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이율배반적인 꼼수정치는 망국의 지름길이다

강희룡 서예가조선후기 문신이며 학자인 윤기(1741∼1826) 선생은 그의 저서 ‘무명자집, 잡기’에 인간행위의 욕망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인간 행위의 근본은 욕망이다.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그 마음에서부터 인간사회의 모든 관계와 행동이 시작된다. 욕망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의 욕망과 남의 욕망이 상충하는 관계망 속에서 나의 욕망이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긍정적으로 발현되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욕망의 기본은 갈구(渴求)다. 이 갈구가 실제와 분수를 앞서 나가다보면 사람은 마침내 자신을 자신이 아닌 무언가로 꾸미고 포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실제와 분수는 다 잊어버리고 목표를 향한 폭주의 바퀴를 굴린다는 것이다.윤기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열거했다. 사람들은 질박한 태도를 잘 지켜내지 못하면서 자신은 질박한 사람이라 말하면서 행여 교묘한 사람으로 취급받을까 두려워한다. 또한 검소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검소한 사람이라 말하며, 행여 사치한 사람으로 취급받을까 두려워한다. 청렴하지 못하면서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취급받을까 두려워한다. 정직하지 못하면서 정직하다 말하고는 거짓된 사람으로 취급받을까 두려워한다. 각박한 사람은 자기가 후하다 말하고, 사기 치는 사람은 자기가 진실하다고 말하고, 폭력적인 사람은 자기가 인자하다 말하고, 교만방자한 사람은 자기가 공손하다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를 훤히 꿰뚫어볼라치면 또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열거된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들은 모두 인간 내면에 원초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의 인간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현대인들 중에서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인간형이 가장 많이 존재하는 집단은 역시 정치집단일 것이다. 자신의 영욕과 명예의 허상을 얻기 위해 가식을 꾸미고 과장하다가 마침내는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 전전긍긍하며 남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나라를 운영한다는 사람들로부터 노동을 하는 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이율배반이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이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제대로 직시하고 자신의 실제를 잘 인지하면서 차곡차곡 내가 바라는 것을 향해 실다움을 쌓아나간다면 이 그물을 피할 수 있을 것인데, 욕망이라는 허상이 앞을 가려 유혹하기 일쑤이니 정신을 제대로 차리고 스스로를 돌아보기가 어려울 것이다.욕망은 오직 그 실다움을 제대로 획득했을 때에만 우리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자본주위 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그 욕망의 늪에서 나오기가 그리 쉽지 않다. 문제는 이 이율배반적인 행태가 일반 개개인들에게서 나타나면 그 피해는 한정적일 수 있으나 정치집단에서 나타나면 국가 전체에 미치는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제왕적 대통령제의 일당독재로 망국(亡國)을 재촉할지도 모른다. 이율배반적인 지금의 우리정치의 상황을 보면, 국민들의 삶에 직결된 민생법안을 신속하게 통과시키기 위해 만든 패스트트랙을 민생법안도 아닌 공수처법과 선거법개정을 패스트트랙에 올려 여당과 야 3당이 위헌(바른미래당의 두 의원 강제 사보임)까지 저지르며 통과시킨 사례이다.공수처법의 조직은 비리의 온상인 국회의원과 대통령 친인척에 대한 기소권은 없고, 경무관 이상 경찰과 검사 판사 등에 대한 수사와 기소권을 가지는 삼권분립을 무너뜨리는 권력기관이며, 국민들은 지금의 국회의원 수 300석에도 피로감을 느껴 의원 수 증가에 매우 부정적이며 줄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희한한 비례성 강화와 연동형 선거제로 의원 수를 늘리려는 위정자들의 망발과 국민의 눈높이와는 반대로 질주하는 정치권의 꼼수정치는 결국은 망국이나 망권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2019-05-13

새겨야 할 퇴역장군의 일침

강희룡 서예가조선 중기의 선비이자 재상이었던 유성룡(1542~1607) 선생의 ‘서애집(西厓集), 감사(感事)’에 ‘양을 잃었어도 우리를 고치고/ 말을 잃었어도 마구를 지을지어다./ 지난 일은 비록 어쩔 수 없지만/ 오는 일은 그래도 대처할 수 있으니.’라는 시 한 구절이 보인다. 서애 선생이 임진년(1592)의 왜란을 겪고 난 다음 해 어가를 모시고 도성으로 돌아온 뒤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유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했던 강토를 초토화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임진왜란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 등을 진단하였다. 그중에서도 조정의 대비와 조치가 백약이 무효였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기강이 이미 풀렸으니/ 만 가지 계책 허사로다./ 많은 병사가 시급한 것이 아니라/ 장수 하나 얻기 참으로 어렵구나.’다시 말해 조정 관료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위정자의 용인(用人)이 실패함으로 인해 왜란을 미연에 방비하지도 초기에 막아내지도 못하여 전 국토가 병화에 휩싸이고, 생령이 도탄에 빠진 것은 물론 임금이 의주까지 몽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다시는 그 같은 전철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한다는 뜻에서 ‘양을 잃고 우리를 고친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끝맺고 있다. 망양보뢰(亡羊補牢)는 어떤 일을 실패한 뒤에 뉘우쳐도 아무 소용이 없음을 이르는 말로 그 뜻이 변용되어 쓰이기도 하지만, 본래는 어떤 일을 실패한 뒤라도 재빨리 수습하면 그래도 늦지는 않다라는 뜻의 성어이다. 국가든 개인이든 양을 잃기 전에 미리 그 기미를 알아차려 우리를 고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국가의 정책이나 제도, 법령에 관계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양을 잃은 뒤에라도 우리를 고치는 것이 차선책이라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을 잃은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다. 원인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는 올바른 해결책이 나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군 검찰의 수사를 받다가 전역식도 제대로 못하고 군을 떠났던 박찬주 예비역 육군대장이 지난달 30일 육군 후배들에게 뒤늦은 전역 인사를 했다. 그는 이른바 ‘공관병 갑질 의혹’ 논란에 휩싸인뒤 수뢰 혐의로 한때 구속됐다가 지난달 26일 항소심에서 뇌물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 전 사령관은 이날 후배 장교 및 장성들에게 보내는 전역사(轉役辭)에서 ‘네 가지 당부’의 메시지를 보냈다. 첫째로, 군의 정치적 중립. 둘째로, 정치가들이 평화를 외칠 때 전쟁을 준비하는 각오. 셋째로 정치지도자들에게 다양한 군사적 옵션을 제공, 넷째로, 군대의 매력 증진 등의 당부를 남겼다.간혹 정치인들이 상대편의 선의를 신뢰하더라도 군사지도자들은 그 선의나 ‘설마’를 믿어서는 안 되며 스스로의 능력과 태세를 믿을 수 있도록 대비해야 한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평화는 허상이며, 전쟁을 각오하면 오히려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평화를 유도하는 것은 정치의 몫이지만 평화를 지키는 것은 군대의 몫이다. 지금처럼 정치집단이 좌우로 나뉘어져 극도의 혼란이 거듭되는 극한대치상황과 현 정부의 장밋빛 친북정책행보는 국민들의 시선에는 대단히 불안정한 인식으로 비쳐지고 있다. 일 년 전의 판문점선언은 남북관계 발전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나아가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라는 등식으로 출발했지만, 비핵화를 위한 평화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비핵화 합의라는 성공조건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퇴역장군의 말대로 군 조직 내에 정치군인들이 활개치고, 정부 스스로 국가방위태세를 허물며 평화의 허상을 쫓는 정책이 지속된다면 국가의 유지조차 어려울지 모른다. 4세기 로마의 군사전략가 베게티우스가 말한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대비하라.’고 한 명언이 생각난다. 퇴역장군의 일침이 가슴 속 깊이 새겨드는 현실이다.

2019-05-06

조선의 건국이념과 지금의 정치현실

강희룡 서예가1392년 7월 17일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태조 이성계가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500년의 고려가 끝나고, 조선의 새로운 500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최영 장군과 정몽주 등 즉위식을 치르던 그때 이성계의 머릿속에는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라든가 삶과 죽음으로 엇갈린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열하루 뒤인 7월 28일 새로운 국왕의 즉위를 알리는 교서가 반포되었다. ‘태조실록, 1년 7월 28일’에 ‘문무과 두 과 가운데 어느 하나는 취하고 어느 하나는 버릴 수 없다. (중략) 세 차례의 시험을 통해 합격한 자 33인을 상고해 이조로 보내면 이조에서는 재주를 헤아려 임용하도록 하겠다. 감시(監試)는 폐지한다.’이 즉위교서에는 호포(戶布)감면과 국둔전(國屯田) 폐지 등 민생을 추스르기 위한 개혁안으로부터 충신, 효자, 절부(節婦)의 포상, 즉위식 이전까지 범했던 일반 범죄에 대한 사면령에 이르기까지 총 17항목에 달하는 새로운 국가 건설의 개혁 방안이 담겨 있다. 모든 계층의 현안을 포착하여 민심을 얻으려는 의도가 뚜렷하다고 하겠다.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첫째 항목은 종묘사직을 바로잡고 고려 왕족을 대우하겠다는 의례적인 것과 다음 항목에 이어진 과거시험의 개혁 방안이었다. 그 세 번째로 문과와 무과 그 어느 하나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약속과 중앙과 지방 그 모든 곳에서 인재를 고루 육성하겠다는 의지, 공적 제도(公擧)를 사적 관계(私恩)로 전락시켜 버린 고려왕조의 과거제에 대한 비판 등 이런 일련의 구절은 모두 새 나라를 함께 다스릴 문무 관료들을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의해 선발하겠노라는 천명한 정책이었다.여기에서 우리는 관료선발의 공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시험의 절차를 투명하게 밝히는 것은 물론, 출제의 범위를 사서오경이라는 유가경전으로 특정해 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즉 유교사상이 학문권력으로 바뀌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고 지배층의 대대적인 물갈이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이성계의 즉위식은 단순히 국가 권력이 왕씨에서 이씨로 옮겨간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에서 1천여 년 동안 이어져 온 불교사상의 국가가 유교사상의 국가로 옮겨가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유교를 바탕으로 한 조선의 문명과 국가로서의 정체성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고 한문이 언문에 국어(國語)의 지위를 넘겨주기까지 강고하게 유지돼 왔다. 이처럼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는 즉위교서는 정도전이 작성한 것으로, 유교정신에 충만한 인물인 정도전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인간의 전범인 동시에 그가 꿈꾸던 새로운 조선의 국가 비전이기도 했다.오늘날의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뽑는다. 일부 국회의원은 내각제적 요소가 있는 비례대표라는 정당 득표율을 통해 간접으로 선출된다. 선거를 통해 선택된 대통령과 소속 정당은 임기동안 국민들로부터 국가통치의 권력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제도의 흐름 속에서 좌우로 쪼개진 정치집단은 어느 한 쪽에서 정권을 잡으면 지난 정권의 폄훼와 동시 언론장악을 통해 장기집권을 획책하려는 방법은 이제 일반화됐다. 더 나아가 비례대표를 늘리려는 가장 중요한 선거법 개정까지 당리당략에 따라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에 옭아매려는 발상에 여야충돌로 의원들의 육탄전으로까지 번져 국회가 난장판이 되는 극한국회가 됐다. 이러한 상황을 국민들은 극한이 아니라 ‘극혐국회’로 생각한다. 이렇게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정치집단의 충돌은 정치철학이 취약할 뿐 아니라 당파 싸움으로 심각한 리스크들만 만들기 마련이다. 정치는 국민에게 제시할 아이디어와 해결책, 그리고 국가발전의 전망이 있을 때만이 강력하다. 국가의 현상은 시민현상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국민이 더 훌륭해지지 않는 한 더 좋은 국가나 정치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2019-04-29

톨레랑스가 실종된 사회

강희룡서예가프랑스어로 톨레랑스는 타인의 사상이나 행동에 대한 ‘관용’을 뜻한다. 여기에서 관용은 단순히 개인의 아량(덕)뿐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과 관련되며 종교, 정치, 국가라는 연관에서 생기는 문제이기도 하다. 관용은 사회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며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나의 ‘예(禮)’인 것이다. 여기서 도대체 예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논어’에 기록된 인상 깊은 대목은 학이(學而)편의 공자가 제자인 자공과 나눈 대화이다. 자공의 생각은 대개 사람들이 가난하고 심지가 굳지 못하면 부자나 권력 앞에서 아부하고, 부자이거나 권력을 쥔 사람은 교만해지기 쉬운데, 아부하지 않고 교만을 부리지 않는다면 강직하고 겸손한 가치관을 가져 예를 갖춘 인격체이다. 라고 생각하며 물었는데, 공자의 답은 한발 더 나아가 강직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좋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겁게 살고, 부유하면서도 겸손한 데서 멈추지 않고 예를 좋아해야 한다고 답했다. 공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와 호례(好禮)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가난 속에 도를 즐길 줄 안다는 것은 이미 부자와 차이를 알고, 그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여기에는 상대와 나의 차별심이 사라지게 되므로 자연히 안빈낙도할 수 있다. 부자나 권력자 역시 자신의 부나 권력에 대해서 크게 의식하지 않으면 상대와 나 사이의 차이가 사라진다. 따라서 상대의 가난은 물질적 가난일 뿐이고, 상대와 나는 인격적인 대면만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가난한 자에게는 낙도(樂道)를 요구하였고, 부자나 권력자에게는 예를 요구하였으니 부자나 권력자가 예를 통해 상대와 자기의 동등함을 인정하는 태도라고 보겠다. 따라서 부자나 권력자가 먼저 시작해야 한다. 군주와 신하 관계에는 신분적인 차이가 있지만 군주는 신분적 차이만 인정할 뿐 신하를 인간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이 먼저이며, 장유(長幼) 사이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상대에 대해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은 상대의 진면모나 진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심리적 태도에서 출발한다. 형식적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형식 이전에 실질적인 이유로 존재하는 것이다. 예에는 본디 톨레랑스적인 사고가 전제돼 있다. 톨레랑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태도에서 출발해 다른 상대를 포용한다는 뜻이니 우리는 서구를 근대 이전에 양이(洋夷·서양오랑캐)라고 불렀지만 그들 내부에는 이미 예에 버금가는 톨레랑스가 있었던 것이다.지금의 우리의 정치집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중에는 상호 예의만 지켜졌다면 충돌을 피해 갔을 법한 일들이 많다. 생각이 서로 같지 않다고 반대 방향으로만 치닫는 정치사회적 구조와 진영 논리의 갈등 속에 상대를 향해 쏟아지는 막말이 그렇다. 여야 할 것 없이 모두가 집단이나 개인의 이익만 존재하고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풍조에서 나온 발상들이다. 아무리 정치가 말로 하는 전쟁이라 하지만 국민들의 수준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서야 이런 언어폭력들이 마구 쏟아질 수 있겠는가. 세월호 같은 슬픈 역사를 정치에 이용해 득을 취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이들도 큰 문제다. 사회적 갈등을 치유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갈등을 조장하고 정치의 품격을 추락시켜 국민들의 정치혐오증을 끝없이 증폭시키는 요인을 만들고 있다. 지구촌에서 소통으로 존재하고 있는 무수한 언어 중에서 한국어가 가장 우수하다는 증거는 저속어와 욕설 그리고 막말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겠다. 언론 또한 이러한 막말을 기사의 무슨 호재처럼 앞 다퉈 보도하니 갈등유발의 한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의 언론은 이제 단순히 보도뿐만 아니라 계몽과 교육적 기능도 함께 해야 한다. 한 국가로서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고자 한다면 상대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이며 국가에 대한 바람보다 내가 국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2019-04-22

참된 삶의 가치

강희룡 서예가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삶의 형식은 개인이 처한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현대인의 생각에는 대개 부모 잘 만나 큰 고생 없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살면 복된 삶이라고 여긴다. 이렇듯 복은 우리의 삶 속 깊숙이 들어와 작은 복에 만족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남의 복을 부러워하며 복 없는 팔자를 원망하기도 하며 살아간다. 요즘 우리가 말하는 복이 있고 없고는 대체로 자기 당대에서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얼마나 누리고 사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또 결과로서만 부각돼 있다.지난 전통사회에서도 사람의 삶에 작용하는 복은 매우 중시됐다. ‘서경(書經)’에 오복이 나오는데, 첫 번째의 복으로 장수를 들었다. 오래 살아야만 여러 복을 누릴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두 번째로 부(富)를 들었는데, 이것은 사회적 성공을 의미하며 연봉이 높고 명망 있는 직업을 말한다. 세 번째는 강녕(康寧)으로 큰 병과 재난을 겪지 않는 건강하고 편안한 삶을 의미한다. 네 번째는 덕을 좋아하는 삶으로 도를 즐기는 삶을 들었는데 이 경우는 자신을 늘 반성하며 의미 있고 건전하게 살고자 하는 종교적인 삶을 의미한다. 끝으로 제 명에 죽는 것으로 곧 자신의 할 바를 다하고 죽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잘 죽는 것’이다.조선후기 문신인 성대중(1732~1809)은 그의 저서 ‘청성잡기(靑城雜記), 성언(醒言)’에서 복은 다섯 등급이 있으니 각자가 택하기 나름이라며 ‘덕을 많이 닦고 재물이 아예 없는 것이 첫째로 가장 좋은 복이고, 재물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조금 있는 경우가 둘째이며, 덕도 많이 닦고 재물도 많은 경우가 셋째, 덕은 그럭저럭한데 재물은 넉넉한 경우가 넷째, 덕은 형편없는데 재물만 많은 경우가 가장 안 좋은 복이다’라고 정리했다. 세 번째에 이미 화의 조짐이 보이니 건괘(乾卦)가 처음 음이 생기는 구괘(59E4卦)로 가는 것과 같고, 네 번째는 음이 많아진 비괘(否卦)와 같으며, 다섯 번째는 평상이 다리부터 깎이기 시작해 살갗까지 미친 아주 위태로운 박괘(剝卦)와 같아 목숨이 위태로움을 가리킨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완벽한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늘 네 번째와 다섯 번째에 있다.성대중은 최고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 중국 주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甫)를 예로 들었다. 고공단보는 주나라의 왕업을 일으킨 문왕의 할아버지이다. 강대국인 적인(狄人)이 나라를 탐내 압박하자 땅을 내주고 떠났다. 대대로 이룬 지위와 재물을 지켜내자고 백성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니 이 결정이야말로 고공단보가 덕을 많이 닦았다는 증좌일 것이다. 백성들 역시 이 어진 마음에 감복해 그동안 이뤄놓은 물질적 안락을 버리고 험난한 피난길을 함께 따랐다. 이것이 밑거름되어 마침내 기산 아래에 새로운 터전을 일구고 그곳에서 문왕을 거쳐 무왕(武王)에 이르러 천하를 소유하는 주나라의 왕업을 이뤘던 것이다.예나 지금이나 복이 있다는 것은 주로 물질적이고 현세에 국한되며 남보다 좀 더 많이 누리는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대중은 이와는 상반된 관점에서 물질이 아닌 덕을 닦는 것과 현재가 아닌 미래에 초점을 맞춰 오히려 당대에 굶주리고 어려운 것을 최고의 복으로 여기고, 물질적 풍요가 가장 성할 때를 반대로 최하의 복이라고 한 것이다. 실제로 물질의 풍요로움이 당장의 복일 수는 있으나 내면으로 경계하지 않는 한 나태와 사치와 자만과 갑질로 이어지고 끝내 화를 부르기에 이것이 복의 겉모습에 숨겨진 재앙이 아니겠는가. 가족들의 갑질로 국민의 지탄을 받는 등 부정적인 요인들이 잠잠해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대한항공 사내 이사직마저 잃어 주총에서 밀려난 한진그룹 회장이 최근 별세했다. 이 부고소식을 놓고 보수와 진보의 언론과 정치권에서 설왕설래하지만, ‘오너리스크’ 해소로 한진그룹 주가가 동반강세를 보였다니 덧없고 씁쓸한 소식으로 들린다. 소유가 아닌 향유하는 삶으로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는 삶이 참된 것임을 시사하는 바 크다.

2019-04-15

봄의 단상(斷想)

강희룡 서예가고산 윤선도(1587∼1671)는 ‘고산유고, 봄의 의미에 대한 책문(對春策)’에서 ‘태극이 쪼개지고 음양이 나뉜 뒤 추위와 더위가 서로 밀어서 네 계절이 생기는데, 해는 황도의 별자리에서 운행이 끝나고 달은 열두 달 뒤 운행이 끝나서, 해와 달의 도수가 마감이 되면 한 해가 다시 시작되는데 이것을 봄이라고 한다. 봄과 관련된 날은 갑을이고, 봄의 임금은 태호(太769E)이며, 봄의 신은 구망(句芒)이라 한다. 봄은 무성하고 온화한 기운이 온 세상에 가득 피어 올라와 오로지 뭇 생명의 고동을 울려 만물을 이뤄 자라나게 하는 것을 일삼기 때문에 봄의 작용은 낳음(生)이다. 여름은 자람(長)이고 가을은 이룸(成)이며 겨울의 갈무리(藏)에 간여하지는 않지만 이른바 자람, 이룸, 갈무리가 낳음이 아니고서 어떻게 작용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봄은 네 계절을 두루 꿰뚫고, 만물이 바탕으로 삼아 시작되며, 한 해의 머리가 되는 것이다, 라고 봄의 의미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사람이 하늘을 본받는 도리로써 말하자면, 다른 데서 구할 수 없고 인(仁)이라는 한 글자에서 구할 수 있을 뿐이다. 일원(一元)이 흘러서 시간에 부여된 것을 봄이라 하고 사람에게 부여된 것을 인이라 한다. 시간상의 봄이 곧 사람에게서는 인이고, 사람의 인이 곧 시간상에서는 봄이다. 인을 얻으면 봄과 부합하고, 인을 잃어버리면 봄과 상반되니, 봄과 부합하면 온화한 기운이 이르러서 만물이 자라나고, 봄과 상반되면 사나운 기운이 응하여 온갖 재앙이 일어난다고 한다.비록 그러하나 이 봄은 사계절을 통털어서 시작이 되고, 이 인은 사단(四端)을 통괄하여 근본이 된다. 이 봄은 만고에 변하지 않으니 이 인은 천 년을 흘러도 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시간의 봄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에게 있는 인으로 돌이켜야 하고 시간의 봄을 체득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나에게 있는 인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인으로써 도를 닦고 정치를 행하여 인을 행하는 공이 쉬지 않고 오래 지속되어서 온 사방에 영향을 주어 두루 관통하면 온 세상이 인으로 돌아가니 한 나라가 인을 일으키고 백성이 화평하고 만물이 자라나며, 온 세상이 봄이어서 저마다 제자리를 얻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가만히 앉아서도 성대한 세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중국의 사상가 순자도 자연의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연의 변화원리를 파악해 거기에 적응하고 문명을 일궈내고 문화를 창조할 것을 강조했다.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제 사람의 삶은 태어남과 죽음 그것만 자연스럽고 나머지는 모두 인공과 인위의 조작 속에서 이뤄진다. 노자는 자연을 불인(不仁)하다고 했다. ‘천지는 불인하며, 만물을 풀개(芻狗)로 여긴다. 노자의 사상은 자연은 만물을 만들어내서 제각기 자기 생긴 대로 살아가도록 두되 절대로 어느 하나를 특별히 배려하거나 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유가에서는 춘하추동의 흐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정감을 도덕으로 추상화하고 이를 자연의 질서에 적용했다. 그리하여 유가사상에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인의 덕이 된다고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의 위대한 작용으로 연결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인간의 의식 바닥에는 자연에 대한 원초적 신화의식이 깔려 있어서 자연의 우호적인 측면은 부모의 자애로 여기고, 자연의 비우호적인 측면은 부모의 꾸짖음으로 여긴다. 이런 의식이 없었다면 우리는 봄을 찬미하는 온갖 음악과 축제, 그림 등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을 법칙으로 파악해 문명을 일궈가는 것도 인간의 숙명이지만 자연의 의미를 엿보고 삶의 의미를 넓고 깊게 하는 것도 인간 삶의 진실한 한 모습이다. 물욕에 젖어 사는 현대인들에게 사계절의 자연이 주는 교훈을 새삼 깊게 들여다보고 마음을 가다듬어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2019-04-08

7대 비리의 주범

강희룡 서예가문재인 정부의 민심을 사로잡고 혁신을 바라는 2기 내각 장관 후보자들의 국회 인사청문회가 끝났다. 이번 청문회 역시 여당에서는 참신하고 훌륭한 인물을 영입하였다고 내세우며 감싸는 반면, 야당에서는 그 인물의 전력을 거론하며 도덕성을 바탕으로 각종 비리를 들추어 질타하는 모습이 공수(攻守)만 바뀌었지 과거와 똑같다. 고위급 인사를 등용하기 전에 그 사람의 직무능력이나 도덕성에 문제는 없는지를 평가하는 인사청문회의 5대악이나 7대 비리는 늘 있는 일이기에 그만큼 인재 영입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반증이라고도 하겠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을 뽑아 국가 발전을 위하여 일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서애 유성룡이 이순신 장군을 발탁한 일은 매우 좋은 사례라 하겠다.청와대가 제시하고 있는 7대 비리 관련 고위공직 후보자 인사검증 기준을 보면 병역 기피, 세금 탈루(꼼수 증여 포함), 불법적 재산증식(부동산투기나 다운계약서 포함), 위장 전입(주민등록법 위반), 연구 부정(논문표절 포함), 음주 운전, 성 관련 범죄 등 7대 분야에 대해 어느 하나라도 해당할 경우에는 임명을 원천 배제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과거정부나 현 정부 모두 이 기준에 자유로운 인사가 한 명도 없으니 청문회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공분을 느낀다. 현대에도 정부에 명마를 잘 고르는 백락같은 사람이 있다면 인사청문회에서 부정적인 사연이 드러나 모욕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도 없을 것이며, 정당에도 백락같은 사람이 있다면 인재 영입에 있어서 호사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정부가 다주택자들을 집값 폭등의 주범을 규명했는데 정부가 죄악시하는 일을 오랫동안 해온 후보자는 고위공직자로서 자격이 없다. 자신의 비리행위를 합리화시키는 말잔치로 상황을 모면해보려는 자들이 관료로 입성하면 그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또 비리를 저지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지금까지의 인사청문회 후보자들 모두 이 7대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보면 결국 사회 지도층의 상부구조에서 서로 국가정보를 공유, 이용하면서 물욕으로 인한 부의 축적에만 혈안이 돼 우리사회의 병리현상을 부추기는 세력의 주축이 되고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그렇다고 이 땅에 인재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인재는 대대로 끊임없이 나타난다고 했지만, 언제나 인물을 알아보는 안목이 문제였다. 그래서 한유(768~824년)는 ‘세상에 백락이 있은 다음에 천리마가 있는 것이니,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은 항상 있지 않다.’라고 개탄했다.이번 청문회의 특이점은 7명의 후보자 중 세 명의 자녀들이 해외유학 중으로 모두 국민 정서와는 동떨어진‘황제유학’을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지명 철회된 과기부장관 후보자가 자식에게 1억 원이 훨씬 넘는 고가 외제차를 사주려고 전세금을 올려 세입자에게 허탈감을 안기는 행위는 공인으로서의 자세가 도를 넘었다. 자진 사퇴한 국토부 장관 후보자 역시 다주택 소유자로 부동산 투기 비난을 피해가려는 꼼수증여를 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중소기업 장관 후보자 역시 과거정부 인사청문회에서 자료 제출 거부, 부실 소명, 과소비를 강하게 질타하더니 정작 본인이 장관 후보자가 되자 재산 형성과정과 과소비, 해외송금 관련 기록 등을 일체 거부했다. 또한 일 년 씀씀이가 4억 수 천만 원이 넘는 것을 보면 ‘내로남불’의 극치이다. 2000년 2월 국회법 개정으로 인사청문회제도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인사청문회를 받아온 후보자들은 사회지도층 인사들로서 모두 하나같이 7대 비리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국토부, 과기부 두 명의 후보자가 낙마하고 청와대 대변인 또한 물러났지만 거듭된 인사 참사는 국가와 국민을 병들게 한다. 인사는 만사(萬事)다. 그러나 인사가 잘못되면 망사(亡事)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적폐를 막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은 강한 야당과 깨어있는 국민뿐이다.

2019-04-01

맹씨행단(孟氏杏壇)의 세 청백리

강희룡 서예가충남 아산시 배방면에 ‘맹씨행단’이란 고택이 있다. 맹씨행단이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란 뜻으로 조선 초기 세종 때 영의정으로 검소한 생활과 원칙에 철저한 학자로 명성을 높인 맹사성이 살던 곳이다. 이곳은 본래 고려 말 충절로 상징이 되는 최영 장군의 가옥이었는데, 최영과 맹사성의 할아버지와의 인연으로 맹사성은 그의 손녀사위가 됐다. 이후 맹사성이 물려받아 그의 집안이 살게 됐다.조선선비의 실천은 학행일치로 시작한다. 배운 것은 행동으로 옮길 때 의미가 있는 것이므로, 입으로 아무리 거룩한 말을 해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비판하고 매도했다.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교묘한 말과 좋은 얼굴색을 지어 남과 자신을 속이는 짓을 ‘교언영색(巧言令色)’이라 하여 매도한 것이 바로 그 예이다. 또한 남에게는 후하고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는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정신을 체질화하여 청빈하고 검약한 생활 방식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혔다. 마음대로 다 쓰면 남는 여유란 있을 수 없으므로 자신을 위해서는 아끼고 절약해야 남에게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청렴 정신이 곧 청백리의 바탕이 된 것이다. 조선의 세종시대는 역사상 가장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시대로, 사회정의가 구현되었다고 평가되는 청백리가 많이 배출된 시기로도 유명하다. 이 시기에 맹씨행단에서 우의를 다지며 청빈한 생활을 솔선수범한 그 대표적인 인물이 황희, 맹사성, 유관이다.황희는 18년 동안이나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청백리의 귀감을 보여 줬다. 그가 영의정 재직 시 공조판서 김종서가 자기 소속 관아인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술과 유과를 마련해 정승과 판서를 대접하게 했다. 이에 황희는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설치한 것은 접대를 위한 것이니, 만약 시장하다면 예빈시로 하여금 음식물을 마련해 오도록 할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제공한단 말이오?’ 예산 외의 경비 지출로 인한 부작용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 후 조정의 조회에 모든 대신이 비단옷을 입고 나왔는데 황희만 거친 베로 만든 관복을 기워 입고 나왔다. 그러자 다음 날부터 모든 대신이 헌 관복으로 갈아입고 출근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상징적인 인물의 일거수일투족이 관료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을 말해 준다. 그만한 인품과 인격을 평가받는 인물이기에 사치를 좋아하는 관료들을 감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맹사성은 부인이 햅쌀밥을 해 올리니 어디서 햅쌀을 구했느냐고 물었다. 녹봉으로 받은 쌀이 너무 묵어서 먹을 수 없으므로 이웃집에서 꾸어 왔다고 하자 부인을 나무랐다. ‘이미 국가에서 녹미(祿米)를 받았으면 그것을 먹을 일이지 이웃집에서 꾸어 와서야 쓰겠소?’ 공사 구별 없이 똑같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함을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다. 당시 병조판서가 좌의정인 그를 찾아갔다가 자신의 행랑채보다도 못한 그의 집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우의정을 지낸 유관은 비새는 단칸 초가집에서 베옷과 짚신으로 생활을 했다. 어느 여름, 한 달 이상 내린 비로 지붕이 새자 유관이 우산을 들고 부인에게 말했다. ‘우산도 없는 집에서 어떻게 견디겠소?’ 그러자 부인이 대답했다. ‘우산이 없는 집엔 다른 마련이 있답니다.’ 대부분의 관리가 우산 걱정할 필요조차 없는 집에서 살고 있는 줄 부부가 모를 리 없건만 시침을 떼고 대화하는 모습이 해학에 가깝다.이들은 맹씨행단에서 평생의 지기로 우의를 다지며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고 격려했을 것이다. 나아가 누가 더 청렴할 수 있는지 내기라도 걸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상호간에 교감된 투철한 공인으로서의 사명의식일 것이다. 속이 꽉 찬 사람은 허기증이란 있을 수 없다. 청빈이 부귀와 영화를 누릴 만한 충분한 권력과 지위를 가진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요구되던 미덕인 것이다. 지금의 관료사회는 영욕에 쪄든 목마른 자가 소금물을 마시고 있는 형국과 다를 바 없다.

2019-03-25

청음(淸陰)과 지천(遲川)의 국가관

강희룡서예가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이 원인이 되어 국호를 청으로 고친 후금으로부터 침략당해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 패해 군신의 의를 맺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한다. 당시 청과의 전쟁과 화의를 주장하는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 중심에는 청음과 지천이 있었다. 청음 김상헌(1570∼1652)은 조선의 역사에서 주전론(主戰論)을 바탕으로 한 척화파의 절개와 지조의 한 상징이다. 그의 82년에 걸친 긴 생애동안 왜란과 호란을 모두 겪었던 조선의 가장 험난한 격동기를 통과했음을 알려준다. 지천 최명길(1586∼1647)은 당시 청과의 전쟁을 피하고 화의를 모색해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주화론(主和論)의 대표학자로서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폈다.시국에 대한 이 두 학자의 대립원인은 이들의 학문과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조선 전기의 주자학은 이기론(理氣論)의 이론전개에서 철학적 우주론보다는 윤리적인 심성론인 사단칠정에 더 중점을 두며 의리사상으로 발전시키는 또 하나의 성리학 특징을 이뤘는데, 이것이 17세기에 이르러 양란(兩亂)을 거치는 동안에 구체적으로 발현됐다. 도학정신을 바탕으로 의리정신의 위치를 확고히 한 조선중기 사림의 맥이 바로 청음의 의리정신이다. 이 의리의 실천은 소학(小學)을 근거하고 있으며 ‘대신(大臣)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고 불가하면 그만둔다.’라는 논리로, 의리를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기는 도학정신의 사생관(死生觀)과 사명의식을 보이고 있다. 청음의 사상은 병자호란을 통해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구현된바, ‘대신은 의를 따르는 것이지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니 사군자의 진퇴는 오직 의(義)일 따름이다.’라고 하여 그는 자신의 진퇴가 오직 의에 달려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둘째로는 정명사상(正名思想)이다. 이 이론은 공자가 당시 사회의 혼란스러움을 명(名)을 바로잡음으로써 구제하고자 주장했던 사상이다. 이 사상은 춘추(春秋)정신으로 이어지게 되며, 춘추란 군신간의 명분을 중시하며 의리를 숭상하고 보편화하며 인(仁) 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대의명분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 줬던 것이다. 이후 송시열 등을 중심으로 민족과 국가의 주체성을 회복하고자 한 북벌사상의 근간이 된다. 조선 중기부터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사상적 흐름과는 달리 또 한 줄기의 사상이 나타나게 됐으니, 바로 실용주의 학문인 양명학(陽明學)이다. 명종시대에 들어온 양명학은 공맹사상을 그 시대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 적용한 사상으로 주자학을 비판하고 보완하는 학문이었다. 하지만 전래 당시부터 유학의 정통이 아니라고 배척당하여 줄곧 이단시되다가 17세기 초의 혼란한 상황을 해결하고 타개해야 하는 현실적 반성과 자각이 대두하자 양명학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며 실심(實心)과 실득(實得)을 강조하고 실용을 추구하면서 최명길이라는 학자의 현실의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당시 척화를 주장하던 주자학적 의리학파 사이에서 최명길이 본심에 바탕을 둔 양명학적 사고에 입각해 홀로 강화를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명길은 ‘비록 만고의 죄인이 될지라도 임금이 망할 줄을 알면서도 차마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오늘날 화친은 부득이한 것이다.’라면서 척화파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일신을 돌아보지 않고 화의를 주장했던 것이다.지천이 지은 조선 측의 강화문서를 청음이 읽고 찢으며 통곡하니 지천은 이를 다시 주워 모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백발이 되도록 청나라 심양에서 함께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들은 서로 방법이 달랐을 뿐, 나라 위한 마음은 같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화해를 했다. 두 선비의 국가관을 잘 나타내주는 역사적사건이다. 정치철학 없이 패거리지어 다투는 지금의 우리 정치판에 시사하는 바 크다.

2019-03-18

30-50클럽과 선진국

강희룡서예가‘30-50클럽’은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3만 달러 이상이면서 인구 오천만 명이 넘는 국가를 말하며 미국을 비롯해 한국을 포함한 7개국이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우리나라의 GNI는 3만3149달러라고 최근 발표했다. 이 3만 달러를 4인 가구로 계산하면 한 가구 당 연소득이 대충 1억3천400만원정도가 된다. 하지만 국민들의 경제적 괴리감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실제생활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서 선진국 진입이라는 정부의 상징성 홍보와 통계가 결과적인 수치에만 매몰된 나머지 다양한 사실들을 외면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단기간 고속성장으로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으나, 산업화를 통한 물질적 성과와는 달리 국민들의 의식구조는 아직도 선진국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선진국’이라는 단어는 매우 모호한 의미로 ‘경제적 필요를 채우는 일’ 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요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한국이 아직 선진사회로 갈 수 없는 이유 몇 가지를 들면, 미숙한 사회구조로 중요한 위치의 정치나 교육계의 지도자들이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 취약하다는 것이다. 국가나 사회관에 대한 자기인식이 부족하여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독서량으로 선진국은 국민의 절대다수가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일평생 자기계발을 위한 필수적 행위인데 한국은 기득권으로 먹고 사는 사회에 머물러 있기에 독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직장 역시 생산성에 관계없이 단지 선임자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지나치게 많은 차등보상을 받고 있다.모든 선진국들의 공통점은 안정된 시민민주주의다. 강력한 공권력과 국가의무에 대한 엄격성이 그 안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사회계약이며, 그 계약 내용에 대해 충실한 것이 바로 선진국이다. 모두가 함께 만든 동일한 법을 어겼을 때의 불이익과 처벌이 크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으며, 또 얼마나 가혹해지는지 보면 알 수 있기에 선진국 국민들이 준법정신이 강한 것이다. 이처럼 선진국이라는 개념은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운영하는 정치나 경제정책 외에도 법질서와 사회규범과 문화까지 포함해서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발전한 나라’라는 뜻을 가진다.한국과 같이 작은 나라의 거대한 정부나 입법부는 그 규모에서 이미 관료조직을 능가하고 있다. 이러한 조직으로 파생된 관료주의는 만연된 부정부패가 사회 전반적으로 나타나며 파킨슨법칙으로 그 수만 더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형적인 후진적 행태는 국가적 재난과 대형사고에 대처하는 미숙함과 무사안일, 아마추어적인 시스템운영,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사회, 재벌세습과 천민자본의 갑질, 반칙의 일상화와 질서의식의 실종, ‘설마’라는 안일한 생각, 입시위주의 몰입식 교육은 가장 중요한 덕목인 사회규범준수와 남을 배려하는 인성교육을 사라지게 했다.영국의 싱크탱크 레가툼 연구소가 지난해 11월 28일 발표한 세계번영지수에서 한국은 전체 149개국 중 35위에 올랐다. 총 9개 항목 중 교육 분야가 17위, 보건시스템항목에서 19위로 비교적 높은 수준에 올랐으나, 기본권과 사회적 관용은 75위, 사회적 규범과 시민참여 등 사회적 자본은 78위로 중위권이다. 사법 분야의 독립성은 0~1점 중 0.47점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중 28위로 하위권이다.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지난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의 노동환경을 종합적으로 따져 매긴 ‘2019년 유리천장 지수’ 평점에서 한국은 조사대상인 OECD 29개 회원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선진국 조건은 돈에 앞서 사람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정적인 요인들은 결국 선택을 잘못한 우리들에게 있으며 국민들의 수준이다.

2019-03-11

양화소록과 매화예찬

강희룡 서예가조선 초기 문신이자 서화의 삼절(三絶)로 추앙을 받던 강희안(417∼1464)은 꽃과 나무에 대한 재배법과 이용법을 설명한 책인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을 저술했다. 이 책의 내용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완상(玩賞)해온 꽃과 나무 몇 십 종을 들어 그 재배법과 이용법을 설명했으며, 또한 꽃과 나무의 품격과 그 의미와 상징성을 논하고 있다.원예나 골동품 수집 등 취미생활은 선비의 학문과 수양을 방해한다는 이른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전통 때문에 원래 유교사회에서 선비들의 꽃가꾸기는 일종의 금기였다. 그러나 강희안은 양화소록 후기에서 “화훼를 재배하는 것은 사람의 심지를 굳건히 하고 덕성을 기르기 위해서다”라며 완물상지를 반박하고 있다. 몰두하지 않고 취미생활을 조절하면 하등 문제가 없고 오히려 학문에도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실제 그는 이른 봄꽃이 필 때 등불을 켜고 책상머리에 두면 벽에 비친 잎의 아름다운 그림자를 즐길 수 있고 책을 읽는 동안 졸음을 없앨 수 있다며 체험적 난초 감상법을 들려준다. 또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의 미물이라도 이치를 탐구해 근원으로 들어가면 지식이 미치지 않음이 없다”면서 꽃을 기르는 것을 학문 연구 및 경륜의 한 방편으로 끌어올리고 있다.양화소록에는 ‘무릇 꽃을 재배하는 것은 오직 마음과 뜻을 굳건히 닦고 어질고 너그러운 성질을 기르는 데 있다.’라면서, 소나무는 굳은 의지를, 국화는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사는 은일(隱逸), 매화는 높은 품격, 난초는 품격과 운치를 본받아야 한다고 적고 있다. 양화소록을 보면 당시 한국인이 좋아했던 꽃들을 알 수 있는데 주로 매화, 석류화, 단계화(丹桂花), 백일홍, 동백같은 수목화요, 화초는 목단 국화, 연꽃, 창포정도에 불과했다. 당시 선비 층에서는 꽃과 나무에 그 상징적 의미에 따라 품계나 등수를 매겼다. 강희안은 매, 국, 연, 죽, 소나무는 1품, 모란은 2품, 월계, 영산홍, 석류, 벽오동은 3품으로 단풍은 4품, 장미는 5품, 목련은 7품에 들어 있다. 특히 매화는 화괴(花魁), 즉 꽃의 우두머리이며 선비의 꽃이다. 청아하면서 속기(俗氣)가 없고 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선비의 삶이 가시밭길같이 춥고 배고파도 그 정신만은 저버리질 않는다. 때문에 추위가 한바탕 뼛속 깊이 사무치지 않고서는 매화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없다.고려중기 문인인 진화(1179~?)는 매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봄의 신이 뭇 꽃을 물들일 때/ 맨 먼저 매화에게 옅은 화장을 시켰지/ 옥결같은 뺨엔 옅은 봄을 머금고/ 흰 치마는 달빛에 서늘해라.’강희안의 할아버지인 강회백이 심은 정당매(政堂梅)의 일화는 유명하다. ‘우리 선조 통정공이 어려서 지리산 단속사에서 책을 읽었다. 그 때 절 마당 앞에 매화 한 그루를 심었다. 공이 과거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의 벼슬에 올라 지금까지도 그 매화를 정당매라고 부른다’라고 적고 있다. 600여 년이 흐른 오늘날 단속사의 가람은 찾아볼 길 없지만 석탑과 초석만이 남아있는 단속사 터에는 양화소록이 전한 매화가 해마다 화사한 군자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산청 3매 중에서 으뜸인 남명매가 있다. 칼 찬 선비였던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61세 때 산천재 앞뜰에 심은 것이다. 연분홍빛과 흰색 겹꽃이 황홀하다 못해 올곧은 남명정신이 물욕에 쪄든 현대인의 등짝을 때리는 듯하다. 이황(1501~1570) 선생은 매화 화분을 앞에 놓고 술벗을 하다 말년에 병들어 눕게 되자 매형(梅兄)에게 누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며 화분을 다른 방으로 옮긴 후 눈을 감았다. 얄팍한 지식 한 장으로 세상에 출사해 입으로는 천리를 말하며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드는 지금의 위정자들은 곳곳에 활짝 피어 있는 매화의 군자상(君子像)을 보며 자신의 참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9-03-04

혈죽(血竹)과 우국충절

강희룡 서예가조선 후기의 우국지사이며 학자인 황현(1855~1910) 선생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피탈이 되자 국치를 통분하며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지 500년이나 됐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이 또한 슬프지 않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절명시(絶命詩) 4편을 남기고 9월 음독 순국해 대한제국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이듬해 영·호남 선비들의 성금으로 ‘매천집’이 출간되고 한말 풍운의 역사를 담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총서 제1권으로 발간돼 한국 최근세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의 근간이 되고 있다. 황현 선생의 저서 매천집에 ‘혈죽명(血竹銘)이 실려 있다. 혈죽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1905년 11월 17일 무장한 일본군의 포위 속에 이토의 위협과 회유에 오적(五賊)의 찬성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게재되자 성난 민심은 울분으로 요동쳤다. 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민영환도 대궐 앞에 엎드려 조약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모두 허사였다. 11월 30일 어둠이 짙게 드리운 새벽녘 종로 전동(典洞)의 한 집에 민영환이 불을 밝힌 채 앉아 있었다. 깊은 상념에 잠겨 있던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명함(名銜)을 꺼내 들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비장함이 배어 있는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글을 마친 민영환은 단도(短刀)를 집어 들고 주저 없이 할복을 했으나 여의치 않자 자신의 목을 수차례 난자했다. 숨이 멎고도 한동안 피가 솟구쳐 옷을 적셨다. 한참 뒤에 급보를 듣고 시종무관 어담(魚潭)이 달려왔을 때까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원망하듯, 노한 듯, 부릅뜬 양쪽 눈은 처절하고도 가여웠고 참으로 장절한 죽음이었다.’고 어담은 당시를 회상했다. 고위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망국의 엄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마침내 속죄하는 심정으로 결연한 의지를 자결로 표했다. 12월 1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보도되자 추모객들이 구름처럼 몰렸고 비탄의 통곡이 전국으로 퍼졌다. 뒤이어 조병세, 송병선을 비롯해 수많은 우국지사와 인력거꾼 등 일반인들도 연쇄 자결을 통한 국권회복과 항일의지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민충정공이 순절하고 8개월 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순절할 당시 선혈이 낭자했던 옷과 단도를 침실 뒤에 보관해 뒀는데, 바로 그 마룻바닥 틈을 뚫고 녹죽(綠竹)이 네 줄기가 솟아났다. ‘죽어도 죽지 않으리라(死而不死)’던 그의 유서처럼 대나무로 부활한 것이다. 실상이 알려지자 고종황제도 직접 대나무를 보고 나서 ‘이 대죽은 민충정공의 충렬’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신채호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7월 7일자 황성신문 논설에서 이 대나무를 ‘혈죽’이라 명하면서 전국에 혈죽 신드롬이 일어났다.매천 황현이 쓴 ‘혈죽명’도 당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쓰여졌으리라. 내용을 보면 ‘충정을 남김없이 다 쏟은 뒤에/몸을 던져 하늘로 돌아갔나니/하늘이 그 충성 기리는 것이/어쩌면 이렇게도 치우쳤는가/ (중략) 생전의 공의 모습 볼 수는 없고/오로지 대나무만 청청하구나./을사오적(五賊)들 이 소식 듣게 되면/날이 춥지 않아도 벌벌 떨리라./내 문을 닫아걸고 깊이 누우니/계속해서 대나무 눈에 선하네.’ 대한의 지식인으로서 망국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황현과 자신이 몸담았던 지배층이 저질렀던 통한의 과오를 죽음으로 속죄했던 충정공 민영환, 같은 시대 그들이 서 있었던 자리와 삶의 궤적은 달랐지만 목숨으로 충절을 지키고자 했던 뜻은 같았다.지금 우리 정치판의 상황은 망국의 구한말을 떠오르게 한다. 사회 구석구석에 110년 전 오적이 현대판 오적으로 부활해 곳곳에서 활개치고 있다. 지금의 사분오열된 정치판을 향해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망국의 역사를 벌써 잊고, 너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선생의 호통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하다.

2019-02-25

역사해석의 다양성

강희룡 서예가역사는 한 국가와 민족의 뿌리이며 줄기이기에 진실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사실로 기록이 돼야 한다지만, 그 진실이라는 것에 대해 시대를 달리하거나 집단이나 계층, 지역이나 개인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영국의 역사학자인 E. H 카(1892~1982)는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역사가가 해야 될 일은 ‘다만 진실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 지식론을 비판하며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가 그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야 의미를 얻는 것이다”라고 했다.중국의 진시황에 대한 재평가의 일례를 보면, BC 241년부터 BC 210년까지 재위 동안 대규모 문화탄압과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일으킨 중국사에서 최대의 폭군으로 배웠으나,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의 중국국가의 기본 토대를 만든 위대한 업적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서갱유는 재위 34년이 되는 해(BC213)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남월지 정벌 축하잔치에서 부사 주청신과 순우월의 의견충돌 와중에 승상 이사(李斯)가 끼어들면서 일어났다. 이사의 의견은 구제도와 사상은 통일국가에서 혼란만 가중시키므로 진나라 기록이나 유가의 경전, 제자백가 이외의 서책을 전부 없애기를 제안한 것이다. 갱유(坑儒) 또한 진시황 35년(기원전 212년)에 불로초를 찾으러 보낸 방사(方士) 두 사람이 진시황이 권력을 탐해 독단적으로 결정한다고 비방하고 재물을 사취해 도망가는 사건이 계기가 되어 유생(儒生) 400여 명을 죽였다. ‘사기, 유림열전’에는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거론하면서 ‘술사(術士)를 묻었다’고 언급했다. 술사는 유생과 다르며 방사를 말하는 것으로 중국 고대에 신선방술을 신봉하던 사람들로 생(生)이라고도 불렸다.조선의 경우는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이다. 우리가 배운 사도세자가 죽은 이유는 당쟁의 희생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살인자였다고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세자의 위치에서 100여명을 넘게 살해한 사례는 동서양 역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한양굿이나 경기도당굿에서는 지금도 사도세자를 별상이라며 모신다.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원혼이 아직도 무속인들에게 신의 지위에 있는 것이다.2차 세계대전의 부산물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반공건국과 경제개발, 민주화로 이어진다. 5·16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후퇴했으나 경제 산업화 면에선 성공해 국민들의 가난을 일소해버렸다. 군사정권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그 통치결과는 IMF경제위기라는 국가를 부도내고 그 고통을 국민들에게 떠넘겼다. 차기정부에서 국민들은 힘을 모아 부도사태는 해결했으나 그 여파는 지금까지도 노동시장에서 비정규직의 고통으로 남아 있다. 이후 정권이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면서 역사교과서는 국정과 검정을 오가며 역대 통치자들의 공과(功過)에 대한 냉철한 평가는 간데없고 지난 정부를 폄훼하며 이념적인 내용만 가득 차 너덜거린다.제1야당 일부 의원들이 내뱉은 5·18 민주화운동 폄훼발언이 이들에게 어떤 정치적 이익이 담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도를 넘었다. 하지만 이들이 의구심을 갖는 석연찮은 5·18유공자 선정과정과 명단공개에는 국민적 공감대가 큰 것 같다. 보훈처는 작년 말 기준 4천415명이라 발표했으나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이러한 사건은 선정과정과 명단을 투명하게 발표함으로써 성숙된 민주사회를 만들 수 있다. 지금 여당에서 ‘5·18 왜곡 처벌 특별법’을 추진하려는 황당한 발상은 군부독재의 ‘유신헌법’발상과 별다를 바 없다. 이런 행태는 ‘정치의, 정치인에 의한, 정치인을 위한 정치’를 민주주의 정치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자세는 국가관과 인간관 그리고 이념체계와 직접 관련되기에 다양한 각도에서 다른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지도자와 국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총체적 축적이다.

2019-02-18

적폐(積弊)와 적폐(敵廢)

강희룡 서예가중국 송나라의 학자인 충선공 범순인(范純仁)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몹시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남을 탓하는 데에는 명석하고,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용서하는 데에는 흐리멍덩한 법이다. 너희가 다만 항상 남을 탓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탓하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면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라는 교훈이다.조선후기 성리학자 기정진(1798~1879) 선생의 ‘노사집(蘆沙集), 답안윤극(答安允克)’에 ‘성인의 도는 자기를 탓할지언정 남을 탓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은 안윤극이란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글에서 서두에 적은 내용으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말고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살피고 돌아볼 수 있어야 이른바 전인(全人)의 ‘도’를 실천할 수 있다고 언급했던 것이다. 옛날 임금들 역시 흉년으로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면 수라상 반찬의 가짓수를 줄여가며 스스로 근신했다. 천재지변은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임에도 임금의 부덕으로 인해서 발생한 소치로 돌리며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근심하고 반성했던 것이다.나를 지칭하는 뜻을 가진 한자는 ‘아(我)’와 ‘오(吾)’가 있다. 아는 손(手)에 창(戈)을 들고 있는 형상으로 밖으로 자신을 드러내 과시하고 싶어 하는 뜻인 반면, 오는 남에게 나타내지 않는 진실한 자신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솔직한 나보다 드러내 과시하며 허세를 부리는 나를 더 알아준다. 사회가 이런 풍조로 흐르다보니 사람들은 세상을 살면서 솔직한 나보다는 드러내 과시하는 나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을 드러낼수록 솔직한 나로부터는 멀어지고 가식 덩어리로 변해 불행하게도 진짜 나를 잊고 거짓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조선 제21대 왕인 영조는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소가 있는 고령재사(高嶺齋舍)를 육오(六吾)로 명명하고 팔순의 나이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평생 동안 마음을 지킨 것이 하나는 자긍심을 경계함이며, 하나는 자만을 경계함이다. 또 하나는 지위를 잊는 마음이며, 하나는 물로 씻어서 깨끗이 하고 싶은 마음이다. 만일 나의 마음을 알려면 고령 육오당(六吾堂)을 보아라’ 영조가 왕이라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과시하는 나를 버리고 진실한 나를 찾으려 했던 것은 요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 오천(吾天)에 초점을 두어 나의 본분을 안다면 물질적 풍요를 함부로 구하지 않고 분수에 맡길 수 있으며 사회적 성공을 기필하지 않고 주어지는 기회에 순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드루킹 일당과 공모해 댓글조작을 벌인 혐의를 받던 경남지사에게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되어 법정구속되었다. 이 상황을 놓고 집권 민주당은 경남지사를 구속시킨 판사에 대해 떼를 지어 인신공격에 가까운 공격을 하고 있다. 객관적 물증과 소신을 가지고 내린 이 결과가 과연 적폐판사의 보복성 판결에서 나온 것일까에 대한 해답은 해당 판사의 과거 판결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2년 전 성창호 판사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부장관을 구속시킨 후, 불과 여섯 달 전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이 판결을 놓고 당시 민주당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다. 인과응보다. 법원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박수를 쳤다. 그러던 당이 경남지사의 유죄선고 뒤엔 곧바로 ‘사법농단세력 및 적폐청산 대책위’를 꾸리고 탄핵까지 추진하겠다고 야단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모두 적폐로 몰아부치는 이런 경우는 적폐(積弊)가 아니라 적폐(敵廢)라 해야 옳다. 여야 없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올 땐 박수치고 그렇지 않을 땐 무차별적 비판과 모독적인 발언을 거리낌 없이 일삼는 정치집단의 이런 작태는 국민의 눈높이에서 보면 삼권분립을 유린하며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국민 혈세로 호의호식하며 나라 망치는 최악의 적폐집단으로 보일뿐이다.

2019-02-11

공직자의 윤리

강희룡서예가율곡 이이(1536~1584)의 율곡전서(栗谷全書), 경연일기(經筵日記)에 공직자로서 표본이 되는 한 사례가 기록돼 있다. 이 일화는 명종과 선조 연간에 활동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청백리로 선정된 인물인 이후백(1520~1578)이 이조 판서로 재직했을 때의 일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이후백이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어 공론을 숭상하고 청탁을 받지 않으니 정사가 볼 만하였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찾아와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전조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이조와 병조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하루는 일가 사람이 찾아와 함께 대화를 나누던 차에 관직을 구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후백이 안색을 바꾸고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 책자 속의 이름들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이었으며 일가 사람의 이름도 기록 안에 들어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그대 이름을 기록하여 후보자로 추천하려고 했었네. 그런데 지금 그대가 관직을 구한다는 말을 하니, 만약 구한 자가 얻게 된다면 그것은 공정한 도리가 아닐세. 참으로 애석하네만,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네.’ 라고 설명하니 그 사람이 대단히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이렇듯 이후백은 관직 하나를 제수할 때면 매번 벼슬할만한 적임자인지 아닌지를 반드시 폭넓게 물었으며,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잘못 제수했을 경우에는 번번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가 나랏일을 그르쳤구나.’라고 하였다. 이조는 문관의 인사를 담당한 곳인 만큼 사적인 청탁이 없을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그 어디보다도 공평무사한 덕목을 필요로 한다. 사람의 의사결정에서 공평무사함이란 사사로운 이익에 이끌려서는 안 되니, 몸에 밴 공손함과 청렴하고 검소한 성품이 있어야 가능했던 것이다. 이후백이 이조 판서라는 막강한 지위에서 사심을 배제하고 공정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부귀와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과 절약으로 철저히 선비로서 공인정신을 완성해 나갔기 때문이다. 공직의 직분을 다하고 스스로 단속하여 청고(淸苦)함을 지키니 육경(六卿)의 지위에도 가난하였지만 검소하기가 유생과 같았고 뇌물을 일체 받지 않아 손님이 와도 밥상이 초라하였다고 하니, 청백리로 선정된 이유를 알 만하다. 이후백은 명종에게 ‘검소하면 씀씀이가 자연 번다하지 않게 됩니다. 만약 임금이 한 번 부국(富國)에 뜻을 두면 세금을 거두는 신하가 으레 먼저 자신의 사욕을 채울 것이니,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고 부국에 성심을 다할 자가 또한 몇이나 되겠습니까.’라고 아뢰어 임금이 솔선해 검소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선비정신은 의를 실현하고 지조를 지키는 꼿꼿함이라든가 혼자 있는 곳에서조차 흐트러지지 않는 위용 등으로 표현되지만, 그 바탕에는 공손과 검소함이 있다고 보겠다. 이 두 가지가 몸에 밴 사람은 남을 존중할 줄 알며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래서 맹자는 선비를 두고 ‘곤궁해도 의를 잃지 않으며, 성공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던 것이다.요즘 언론을 통해 접하는 우리의 위정자나 공직자들 모습에서 이후백과 같은 청렴함과 공평무사함을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 자신의 이익이나 부를 위해 탈당과 복당을 거듭하고 온갖 허언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또한 강원랜드나 목포 문화재거리의 부동산투기의혹 사건 등 정치인들의 일탈을 보면 ‘애민정신’을 갖춘 바람직한 공직자상은 실종 된지 오랜 것같은 생각이 든다. 올바른 정치이념은 우리사회를 이끌어 가는 근간이다. 우리는 모두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 묶여 있기에 올바른 정치인을 가려서 선택해야하는 의무가 유권자들에게 있기에 그 책임이 크다고 보겠다.

2019-01-28

박기후인(薄己厚人)과 춘풍추상(春風秋霜)의 허언

강희룡서예가공자가 주(周)나라의 태묘(太廟)인 후직의 사당을 구경하다가 쇠로 만든 사람(金人)을 보았는데 입이 세 겹으로 봉해져 있었다. 이 금인의 등에 ‘옛날에 말을 삼가던 사람이다. 경계할지어다. 말을 많이 하지 말라. 입은 화의 문이 되는 것이다. 힘을 믿고 날뛰는 자 제명에 못 죽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 반드시 적수를 만나게 된다. 경계해야 할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금인은 주나라의 시조 후직(后稷)의 사당 오른쪽 계단에 있던 쇠로 만든 사람을 일컫는다. 이 내용을 공자는 공자가어(孔子家語) 관주(觀周)에 기록했다.조선 후기 문신인 허목(1595∼1682)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실린 ‘금인의 명(金人의 銘)’을 그의 문집인 ‘미수기언(眉FFFC記言). 서문(序文)’에 실었다. ‘나는 독실하게 옛글을 좋아해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언제나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 말조심과 관련된 금인의 명을 읊조렸다’고 했다. 청렴하고 강직하기로 이름난 허목이 자신이 말한 걸 기록해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기언’을 편찬했음을 알 수 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말에는 무게가 없다. 말에 무게가 없으면 진실을 말해도 소모품처럼 사라져 신뢰감이 없다. 실천력 또한 없기 때문에 아름답게 꾸미며 속이는 감언이설이 거의 대부분이다.이에 반해 사유가 깊고 인격체인 사람은 말한 내용을 반드시 실천에 옮기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거나 함부로 하지 않는다. 말하기 전 언행일치의 생각을 먼저 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말에는 무게와 위엄과 진실이 있으며 저절로 말수가 줄어든다. 퇴계 이황은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며,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라는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선비정신을 강조했다. 이 정신으로 조선의 선비사회에서는 천하의 공정한 말을 사론(士論)이라 하고, 당세의 제일류를 사류(士流)라 일컬었다. 사해(四海)에서 의로운 명성을 얻도록 고무하는 것을 사기(士氣)라 이르고, 군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했으며, 학문과 도를 강론하는 것을 사림(士林)이라 했던 것이다.오늘날 권력을 가진 위정자나 공직자들의 이중적 잣대는 그 영향이 본인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까지 미치기 때문에 폐해가 실로 막대하다고 보겠다. 지난 13일 여당대표가 신년 기자회견에서 ‘스스로에게는 엄하고 국민께는 더 낮게 다가가는‘박기후인’의 자세로 사심 없는 개혁을 이끌겠다’고 국민 앞에 다짐했다. 새로 임명된 신임 대통령비서실장 역시 비서실에 근무하는 모든 공직자들은 비장한 각오로 되새겨야 할 사자성어로 ‘춘풍추상(春風秋霜)’을 언급했다. 이 춘풍추상은 ‘남에게는 봄바람처럼 대하고 자신에겐 가을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으로 채근담에 나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을 줄인 표현이다. 박기후인과도 그 뜻을 같이 하며 공직자의 기강을 강조하는데 즐겨 쓰던 단어이나 말잔치이지 실천에 옮겨진 사례는 거의 없다고 본다.2014년 지난 정부 당시 김기춘 비서실장은 청와대 직원의 비위와 관련해 ‘사안의 대소경중을 불문하고 엄단해 기강을 확립할 것이며, 춘풍추상의 마음으로 청와대 기강을 먼저 바로 세워야 각 부처의 기강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권력자들 스스로에겐 추상같이 박하게 임하겠다고 다짐했던 결과가 전대미문의 대통령탄핵까지 이어졌다. 말만 옮긴다고 채근을 씹던 선현의 지혜가 구현되는 건 아니다. 내편에게는 후하고 상대에게는 야박하게 구는 소위 ‘내로남불’이 더 일상화된 지금의 정치판에서 누구라도 국민 앞에 내뱉는 말을 실천에 못 옮기면 그 약속은 공허하기만 하며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인을 비롯한 사회지도층에서의 말이 허언(虛言)으로 판치는 나라는 미래가 그리 밝지는 못하다. 위정자들이 주는 피해는 결국 국가나 국민들에게 환란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2019-01-21

망각과 기억

강희룡서예가사람에게 망각이라는 기능이 없다면 평생 끝이 없는 슬픔과 괴로움, 번민과 수치에 시달리며 고통으로 살아갈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상실하는 것도 고통인 반면 잊어야할 것을 잊지 못하는 괴로움도 큰 고통이다. 이 망각에 대한 일화가 ‘열자(列子), 주목왕(周穆王)편’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 전국시대 송나라의 화자(華子)는 건망증이 아주 심했다. 오전에 생겼던 일들을 저녁이면 잊고 저녁에 일어난 일들은 이튿날 아침이면 모두 잊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화자의 건망증은 낫지 않았다. 어느 날 노나라 선비가 찾아와 화자의 건망증을 깨끗이 고쳐주었다. 그런데 화자는 고마워하기는커녕 화를 내며 창을 쥐고 선비에게 달려들었다.사람들이 화자를 뜯어말리며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건망증이 있었을 때는 세상의 존재조차 잊고 살았는데, 이제 지난 일을 기억하게 되니 평생 동안 잘하고 못한 일, 기쁘고, 슬픈 일, 좋고 나쁜 일 등 온갖 생각이 다 떠오른다. 앞으로 남은 생애동안 이 기억이 내 마음을 어지럽힐 것이 두렵다. 잠시나마 잊고 싶어도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화자가 건망증을 고쳐준 선비에게 화를 낸 이유는 잊었던 과거가 모두 떠오르자 그것을 스스로 감내할 수 없었던 것이다.사람이 경험이나 학습한 것을 재생하는 능력이 없는 망각이 과연 축복인가. 저주인가? 이 물음에 자연이 인간에게 준 ‘축복과 저주’사이를 넘나드는 것이 ‘기억과 망각’이라고 하겠다. 축복의 측면에서 보면 기억은 과거의 잘못을 잊지 않고 반성함으로써 미래에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고, 망각은 과거의 불행을 잊게 함으로써 미래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저주의 측면에서 보면 기억은 과거의 불행이나 옳지 못한 행동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늘 괴롭다는 것이고, 망각은 과거의 잘못을 잊음으로써 미래에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망각과 기억은 사람에게 ‘자유와 속박’이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사람은 과거가 되어버린 자기만의 시간 속에는 무수히 많은 기억들이 유영하고 있다. 그 기억의 조각 하나하나에 희노애락을 느낀다. 수많은 기억 중 나쁜 것은 사라지고 좋은 것만 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고 하겠지만, 좋은 기억은 쉽게 잊고 나쁜 일은 오히려 가슴 속에 깊이 각인된다. 이렇듯 좋은 것만 오래 간직하고픈 것이 인간의 기본심리임에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삶이 힘들고 고달픈 것이다.고통의 근원이 되는 분노를 빨리 잊어야 한다는 것은 결국 심리적인 평형을 찾는 과정이다. 해묵은 과거의 고통을 마음속에 두고 버리지 못한다면 개인은 물론 사회까지 병들고 말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기에 언론에 드러난 위정자나 공직자의 일탈행위는 망각이 주는 해방감보다 상실로 인한 피해가 더 크다. 기억과 망각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회일수록 값비싼 비용을 치러도 정치는 후지며 사회는 부정부패와 범죄로 점철되는 것이다.물고기가 어항에서 살 수 있는 것은 기억력이 없기 때문이며, 굴참나무가 싹을 틔워 숲을 이룰 수 있는 것은 다람쥐가 땅속에 묻어둔 도토리를 건망증으로 잊기 때문이다.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잊지 말아야 할 지난 잘못을 잊고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망각을 마냥 축복으로 받아들이기에는 그 부작용이 너무 큰 과거가 있었으니, 수많은 외침은 차치하더라도 구한말 정쟁으로 국력은 약해져 일제로부터 국권을 피탈당하는 경술국치(1910)는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의 단절이라는 치욕을 가져왔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세계에서도 비슷한 예가 없는 대규모 집단적 민족저항 운동으로 제국주의 만행을 천하에 알린 ‘삼일절’은 올해로 100돌을 맞는다. 나라 잃고 수탈과 탄압에 항거한 이 날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우리 민족의 교훈이 담긴 역사이다.

2019-01-14

사자성어(四字成語) 인용에 신중해야

강희룡서예가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대략 사자성어가 600개 정도이며 여기에 속담, 격언, 명언들까지 합치면 무려 1천200여 항목에 이른다고 한다. 단순히 뜻을 함축시킨 사자성어도 있지만 고사(故事)에 기인된 ‘고사성어’는 과거의 이야기를 상황이나 감정, 사람의 심리 등을 비유적으로 함축된 내용을 묘사한 관용구이다. 예컨대 다다익선(多多益善)은 한신과 유방이 나눈 대화 중에 나온 말로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인용하면서도 뜻풀이에만 급급한 나머지 정작 여기에 얽힌 고사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사자성어를 뒷받침하고 있는 사실이나 역사를 바로 알고 나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뜻이 전혀 달리 이해된다. 이 다다익선은 단순히 ‘많을수록 좋다’는 내용 이면에 명장 한신의 오만한 성격을 함축하고 있어 이것이 결국은 한신이 ‘토사구팽(兎死狗烹)’당하게 되는 복선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파악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사자성어가 현실적인 필요성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혜의 차원에서 인생의 철리(哲理)를 깨우치게 한다는 것이다. 바닷물에서 소금의 결정체를 얻듯 한 글자마다 간결하고 의미심장하게 삶의 본질을 꿰뚫는 격조 높은 표현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사자성어를 적절하게 구사할 수 있다면 말의 격을 높이고, 나아가서는 삶의 풍요를 높일 수 있는 훌륭한 화법(話法)을 갖추게 된다.한해가 거듭될 때마다 연말연시에 사자성어가 넘쳐난다. 이 사자성어의 사용은 단순히 글자의 조합을 뛰어넘어 민심과 세태를 절묘하게 반영하고 나아가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기 때문에 실천을 통해 가치와 매력을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해 직장인은 다사다망(多事多忙), 구직자와 자영업자는 고목사회(枯木死灰)와 노이무공(勞而無功)을 뽑았다. 직장인들에겐 늘 바쁜 한해였고, 구직자와 자영업자에겐 노력해도 별 성과가 없는 힘든 한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취업준비생의 ‘돈이음슴’(돈이 없음)이나 서류광탈(입사서류 심사부터 빛의 속도로 탈락)이란 이색적인 신생어까지 만들어진 것을 보면 서민들의 삶이 팍팍함을 느낄 수 있다.제1야당 원내대표는 ‘도탄지고’(塗炭之苦·진흙과 숯의 고통, 즉 포악한 군주의 착취로 인한 백성의 고통)를 선정했다. 이 말은 4세기 남북조시대의 장안에 고립되어 있던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참상의 고사에서 만들어졌으며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내세워 정권을 무너뜨리려 할 때 자주 쓰인 말이다.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지난 정부나 현 정부나 고착된 빈부의 심화로 가난이 유산으로 대물림되고, 없어지지 않는 기득권층의 갑질, 2003년 이래로 OECD 회원국 중 현재까지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자살률을 보면 지난 일 년을 반영하는 사자성어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교수신문이 정한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라는 임중도원(任重道遠)은 ‘논어’태백(泰伯)편에 실려 있는 증자의 말이다. 증자는 선비의 임무인 인(仁)의 실현이 무겁고 그 길 또한 멀기 때문에 넓은 도량과 굳센 의지로 실천하다 죽은 후에야 그친다고 했다. 장자는 평생의 목적을 오로지 인의 실현에 두었기에 이 말이 가능했을 것이다. 시경 해설서인 한시외전(漢詩外傳)에 실려 있는 ‘짐이 무겁고 길이 먼 사람은 땅을 가리지 않고 쉬며,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었으면 벼슬을 가리지 않고 해야 한다.’이 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위정자를 비유할 때 쓴다.대학교수라는 학자집단이 냉철한 지성보다는 정치권을 기웃거리거나 경박한 감정에 무게 중심을 두고 선정한 것으로밖에 안 보여 씁쓸한 인상을 준다. 같은 상황을 두고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자신과 남에게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지금의 현실을 사마천이 살아있어서 사자성어를 만든다면 그 역시 신조어인 ‘내로남불’에 무릎을 칠 것이다.

2019-01-06

고봉의 ‘自警說’을 되새긴다

강희룡서예가얇아진 달력을 보니 어김없이 또 한해가 기우는가보다. 이렇듯 해가 바뀌는 즈음에는 자기가 지나온 한해의 삶을 돌아보고 다가오는 새해의 삶을 설계한다. 사람이 사람답다는 것은 자기를 돌아보고 성찰할 줄 알기 때문이다.지난 시간에 대한 시행착오와 잘못에 대해 성찰과 반성으로 스스로를 살피고 경계한 글을 자경설(自警說)이라 한다.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고봉 기대승(1527∼1572)의 ‘고봉집’에 실린 ‘자경설’을 통해 한해를 마무리지어본다. ‘옛 사람들은 지난 허물을 자책하여 스스로 경계한 것은 대체로 잘못을 마음 아파하고 앞으로 착하게 살려는 생각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성인과 현자들이 모두 뜻을 두고 공부하였던 것이다. 나만 어찌 홀로 그리하지 않겠는가! 부지런히 학문을 닦을까 했으나 뜻을 굳게 세우지 못하였고 굳어진 버릇을 없애지 못해 시간만 흘러 허송세월을 하였을 뿐이었다. 지난 시간과 내 행실을 헤아려 슬픔이 가슴을 가득 메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지나온 일을 차례로 엮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자취를 밟아 경계를 삼고 한편으로는 권면으로 삼는다.’(하략)고봉은 자경설에서 허송세월을 안타까워하였다. 지나온 삶의 허물을 곱씹는 것은 그런 과오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고봉은 이황(1501∼1570)으로부터 신진사림의 대표로 인정을 받았고 실제로 명종 말에서 선조 초에 사림의 영수로 활약했다. 이황은 기대승의 인물을 더 다듬기 위해 뛰어난 자질을 함부로 드러내고 호탕한 습성에 얽매이고 방종한 놀이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로보아 기대승은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로서 지적인 영민함을 드러내기 좋아하였고 이론논쟁에서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병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봉은 선조 옆에서 조선건국 이래 드러난 내부 모순에 대해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선비였지만,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대쪽같은 성격이 결국 자신을 외롭게 만들자 44세에 관직을 내려놓았다.그는 이를 말리는 임금에게 ‘군왕이 정사를 소홀히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근본이 없는 것입니다. 백성이 고르게 잘 살도록 정치를 하지 않는다면 왕의 혜택이 아래까지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지며, 백성이 만족하게 되면 군주는 누구와 더불어 부족함이 있으리까.’라는 말을 남겼다. ‘정조어록’에 ‘고봉은 호남의 가장 걸출한 사람이다. 높은 학문의 조예와 뛰어난 문장, 그리고 절의의 정대함은 삼절(三絶)이라고 할만하다. 퇴계와 주고받은 사칠논쟁(四七論爭)은 동이(同異)를 변별하고 분석한 수많은 말들이 의논이 뛰어나서 바로 창을 들고 방 안에 뛰어들 듯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봉보다 26년이나 연상인 이황은 이(理)를 보편이념으로 삼아 그것이 물질적 세계 밖에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이것을 도덕규범의 근원으로 삼음으로써 봉건윤리의 절대성을 합리화하였다. 이에 기대승은 도덕성이란 칠정(七情)이 현실 속에서 도덕규범과 합치될 때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 둘 사이의 논쟁은 조선후기의 성리학을 주리, 주기파로 나누는 연원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논쟁의 당사자였던 퇴계와 고봉은 서로 깍듯한 예의를 갖추었으며, 묻고 배우는 입장에서 고봉은 퇴계를 스승으로 삼았다. 생각이 같은 상대도 좋지만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도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준 일화다. 생각이 전혀 다른 이 둘은 가식적 화해나 억지스런 봉합없이 논리적 논쟁으로 중국의 주자학을 조선의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의 지평을 열었다. 지금의 우리 위정자들이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할 사건이라 본다.우리 모두 주어진 위치에서 ‘자신 바라보기’ 즉 지난 시간을 스스로의 성찰과 반성을 통해 자기를 살피고 또 경계하며 새로운 각오를 실천에 옮기는 새해를 맞이해야 하지 않겠는가.

2018-12-25

빈둥지증후군과 도자설(盜子說)

▲ 강희룡 서예가자녀가 독립하여 집을 떠난 뒤에 부모나 양육자가 경험하는 외로움과 상실감으로 인한 슬픔을 ‘빈둥지증후군’ 또는 ‘공소증후군(空巢症候群)’이라 한다. 태어나서 성인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현상이나 자녀가 둥지에서 떠나는 것은 부모의 삶이 완전히 재조정되도록 만들기 때문에 부모 입장에서는 목표상실과 우울을 경험할 수 있다. 현재 우리사회는 성인이 된 자녀들의 독립 시기가 점점 늦어지고 있다. 또한 결혼 후 어머니에게 자녀의 양육을 의존하는 등 한 집에서 같이 살지는 않더라도 실질적인 독립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로 ‘캥거루족’이니 ‘연어족’이니 하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명문장가인 사숙재 강희맹은 자식교육이 특별하였다.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이 편찬한 ‘사숙재집(私淑齋集)’에 ‘훈자오설(訓子五說)’이 실려 있다. 이 글은 그가 자식을 교육하기 위해 우화 형식으로 쓴 연작 수필 다섯 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도자설(盜子說)’은 도둑의 자식교육을 인용한 것이다.내용인 즉, 도둑이 그의 자식에게 도둑질에 관한 모든 기술을 가르쳤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아들은 자기 재주가 아버지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번 도둑질마다 반드시 먼저 들어가서 나중에 나왔으며 귀중한 물건만 훔쳤다.(중략) 하루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기술이 더 뛰어나다고 뽐내자 아버지는 ‘지혜란 배워서 성취하는 데서 막히고, 스스로 터득하는 데서 넉넉하게 된다. 너는 아직 멀었다.’라고 하자 아들은 ‘도둑의 도는 재물을 훔치는 것으로 공을 삼습니다. 나는 늘 아버지보다 공이 배나 되지요. 나이 또한 젊으니 아버지 연세가 되면 당연히 특별한 기술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자 아버지는 ‘한 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재앙이 따른다. 찾은 자취가 없고 임기응변하여 막힘이 없는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야 한다.’ 라고 훈계해도 아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도둑은 아들을 보물창고에 들어가게 한 뒤 밖에서 문을 닫고 소리를 질러 주인에게 알렸다. 주인이 도둑을 쫓아가다 돌아와서 보니 자물쇠가 그대로 잠겨 있으므로 안으로 들어가자 밖으로 나올 길이 없었던 아들은 손톱으로 긁어서 쥐가 물건을 쏘는 소리를 냈다. 주인이 쥐를 쫓아내려고 등불을 켜고 창고 안을 살펴보는 순간 아들이 빠져나와 달아나자 주인집에서 뒤를 쫓았다. 궁지에 몰린 아들은 연못을 돌아 달아나면서 돌을 물에 던졌다. 쫓던 사람들이 도둑이 물에 빠진 줄 알고 허둥대는 틈에 무사히 빠져나와 돌아올 수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 그 행위를 원망하지만 도둑이 말하길 ‘이제 앞으로 너는 마땅히 천하를 홀로 주름잡게 될 것이다. 사람의 기술이란 남에게서 배운 것은 푼수에 한도가 있고, 마음에서 터득한 것은 응용이 무궁하다. 하물며 곤궁하고 답답한 상황은 사람의 의지를 견고하게 하고 사람의 인덕을 완숙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내가 너를 곤궁에 빠뜨린 것은 바로 너를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고, 내가 너를 함정에 빠뜨린 까닭은 너를 건져주기 위함이었다.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어찌 쥐의 시늉을 하고 돌을 물에 던지는 기묘한 꾀를 낼 수 있었겠느냐? 이렇듯 의식의 근원이 한번 열리면 다시는 헷갈리지 않을 것이다.(하략)위 글에서 도둑은 아들을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단편적인 기술을 엮어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도록 이끌어냈다. 대학진학을 위해 수능시험을 지상명제로 생활해온 수험생과 부모들은 시험이 끝난 후 허탈감과 상실감에 빠지기 쉬우며, 특히 어머니들에게는 빈둥지증후군이 찾아오기 쉽다. 학생들은 그동안의 지식을 꿰고 엮어서 새로운 쓸모있는 지식으로 승화시키는 가치관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부모들도 오직 자식을 위한 헌신에서 성장하면 떠나야 한다는 일상의 진리를 슬기롭게 받아들여 스스로의 풍요로운 삶의 덕목을 꾸미는 게 건강한 가정과 사회를 만든다.

2018-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