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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반일(反日)’로는 ‘극일(克日)’ 못한다

안재휘 논설위원30년쯤 전 이야기다. 장기 해외취재 일정으로 일본 도쿄에 갔다가 만난 어떤 외교관(공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흥미로웠다.그는 “한국은 일본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그리고 지금 이대로라면 한국이 일본을 이기는 것은 영원히 기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심각하게 말했다.그가 밝힌 견해의 매듭은 이랬다. 당시 일본에는 ‘한국’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8천 명쯤 되는데, 한국에서는 제대로 된 일본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었다.말하자면,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분심(憤心)이 깊어 매사 감정이 앞서고 일본을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대비하는 일에 서툴다는 얘기였다. 이웃하고 있는 두 집 중에 옆집에 대한 악감정에 휩싸여 비난하기에만 바쁜 집과 이웃집을 유리알처럼 샅샅이 들여다보고 연구하는 집 중에서 유리한 쪽이 어디겠는가 하는 부연설명이었다.일본의 야비한 무역보복으로 한국이 흔들리고 있다. 가뜩이나 나빠진 경제가 걱정인데, ‘침략’으로까지 묘사되는 일본의 경제공격이 또 얼마나 큰 피해를 몰고 오게 될 것인가 조바심마저 치솟는 중이다. 이 판국에 ‘죽창가’를 들먹거려서 비난을 샀던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이번에는 “2018년 대법원판결을 부정, 비난, 왜곡, 매도하는 한국 사람을 마땅히 ‘친일파’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선동 글을 또 올렸다.지난 18일에도 그는 페이스북에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 ‘좌냐 우냐’가 아닌 ‘애국(愛國)이냐 이적(利敵)이냐’”라고 적었었다. 일본의 무역보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놓고 상황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끊임없이 천박한 진영논리의 오물통 속으로 우겨넣으려는 조국 수석의 어리석은 행위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도대체 그가 꿈꾸는 이 나라의 미래는 무엇인가.집권 3년 차에 접어들어 나라 형편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집권세력이 일본의 무역보복을 ‘옳거니!’ 하고 정략적 차원에서 주물럭거리고 있는 모습이 얼비치면서 많은 국민이 분노를 키우고 있다. ‘토착 왜구’, ‘매국’, ‘친일’이라는 자극적인 ‘편 가르기’용 분열용어들이 난장을 치며 날아다닌다. 일본의 무역보복을 규탄하는 시위·집회가 일본대사관 부근에서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우리는 또다시 ‘닥치고 반일(反日)’의 광풍을 부채질하는 세력의 준동을 목도한다. 이성적인 해법을 촉구하는 이 나라의 민심을 모조리 ‘토착 왜구’의 감옥에 처넣으려는 비열한 흉계가 진행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지난해 11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확정판결 이후 무려 8개월 동안 정부가 아무런 외교적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 의혹의 단서가 있다. 국민들은 지금 매국(賣國)과 만용(蠻勇)의 어둑한 골짜기로 무참히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한일 양국의 견해차가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테니 이를 해소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은 필수적이었다. 일본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오리라는 것을 몰랐다면 ‘치명적인 무능(無能)’이다. 만약 알고도 정략적으로 악용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면 이는 직무유기를 넘어서 사악한 역적 범죄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향해서 ‘매국노’라고 손가락질을 할 것인가.아마도 지금쯤 일본에는 ‘한국’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기만 명을 헤아릴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정치외교 영역은 물론 대한민국의 온갖 시시콜콜한 것들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풍부한 이웃집에서 걸어온 간단찮은 경제 전쟁이다. 길거리에 촛불 들고 나가 시위를 하고 혈서를 쓰고 분신을 해서 찾을 수 있는 해법은 없다.우물 안 개구리식 사대 명분에 갇혀 병자호란을 불러들임으로써 백성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380여 년 전 인조(仁祖)의 조정이 떠오른다.

2019-07-21

‘사면초가’의 대한민국

안재휘 논설위원대한민국이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위기에 빠졌다. 경제는 좀처럼 활기를 찾을 기미가 없고, 한반도 평화의 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맹점을 드러내며 허둥대던 외교는 드디어 일본의 무역보복이라는 전대미문의 경제침략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사분오열의 파열음을 점점 더 키워가고 있는 국론은 더 참담하다. 나라가 망해도 권력만 잡겠다는 욕심에 찌든 정치권은 볼썽사나운 드잡이질만 벌인다. 국민은 도무지 기댈 언덕조차 없는 막막한 처지다.문재인 정권이 마법의 주술처럼 되뇌던 소득주도성장의 ‘상징’ 최저임금 폭등세가 한풀 꺾였다. 최저임금위원회는 내년도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2.87% 오른 시간당 8천590원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소상공인들의 처참한 실정을 개선하기에는 역부족일 듯하다. ‘인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동결’까지는 했어야 옳았다는 이야기에 힘이 실린다.지난달 30일 판문점에서 펼쳐진 장면은 가히 역사적이었다. 미국 대통령이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을 만나 웃으며 사진을 찍었으니, 그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왕따 모습의 문재인 대통령 모습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그게 어떤 형태든 만나는 일 자체를 시비하는 손가락질들은 온당치 못하다.당연한 말이지만, 트럼프는 어디까지나 트럼프 편이다. 이 유치한 명제를 대입해보면, 판문점 정상회담은 우리에게 그리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국내외 호사가들은 판문점 촬영 쇼는 두 사람에게는 분명 ‘남는 장사’였다고 분석한다. 그런데도 왠지 ‘북한 비핵화’가 제자리걸음인 작금에, 앞질러 날아다니는 ‘종전선언’ 화두는 분명 선후(先後)가 뒤바뀐 난수표다.남북, 북미 정상회담의 요란한 평화잔치 분위기에 취해 우리의 안보는 확실히 좌표를 잃었다. 국방 전선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말하듯 우리는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가고 있는데, 북한의 가공할 핵무기는 오히려 더 늘었다는 애타는 소식뿐이다.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평화’가 대체 언제까지‘모래 위의 성’ 양상이어야 하나 두렵기만 하다.일본이 작정하고 무역보복을 감행해왔다. 우리가 무역을 ‘전쟁’이라고 일컬어온 세월이 길었으니 이건 분명 또 다른 형태의 왜란이다. 아베가 추악한 정치적 목적으로 일을 저질렀다느니 하는 치자들의 한가로운 해석은 참혹한 무역 전장에 도무지 효험이 있는 처방이 아니다. 일본의 무역보복이 민초들에게 또 얼마나 혹독한 빈곤을 몰고 올까 한걱정이 쌓인다.민심을 흔드는 것은 일본의 야멸찬 보복공격 자체가 아니라, 뻔히 알았을 텐데도 마땅한 대응방안을 못 내놓는 정부·여당의 아둔한 태도다. 1차원적 ‘반일감정’에 기대어 어찌어찌 반전을 노려보려는 운동권 기질이 얼비치는 대목은 아연실색을 불러일으킨다. ‘적폐청산’ 편법으로 정적 때려잡는 일에 보여주던 능수능란들이 반만큼이라도 발휘됐으면 좋겠다.아무렇거나,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민심의 향배다. 무구한 민심을 텃밭에 잡아 가두려는 정치꾼들의 선동술수들이 활개를 친다. 내년 총선을 겨냥한 무책임한 선심 정책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고, 민심은 또다시 흙탕물 와류에 휘말리기 직전이다. 찢어진 민심을 덧내는 여야 정치권의 온갖 험구들마저 경계가 없다.트럼프의 재선을 아무리 담보한다 한들, 대한민국이 북한의 핵인질이 되는 일은 비극이다. 정치권은 지금 무조건 불황을 반전시킬 비책부터 찾아내야 한다. 방황하는 실직자들의 뒷주머니에 푼돈 질러주며 지지표나 구걸하는 걸 정치라고 말하는 건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향 초나라의 노래들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군사들을 이끌고, 패장 항우(項羽)가 돌아갈 땅은 어디인가. 돌아갈 곳이 그 어디든 있기는 한가.

2019-07-14

‘기해왜란(己亥倭亂)’의 이면

안재휘 논설위원일본이 벼르던 대로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실행에 옮겼다. 이른바 우리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국가 차원의 ‘경제보복’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주력 수출 품목인 반도체와 TV, 스마트폰 등에 사용되는 3개 아킬레스건 같은 품목을 걸었다. 일본의 조치를 놓고 이 나라는 또 진영별로 쫙 갈려서 볼썽사납게 맞서는 중이다.정부·여당과 진보 쪽의 용감무쌍한 견해는 언제나 그렇듯 이념과 ‘명분론’이 앞선다. 강제징용 배상판결은 어디까지나 사법부의 영역이기 때문에 3권분립을 지키고 있는 나라에서 행정부나 정치권의 소관이 아니라는 논리부터 편다. 일본 아사히신문과 도쿄신문도 자국 정부의 조치를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비판했다고 알려준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등도 한결같이 일본이 부당하다고 평가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일본의 속 좁은 조치는 부메랑이 될 것이기 때문에 전쟁을 오래 끌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론까지 읊어댄다.그러나 다수의 경제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한걱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의 경우 일본의 소재 공급이 끊겨도 4개월은 버틸 수 있지만, 그 이상 끌면 우리 기업뿐 아니라 전 세계 공급망에 큰 피해가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벌써 자동차 및 화학 업계까지 긴장하고 있는 판이다.보수를 중심으로 한 야권은 문재인 정부의 무대응 무대책을 물어뜯는 일에만 여념이 없다. 자유한국당은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에 대한 정부 대응을 ‘외교 참사’로 규정하고 “문재인 대통령은 총체적 국정 실패에 대해 국민께 사죄하라”고 부르댄다. 이미 불이 붙었는데, 불 끄려고 대드는 사람이 아무도 안 보이는 한심한 꼴이다.문재인 정권 들어서 악화 일로를 걸어온 한일관계의 이면에는 어떤 요소들이 작용했을까. 그 시발점은 쇼 정치와 포퓰리즘을 탐닉하는 이 정권의 정치전략에서 비롯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우선 지난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협상하여 최종적 종결을 약속한 ‘한일일본군위안부 합의’를 뒤집어엎어 지지층 결집에 활용했다.집권세력은 지난 1965년 6월 2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체결한 ‘한일국교정상화 조약 (한일기본조약)’까지 선동의 먹잇감으로 삼았다. 대법원은 지난해 10월 한일기본조약을 뒤집어엎어 강제징용에 대해 일본 기업의 배상 판결을 내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판결을 존중하며, 행정부나 입법부도 이 판결에 승복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취했다.한일관계에 있어서 ‘가깝고도 먼 이웃’이라는 말보다 더 적나라한 표현은 없다. 일본은 역사적으로는 가까워지기가 어렵지만, 경제적으로는 밀접하게 지낼 수밖에 없는 이웃임에 틀림이 없다. 상당 기간 우리 정치인들이 인기영합 목적으로 일본의 귀싸대기를 때려도 그러구러 경제교류가 끊어지지 않았던 까닭은 분명했다. 이번 경제보복 사태는 일본이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는 신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후 피폐한 이 나라 재건을 위해서는 일본과 화해해 도움을 받는 길뿐이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고,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한없이 꼬여가는 위안부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 결과물이 ‘한일협정’이고 ‘한일일본군위안부 합의’였다.임진왜란 직전 일본을 다녀온 뒤 서로 딴소리로 팔도강산을 전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파당정치꾼 황윤길과 김성일의 후예들이 지금 이 나라 안에 수두룩하다. 정치적 의도로 외교합의를 뒤집어엎었으면 상황을 반전시킬 책임도 확실히 져야 한다. 한일 정상외교밖에 돌파구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진짜 능력을 보고 싶다. 전투에서 이기더라도 전쟁에서 지기 십상인 이 게임은 위험하다. ‘기해왜란(己亥倭亂)’을 각오한 사람들의 비책은 뭔가.

2019-07-07

길 잃은 ‘황포돛배’

안재휘 논설위원지난 1992년 서울대학교 산업공학과 이면우 교수가 내놓은 ‘W이론’은 반향이 대단했다. ‘W이론’은 한국인의 전통적 기질인 신바람과 흥을 산업현장과 우리 생활에서 불러일으켜 어려운 상황을 획기적으로 돌파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 교수의 저서 ‘생존의 W이론’에 나오는 ‘황포돛대 이론’은 어디로 가는 배인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노만 젓고 있는 어리석은 행태를 통렬히 비판한다.집권 3년 차에 들어선 문재인 정권의 실정 행태가 심각하다. 거의 전 분야에 있어서 난정(亂政)이 확산하고 있다. 문 정권이 핵심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북한 비핵화’를 통한 안보 추구부터 여의치 않다. 북한과 미국 틈바구니에서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지만, 하노이 북미회담 결렬 이후 한국외교는 한마디로 ‘개밥에 도토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미국은 미국대로 흔쾌한 모습이 아니고, 북한은 또 나름대로 서운한 표정이 역력하다. 문 대통령이 자처했던 조정자 역할에서 한계를 드러내면서 모종의 오해를 사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군 철수’를 포함하는 김정은의 ‘조선반도 비핵화’ 개념을 문 대통령이 미국과 우리 국민에게 ‘북한 비핵화’로 잘못 의역(?)한 업보로 읽힌다.정치 분야는 끊임없는 보복 논란으로 점철되고 있다. ‘적폐청산’의 탈을 쓴 조직적이고 악착같은 정치보복은 이 나라 정치력 진화의 발목을 잡는 참담한 족쇄다. 야당과 유례없는 소통을 통해 새로운 정치문화를 일궈가리라 기대했던 문 대통령의 정치력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70%가 넘는 국민지지율에 만취해 적대 정치의 적폐만 산처럼 쌓아 놓았다.경제는 또 어떤가. 아무런 검증도 안 된 ‘소득주도성장’이라는 희한한 경제정책을 들고나와 최저임금을 왕창 올리는 바람에 근근이 중산층의 꿈을 일궈가던 수많은 뒷골목 영세상인들을 거지로 만들었다. 아르바이트비 인상으로 대한민국 경제 활성화를 꾀한다는 만화에도 안 나올 얄궂은 논리로 나라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고도 반성조차 없이 직진이다.이쯤 되면 야당이 떠야 맞다. 집권당이 연달아 죽을 쑤고 있는 동안 이 나라의 제1야당 자유한국당은 한술 더 떠서 개죽을 쑤고 있다. 수십 년 독과점 지역주의의 뜨뜻한 청백전 정치의 관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듯한 자유한국당의 지리멸렬은 차라리 고질병이다. 서 푼어치 가치도 없어진 극우 꼴통의 논리로 제자리 땅따먹기나 하자는 치들의 악센트만 높아지고 있다.그리 멀리 갈 것도 없다. 섣부른 인적청산에 앞서 ‘가치논쟁’부터 시작하겠다던 김병준 자유한국당 혁신비대위원장 시절의 밑그림을 다시 묻는다. 자유한국당은 지금 ‘수구꼴통’·‘반평화 세력’·‘부패집단’·‘부자들만 편드는 정치인’·‘기득권 수호세력’·‘패거리 정치의 화신’ 따위의 부정적 이미지를 청산했는가.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였던 황교안의 등장은 화려한 변수였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황교안의 안착은 90%가 문재인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사작용에 불과하다. 집권세력의 행태가 싫어서 욕하고 돌아서면 그래도 한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긴 했다. 그런데 잠시만 더 바라보면 도대체 뭐 하자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여야를 불문하고 다들 부지런하다. 정부 여당은 포장만 그럴싸한 서툰 정책 속으로 애꿎은 국민만 숱하게 욱여넣어 울리고 있다. 혹시나 하고 돌아보면 제1야당 자유한국당은 더 한심하다. ‘가치논쟁’은 결론을 냈는지 말았는지, 시대정신은 깨달았는지 말았는지 권력 연장에만 혈안이 된 구닥다리 정치꾼들의 욕심 사나운 궤변만 난무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열심히 노를 저어대고 있는,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이끄는 한심한 ‘황포돛배’ 위에서 대한민국 민초들은 지금 덧없이 표류 중이다.

2019-06-30

‘캉캉 쇼’ 시대는 갔다

안재휘 논설위원‘빨간 풍차’라는 뜻의 물랭루즈(Moulin Rouge)는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르의 번화가 클리시 거리에 있는 댄스홀이다. 1889년 개장한 댄스홀인 이곳에서 펼쳐진 ‘카드리유(프렌치 캉캉)’라는 춤 공연은 한때 세계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옛날 중앙정보부가 세운 국제관광공사 소유의 호텔이었던 워커힐의 ‘캉캉 쇼’도 유명한 고급 관광상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이힐과 화려한 무용복 차림의 무희들이 집단으로 다리를 들어 올려 팬티를 아슬아슬 보여주는 댄스공연 ‘캉캉 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없다.자유한국당이 범보수 진영의 인적기반 강화를 위해 외연 확장에 적극 나섰다. 최근 외연확장과 총선 대비를 위해 인재영입위원회를 출범하고 위원장에 이명수 의원을 임명했다. 황교안 대표는 “삼고초려, 오고초려, 십고초려를 해서라도 반드시 인재를 모셔와 주길 바란다”고 신신당부했다.인재영입위는 사회 각계각층의 2천 명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1차 영입대상으로 각계인사 164명을 선정했다는 소식이다. 그 명단에 박찬호 한국야구위원회(KBO) 국제홍보위원과 이국종 아주대병원 교수,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자인 이재웅 쏘카 대표가 포함된 것으로 전해지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한국당 인재영입위는 이들을 상대로 영입교섭을 진행해 늦어도 9월 말까지는 결과물을 내놓겠다는 방침이다.지난해에도 한국당으로부터 비상대책위원장 직을 제안받은 바 있는 이국종 교수는 그러나 이번에도 “병원 내 정치도 잘 못 한다”며 “과대평가해 주신 것 같다. 그런 주제가 못 된다”고 사양 의사를 밝혔다. 한국당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이 교수는“한국당보다는 민주당 분들과 더 자주 접촉한다”고 선을 그었다.박찬호 위원의 국내 매니지먼트사인 ‘팀61’의 정태호 대표는 “박찬호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박찬호는) 정치할 의사도 전혀 없고 지금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전했다. 말하자면 한국당이 일방적으로 명단을 작성하고 일부 유명인사들의 이름을 흘려 애드벌룬을 띄워본 셈이다.자유한국당은 지난 19대 총선 때는 귀화 여성 이자스민 의원을, 20대 총선 때는 유명 바둑기사 조훈현 의원 등을 비례대표로 영입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도 ‘깜짝 발탁’ 전략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역구마다 줄을 선 인물들이 넘쳐나는 더불어민주당은 비교적 느긋하다.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공천 룰을 마련하고 상향식 공천시스템을 완전히 뿌리내려 총선 승리의 발판을 마련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한국당의 인재영입 안간힘을 바라보는 민심은 어떨까. 지명도가 높은 인기인들을 영입해 관심을 높이는 일이 나쁠 까닭이 없다. 그런데 유명인들을 명단에 욱여넣고 알 만한 이름들을 치마폭 들어 올리듯 슬쩍 흘리는 자유한국당의 행태는 측은하기도 하고, 짜증을 부르기도 한다. 구멍 뚫려 새는 바가지를 들고 우물 앞에 선 모습이 연상된다. 무너지고 부서진 무대를 고칠 생각도 없이 철 지난 ‘캉캉 쇼’나 기획하고 있는 어설픈 풍경이다.문재인 정권 잘못하는 것들 줄줄이 꿰어 들고 민중을 향해 꽹과리 치며 흔들어대는 것 말고 자유한국당이 제대로 하는 게 뭔가. 무엇 하나 정리 정돈된 것 없는 갈등 시한폭탄들을 그대로 두고 정부·여당의 실정(失政) 부풀리기에만 여념이 없는 형편 아니던가. 국민은 아직 자유한국당에게 권력을 되돌려 맡길 준비가 돼 있지 않다. 미더운 무대도 마련해놓지 않은 마당에 무슨 꿍꿍이로 ‘캉캉 쇼’ 티켓이나 돌릴 궁리를 하고 있나. 중도 민심을 확실히 돌려세울 미더운 정책으로 무장된 건강한 조직으로 혁신하는 일부터 빨리 마무리짓는 게 맞다. 그래서 천하의 인재들이 스스로 몰려들게 만드는 게 자유한국당이 가야 할 바른 길이다.

2019-06-23

‘섀도캐비닛(Shadow Cabinet)’

안재휘 논설위원영국 ‘섀도캐비닛(Shadow Cabinet 그림자 내각)’ 제도의 시원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43년 전인 18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섀도캐비닛’이라는 말은 1907년 영국보수당의 A.체임벌린이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영국의 민주주의가 현대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저력을 유지해가는 비결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섀도캐비닛’ 제도일 것이다. ‘섀도캐비닛’은 야당이 정권획득에 대비해 수상 이하 각 각료를 예정해 미리 정책을 연구하고 대안을 만들며 집권 준비를 하는 제도다.양당제가 발달한 내각제 국가라는 특성을 살려 야당도 총리를 비롯한 내각을 미리 정해 정책을 다듬어간다는 차원에서 정권 교체에 따른 정치적 불안정성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평소에도 정당 운영 자체가 ‘섀도캐비닛’ 중심으로 움직이는 만큼 자연스럽게 정당은 ‘정책 정당’으로 발전하게 된다. 영국 정부는 야당의 ‘섀도캐비닛’이 정책 연구에 필요로 하는 정부 자료를 아낌없이 제공한다.평화적 정권 교체의 전통이 이제야 비로소 성립해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작금 심각한 문제점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바뀐 정권의 정책적 불안정성이다. 보수-진보 구조의 청백전 방식의 적대적 정치문화가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황에서 잦은 정권 교체로 인한 치명적인 정책 불안정성이 위험수위에 도달하고 있는 형국이다. 시행착오 때문에 번번이 죽어나는 것은 국민이다.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야심만만하게 펼쳐온 적폐청산 드라이브와 온갖 이념정책들은 형언키 어려운 부작용들을 양산하고 있다. 부작용, 반작용들은 거의 전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닥치라 하고 달려가는 정책의 방향도 그렇거니와 검증되지 않은 탁상공론들이 마치 무슨 비법이나 되는 양 마구 펼쳐지는 바람에 힘들어하는 사람이 너무 늘었다. 국민이 설익은 정책의 실험 대상으로 전락해버린 결과는 참담하기 짝이 없는 비극이다.제1야당 자유한국당이 ‘정책 정당’으로의 변신을 모색하고 있는 가운데, ‘섀도캐비닛’ 제도를 원용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솔솔 나오고 있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는 우리의 고질적 야당 풍토를 개선하기 위해서도 일리가 있는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대선 전 ‘섀도캐비닛’ 아이디어를 내놓은 적이 있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우선 ‘매관매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부터 펼친다. 불투명한 과거 정치의 관행에 비추어 볼 때 개연성이 전혀 없는 우려는 아니다. 그러나 제도가 가져올 편익을 좀 더 깊이 생각한다면 반대할 이유란 희박하다. 그래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 선진화할 수만 있다면 제도적 도입을 정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국민이 정당의 수권 능력을 미리 심층적으로 가늠해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 않을까 싶다. ‘섀도캐비닛’은 ‘무조건 반대’의 습성에 빠져 여론 선동에만 혈안이 된 우리 정치의 구태(舊態)를 개선해갈 여지가 분명하다. 걱정스러운 것은 제도적으로 도입을 하려고 하면 정부 자료의 야당 제공을 극도로 싫어하는, 승자독식 의식에 포로가 된 정부·여당의 몽니가 여지없이 작동할 것이라는 점이다. 야당 인사에게 자료를 제공했다간 곧바로 공무원이 치도곤을 당하는 세상이다.당장 제도화가 어렵다 하더라도 자유한국당이 ‘섀도캐비닛’ 콘셉트를 십분 활용해 ‘대안 정당’으로서의 역량을 구축하는 것도 괜찮은 지혜다. 사탕발림, 궤변이 뒤범벅이 된 선동정치의 망령으로부터 무구한 민심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도 ‘정책 정당화’ 작업은 시급한 과제다. 이 나라 국민들이 각종 연고에 집착하거나, 오만가지 포퓰리즘 선동정치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정책’을 표심의 으뜸 척도로 작용하도록 만드는 일을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 진정한 ‘발상의 혁명’이 절실하다.

2019-06-16

‘김원봉’ 핵실험

안재휘 논설위원결론부터 먼저 말하고 시작하자. 김원봉(金元鳳)은 독립운동가인가? 그렇다. 그는 애국지사인가? 그렇다. 김원봉은 국가유공자인가?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을 반대한 사람이다. 김원봉은 6·25 전쟁의 전범인가? 그렇다. 그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북한 정권의 핵심이었다. 김원봉은 서훈의 대상이 될 수 있나? 아니다. 그에게 훈장을 주면 그와 그의 가족들이 보훈 대상이 되는데, 나랏돈이 그렇게 투입되는 것은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다.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를 통해서 느닷없이 소환한 인물 하나가 정국의 핵폭탄으로 등장했다. 문 대통령은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면서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 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밝혔다.문 대통령의 발언을 듣는 순간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 사람들은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간단없이 발생하는 정치권의 막말 파동을 둘러싸고 가뜩이나 헝클어져 버린 정국 속에서 대통령의 도발적 발언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 더 문제다. 3·1절 기념사에서의 ‘빨갱이’, 5·18 기념사에서의 ‘독재자의 후예’ 발언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마당이다. 도대체 이 나라 대통령이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무엇인가.문 대통령이 ‘약산 김원봉’을 치켜세운 일은 그게 언제 어떤 자리였느냐부터 따져봐야 한다. 예순네 돌을 맞은 현충일이었고, 하필이면 6·25 전쟁으로 희생된 호국영령들이 묻혀있는 국립서울현충원이었다. 굳이 그 자리에서 김일성으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북한 권력 핵심의 이름을 불러 찬양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식의 오작동이다.배려심이 부족한 청와대의 행태는 그 며칠 전에도 있었다. 청와대는 현충일을 앞둔 지난 4일 천안함 폭침·연평해전 유가족을 비롯한 보훈가족들을 초청한 오찬 자리에서 북한 김정은과 문 대통령이 손을 맞잡은 사진이 담긴 안내서를 배포해 참석자들의 반발과 정치권의 비판을 샀다. 5·18 피해자들 앞에 전두환 대통령 부부와 문 대통령 부부가 손을 맞잡은 사진을 배포한 격이라는 비아냥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을 패착이다.예상대로 심각한 후폭풍과 국민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야당 인사들이 줄줄이 맹비난을 퍼붓고 나섰다. 문 대통령이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인 2015년에 했던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 드리고 술 한 잔을 바치고 싶다”고 했던 발언이 되살아나고 있다. 차명진 전 의원이 “문재인은 빨갱이”라는 막말까지 쏟아내어 세상이 또 시끄럽다.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사업을 추진 중인 국내 7개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이들은 오는 8월부터 11월까지 광주·대구·대전·부산을 순회하며 ‘약산 김원봉 서훈 대국민 서명운동’을 전개한다고 밝혔다. 이래저래 민심은 더욱 갈기갈기 찢어지게 생겼다. 해방 전 조선의열단의 활약이 제대로 평가되는 것은 맞지만, 아무리 그 말로가 짠하다 해도 6·25 전범까지 미화(美化)하는 것은 결코 바른길이 아니다.친일 행적이 드러난 국가유공자를 유공자 호적에서 뺀다는 얘기도 있다. 손혜원 의원은 부친이 공산주의자였지만 전향해 경찰의 대공 수사에 협조했기 때문에 서훈 결정에 하자가 없다고 주장한다.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중에 석연치 않은 인사가 적지 않다는 논란도 있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정의롭고 온당한 것인가. 그러잖아도 복잡하고 어지러운 정치판에, 노림수를 알 길 없는 문 대통령의 ‘김원봉’ 핵실험 연기가 자욱하다.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는 지금 온전한가.

2019-06-09

수상한 ‘국가채무비율’ 전쟁

안재휘 논설위원‘외상이라면 사돈집 소도 잡아먹는다’는 옛말이 있다. 뒷일은 어떻게 되든지 생각하지 않고 우선 당장 좋으면 그만인 것처럼 무턱대고 행동함을 비유하는 속담이다. 문재인 정부가 재정을 크게 확대하기로 작정한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 속담이 떠올랐다. 문 대통령은 본인이 불과 4년 전에 했던 말을 뒤집고 국가채무비율 한도를 높여서라도 도무지 안 돌아가는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벼랑 끝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문 대통령은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시절 2016년도 예산안을 놓고 “재정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노선인 40%가 깨졌다. 재정건전성 회복 없는 예산안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맹비난한 바가 있다. 그랬던 분이 최근 홍남기 경제부총리에게 “국가채무비율이 미국은 100%, 일본은 200%가 넘는데 우리 정부는 40% 안팎에서 관리하겠다는 근거가 뭐냐”고 물었단다. 그러자마자 집권당과 정부 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확대재정의 필요성을 부르대기 시작했다. 지난달 30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국회의원 워크숍에서는 확장적 재정정책 토론이 무성하게 쏟아진 것으로 전해진다. 한 정부 관계자도 “대부분의 나라가 100% 안팎이고, 일본은 무려 250%에 달한다”며 “확장속도가 오히려 더디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같은 움직임에 대한 정치권의 공방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야당에서는 후세에 부담을 지우는 ‘나랏빚’ 증가를 조심해야 한다고 강력히 비판한다. 확장 재정 기조는 내년 총선을 의식한 ‘선심성 돈 풀기’이며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덮으려는 방만한 국정이라는 게 야당의 시각이다.4조 원대의 적자 국채 발행 시도와 ‘박근혜 정부 마지막 해의 국가채무비율을 39.4% 이상으로 높이라’는 부총리의 지시를 폭로했던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 생각이 난다. 범법자 취급을 서슴지 않던 기재부는 얼마 전 고발을 취하했고, 검찰도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이렇게 되면 신재민의 폭로처럼 문재인 정부는 애초부터 국가부채 확대 카드는 진작부터 만지작거렸다는 얘기가 되는 거 아닌가 싶다.대통령의 판단 기준이 바뀐 것을 ‘상황변경’의 논리에 대입한다면 일견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산성만 보장된다면 부채비율을 높이는 일을 무조건 터부시할 일은 아닌 것도 맞다. 더욱이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가속화, 생산인구의 급격한 감소가 진행되는 마당에 소요예산이 일정 부분 늘어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정부·여당의 재정확대 정책이 품고 있는 위험요소는 심각하다.재정확대 찬성론자들의 논리는 OECD의 평균 국가채무비율이 110%가 넘기 때문에 국가채무비율 40%를 넘겨도 국제 수준으로 보면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국가가 처한 상황과 경제의 질을 무시하고 단순하게 채무비율만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 경제의 경우 워낙 자생 기반이 취약하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까닭에 국가부채 수준이 낮아도 부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무엇보다도 문재인 정부가 늘리려고 하는 재정의 ‘지출 소모성’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하게 민생을 지원하는 시혜성 지출이 많아 예산 낭비 성향이 높다는 점이 가장 큰 걱정거리다. 복지예산이란 한 번 지출되기 시작하면 다시는 절감할 수 없다는 특성이 있다. 예산을 필요한 곳에만 쓰는 재정개혁을 서두르고 재정지출의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먼저다.정부가 소득주도성장 정책으로 인한 경제실패를 덮기 위해 국가재정을 허물어 쓰기로 아예 작정한 것인가. 총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온갖 행태가 수상하다. ‘재정확대’가 ‘경제 회생’으로 이어지고, 다시 ‘세수증가’를 불러와 ‘재정안정’을 구축하는 선순환 체제가 구축되면 좀 좋을까. ‘외상’ 준다고 마구 때려 잡아먹은 사돈네 소값 ‘외상’은 대체 누가 갚나.

2019-06-02

‘증오 정치’의 역습

안재휘 논설위원남편의 정치적 성공을 위해 떡볶이 장사까지 하며 뒷바라지를 했던 여인이 골프채에 맞아 처참하게 숨졌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과 여성단체는 아무런 말이 없다. 민주당 소속 유승현 전 김포시의회 의장 이야기다. 우리 정치와 사회가 얼마나 천박한 의식에 발목이 잡혀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이 비극적 장면은 이 나라가 정말 온전한 상황인지를 깊이 의심케 한다.‘박근혜 망신주기’ 드라마는 여전히 연장 방영 중이다. 박 전 대통령의 방중(訪中) 연설 문구를 놓고 최순실이 정호성 비서관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 내용의 녹음파일이 폭로됐다. 지금 시점에 왜 이 녹음파일이 공개됐을까 하는 의구심을 넘어, 국정 경험도 직책도 없는 최 씨가 대통령의 연설문 문구를 좌지우지하는 대목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대목이다.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장외투쟁 ‘민생투쟁대장정-국민 속으로’ 일정이 마무리됐다. 황 대표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크게 높였고, 한국당에 대한 국민지지율도 상승시키는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극한대결로 치닫는 여야 정치권의 비정상 기류가 개선되기는커녕 악화된 측면이 있다는 차원에서 숙제도 많이 안게 됐다. 여야 정치권의 막말 대치는 더욱 험악해지는 형국이다.여야 정치권의 맞대결 구도에서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은 집권 여당 대표의 정치력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걸핏하면 ‘장기집권론’을 부르대는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집권세력의 선두에서 칼을 휘두르는 용맹한 졸병의 역할에 줄곧 머물고 있다. 패스트트랙 갈등국면에서도 야당을 조준해 “도둑놈들한테 이 국회를 맡길 수 있겠냐”고 공격하는 게 고작이었다.민주당 원내대표를 지낸 우상호 의원은 나경원 한국당 원내대표를 겨냥 “지금 좀 미친 것 같다”고 막말을 했다. 5·18 민주화운동 39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이 날린 직격탄은 더 문제다. 한국당의 ‘좌파독재’ 공세를 문 대통령은 ‘독재자의 후예’라는 말로 되돌려줬다. 영부인 김정숙 여사는 황교안 대표와의 악수를 건너뛰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고의성을 시인하고 있다.문 대통령의 광주 발언에 대해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진짜 독재자의 후예에겐 말 한마디 못하니까 여기서 지금 (김정은의) 대변인 하고 있지 않나”라고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다. 이주영 한국당 의원은 “‘남로당의 후예가 아니라면 천안함 폭침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되돌려줘야 한다는 비아냥 소리를 여기저기서 많이 듣는다”고 공박했다. 5·18 기념식에 참석하려는 황교안 한국당 대표를 향해 이정미 정의당 대표의 ‘사이코패스’라는 공격은 막말의 극치다. 이정미 대표의 발언 논법을 패러디하는 가정법을 동원해 거꾸로 되받아친 한국당 김현아 의원의 ‘한센병’ 발언 파문도 심각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듯 정치권의 험구는 좀처럼 개선되기 어려운 난치성 유행병이다.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정치권은 어느새 욕지거리 난장판이 돼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촛불 정신’을 앞세운 문재인 정권은 왜 이렇게 정국을 험악하게 이끌어가는 것일까. ‘적폐청산’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한 포퓰리즘의 화신이 되어 나라 곳곳에 과거의 ‘쓰레기통’ 엎어놓고 매타작하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국민의 대통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라 경제마저 거덜이 나고 있는 중이다.백성들이 다 죽어가는 데도 권력만 줄창 탐할 것인가. 국민도 없는 땅에서 그 알량한 권력들 어디에다 써먹을 참인가. 민생을 살리기는커녕 모두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몹쓸 ‘증오 정치’부터 청산해야 한다. 미래를 이야기하고, 희망을 주는 정치를 펼쳐야 한다. ‘죽이는’ 정치가 아니라, ‘살리는’ 정치를 해야 한다. 민생을 지옥으로 몰아가는 이 ‘증오 정치’의 역습으로부터 영원히 탈출할 새길을 찾아내야 한다.

2019-05-26

‘성역’과 ‘우상’이 민주주의 망친다

안재휘 논설위원어느새 39년 세월이 흘렀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를 하는 동안 24차례나 박수를 받으며 눈시울을 붉혔고, 황교안 제1야당 대표는 우산대로 찌르려는 사람까지 나오는 살벌한 분위기에 퇴로를 열지 못해 묘지 후문 펜스를 뜯고 피신할 정도로 위협과 박대를 받았단다. 5·18 광주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강산이 4차례나 바뀐 긴 세월이 흐르고도 아직도 진상규명이 덜 됐다고 아우성치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광주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39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미안하다’며 광주 시민과 1980년 당시 희생자들을 위로했다. 온갖 협박에도 ‘안 가면 더 욕먹을 것’이라는 강박관념 속에 광주행을 결행했다가 갖은 수모를 겪었던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광주의 상처가 치유되고 시민들의 마음이 열릴 때까지, 진정성을 갖고 광주를 찾고, 광주 시민들을 만날 것”이라는 입장문을 내놨다.그동안 ‘5·18 망언’이라고 일컬어지는 구설 사태들이 있었으니, 희생자 가족을 비롯한 피해자들의 억하심정을 헤아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분노의 수위를 함부로 시비할 계제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도 금기는 있다. 특히 그것이 정치적인 재단일 경우에는 충분히 냉정하고 엄격한 게 맞다.극우성향의 인사들의 단언적 주장에서 비롯된 시빗거리 중 가장 첨예한 문제는 5·18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 잠입설과 5·18 유공자 중 상당수가 가짜여서 명단 공개와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견해일 것이다. 두 주장은 쌍방의 논리가 워낙 첨예하고, ‘확증편향’에 빠진 이들의 침소봉대와 확대재생산으로 인해 진실 판별이 더 어렵게 돼 버린 형국이다.생각 같아서는 똑 떨어진 증거들을 펼쳐놓고 불순하거나 어리석은 억지를 펴온 인사들을 단박에 개망신 주고 싶지만 여의치 않다. 우리는 역사에 남아 있는 수많은 의혹이 수백 년을 흘러도 여전히 논쟁 중인 경우들을 무수히 본다. 권력에 의해 논쟁 자체가 봉쇄돼 꽁꽁 묻히고 세월에 씻겨 억울하게 사라진 진실은 또 얼마이던가.진보진영이 강력하게 추진 중인 소위 ‘5·18 망언 처벌법’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민주당이 민주평화당·정의당과 바른미래당 일부 의원들의 법안을 종합할 예정이란다. 개정안은 5·18민주화운동 또는 5·18단체를 비판하는 자에게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7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처하도록 하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다.한마디로, 5·18을 ‘성역’으로 떠받들어 어떤 비판적인 견해도 내놓지 못하게 막는 금법(禁法)이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위헌적 발상일 뿐만 아니라, 필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악법이 될 여지가 있다.그동안 1987년 KAL기 폭파나 2010년 천안함 폭침, 더 올라가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나 6·25에 대해 진보진영에서 어떤 가당찮은 담론들을 퍼트려왔는지를 반면 교사할 필요가 있다. 이슈마다 특별법 자물쇠를 채워놓고 입만 뻥긋해도 잡아넣는다면, 그게 바로 ‘독재’ 아니고 무엇이랴. 멀리 갈 것도 없이 세기적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북한의 악랄한 독재가 어떻게 기형적으로 심화돼 왔는지만 보아도 금세 알 수 있는 패착이다. 누가 뭐래도 이건 아니다.참된 자유민주주의 전통을 쌓아가려면, 그것이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라 하더라도 정치적 동기를 부여해서 처벌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입만 열면 ‘민주주의’를 위해서 목숨 바쳐 투쟁해왔다고 우쭐대는 진보정치인들이 요즘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들 스스로 ‘좌파독재’의 업보를 쌓아간다는 힐난을 거듭거듭 자초하는 속내란 참으로 난해하다. ‘성역’과 ‘우상’은 어김없이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이건 안 된다.

2019-05-19

비운의 ‘홍길동전’

안재휘 논설위원불상(佛像) 이미지 밑에 로켓 엔진을 달아 하늘로 쏘아 올리는 합성 패러디 사진들이 인터넷을 장식했다는 뉴스는 실소(失笑)를 터트리게 한다.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을 ‘불상 발사체’라고 한 합참의 발표를 희화화한 민심의 발로다. ‘미사일이 아니라면 그럼 새총이란 말이냐?’라는 일각의 비아냥도 폭소를 부른다. ‘미사일을 미사일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모습을 홍길동전에 비유한 ‘홍길동 정권’이라는 작명 또한 신랄하다.북한의 잇따른 미사일 발사는 ‘한반도 평화 쇼’ 국면에서 엉망진창이 된 나라의 국방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정부 여당이 지난 4일 북한이 동해안에서 감행한 발사실험을 굳이 ‘미사일’이 아니라고 두둔하는 모습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9일 평양 북방 내륙인 구성에서 동해안을 향해 발사한 두 발의 미사일이 ‘탄도’냐 아니냐를 놓고 한심한 논란을 지속하고 있다. 합참과 국방부는 웬일인지 며칠이 지나도 계속 ‘분석 중’이란다.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은 제주도까지 타격할 수 있는,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무기로 밝혀지고 있다. 실제 전쟁이 벌어져 남한 전체가 핵폭탄으로 초토화가 된 뒤에도 국방부는 계속 ‘분석’만 하고 있을 참인가,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9·19 남북 군사합의’ 위반인가 여부를 놓고도 당국의 언급들은 도무지 헛갈린다. 도대체 위반이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거의 말장난 수준이다.신임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법률적으로는 위반이냐 아니냐를 따져볼 수 있겠지만 정신적으로는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합의에서 반대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원은 “문구상으로만 보면 위반이라고 얘기하기는 어려운데 군사적 충돌의 근원이 되는 일체의 적대적 행위를 전면 중단하자는 취지는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국방부의 입장은 더 종잡을 수가 없다. 지난 4일 강원도 원산 북쪽에 있는 호도반도 일대의 발사를 놓고는 9·19 군사합의에 명시된 포병 사격훈련 금지 구역을 벗어난 지역이어서 합의 위반이 아니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9일 미사일 발사에는 “9·19 군사합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모두 짜 맞춘 듯이 북한의 도발을 ‘합의 위반’이라고 말하지 않고 ‘취지 위반’이라고 언급하고 있다.미국 국방부는 북한의 발사체를 ‘복수의 탄도미사일’이라고 발표했다. ‘탄도미사일과 관련한 모든 활동 중단’을 명시한 유엔 안보리 결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란 의미다. 우리 국방부의 “단거리 미사일이라고만 말하겠다”면서도 “탄도가 아니라는 말은 안 하겠다”는 교졸한 입장과 대비된다. 우리 군이 이렇게 이상한 표현에 발이 묶인 것은 북한이 유엔 결의를 어겼다는 사실을 애써 흐리려는 것이라는 해석이다.그러나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대목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변화무쌍한 반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처음에 북한의 발사에 대해 “아무도 그에 대해 행복하지 않다”고 밝혔다. 하지만 트럼프는 10일 폴리티코와 인터뷰에서 “그것들(북한의 미사일)은 단거리 미사일이었다”면서 “나는 그것이 신뢰 위반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우리는 ‘미국은 언제나 미국 편’이라는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미국에 위협적인 존재만 아니라면 언제나 ‘북핵’ 문제는 미국 외교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 있다.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이 ‘단거리 미사일’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하는 시점에 우리 국방부는 ‘미사일을 미사일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현대판 홍길동’ 처지가 돼 있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은 남북대화의 판을 깨지 않기 위해서만 전전긍긍한다. 어느 날 갑자기 처절한 비극이 되어버린 ‘홍길동전’ 무대 위에 갇힌 우리는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안팎으로 위태로운 이 나라가 정말 걱정이다.

2019-05-12

‘김관영의 난(亂)’

안재휘 논설위원유승민의 선택은 옳았나.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여의도 정치권 한가운데에서 요즘 가장 곤혹스러운 인물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유승민일 것이다. 안철수 역시 좌불안석이긴 마찬가지일 테지만 짐작이 쉽지 않다. 개혁적 보수, 합리적 진보의 ‘중도정치’ 건설에 뜻을 합쳤던 두 사람은 좌우 거대정당의 블랙홀 구심력에 속절없이 부서지는 바른미래당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리라. 용어도 생소한 ‘패스트트랙’을 둘러싼 정국혼란의 진원지는 단연 바른미래당 지도부다. 지난 대선에서 실패한 유승민과 안철수는 중도정치 건설의 꿈을 품고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을 합쳐 바른미래당을 꾸려 놓고 일단 뒤로 물러앉았다. 거대 양당의 인력을 버티면서 독자적인 정치색을 굳건히 만들어가는 것이 그들의 숙제였다.그 첫 번째가 좌파-우파로 통칭되는 거대 양당과는 차별화된 정책 능력이었다. 어젠다를 생산하고 이슈를 선점해나가는 결기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바른미래당은 창당 초기부터 정체성 혼란을 드러냈다. 2018년 연초 결성된 통합추진위원회에서 일어난 ‘햇볕정책 폐기’ 논란이 그 시작이었다. 바른정당이 ‘햇볕정책’을 존중한다고 선회함으로써 곧바로 봉합되긴 했었다.그러나 오늘날 혼란한 정국에서 돌이켜보면, 바른미래당은 ‘중도정치’에 대한 확고부동한 철학을 생산하지도, 공유하지도 못한 오합지졸들의 집합체였다. 꼴통 보수정치를 바꾸고 싶어 하는 일부와 호남에서 미래를 보장받지 못한 정치꾼들이 한쪽 발만 들여놓고 오직 ‘교섭단체’의 꿀단지를 향유하기 위해 뭉친 임시천막, 비 맞은 철새들의 초라한 둥지에 불과했던 것이다.바른미래당의 허술한 실체는 국민이 먼저 알아챘다. 민심은 좀처럼 지지를 보내주지 않았다. 정의당을 2중대, 민주평화당을 3중대로 삼은 좌파정당 본부중대 더불어민주당의 흡인력은 깊어만 갔다. 손학규 대표-김관영 원내대표 체제가 들어선 이후 바른미래당은 민주당의 4중대, 호남 정치의 별동대로 색깔을 호시탐탐 변화시키기 시작했다.‘패스트트랙’ 난장판의 본론으로 잠시 들어가 보자.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김관영과 국회의장 문희상이 합작 행사한 ‘사보임’은 우선 언어적으로 치명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사임(辭任)의 사전적 의미는 ‘맡아보던 일자리를 스스로 그만두고 물러남’이다. 오신환과 권은희 두 사람 모두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다. 해임(解任)과 보임을 합친 ‘해보임’이라고 부르지 않는 한 어불성설인 것이다.국회법 48조 6항은 ‘임시회의 경우에는 회기 중 개선될 수 없고’라고 명시돼 있다. 반쪽짜리 최고위원회의에서 “내가 더불어민주당을 확실하게 지킬 것이다. 왜? 이게 내가 추구해온 정치적인 가치니까”라고 했던 손학규의 말은 단순한 실언이었을까. 손학규를 비판했다가 ‘당원권 정지 1년’이라는 퇴출 조치를 당한 이언주 의원의 “찌질하다”는 비난이 새록새록 떠오른다.‘김관영의 난(亂)’은 국회의장 문희상의 동조 때문에 가능했다. ‘신(新) 동물국회’라는 비아냥으로부터 문희상의 책임은 자유로울 수 없다. 너나없이 그럴싸한 이중인격의 사시이비(似是而非)다. ‘협치’의 정신이란 모조리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정치보복에만 혈안이 된 그릇된 통치 기조에 그 시원(始原)이 존재한다.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손학규와 김관영, 그리고 문희상은 틀렸다. 정치를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편파적 법안을 급행열차(패스트트랙)에 올려놓고 시간만 보낼 게 뻔한 꼼수 정략을, 짜고 치는 술수로 밀어붙이는 것은 결코 ‘바른’길도 ‘미래’를 위한 길도 아니다. “쉽고 편하고, 계산기 두드려서 그때 더 이익이 많아 보이는 길로 가지 않겠다”는 유승민의 작심은 여전히 옳다. 그러나 지금은 ‘진심’만 가지고는 안 된다. 이 난국이야말로 어긋난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능력을 보여줄 때다.

2019-04-28

총선 ‘블랙홀’

안재휘 논설위원지난해 말 퇴임을 앞두고 국회예결위에 출석한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김동연은 “현재 경제 위기에 직면해 있다”는 야당 의원의 지적에 대해 “경제의 위기라기보다 정치적 의사결정의 위기”라고 말했다. 그의 말은 경제마저 정치의 흥정대상이 돼버린 ‘경제의 정치화’가 끼치는 해악에 대한 장관의 비명으로 들렸다. 사실 이 나라는 경제뿐 아니라 사회, 문화 등 사람 사는 모든 일이 정치적 결정에 맡겨져 있다.‘좌파 독재’라는 용어가 정치권에 등장하는 일이 잦아졌다. 대통령이 이미선 헌법재판관을 기어이 임명하자 자유한국당이 길거리로 나섰다.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집회에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문재인 정권은 한결같이 좌파 독재의 길을 걸었다”며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좌파천국을 만들어왔다”고 공격했다.황 대표는 이어 “힘도 없는 지난 정권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잡아넣고, 아무리 큰 병에 시달려도 끝끝내 감옥에 가둬놓고 있다”며 “‘친문(친문재인) 무죄, 반문(반문재인) 유죄’가 이 정권이 말하는 민주주의냐”고 성토했다. 황 대표는 나아가 “개성공단에는 목을 매면서 우리 공단을 살린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 “대한민국이 ‘베네수엘라행 특급열차’를 타고 망하는 길로 달려가고 있다”고 주장했다.청와대와 여당은 내년 4월 총선 승리를 목표로 일찌감치 모종의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시작한 모습이다. 윤영찬 전 국민소통수석을 필두로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권혁기 전 춘추관장, 한병도 전 정무수석,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송인배 전 정무비서관 등의 총선 출마 선언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김부겸 전 행안부 장관, 김영춘 전 해수부 장관, 도종환 전 문광부 장관 등도 당에 복귀했고, 대통령 복심으로 통하는 양정철은 차기 민주연구원장으로 내정됐다.잇단 인사 검증 실패로 구설수에 오른 조국 민정수석의 부산 출마 여부를 놓고 입방아가 시끄럽다. 이낙연 국무총리 차출설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출격 이야기도 나온다. 그만큼 민심이반에 대한 문재인 정권의 위기감이 크다는 의미도 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중은 마뜩지 못하다. 도대체 도탄에 빠진 민생, 지독한 불경기의 늪에서 죽어가는 영세상인들의 생사는 어쩌라고 권력 놀음, 총선 체스판만 벌이는가 싶은 것이다.한국 경제의 허리인 40대 취업자 수는 끝없는 추락 중이다. 올 3월 40대 취업자는 1년 전보다 16만8천 명 줄었다. 지난 2월 12만8천 명 감소한 것보다 더 많다. 30대 취업자도 8만2천 명으로 감소했다. 체감실업률을 보면 정부의 재정 투입을 통한 일자리 창출 정책은 실패한 게 분명하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6%에서 2.5%로 하향 조정했다.‘경제’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감각은 마비 상태에 빠졌다. ‘경제실패’ 비판을 귀 기울여 듣는 위정자들조차 이젠 없다. 이미 영세서민들의 연옥이 돼버린 뒷골목의 불황을 개선하기 위해 굿판이든 뭐든 뭔가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민성(民聲)을 제대로 알아듣는 모습도 없다. 일 안 하고 놀면서 뒷주머니 열어놓고 있으면 ‘복지’의 이름으로 먹고살게 해주는 나라가 돼가고 있다는 항간의 비아냥이 우스개로 들리지 않는다.민주노총 등 과격 좌파 운동권의 위세에 무력화되는 공권력을 상징으로 ‘정치적 의사결정의 위기’가 한껏 깊어지고 있는 나라에 희망이 남아날 개연성은 없다. 이런 판에 1년 가까이 남은 총선에서의 240석 대승을 장담하며 팔 걷어붙이고 나선 집권당의 행태는 온당한 것일까. 이렇게 총선 블랙홀, 판도라의 상자부터 무책임하게 열어젖혀도 괜찮은 것일까. 머지않아 펼쳐질 정치권의 포퓰리즘 선심 잔치가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2019-04-21

‘조선반도’와 ‘북한’의 차이

안재휘 논설위원1년 9개월여 기간 통일부 수장으로서 대북정책을 수행했던 조명균 장관이 이임식도 없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장관실을 훌쩍 떠났다는 소식은 여운이 남는다.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과 3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모두 지켜보며 대응책을 궁구했던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지난 1월 9일 조명균은 국회 답변 중에 “북한이 계속해서 주장하는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와 우리가 목표로 하는 ‘북한 비핵화’와는 차이가 있다”고 시인했었다.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차 북미정상회담에 나설 의지가 있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대화 시한’을 올해 연말로 한정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조건에서 제3차 조미(북미)수뇌(정상)회담을 하자고 한다면 한 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김 위원장이 시정연설에서 남측을 향해 던진 메시지는 강했다. 그는 우리 정부에 대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시니컬한 충고를 던졌다.북한 선전매체는 지난달 스텔스 전투기 F-35A 2대가 국내에 도착한 것을 두고 날을 세웠다. 대남 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는 F-35A의 공군 청주기지 도착을 거론하며 “박근혜 역도가 대결시대에 계획하였던 전쟁장비 반입 놀음을 고스란히 실행하고 있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배신적 망동”이라고 을러댔다.문재인 대통령의 1박 3일 미국 방문을 놓고 말이 많다. 청와대는 이번 회담에 대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논의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허심탄회한 논의’라는 용어는 ‘진전이 없었음’을 말하는 외교적 수사라는 측면에서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평가는 후하게 매겨질 여지가 없다.문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온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마저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지난번의 하노이 회담에 이어 이번 한미정상회담도 ‘워싱턴 노딜’”이라며 “전혀 한미 간에 접점을 만들지 못했다”고 평했다.청와대 언론보도문에는 남북 정상회담 추진 계획, 추가 북미 정상회담 의지, 톱다운 방식 대화 지속 등의 표현이 있지만, 백악관 자료에는 이런 내용이 하나도 담기지 않았다.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공통된 문장은 “대화의 문이 항상 열려 있다” 하나뿐이었다. 정치권 안팎의 반응이 대통령의 방미에 대해 ‘가서 뭘 했나’ 수준을 넘어서 ‘이럴 바엔 왜 갔나’는 차원으로 번지고 있다.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하지 말라”고 퉁을 놓기까지 한 마당에 우리 정부의 처지는 참으로 딱하게 됐다. 이렇게 된 데는 역시 북한 김정은은 ‘미군 철수’를 노림수로 둔 ‘조선반도 비핵화’를 변함없이 부르대는데, 문재인 정부가 이를 ‘북한 비핵화’로 의역하여 우리 국민과 미국에 전달해온 패착에 기인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맞을 것이다.문재인 정부의 개념 비틀기가 실수였는지, 아니면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이 부분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는 한 발짝도 진전되기 어렵다. 더욱이 무구한 우리 국민이 더 이상 흐리멍덩한 개념에 현혹돼 금방이라도 영구평화가 정착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게 해서는 안 된다.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조선반도 비핵화’와 ‘북한 비핵화’ 사이의 끔찍한 비밀이 밝혀질 것이다. 그 은밀한 열쇠를 쥐고 있을 조명균에게 더 물어보고 싶지만, 그는 퇴임 후 당분간 야인(野人)으로 지내겠다며 뒤안길로 꽁꽁 숨어버렸다.

2019-04-14

‘적폐 몰이’의 역습

안재휘 논설위원4·3 보궐선거 결과를 해석한 정치권의 아전인수식 논평들이 우스꽝스럽다. 이번 선거의 최대 수혜자로 꼽히는 정의당은 “4·3 선거 승리는 선한 나비 날갯짓이 되어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껏 으스댔다. 하지만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를 통해 고인이 된 노회찬 의원의 지역구 의석을 진땀 승부 끝에 가까스로 물려받은 선거결과에 무슨 감상이 그렇게 요란한지 모를 일이다.자유한국당은 “이번 선거결과는 문재인 정권의 폭주에 브레이크를 걸어달라는 국민 여러분들의 절절한 목소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한국당은 황교안 대표가 선거현장에서 살다시피하고 온 당력을 집중해서 치른 선거였다. 결과적으로 근근이 예전 구도를 지켜낸 것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를 과하게 붙일 일은 아닐 것 같다.어쨌거나 딱하게 된 쪽은 바른미래당이다. 통영·고성지역에 머문 황교안 한국당 대표처럼 창원·성산지역에 상주하며 10% 득표를 장담해온 손학규 대표의 입지가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민주당과 정의당의 후보 단일화로 득표의 의미가 퇴색해버린 상황에서도 올인하다가 이언주 의원에게 ‘찌질하다’는 소리까지 들은 망신을 두고두고 성찰해야 할 판이다.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민주진보개혁 단일 후보인 여영국 후보의 승리는 우리 당의 승리나 마찬가지”라는 논평은 후안무치하다. 국회의원 선거구 2곳과 기초의원 선거구 3곳에서 실시된 이번 보선에서 민주당은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홍영표 원내대표의 “19대 총선의 2배 가까운 지지를 얻었다”는 발언은 차라리 측은하다. 보궐선거 직후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문재인 정부가 맞닥트린 ‘북경노적사(北經勞積司 북한·경제·노동·적폐·사법)’ 문제에 대한 자신의 발언을 상기하면서 “‘문재인 저수지’에 쥐구멍이 뚫렸다”고 경고했다.국회의 장관 청문회는 최근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는 이슈 가운데 단연 으뜸이다. 인사 참사 논란은 거듭돼왔지만, 이번 장관내정자 7명 중 두 명이 낙마한 현실은 자못 심각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와대 전 대변인 김의겸의 개발예정지 부동산 투기 의혹은 정권 최대의 스캔들로 여론을 후벼 파고 있다.국회 운영위원회 청와대 업무보고에 참석한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의 태도는 적절하지 않았다. 노 실장은 이날 4·3보궐선거 결과에 대해 “‘국민에게 겸손하게 다가가야겠구나’라고 자성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어서 “창원성산 지역구는 문 대통령이 (대선에서) 41%를 얻었는데 이번에 45%를 얻어서 4%포인트 지지도가 높아졌다”고 말해 초라한 견강부회의 의식을 드러냈다.그는 ‘문재인 정부 들어 청문 보고서 없이 임명을 강행한 장관이 12명’이라는 이만희 자유한국당 의원의 지적에 “청문 보고서 없이 청와대로 올라온 사람 중 역대 정권에서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은 경우는 단 한 명도 없다”며 “국회가 국회의 직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역공을 폈다. 그의 표정에 ‘자성’ 따위는 없었다.문재인 정부의 ‘남 탓’ 근성은 고질병 수준이다. 걸핏하면 문제의 원인을 ‘전 정부 탓’으로 돌린다. 노영민 대통령실장의 “전 정부도 다 그랬다”는 반박은 불행하게도 이 정권에서 단두대처럼 써먹고 있는 ‘적폐 몰이’의 역습이 시작됐다는 신호탄이다. 내가 하면 ‘촛불정신’이자‘관행’이요, 남이 하면 ‘적폐’라는 논리야말로 역사를 망치는 천박한 인식의 발로다.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의 사례는 빙산 일각일 것이라는 끔찍한 풍문이 나돈다. 어림잡아 100여 명의 전 정부 인사와 공무원들에게 ‘적폐’ 딱지를 붙여 사법처리 중인 정부 여당이 자기편 김경수 한 사람 구속에 흥분하여 담당 재판관에게 무차별 신상털이 인신공격 몰매질을 가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혼돈의 계절이 깊어지고 있다.

2019-04-07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안재휘 논설위원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북방의 흉노족에게 억지로 시집을 간 중국 한나라 때 궁녀 왕소군(王昭君)의 심경을 헤아리며 당나라 시인 동방규가 쓴 시 ‘소군원(昭君怨)’에 나오는 대목이다. 우리 정치사에서는, 지금은 고인이 된 거물 정치인 김종필(JP)의 인용으로 유명하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서울의 봄’이 거론될 적에 전두환이 쿠데타를 감행하자 김종필은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구나’라는 뜻의 이 말을 사용해 촌철살인의 어록을 남겼다.또다시 ‘춘래불사춘’이다. 이 나라 국민 노릇 하기가 힘겹도록, 계절은 봄이로되 바람은 여전히 삭풍이다. 집권세력은 자기들 아집대로 정국을 끌고 가려는 강다짐을 놓지 않고 있다. ‘적폐청산’으로 포장된 포퓰리즘 정치보복은 끊임이 없고, 민생은 도무지 피폐의 암운을 걷어낼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북한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허물기 위한 어설픈 사기극으로 귀결돼 문재인 대통령이 대략난감에 빠졌다.그럼에도 권력자들의 오만방자가 하늘을 찌른다. ‘내로남불’의 신생 사자성어로 표현되는 이중인격적 언행들은 이미 여야를 막론한 정치권의 폐습으로 굳어졌다. 주야장천 상대방 쓰레기통 엎어놓고 냄새나는 ‘남 탓’ 퍼레이드만 벌인다. 도무지 달라지는 게 없다. ‘내가 잘해서’ 민심을 얻기보다는 ‘상대방 허점’만을 욱대겨서 거꾸러뜨리려는 악의만 무성하다.문 대통령이 정권 중반기를 맡기겠다며 내정한 장관후보자들의 살아온 내력들이 가관이다. 자기들이 정한 7대 불가 기준에 이리저리 걸려있는 하자들이 화려하다. 국회에서 열린 청문회에서는 ‘능력 검증’ 따위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고, 티 듣기와 육탄방어만이 난무했다. 검증받으러 나온 후보자가 제1야당 대표를 공격하는,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장면마저 연출됐다. 국회 장관후보자 청문회의 의미는 바야흐로 완전히 퇴색하고 말았다.자유한국당이 외치는 ‘좌파독재’·’폭정’비판에 당장 흔쾌히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징후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은 역연하다. 촛불 민심을 핑계 삼아 하염없이 끌고 가는 ‘적폐청산’ 드라이브를 ‘보복정치’·‘공포정치’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고 주장할 명분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다. 김경수 경남지사의 구속 이후 벌어지는 여당의 무차별 판사공격은 이 나라 민주주의에 심각한 적신호다.작금 일어나는 정치권 안팎의 이슈들도 그렇다. 문 대통령은 동남아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버닝 썬’과 ‘김학의’와 ‘장자연’ 문제를 언급하며 특명을 내렸다. 자유한국당의 대표가 된 황교안과 문 대통령 가족 문제를 건드린 곽상도를 때려잡으려는 보복행위라는 것이 호사가들의 입방아다. 김은경 전 환경부장관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서 이중잣대를 우겨야 하는 처지가 된 청와대에 이번에는 대통령의 입인 대변인의 부동산 투기 의혹이라는 핵폭탄이 터졌다.한국갤럽이 지난달 26~28일 전국 성인 1천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문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자가 43%에 불과해 최저점을 경신했다. 부정적 평가는 46%였다. 부정평가의 이유로는 ‘경제·민생 문제 해결 부족’(36%)이 단연 으뜸이다. ‘북한 관계 치중·친북 성향’(16%)이 다음이었다.민심은 시시각각 변한다. 정치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출렁거리는 민심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분명 잘못하고 있다고, 길을 바꾸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고 외치는 숱한 곧은 소리에도 정권은 야릇한 맹신에 빠져서 오기를 부리고 있다. 오만한 권력은 스스로 힘겨울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봄이 왔으되 도무지 봄 같지 않아서 더 슬픈 민초들의 삶을 좀 돌아보라. 봄이 봄 같이 느껴지는 따뜻한 나라를 제발 좀 만들어 달라.

2019-03-31

‘유승민’과 ‘김부겸’

안재휘 논설위원바른미래당 유승민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의원은 누가 뭐래도 대구·경북(TK)의 미래정치를 걸머진 동량지재(棟梁之材)들이다. 두 사람의 역정은 사뭇 다르다. 유승민은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출신의 흔치 않은 베테랑 경제통 정치인이다. 보수정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해 박근혜 정권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개혁적 보수’의 아이콘이 돼 있다. 김부겸은 학생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정치를 시작, 3당 합당으로 보수정당 소속이 됐다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다시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다. 문재인 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취임해 일해왔고, 후임 개각 결정으로 국회 복귀를 예정하고 있다.진영논리에 함몰된 척박한 한국 정치의 지형 속에서 두 정치인은 대구 출신이라는 동향(同鄕) 말고는 외견상 도무지 닮은꼴이 아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에게서는 결정적인 순간에 엄정한 시시비비(是是非非)의 기질을 드러내는 공통점이 있다. 투철하되 조직의 모순과 싸구려로 타협하지 않는 그 기질들은 어쩌면 소중히 지켜야 할 TK의 전통적인 뚝심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바른정당 창당을 주도했던 유승민은 국민의당과 합당 이후 지휘봉을 넘겨준 뒤 긴 겨울잠을 잤다. 그러던 그가 선거구 협상 과정에서 여야 4당의 한 축으로서 취하고 있는 ‘패스트트랙’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선거법과 국회법은 지금보다 다수당의 횡포가 훨씬 심할 때도 숫자의 횡포(다수결)로 결정한 적이 없다”고 곧은 소리를 던졌다. 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행사에 불참한 문재인 대통령의 행태에 대해서는 “국군통수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다”고 비판했다. 북한의 서해 무력도발을 ‘불미스러운 충돌’이라고 표현한 국방부 장관에 대해서도 “오늘 무슨 낯으로 영웅들의 영정을 바라봤을지”라고 내리쳤다.유승민이 ‘개혁적 보수’ 기치를 내걸고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낸 바른정당의 ‘중도정치’ 실험은 안타깝게도 성공의 땅에 이르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합쳐낸 바른미래당은 오늘날 ‘보수’라는 말을 던져버린 지 오래고, ‘중도’마저 투철하게 지켜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김부겸은 늘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당 정서로 정치를 해왔지만 조금은 달랐다. 어설픈 이념에 발 묶이지 않는 합리적 사고체계를 건강하게 갖춘 정치인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그런 그가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오히려 빛이 바랬다. 장관으로서 김부겸은 전국 산지사방에서 시나브로 터지는 사건 사고 현장에 노란 점퍼 입고 부지런히 나다니는 모습 말고 지역민들에게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지역민들은 하필이면 혹독한 ‘TK 홀대’와 노골적인 ‘TK 패싱’이 자심한 문재인 정부의 행태 때문에 서운한 감정마저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던 그가 재임 막판 개각 과정에서 드러난 ‘출신지 세탁’ 논란 국면에서 청와대의 처사를 ‘치졸하다’고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국회 대정부질의 답변 도중 정부의 개각 인사 발표 방식에 대해 “늘 하던 방식이 아닌 그런 발상을 정부 내에서 누가 했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치졸하다고 생각한다”고 작심 발언했다. 개각 때 7명의 장관 후보 출신지를 기존의 출생이 아닌 고교 기준으로 분류한 편법을 겨냥한 것이다.유승민이 긴 동면에서 깨어나고, 김부겸이 국회로 돌아온다. ‘꼴통보수’의 무지막지한 싹쓸이 정치가 빚어낸 TK 정치의 폐해를 씻어내고 나아가 대한민국 정치를 진화시킬 의무가 그들에게 지워져 있다. 두 사람이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의 교집합 영역을 한껏 넓혀, 건실한 ‘중도’의 땅을 왕성하게 개척해주기를 기대한다. 빈사 상태에 빠진 TK 정치를 다시 일궈낼 막중한 책임이 두 사람의 어깨에 걸려 있다.

2019-03-24

‘핵무장론’ 필요하다

안재휘 논설위원북한은 지금 ‘핵보유국’인가, 아닌가.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최근 “올 2월 기준으로 북한은 20~30개의 핵탄두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이는 지난해 3월 추산치인 ‘핵탄두 10~20개 보유’에서 10개 나 늘어난 것이다. 주일미군사령부(USFJ)도 지난해 말 공개한 자체 제작 동영상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를 15개 이상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지금 핵보유국인가, 아닌가.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세계가 북한을 ‘실질적 핵보유국’이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대한민국만 입을 다물고 있다. 미국이 굳이 공식적으로 북한을 ‘핵보유국’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단지 핵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것이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다. 북한 핵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핵무장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장해제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의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다.워낙 예측 불가능한 집단이니 달래는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한다. 막무가내 어린아이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칼을 들고, 총을 들고, 나아가 핵미사일을 내세워 협박을 일삼는 무리에게 일방적 평화놀음이 무슨 해법이 될 수 있다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한 핏줄, 한 동포’라는 낭만적인 접근은 저들의 전술 전략에 딱 맞아떨어지는 먹잇감이다. 우리는 지금 평화로운가, 아니면 그냥 평화를 갈망하다 못해 정신줄을 놓은 것인가.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자체 핵무장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이제 핵무장을 검토할 때’라는 이름의 정책토론회에 보낸 서면 축사에서 “자체 핵무장이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폭넓은 국민 여론 수렴이 필요함과 동시에 국제사회와도 함께 고민하면서 풀어가야 할 과제”라며 “(자체 핵무장은)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는 우리 현실을 감안하면 무조건 접어놓을 수만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지난 달 전당대회 과정에서 오세훈 후보는 “전술핵 재배치를 뛰어넘어 핵 개발에 대한 실증적 논의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난 4일 한국당 조경태 최고위원은 “북한이 핵 포기 의사가 없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문재인 대통령은 자체 핵 개발이나 전술핵 주장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준표 전 대표는 전술핵 재배치와 핵무장을 촉구하는 서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문제는 집권 여당인 민주당의 시각이 여전히 정파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이해식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황 대표가 사실상 불가능한 핵무장론으로 보수층에 구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당은 당 대표까지 나서 핵무장으로 한반도와 동북아를 화약고로 만들겠다는 무지막지한 생각을 보여줬다”며 “표만 얻을 수 있다면 악마와도 손잡겠다는 수구냉전세력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했다.임진왜란 10년 전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 이이가 일본과의 전쟁을 예상하고 10만 대군 양병을 주장했다는 설이 있다. 당파에 눈이 멀었던 주류 서인들이 공연히 전쟁위험을 조장한다고 반대해 결국 실현되지는 않았다는 내용이다. 율곡의 10만 양병설이 실재했는지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소중한 교훈을 남긴다. 군사적 대비에 필요한 비용은 전쟁으로 겪게 되는 막대한 참화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점이다.비대칭 전략자산의 차원에서 보면, 한반도는 이미 균형추가 기울었다. 자주국방을 해야 한다면서 ‘미군 철수’를 부르대는 사람들이 ‘핵무장’은 절대 말하지 않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태영호 전 북한영사의 “김정은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 남북의 ‘핵 균형’ 말고는 답이 없다. 다시 묻는다. 북한은 핵보유국인가, 아닌가. 다 알면서 지금 스스로를 속이고 평화놀음에 취한 자들은 대체 무슨 속셈인가.

2019-03-17

‘역(逆)색깔론’ 망령

안재휘논설위원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관련 영상 중에서 소름 끼치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호텔 방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김정은에게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저만큼 입구 쪽에 떨어져서 두 손을 앞에 모은 채 쩔쩔매고 서 있는 북한 고위참모들의 모습이었다. ‘북미회담 결렬 직후’라고 소개된 영상은 지구촌에서 가장 혹독한 독재 군주의 나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컷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역사의 기원은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군주들은 왕권신수설에 기초하여 권력분산 자체를 신성 모독이라고 규정했다. 계몽주의자들은 ‘법의 지배’ 아래에서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새로운 사상을 피력했다.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에 영감을 준 이 사상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오늘날 우리가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로 진화됐다.평등한 참정권 등 여러 가지 기본요소가 있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표현의 자유’다. ‘표현의 자유’가 정치권력에 의해 명시적으로 억압되고 제한되는 나라가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구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는 일에 우리는 잠시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일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움직임이다. 최근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이 국회에 제출한 일명 ‘한국판 홀로코스트 방지법(반 5.18 방지법)’은 결코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 개정안은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비방 또는 허위사실 유포 행위에 대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7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부 과격한 극우 세력의 망발이나 시대착오적 ‘색깔론’ 횡포를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설익은 의혹을 단정적으로 내놓는 무례한 발언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어떤 주장이나 행동이 옳지 않다면 그 비논리와 불합리를 비판받을 공간을 허용해주면 된다. 입을 틀어막거나 잡아 가둘 생각부터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반민주적이다.1975년 3월 25일부터 1988년 12월 30일까지 대한민국 형법 제104조의2에 범죄로 규정되었던 국가모독죄(國家冒瀆罪)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로, 외환유치죄·간첩죄 등과 함께 있었던 이 법률은 여소야대가 된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 이후 12월 국회에서 삭제됐다. ‘국가모독죄’가 이슈가 된 계기는 시인 양성우의 ‘노예수첩 필화사건’이다. ‘겨울공화국’이라는 반골 시 한 편 때문에 교직을 잃은 그는 1977년 6월 발간된 일본 잡지에 유신을 비판하는 시를 실었다가 국가모독 및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헌법재판소는 2015년 10월 이 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민주주의의 진짜 반대개념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전체주의·군국주의·독재라는 정의에 동의한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지구상에 창궐했던 많은 나라가 독재정권으로 변질했다가 사라진 것은 인류사의 부끄러운 기록이다.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제아무리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어도 그 체제나 행태 어디에도 ‘민주주의’는 없다.인물이나 사건에 신성불가침의 ‘성역’이 존재한다면 그 체제의 민주주의는 하자가 있는 것이다. ‘5.18’에 대한 합리적인 문제 제기마저 원천봉쇄하려는 움직임은 자제돼야 한다. 지금은 ‘평화’라는 명분이 만들어낼 지도 모를 또 다른 ‘재갈’을 걱정해야 할 때다. 양성우가 시 ‘겨울공화국’에서 묘사하듯이, ‘다소곳이 거짓말에 귀 기울이며/뼈 가르는 채찍질을 견뎌내야 하는’ 노예나 머슴이나 허수아비로 살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저 서슬 퍼런 ‘역(逆)색깔론’ 망령부터 하루빨리 물리쳐야 한다.

2019-03-10

황교안, 미더운 ‘대안야당’ 구축하길

안재휘 논설위원자유한국당 ‘황교안 체제’ 출범을 놓고 ‘탄핵 궤멸’ 이후 처음으로 ‘오너 당 대표’가 등장했다는 평가에 동의한다. 경선 과정에서 드러난 황 대표의 이미지는 비교적 강단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그를 헐뜯으려는 진보진영 논객들은 ‘탄핵 총리’, ‘두루뭉술한 화법의 기회주의자’에 심지어는 ‘두드러기를 이유로 군대를 슬그머니 빠진 사람’이라며 까마득한 병역면제 이력까지 들쑤시지만, 그는 생각보다 단단하다.한국당 전당대회 자체는 아쉽다. 기대했던 국가미래 청사진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없었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폐허에서 의연히 일어설 혁신의 깃발이 무성히 나부끼길 기대했던 다수의 기대에는 한참 못 미쳤다는 게 냉정한 관전평이다. 또다시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진 데 대한 서운함은 예상보다 짙다.일단 ‘범보수 통합’을 외친 황교안 후보가 ‘중도 외연확장’을 부르짖은 오세훈 후보, ‘강성야당’을 주창한 김진태 후보를 넉넉한 표차로 눌렀다는 점에서 자유한국당이 나아갈 대로(大路)는 일단 ‘범보수 통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투표결과에 나타난 민심의 함의를 가볍게 읽어서는 안 된다. 일반국민 여론조사 득표내용을 살펴보면 그 뜻은 명확하게 드러난다.황교안은 최종 50% 득표율로 당 대표에 당선됐다. 오세훈이 31.1%, 김진태는 18.9%를 얻었다. 여기에서 30%가 반영되는 일반국민 여론조사에서 오세훈이 50.2%를 얻어 37.7%에 그친 황교안은 물론 12.1%를 얻은 김진태를 압도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일반민심은 한국당의 ‘중도 외연확장’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정직하게 읽어야 한다.‘중도 외연확장’은 ‘범보수 통합’의 가치와 어긋나는 개념이 아니다. ‘중도 외연확장’은 ‘범보수 통합’의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매듭이요 접착제일 수 있다. 민심이 뒷받침하고 있는 이 같은 환경은 철저하게 국가와 민생의 질을 개선할 ‘미래 정책’을 펼쳐내야 할 당위성으로 연결된다.김진태의 꼴등은 어설픈 선명성만으로는 ‘범보수 통합’의 기저 구축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증명한다. ‘문 대통령 모두까기’ 합창만으로는 흩어져 있는 ‘보수 민심’을 결코 하나로 모아낼 수 없다. 그렇게 해서는 미래를 책임질 미더운 정치세력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현실을 깊이 깨우쳐야 한다.원래 진보란 ‘자유’를 으뜸철학으로 놓고, ‘국가주의’를 해체하는 사상에서 출발해야 맞다.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보수가 ‘자유’를 말하고 진보가 ‘국가주의’에 집착하는 한국의 정치 현상에 고개를 갸웃댄다. 평등한 세상을 만든다며 강력한 ‘국가주의(전체주의)’를 동원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은 모조리 민중의 피맺힌 한만 남기고 무덤 속으로 처박혔다. 그 역사를 애써 외면한, 넋 나간 외눈박이 앵무새들의 노래가 난무하는 일은 참담하다.황교안 대표는 자유·실용·경쟁·개방·통합 등 보수의 아름다운 이정표들을 새롭게 세워내야 한다. 극단보다는 ‘중도’, 비난을 위한 비난보다는 ‘대안’, 비관보다는 ‘낙관’, 부정보다는 ‘긍정’, 안주보다는 ‘변화와 도전’을 추구하는 참보수의 모습을 일궈내야 한다. 특히 집권 정부여당에 대한 티 뜯기 일변도에서 벗어나 신실한 대안을 꾸준히 제시하면서 감동적인 정책들을 쏟아내는 대안야당 전통을 세워내는 새로운 역사를 써야 한다.온종일 정부여당 헐뜯는 형용사만 연구하다가 건듯하면 자극적인 플래카드 들고 길거리에 나서는 일로 할 일을 다 한 듯이 우쭐대는 야당 노릇에 국민은 넌더리가 나 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는 민심의 목마름에 정확하게 답해야 한다. 그것만이 ‘중도 외연확장’의 소명으로 ‘범보수 통합’의 긍극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첩경이다. 황교안의 제1야당은 달라야 한다.

2019-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