 어떤 목적을 가지고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동료로서 여성을 새롭게 발견하길 바라고 더욱 폭넓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길 기대한다. 어머니와 누이 그리고 딸들의 하루하루를 새겨보아야 한다. 보수라는 핑계는 낡아도 너무 낡았다.보수가 새로워져야 한다. 진보가 정신이 번쩍 들도록 다시 태어나야 한다. 국민이 편안한 나라가 되기 위해 변화를 겁 없이 맞아야 한다.

2019-11-20

글을 생각하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한글은 우수하다. 소리가 그대로 눈에 보이도록 고안된 글자를 가진 민족이 세상에 드물다. 문맹률이 제로에 육박하는 겨레가 아닌가. 그런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수년 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문서독해력에서 조사대상 22개국 가운데 꼴찌였다고 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국민들 가운데 생활정보가 담긴 보통 문서해득에 취약한 사람이 38%나 되고, 고도의 문서독해능력을 가진 사람은 2.4%에 불과하다고 한다. 적힌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과 글에 담긴 생각을 짚을 줄 안다는 것이 다르다면, 우리는 ‘글’에 대하여 생각을 다시 해야 하지 않을까. 우수한 글자를 가졌으면서 글을 이해함에는 어째서 더딘 것일까. 기계적인 글 읽기를 넘어, 글을 이해하며 분석하고 비판하고 다루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누군가 적어 발표한 글이라 해서, 일방적으로 비판없이 수용하지도 말아야 한다. 디지털 문명이 펼쳐지는 길목에 글과 내용에 그럴듯한 모양을 입히는 일은 너무나 쉽다.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 진실을 담았는지, 필자는 누구인지, 인용한 내용의 출처는 분명한지, 글의 의도는 무엇인지, 전하려는 의미는 어떤 것인지 묻고 물으며 글을 대하여야 한다. 언급하기도 부끄럽지만, 가짜뉴스가 기성언론을 무색하게 하는 지경이 아닌가. 일인 미디어가 언론기관에 도전하는 환경이 아닌가. 미디어시스템과 언론매체들이 긍정적으로 작동할 것인가는 이제 소비자에게 달려있다. 이전보다 더 많이 읽어야 하고, 비교하고 분석하며 날카로운 비평적 시선을 가질 때 언론이 긴장하고 미디어가 제 역할을 회복할 터이다.가짜뉴스에 포위되어서일까, 매체들이 ‘팩트체크’를 한다는데. 글의 내용이 팩트,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를 체크, 즉 확인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럼, 이전의 기사들은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썼다는 말인가? 코바크(Bill Kovach)와 로젠스틸(Tom Rosenstiel)은 명저 ‘저널리즘의 기본(Elements of Journalism)’에서 ‘언론행위의 기본은 사실확인에 있다’고 하였다. 차라리 조금 더 깊이 들여다 보겠다거나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핀다는 정도였으면 좋았을 것을 ‘팩트체크’를 이제 한다니 공연히 불안해지는 게 아닌가. 사회의 기본적인 소통은 언론이 바로설 때 가능해진다. 언론이 보내준 글에서 독자들이 유용하고 신뢰할 만한 내용을 접할 수 있도록 잘 적어 주길 바란다.글은 소중하다. 생각을 전하고 마음을 나누며 소통하고 설득하는 일은 모두 글을 통해 일어난다. 기자나 작가 뿐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지 내 생각을 남에게 전하려면 잘 써야 한다. 좋은 글을 잘 쓰려 해도 기본은 역시 글 읽기에서 출발한다.‘실질문맹률’도 다시 낮아져야 한다. 보고 읽을 뿐 아니라 살피고 새기는 데에도 앞서가야 한다. 글이 독자를 두려워 해야, 가짜뉴스도 사라질 게 아닌가. 대학입시에도 성공해야 하지만, 글을 다루는 솜씨를 길러야 한다. 다음 세대의 성공이 글을 벼르는 능력에 달려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2019-11-13

미래가 문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누구에게나 미래가 문제다. 불확실한 내일이 걱정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보여야 하는데, 당신에게 그런 내일이 느껴지는가. 미래를 열어감에 있어 개인도 노력해야 하지만 정부가 적절한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민주 정부에는 ‘삼권분립’ 개념에 생각이 숨어있다. 먼저 입법부. 국민이 직접 선출한 의원들이 나라가 바르게 운영되도록 법과 제도를 만든다. 행정부는 이를 시행하면서 오늘 나라를 운영한다. 사법부는 혹 그 운영에 잘못이 없는지 살피고 판단하며, 법과 제도가 적절한지도 헤아린다. 사법은 과거를, 행정은 현재를, 입법은 미래를 책임진다. 미래를 맡은 우리 입법부는 잘 하고 있는가. 아니면, 총선준비 운운하며 일신의 안위에 몰두하는가.세상이 변해간다. 무섭게 빠르게 변해간다. 디지털과 온라인, 4차산업혁명과 AI는 이미 우리 곁에 살고 있다. 미래가 오늘이 되었다. 예를 들어, ‘타다’서비스를 검찰이 기소하였다. 고발한 사람과 기소한 검사를 탓할 수 없다. 정해진 법과 제도에 따라서 판단하지 않았을까. 미래를 다루어야 하는 입법부는 무엇 하는가. 문제는, 빛의 속도로 바뀌어 가는 세상을 따라잡지 못하는 우리 국회에 있다. 언제까지 당신들은 총선대책과 공천문제만 붙들고 있을 것인가. 국민의 삶과 나라의 미래를 걱정이나 하는가. 이미 시작된 미래가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동안에 우리 국회는 아직도 잠자고 있었는가. 의원들이 ‘헌법기관’인 까닭은, 헌법에 따라 국민이 맡겨준 무거운 책임에 있다. 책임을 다할 능력이 없다면, 그만 내려와 주시라.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국민을 위하여 일하지 않을 사람에게 힘을 맡기면, 민주주의는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국민을 대표하여 내일을 준비하는 당신이 되어주길 바란다. 선거철로 들어간다지만 나라와 국민을 위한 섬김이 공천 여부와 선거 판세에 흔들리면 안 되지 않겠나. 언론 지면을 오르내리며 걱정을 끼치는 당신은 이제 물러서 주시라. 정치권이 젊어져야 하며 변화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글로벌시장을 꿰뚫어야 하며 디지털환경도 짚어야 한다. 여성과 다문화에도 마음을 열어야 하고 세계적 변화와 해외교민도 돌아보아야 한다. 나라의 내일과 국민의 살림을 돌아볼 양이면, 오늘 당신은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내일 국민이 평안하려면 오늘 당신이 분주해야 한다. 어제와 오늘에 매달리면 내일이 없다. 국회가 맡은 바 ‘내일’ 업무에 매진하길 바란다. ‘타다’서비스가 해결되려면 국회가 나서야 한다. 행정부와 사법부 뒤에 숨는 입법무는 자격이 없다. 세상의 모든 변화를 국회가 맡아 감당해야 한다.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는 국회는 자격이 없다. 자신없는 당신은 그만하시라. 준비된 다음 선수에게 양보하시라.국민이 다가온 미래를 제대로 만나기 위하여 국회가 정신 차려야 한다. 법과 제도를 잘 준비해야 나라의 미래가 평안할 터이다. 문제는 미래다. 미래는 국회의 몫이 아닌가.

2019-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