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김정은’에게 당한 걸까

안재휘 논설위원상상하기 싫지만, 버릇 나쁜 어린아이가 날카로운 면도칼을 들고 휘두르며 심하게 생떼를 쓴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쓸 수 있는 수단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달래고 꾀어서 칼을 내려놓게 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꾸짖으면서 힘으로 빼앗는 수단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빠르고 효과적일 수 있으나 위험성이 높다. 그렇다 보니 가능한 첫 번째 방법을 써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일단 더 순리적으로 보이기 마련이다.한반도의 안보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 ‘연말까지’라며 일방적으로 협상 시한을 정한 북한이 모종의 도발프로그램을 획책하고 있는 징후가 뚜렷하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김정은을 향해 비핵화 협상 이후 사용을 중단했던 ‘로켓맨’이라는 조롱 호칭을 2년 만에 또다시 꺼내 들었다. 북한의 북미 협상 책임자인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담화를 통해 즉각 ‘늙다리 망녕(망령)’이라며 신랄하게 비난했다.북한이 고체 연료를 쓰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엔진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분석이 나왔다.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미사일 발사대에서 장거리 미사일 발사 준비 징후로 추정되는 상황이 미국 상업위성에 잡혔다는 것이다. 미국의 첨단 정찰기들이 한반도 주변을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다.전문가들이 일제히 한반도의 상황을 ‘긴박하고 엄중하다’고 분석한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북한이 모종의 도발을 감행할 공산이 크다는 예측마저 나온다. 그런데도 외눈박이 평화론자들은 여전히 이 모든 정황을 ‘협상용’으로 해석한다. 남한을 향해 거듭되는 북한의 위협에도 “북한은 남한을 향해 절대로 핵무기를 쓰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맹신을 방패막이로 내세운다. 김정은으로부터 그런 철석같은 약속을 받은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작금의 한반도 ‘긴장 고조’가 정말로 동트기 전 일시적인 어둠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만에 하나 북한 김정은이 수준 높은 교언영색 위장평화 전술로 핵무기와 ICBM 기술개발의 시간을 넉넉하게 확보한 것이라면 정말 큰 일이다. 한미를 비롯한 전 세계가 2년 동안이나 농락당한 셈이라면 어떻게 되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대북제재위원회는 지난 9월 전문가 패널보고서에서 “북한이 함흥 미사일 공장 등에서 활발하게 고체 연료 생산과 연구개발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정신 차려야 한다. 우리 위정자들 누구도 ‘ICBM만 아니면 괜찮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에 대해 북한은 이미 가차 없는 ‘핵보유국’이고, 남한 전역은 핵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터무니없는 김정은의 ‘선의’와 미국의 ‘핵우산’만 믿고 온 국민을 어설픈 ‘한반도 평화’ 착시에 빠져 살게 할 참인가. ‘자체핵무장’ 필요성을 명확하게 말해야 할 시점이다. 미국은 철저하게 ‘미국’ 편일 따름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김정은은 ‘햇볕정책’ 따위의 유화책으로 달래고 꾄다고 말을 들을 철부지가 아닌 게 분명하다.

2019-12-08

구멍난 ‘민주주의’

안재휘 논설위원도덕경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일도 그 시작은 미세하다(天下大事必作於細)’는 말이 나온다. 돌아보면 세상의 그 어떤 큰일도 시작은 아주 작은 조짐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굵직한 정치적 사변(事變)들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이 제아무리 틀어막아도 끝내 봉쇄되지 않고 진실이 기어이 밝혀지고 만 역사와 교훈은 부지기수다. 문재인 정권의 구멍 난 ‘민주주의’가 조금씩 추악한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몇 달 동안 나라를 온통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조국 대란’의 여진이 미처 잦아들기도 전에 ‘유재수’ 전 부산시 정무부시장 뇌물사건과 김기현 전 울산시장 ‘청와대 하명수사’ 의혹이 불길을 활활 키워가고 있다. 많은 이들이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과는 또 다른 차원의 권력 일탈을 의심한다.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유재수에 대한 뒷말은 혀를 차게 만든다. 문재인 대통령을 ‘재인이 형’이라고 불렀다는 소문마저 나도는 그의 위세가 어디까지였는지는 이제 낱낱이 밝혀질 것이다. 밝혀진 그의 부정행위는 거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수준이다.그러나 정말 심각한 것은 지난해 지방선거 직전에 벌어진 야당 후보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공작 논란이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하명수사 의혹은 파장을 가늠키 어렵다. 백원우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이 넘겨준 김기현 울산시장의 비리 첩보가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을 통해 경찰청을 거쳐 황운하 울산지방경찰청장에게 넘어간다.황운하는 김기현이 자유한국당으로부터 공천을 받던 그 날 전격적으로 울산시청을 압수수색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인 송철호 후보를 10%포인트 이상 앞서 있던 김기현은 그 시점을 계기로 판이 뒤집혀 선거에서 낙선한다. 고향인 대전지방경찰청장으로 자리를 옮긴 황운하는 내년 총선 출마를 위해 명예퇴직을 신청하기도 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 겹치고 또 겹치고 있다.의혹은 백원우가 민정비서관 시절 ‘비선 특감반’을 별동대로 운영하면서 거대한 정치공작을 지휘한 것이 아니냐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백원우는 “경찰로부터 수사내용을 보고 받은 적 없다”고 뻗댄다. 하지만 검찰은 청와대가 선거 이전에 경찰로부터 8차례나 보고를 받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백원우는 현재의 ‘수사 시점’을 거론하며 검찰을 겨냥했다. 그러나 그가 ‘수사 시점’을 시비하려면, 울산시청 압수수색이 왜 하필이면 김기현의 공천 결정일이었는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경찰 수사를 받다가 자살한 조진래 창원시장 후보를 비롯해 경남의 야당 출마자 8명이 경찰 수사를 받은 ‘시점’도 함께 설명이 돼야 마땅하다.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범죄 중에 선거 공작보다도 더 추악한 것은 없다. 이런 험악한 의혹은 결코 그냥 넘어갈 성질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무참히 펑크내고도 무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든 합리적 의혹들은 명명백백 밝혀져야 한다. ‘천 리의 둑도 개미구멍 하나로 무너진다(千里之堤 潰於蟻穴)’는 한비자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2019-12-01

‘당랑거사(螳螂居士)’ 짝사랑

안재휘 논설위원춘추시대 ‘장공’이라는 제(齊)나라 왕족이 사냥터에 가고 있었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왕족의 행차에 무례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길가에 멀찌감치 물러섰는데, 웬 낯선 벌레 한 마리가 길 한가운데에서 앞발을 치켜들고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들었다. 사마귀였다. 장공은 “저 벌레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용감한 장군이었을 것”이라면서 사마귀를 피해 가게 했다.‘사마귀가 앞발을 쳐들고 수레를 막는다’라는 뜻의 ‘당랑거철(螳螂拒轍)’ 고사다.국제사회의 변화와 상식을 거부한 채 외톨이 길을 가고 있는 북한의 존재 방식을 놓고 사람들은 당랑거철을 떠올린다. 한미동맹이라는 형태의 편짜기 지혜로 놀라운 번영을 이룬 한국이 미국의 변심으로 곤혹스러운 번뇌 국면에 접어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방위비 분담금을 5배나 올리자고 제안하면서 전천후압박을 시작했다.문재인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김정은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 자세를 줄기차게 견지하고 있다. 우리가 소원하는 ‘북한 비핵화’는 단 1㎜도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전 생방송으로 진행한 타운홀 미팅에서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는 제가 보람을 많이 느끼고 있는 분야”라고 표현해 국민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도대체 뭐를 얼마나 이뤘다고 보람을 느낀다는 것인지.동료 선원 16명을 살해한 혐의로 탈북 어민 2명을 우리 정부가 강제북송한 사건에 대한 여파가 길다. 북한인권탈북단체총연합 등 국내외 30여 인권단체가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을 비롯한 고위 관계자 4명을 ICC(국제형사재판소)에 고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의 강제북송 조치는 헌법과 대법원 판례, 국제법에 정면으로 어긋난다는 비판이 많다.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초청 친서를 보낸 날짜가 11월 5일이라고 북한이 공개했다. 바로 그날이 정부가 동해로 넘어온 탈북 어민 2명을 추방하겠다고 북에 서면으로 통보한 날이란다.‘김정은 초청장’에 ‘어민 북송문’을 선물꾸러미로 동봉한 셈이라는 의혹과 논란이 증폭 일로다.아무리 살펴보아도 문재인 정권은 북한과 잘해보려고 ‘평화’ 도박에 ‘짝사랑’을 몽땅 걸었다. 북한은 “(문 대통령) 친서 이후에도 (남측은) 몇 차례나 특사 방문을 허락해달라고 청했다”고 까발렸다. “반성과 죄스러운 마음으로 삼고초려(三顧草廬)해도 모자랄 판국” 운운하며 아랫사람에게 훈계하듯 하는 그들의 패악질은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는다.미국은 변했다. 이제는 미국이 우리를 여전히 짝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북한을 계속 짝사랑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 이 판에 북한을 따라 하듯이, ‘미군 철수’ 피켓을 들고 당랑거사(螳螂居士 사마귀) 놀음을 하자고 대드는 것은 더더욱 곤란하다. 북한이 천사로 변신하기를 고대하며 걸고 있는 문재인 정부의 이 지독한 ‘짝사랑 도박’은 멈춰야 한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게 아니다.

2019-11-24

풍전등화(風前燈火)의 ‘한미동맹’

안재휘 논설위원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를 방문한 미국 마크 에스퍼 국방부 장관의 지소미아(GSOMIA·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결정 중단요청을 일단 거절했다.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지소미아가 오는 23일 실제로 종료될 경우 “역내 안보와 한미동맹에 심각한 타격을 줄 것”이라고 일제히 경고했다는 미국의 소리(VOA) 뉴스가 나왔다. 엉뚱하게도, 한일 간 무역갈등이 한미동맹의 균열로 번질 수 있는 엄중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얘기다.한미동맹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는 상당히 복합적이다. 핵심 변수는 북한 비핵화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느냐다. 우려했던 대로 미국은 북한이 ICBM(대륙간 탄도탄) 개발 중단 약속을 지키는 한 ‘북한 비핵화’을 서두르지 않을 태세임이 드러나고 있다. 터무니없는 수치를 내밀고 있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주한미군 주둔비용’ 청구서도 심각한 문제다.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나타난 현상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전문가들은 소위 ‘유동성 딜레마’라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던 브레튼우즈체제(Bretton Woods system)의 완전한 붕괴 현상부터 언급한다. 국제무역의 확대, 고용 및 실질소득증대, 외환의 안정과 자유화 등을 달성할 것을 목적으로 1944년 7월 체결된 브레튼우즈협정은 1971년 닉슨 대통령의 ‘달러화 금 태환 정지선언’으로 일단 무너졌고,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우선주의(American First) 정책으로 완전히 해체되고 있다는 설명이다.브레튼우즈체제는 원래 소련에 맞서는 안보동맹 체제가 그 본질이었다. 미국이 안보를 주도하는 대신 동맹국들에게 경제적 이익을 안겨준다는 식이었고, 오랜 기간 미국은 엄청난 적자를 감수했다. 무역적자는 2017년 기준 무려 5천700억 달러에 달했다. 중국도 1970년 무렵 이 체제에 편입되어 미국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아 경제도약을 달성했다.미국의 국제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Peter Zeihan)은 저서 ‘셰일 혁명과 미국 없는 세계’에서 “셰일가스 개발로 에너지 자급의 꿈을 이룬 미국은 이제 세계질서 유지에 관심이 없다. 미국의 동맹은 각자도생해야 한다”고 썼다.그는 며칠 전 한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속내는 “ICBM만 아니면 상관없다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토로했다.결과적으로 북핵 위협은 오로지 대한민국만의 존망(存亡) 문제가 됐다는 얘기다.미국은 변했다. 우리가 알던 미국은 없다. 미국이 변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대응해야 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은 헛똑똑이 반미(反美) 급진세력들이 국민선동의 빌미로 삼는 일이다. 미국이 이제 출혈(出血)관리를 안 하겠다는 것뿐이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세계 최강의 국가다.분명한 것은 이제 미군 없는 국가안보를 생각할 때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자체 ‘핵무장’이 절실해졌다. 픙전등화(風前燈火)의 ‘한미동맹’앞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2019-11-17

‘칼춤’ 주의보

안재휘 논설위원조선 시대 당쟁사의 이면에는 정적을 탄압하고 제거하기 위한 파당 정치꾼들의 무시무시한 ‘음모’와 ‘조작’이 난무한다. 그 중에도 중종(中宗) 14년 훈구파들이 신진사류 조광조(趙光祖) 일당을 죽일 목적으로 일으킨 기묘사화(己卯士禍)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사는 대궐 뜰의 나뭇잎에 꿀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하여 사단을 만들었다고 적고 있다. 이 만화 같은 이야기는 오늘날 트집거리를 만들기 위한 조작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적의 집에 무기들 몰래 갖다 놓고 들이쳐서 ‘반란죄’를 뒤집어씌우기도 했다는 야사의 틈새를 보면 사색당파 권력다툼의 살풍경은 상상을 초월한다.김대업(金大業)의 이회창 아들 병역 비리 조작사건인 ‘병풍(兵風)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악행이 정권의 향배를 가르는데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계량하기 어렵지만, 그는 승자의 편에 선 추악한 죄를 저지르고도 고작 1년 10개월의 징역을 살았을 따름이다. 김대업은 2016년 강원랜드 등의 CCTV 교체 사업권을 따주겠다며 2억5천만 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필리핀으로 달아났다가 얼마 전 체포돼 송환됐다.‘조국 대란’을 넘어서자마자 정국은 급속도로 내년 4월로 예정된 총선 격전으로 전환되고 있다. 집권세력은 쓰레기통에서 대략 두 개의 부비트랩을 끄집어냈다. 그 첫 번째는 지난 2017년 초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정국에서 논의된 ‘계엄령 검토’에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연루되지 않았느냐는 의혹이다. 총대를 멘 인물은 진보 시민단체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이다.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은 촛불 정국 계엄령 문건에 대해 “청와대가 가짜 최종본 문건으로 국민을 우롱하고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군인권센터 임태훈은 즉각 하 의원이 주장하는 문건을 ‘위·변조된 문건’이라고 반박했다.한편, 검찰은 더불어민주당의 ‘세월호 재수사’ 요구에 특별수사단을 만들어 다시 수사하겠다고 화답했다.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등 책임자 122명을 오는 15일 고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제1야당을 이끄는 황교안 대표를 겨냥한 총공세가 시작된 것이다.이주영 자유한국당 의원은 군인권센터가 제기한 ‘기무사령부 계엄문건 황교안 관여’ 의혹에 대해 “제1야당 대표를 흠집 낸 최악의 정치공작 작태”라면서 “제2의 김대업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역사는 돌고 돌아 또다시 한바탕 정치보복의 망나니 ‘칼춤’을 예고하고 있다. 온갖 실정(失政)으로 지탄받는 문재인 정권이 5년이 넘은 ‘세월호’ 화두를 여전히 동아줄로 여기는 모습은 만감을 부른다. 민주당 이철희 의원의 말처럼 이 ‘낡은 정치 문법’에 목을 매는 저질정치는 참으로 끈질기다. 여러 차례의 실험에도 나뭇잎 꿀물 글씨 ‘주초위왕(走肖爲王)’을 갉아먹는 벌레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2019-11-10

뻐꾸기 알 ‘손학규’

안재휘 논설위원뻐꾸기는 자기 둥지에 알을 낳지 않고 오목눈이나 노랑때까치 등 다른 새의 둥지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이를 ‘탁란(托卵)’이라고 하는데, 다른 새의 둥지에 들어가 부화한 뻐꾸기 새끼는 어미 새의 진짜 알이나 갓 태어난 새끼들을 둥지 밖으로 한사코 밀어내어 제거한다. 자연 다큐 프로그램에서 그 잔인한 얌체 짓 장면을 보노라면 부아가 저절로 치밀어오른다. 참으로 잔혹한 생태계 현실의 하나다.지난 대선과 총선을 반추하노라면 떠오르는 중대한 시대적 변화 하나가 있다. 만년 드잡이질만 하는 청백전 정치에 대한 국민의 피로감이 극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다양해져서 무지개 스펙트럼을 형성한 게 언제인데, 여전히 민심을 두 줄로 세우려는 억지는 이제 청산돼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튼실한 제3 중도정당에 대한 갈망은 강하다.그래서 생겨난 것이 유승민의 바른정당, 안철수의 국민의당이었다. 안타깝게도 지난 대선에서 두 사람은 성공하지 못했다. 중도 안에서 중도좌파, 중도우파를 아우를만한 정치철학을 창출해내지 못하고 분열적 정치 공학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뒤늦게나마 두 당을 합쳐서 ‘바른미래당’이라는 새로운 반성의 몸짓을 보였다.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호남 민심’을 기반으로 대붕(大鵬)의 꿈에 취해 살던 손학규라는 또 다른 야심가가 사령탑을 장악했다. 하지만 바른미래당은 건강한 중도정당의 구축에 이르지 못했다. 그 실패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손학규식 정치의 실패를 뜻한다. 적어도 20%는 훌쩍 넘겨야 할 지지율이 투철한 좌파 정당을 표방하는 정의당에도 걸핏하면 뒤처지는 신세다.‘죽어도 개혁 못 하는’ 보수 자유한국당과 함께, 바른미래당은 ‘죽어도 패 갈라 싸우는’ 정당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 그 핵심에 손학규의 흉계 내지는 오산(誤算)이 작용한다. 손학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정치 인생 마지막 승부수를 건 듯하다. 무슨 추한 꼴을 당하더라도 그것만 이루면 성공할 것이라는 자기 확신에 빠진 모습이다.그의 잘못은 첫째 온 국민의 여망인 제대로 된 중도정당의 꿈을 박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비판하는 척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문재인 정권의 예하 부대장처럼 굴어온 그의 언행이 문제다. 두 번째는 이 나라 민주화 시계를 거꾸로 돌릴지도 모르는 ‘공수처(공직자비리수사처)’를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바꿔 먹으려는 행태다. 아니, 어쩌면 원론적 취지와 달리 ‘연동형 비례대표제’ 자체가 이 나라 보수와 중도정치를 모두 말살할 수도 있다.손학규는 그 화려한 정치 이력의 피날레를 이렇게 끌고 가서는 안 된다. 남의 둥지에 들어와 진짜 주인인 알들을 둥지에서 밀어내어 제거하는 뻐꾸기 알처럼 행세하는 그 모습은 온 국민의 절망거리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때가 되면 어미 뻐꾸기가 부르는 곳으로 미련 없이 날아갈 그 무정한 뻐꾸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한때 한국 정치의 희망이던 손학규가 이래서는 안 된다.

2019-11-03

‘공수처’ 법안의 암수(暗數)

안재휘 논설위원북한의 사법체계는 ‘인민재판’ 방식이다. 1946년 12월 1일부터 현재까지 북한 전역에서 시행되고 있는 ‘인민재판’은 ‘공개된 장소에서 일반 군중들을 모아놓고’ 한다는 차원에서 외견상 상당 부분 요건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판의 핵심인 재판부 구성이 문제다. 조선로동당이 지명한 재판부가 재판을 진행하기 때문에 도무지 문명사회가 추구하는 ‘공정한’ 재판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문재인 정권이 시작되면서 악착같이 밀어붙인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의 교묘한 정치보복극은 소위 ‘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다. ‘진보 시민단체’가 장악한 공기관들의 ‘위원회’는 이미 태동에서부터 공정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온갖 기밀서류들을 다 까발리며 정적 연루자들의 적폐목록을 찾아내어 언론에 ‘죽일 놈’이라고 공표하며 검경에 넘겨 수사하게 하는 인민재판식 타작 놀음을 해왔다.‘조국 낙마’ 이후 집권세력은 ‘공수처(공직자비리수사처)’ 가속 페달을 힘껏 밟고 있다. 엊그제 친여세력 집회의 손팻말도 ‘설치하라 공수처’와 함께 황교안 한국당 대표를 겨냥한 ‘내란음모 계엄령 특검’이 새롭게 등장했다.이제 우리는 ‘검찰 개혁’이라는 흐드러진 구호와 함께 여권(與圈)이 조국 블랙홀을 넘어 외치고 있는 ‘공수처’에 대해서 깊이 따져보아야 할 때다.패스트트랙 급행열차에 올라가 있는 민주당의 법안은 어쨌든 공수처장을 대통령이 뽑도록 하고 있다. 추천위원 7명 중 최소 6명의 찬성으로 2명을 추천하도록 하는 등 꼼수 장치를 붙이고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더욱이 공수처 검사의 절반 이상을 비(非)검사 출신으로 충원한다는 조항에 엄청난 마수(魔手)가 숨어 있다.‘적폐 청산’ 토끼몰이처럼 민변, 좌파 시민운동가들을 동원해 ‘민변 검찰청’ 혹은 ‘대통령 호위무사단’으로 만들자고 들면 식은 죽 먹기다. 더욱이 ‘수사권·기소권 분리’를 ‘검찰 개혁’의 본질로 부르대던 사람들이 공수처에는 다 주자고 하니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수상하다는 것이다. 잘라 말하면, 독립성이 확실히 보장되지 않는 한 대통령을 초헌법적인 최고의 사냥개들을 거느리는 황제로 만들려는 음모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무엇보다도 판사 3천 명, 검사 2천 명과 경찰 간부에 대한 기소권을 보장하는 ‘공수처’ 법안은 결코 허투루 다룰 일이 아니다. 나라 말아먹는 공직자들의 부패 비리를 발본색원한다는데 싫어할 국민이 누가 있을까. 그러나 이렇게 추악한 ‘인민재판’을 획책해서는 안 된다. ‘검찰 개혁’이 문제의 본질이라면, 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검찰의 정치적 독립’ 장치를 만들어 놓고, 수사권·기소권을 조정하면 된다. 모사꾼들의 철저한 기획 아래 지지자들을 길거리에 내세워 몰아붙이는 ‘공수처’는 중국 역사의 오욕으로 기록된 ‘홍위병’ 소동을 떠오르게 한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희귀한 ‘공수처’ 법안은 암수(暗數)가 다 제거될 때까지 더 연구되는 게 옳다.

2019-10-27

‘입비뚤이들’의 참말

안재휘 논설위원“지금 공무원들은 나라가 망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겠다는 심사다. 이는 내가 배웠던 충신(忠臣)의 자세가 아니다” ‘조국 대란’ 광풍에 묻혀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얼마 전 국장급 공무원 한 사람이 파면됐다. 한민호 전 국무총리소속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사무처장 이야기다. 그의 핵심 파면 사유는 ‘근무시간에 페이스북에 VIP(대통령)와 정부를 원색적으로 비판했다’는 것이었다.한 전 사무처장의 이력은 특이하다. 그는 대학 시절 운동권에 몸담았다가 무기정학을 당해 간신히 졸업했다. 고등학교에서 한동안 역사교사를 하다가 ‘공산주의를 하려면 독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으로 전향한 뒤 1994년 행정고시를 거쳐 문체부 공무원이 된 인물이다. 재작년 문체부 노조 투표에서 ‘바람직한 관리자’ 부문 1등으로 뽑혔던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조국 대란’의 여파 속에 집권세력 안에서도 소위 ‘소신 발언’이라고 불리는 딴소리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정성호 민주당 의원은 국회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정치인들이 자기 정당의 정파적 이익에 부합되면 ‘검찰이 잘했다’ 칭찬하고, 우리 정파에 불리한 사법 절차가 진행되면 비방과 외압을 행사한다”면서 “그런 행태야말로 사법농단”이라고 싸잡아 비판했다.같은 당 이철희 의원의 튀는 발언도 눈에 띈다. 그는 서울고법·서울중앙지법 국감장에서 지난 2017년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구속영장 기각 당시를 거론하며 “2년 만에 여야가 바뀌었다. 이게 뭐냐. 창피하다”면서 “부끄러워 법사위원 못하겠고, 국회의원 못 하겠다”고 한탄했다. 이 의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참회록을 쓰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정부·여당이 밀어붙이고 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대해 쓴소리를 내놓은 금태섭 민주당 의원의 소신 발언 또한 눈길을 끈다. 금 의원은 “전 세계 어디에도 공수처 유사 기관은 없다”고 상기하며 “수사·기소 분리가 글로벌 스탠다드이고 검찰개혁 방안도 분리하려는 것인데, 왜 공수처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가져야 하냐”고 지적했다. 그는 작금 민주당 지지세력 안에서 영락없는 ‘미운 오리 새끼’ 신세다.‘조국 대란’ 한복판에서 하나의 변곡점을 형성했던 인물인 김경율 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회계사)의 말은 더욱 신랄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조국 사태는 무능한 진보가 부패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고 진단하고 “진보지식인들의 무비판적 태도는 단순한 ‘분열’이 아니라 ‘몰락’”이라고 단정했다.따지고 보면 지금 뒤늦게 ‘바른말’에 나서는 집권세력 인사들은 하나같이 나라를 이 꼴로 만드는데 앞장선 입비뚤이 궤변론자들이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을 바로 하랬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가증스럽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참말을 하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파면당한 한민호 전 사무처장의 항변이 여운을 남긴다. “내가 페북질로 징계를 받아야 한다면 ‘죽창가’ 등 폭풍 페북질을 하던 조국은 왜 괜찮은가.”

2019-10-20

‘검찰 개혁’ 죽이기

안재휘 논설위원승불요곡(繩不撓曲)이라는 말이 있다. 한비자(韓非子) 유도(有度) 편에 나오는 이 말은 ‘먹줄은 나무가 굽었다 하여 같이 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이란 먹줄과 같은 효능을 갖고 있다. 곧은 길이 어디인지, 우리가 지켜야 할 경계가 어디인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불가침의 기준이다. ‘법치’란 바로 먹줄의 기능을 존중하는 데서 출발한다. 시대 상황이 제아무리 휘었다 한들 절대 휜 줄을 치지 않는 먹줄의 가치는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조국 대란’에 휘둘린 지 석 달째 접어들면서 대한민국은 ‘궤변 공화국’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조국의 문제는 ‘진보-보수’가 아니라 ‘정의-불의’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절대다수다. 아무리 생각해도 논리적 연결성을 찾아내기 힘든 대목은 ‘조국 수호=검찰 개혁’이라는 구호다. 불법과 편법이 뒤죽박죽 엉킨 인생을 살아온 조국 일가의 온존이 어찌 검찰 개혁과 등치(等値)되는 개념인가.최고 수준의 교졸한 궤변론자로 유명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치지도 않고 서툰 훈수질을 멈추지 않고 있다. 조국 장관 딸 조민의 인턴 수료증 위조문제가 첨예하게 대두될 당시에 동양대 총장과 통화를 해 물의를 빚은 그는 대뜸 ‘유튜브 기자로서 취재한 것’이라고 세상을 희롱했다. 정경심 교수의 증거인멸을 ‘증거보존 행위’라고 강변해 또 한 번 그 진영주의 논법의 천박성을 드러낸 바 있다.이번에는 법무부와 대검찰청이 특수부를 반부패수사부로 바꿔 서울중앙지검을 비롯한 3곳에만 최소한으로 설치하기로 합의한 검찰개혁안을 물고 늘어졌다. 유시민은 이를 놓고 “영업 안 되는 데는 문 닫고, 잘 되는 곳은 간판만 바꿔서 계속 가면 신장개업이지 없어지는 게 아니다”라고 비아냥댔다.이쯤 되면 여권(與圈)이 추구하고 있는 ‘검찰 개혁’이 곧 ‘검찰의 무력화(無力化)’임을 단박에 알게 한다. ‘권력의 사냥개’였던 검찰을 ‘권력의 똥개’로 만들자는 흉계인 것이다.조국 장관이 내놓은 검찰개혁안도 마찬가지다. 법무부의 ‘인사권·감찰권’ 강화로 검찰을 통제하겠다는 그의 구상은 분명하게 ‘검찰 개혁’의 역방향이다. 검찰의 1차 감찰권을 법무부가 빼앗겠다는 방침은 ‘검찰독립’을 현저히 헤쳐 대통령의 ‘검찰 장악’을 더욱 강화할 게 틀림없는 개악(改惡)임이 분명하다. 서초동에 모여서 펼치는 친여세력 힘자랑의 목표가 ‘검찰 무력화’라면 이건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저질 선동정치에 불과하다.‘검찰개혁안’의 제1조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 중에도 상식이다. ‘검찰 개혁’이라는 구호를 앞세워서 ‘검찰 개혁’을 완전히 죽이고 있는 이 역설을 어찌 헤쳐가야 하나. 굽은 나무에 굽은 먹줄을 치려는 이 음험한 정치적 먹구름은 대체 어떻게 걷어내야 할 것인가.엉터리 궤변에 동조해 ‘조국 수호=검찰 개혁’ 팻말을 들고 길거리에 나가 말도 안 되는 구호를 외치며, 자신이 무슨 모순을 빚고 있는지도 모르는 무수한 편견의 노예들이 딱하기 그지없다.

2019-10-13

‘진영의식’ 포로들의 백병전

안재휘 논설위원‘내로남불’이라는 용어는 1990년대 정치권에서 생산돼 현재까지 오프라인과 온라인에서 활발히 쓰이고 있는 말이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줄인 이 말은 똑같은 상황에서 자신과 타인을 다른 기준으로 단정하는 이중 잣대를 지닌, 남에게는 가혹하고 자신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을 뜻한다. ‘나는 옳고 다른 이는 그르다’라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 ‘我是他非(아시타비)’보다도 한층 더 비틀린 모순을 일컫는다.만 두 달을 넘기고 있는 ‘조국 대전’이 마침내 백병전 차원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 논란은 원래부터 좌우 이념대결의 쟁점거리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고위공직자 검증과정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수위 높은 파열음 정도의 잡음이었다. 그러나 ‘조국’을 지키려는 세력은 마치 ‘조국’이 무너지면 자신들의 권력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으로 행동했고, 마침내 온 국민을 진흙탕 싸움으로 끌어들였다.백병전에서는 옳고 그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죽이느냐 죽느냐의 이분법만 남는다. 뒤엉켜서 상대방을 죽일 생각에만 빠져들게 된다. 확증편향 사고체계 아래에서 마침내 이성은 마비되고 투철한 ‘내로남불’의식에 사로잡혀 앞만 보고 무한 작동하는 강시처럼 행동하게 된다. 길거리로 몰려나와 ‘맹종하는 존재감’을 과시하는 선동의 노예들이 부르는 무궁동(無窮動) 돌림노래가 짜증을 부른다. 거듭되는 그들의 백해무익 집회는 소름 끼치는 폭류다.‘조국 수호’를 부르대는 이들 사이에서 이미 피의자 정경심의 컴퓨터 반출은 ‘증거인멸’이 아닌 ‘증거 보전’으로 둔갑했다. 검찰의 압수수색은 ‘인권 탄압’이 됐으며, 연구논문 제1저자 허위등재와 표창장 위조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돼버렸다. ‘살아있는 권력도 엄정히 수사하라’고 주문했던 대통령은 불과 두 달 만에 말을 바꿔 스스로 혼란한 진영대전의 진앙지임을 증명했다. 동원정치의 마법에 취한 채 야만의 시대로 퇴행하는, 정말로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희한한 나라를 경험하게 되는가.김경율 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은 참여연대의 침묵에 반발하여 SNS에 “시민사회에서 입네하는 교수, 변호사 및 기타 전문가 생퀴들아. 권력 예비군, 어공 예비군 생퀴들아. 더럽다 지저분한 놈들아”라고 울분을 토했다. 경실련 정책위원장인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도 “대중을 동원하는 경쟁은 그만두고 조 장관이 자진 사퇴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고언을 내놨다.유치한 동원정치 숫자놀음에 빠진 세력들의 편집적 행태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요소는 자기들끼리만 소통하고, 다른 말은 도무지 듣지 않는 의식구조다. 무엇보다도, 선악 개념은 물론 옳고 그름에 대한 이성마저 일제히 사라진 집권여당의 ‘선동정치’ 행태가 문제의 핵심이다. 아시타비, 내로남불의 혼돈을 획책하는 추악한 횡포가 역겹다. 정의-불의의 변별력마저 모조리 거세된 빛바랜 이념의 포로들이 펼치는, 이 더러운 합창은 하루빨리 중단돼야 한다. 파멸적 행군을 멈출 양보의 리더십은 이 땅에 정녕 없는 것인가.

2019-10-06

‘사냥개’ 딜레마

안재휘 논설위원지난 1925년 소설가 박영희(朴英熙)가 발표한 ‘사냥개(원제는 산양개)’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섬세한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자린고비 백만장자 정호가 양심의 가책과 연결된 연상작용에서 점증한 몽환적 공포를 견디지 못하고 한밤중 금고를 들고 집을 나섰다가 굶주린 자신의 사냥개에게 물려 죽는다는 내용이다. 박영희는 이 작품을 쓴 이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조직에 가담했다.대한민국이 온통 ‘사냥개’ 딜레마에 빠졌다. 날마다 새로운 역사를 써온 ‘조국 논란’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비화하고 있다.문제의 핵심은 조국 일가의 놀라운 편법 또는 불법 의혹인데 순식간에 친문(親 문재인)대 반문(反 문재인) 대전(大戰)으로 변질돼 버렸다. 대통령이 검찰에 ‘성찰하라’고 한 말씀 하자 동원된 친문들이 서초동에 모여 실력행사를 벌였다.많은 사람이 “문재인은 왜?”, 또는 “윤석열은 왜?”하고 의문부호를 붙인다. 멋진 진보지식인으로만 비치던 조국은 언행이 도무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라는게 낱낱이 드러났다. 장관이 되고 나서도 깜냥이 안된다는 증거가 속출한다. 자택 압수수색 팀장과 전화통화를 한 사실은 공사(公私)조차 구분 못하는 인물임을 만천하에 입증했다.검찰을 ‘증거조작단’으로 간주한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궤변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그는 조국의 아내 정경심의 ‘PC 무단 반출’을 놓고 “검찰이 압수수색해서 장난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복제하려고 반출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검찰 측에서 “이쯤 되면 막 가자는 것”이라는 격앙된 반응까지 나왔다.유시민의 논리가 참이 되려면, 최소한 검찰은 지금까지 ‘적폐청산’이라며 잡아들인 전직 대통령들과 수많은 전 정권 인사들에 대해 숱하게 증거를 조작해 기소했다는 말이 된다. 유시민은 나아가 윤 총장을 겨냥해 “총칼은 안 들었으나 위헌적 쿠데타나 마찬가지”라고 선동하고 있다. 그에 발맞춰서 문재인 지지자들은 윤석열을 일제히 ‘배신자’로 몰아간다.윤석열은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중앙지검장으로 발탁돼 벼락출세한 사람이다. 지난 2년여 동안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보복 정치의 ‘으뜸 사냥개’로 충성을 다한 인물이다. 그리고 마침내 검찰총장이라는 최고봉에 올랐는데 검찰의 힘을 반 토막 내려는 ‘개혁’의 칼을 받으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영락없이 벼슬과 조직을 바꿔먹은 배신자가 될 판이다. ‘오직 조직에만 충성한다’는 신념의 윤석열은 어쩌면 자신의 처지가 토사구팽(兎死狗烹) 직전에 몰린 사냥개 같을지도 모른다.‘검찰 개혁’은 독립성 보장에서 시작돼야 한다. 그런데 청와대와 여당이 말하는 ‘검찰 개혁’은 정권의 말 잘 듣는 사냥개를 만들겠다는 엇나간 개혁임이 분명하다.“살아있는 권력까지도 엄정하게 수사하라”던 문재인 대통령이 또다시 일구이언(一口二言)을 보태기 시작했다. 누가 물려 죽을지 모르는 이 혼란한 ‘사냥개’ 딜레마의 끝은 대체 어디인가.

2019-09-29

딱한 ‘조국’

안재휘 논설위원설마 설마 했는데, 점점 확신이 깊어간다. 저토록 집중사격의 표적이 되어 만신창이가 되고 오만 칼질에 너덜너덜해지고 있는데, 조국은 버티고 있다. 이게 혹시 정부 여당의 사석작전(捨石作戰)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그에게 기어이 장관 임명장을 주면서부터다. 무자비한 사냥개로부터 전방위에서 물어뜯기는 그를 굳이 장관에 임명하는 까닭은 멀쩡한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였다.사석작전은 바둑의 독특한 전술의 하나다. 접전이 벌어졌을 때 아군의 일부를 ‘버림돌’로 내놓아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를 잡도록 강요하고, 그 대가로 바깥쪽에서 외세를 쌓거나 그 이상의 실리를 확보함으로써 더 큰 이득을 취하는 작전이다. 미끼에 정신 팔려있는 사이에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는 양동작전의 개념과 비슷하다.여권(與圈)이 조국 장관을 처음부터 ‘총알받이’로 쓸 생각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8월 초 장관후보자로 지명한 이후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경제·안보·외교 실패에 대해 빗발치던 여론이 모조리 조국 난타전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것이다. 정치공학적으로 볼 때, 여당으로서는 무조건 나쁜 국면이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위험성이 전혀 없는 작전은 없다. 오면초가(五面楚歌)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 사석작전은 유효한 전략일 수 있는 것이다.물론, ‘조국 전쟁’이 파생하고 있는 요소 중에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의 지지율이 휘청거리고 있는 현상은 위태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변화가 마냥 부정적인 환경만 조성하는 것은 또 아니다. 어쨌든 위기의식을 느낀 약 25∼35% 쯤으로 추정되는 골수 지지자들의 응집력은 더 커졌고, 민심을 얻기 위해 혹독한 ‘제 살 깎기’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넓어졌다. 당장 민주당은 내년 총선을 겨냥한 ‘대규모 물갈이’에 선수를 치고 나오고 있지 않은가.민주당의 ‘물갈이’ 시동은 절묘하다. 제1야당 자유한국당이 환골탈태의 혁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재인 정권 정책실패에 기대어 ‘무조건 보수통합’이라는, 감동적 요소라곤 전혀 없는 케케묵은 잡가(雜歌)나 부르고 있지 않은가. 자유한국당엔 고목 나무에 꽃 피길 바라는 정치꾼들만 득실거리고, 바른미래당은 사이비 중도로 포장된 좌우 해바라기들의 내분 끌탕 드잡이질에 주야장천 여념이 없다. 민주당의 ‘대대적 물갈이’ 선수(先手)는 회심의 일격이다.이제 여기에서 구태정치에 넌더리를 내고 있는 국민의 관심을 ‘정치개혁’으로 반쯤이라도 돌리기만 하면 성공이다. 게다가 보수정치세력들이 그동안 별러왔던 권력다툼을 일시에 쏟아내며 극심한 아노미 국면으로 접어들기만 하면 더불어민주당의 그림은 완성된다. 작금의 시큰둥한 민심이 중도나 정치 무관심의 영역에 머물러주기만 해도 진보는 성공하게 돼 있는 구도다. 제아무리 시끄러워도, 제아무리 정책에서 죽을 쑤어도 진보정권이 이기게 돼 있는 이 야릇한 구도란 참으로 한심한 드라마다. 딱한 조국(曺國)이다. 아니 정말 딱하고 처량한 우리나라 조국(祖國)이다.

2019-09-22

‘달’과 ‘손가락’의 혈투

안재휘 논설위원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라는 말이 세상에 나돈 건 지난 1988년 10월이었다. 교도소 이감 중이던 지강헌(池康憲)을 비롯한 미결수 12명이 집단 탈주한 뒤, 9일 동안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인질극을 벌이다가 서로 총을 쏘거나 경찰에게 사살 또는 검거됐다. 주범 지강헌은 인질극을 벌이는 와중에 “돈 있으면 무죄요, 돈 없으면 유죄”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법무부 장관 취임은 아무리 돌아봐도 무리다. 문재인 정권은 가라앉지 않는 여론 악화를 차단하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하고 있다. 조국 장관 딸의 의학 논문 제1 저자 등재로 촉발된 공분을 ‘물타기’ 하는 일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 아들의 서울대 실험실 사용 문제를 소환했다.때마침 제1야당의 공격수 장제원 의원의 아들이 음주운전 물의가 발생하자 오만 논리를 다 동원해 역공에 나섰다. 조국의 수신제가(修身齊家) 실패 모욕에 ‘물타기’ 하려는 치사한 선동술이 발휘되고 있는 셈이다. 민심의 거울에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기본적으로 페어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검찰이 조 장관의 5촌 조카를 인천국제공항에서 체포했다. 의혹의 키맨으로 불리는 혐의자가 날쌔게 해외로 달아났다가 장관 임명 직후에야 돌아오는 모습을 국민들은 과연 순수하게 읽어줄까. 조 장관 임명과정에서 불거진 논란 중에 최대의 모순은 ‘피의사실 공표’ 시비다. 조국 관련 수사기밀이 검찰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의심인데, 새삼스럽고 뜬금없는 불평으로 들린다.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은 검찰이 아니고서는 출처를 따로 짐작할 수 없는 수사기밀들이 언론과 야당에 흘러 다닌다는 주장이다. 돌이켜 보면 언제 그런 적이 없었던가를 오히려 생각하게 된다. 형법 제126조(피의사실 공표)는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다.생생하게 기억되는 일들이 있다. 대통령 자리에서 끌려 내려와 치욕스러운 영어(囹圄)의 생활을 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국정농단’ 사건 수사는 시종일관 ‘피의사실 공표’의 광풍 속에 펼쳐졌다. 광폭으로 전개된 소위 ‘적폐 청산’ 수사는 또 어땠나. 정치보복으로 비친 그 편파 수사 역시 ‘피의사실 공표’를 통한 여론선동을 앞세워 자행돼온 게 어김없는 사실 아니던가.그때는 괜찮고 지금은 안 된다는 의식을 가진 유치한, 법치를 향한 어불성설의 ‘내로남불’ 의식이 탄식을 부른다. 온전한 정신이라면 그때도 잘못됐고, 지금도 잘못이라고 말해야 한다. 도둑놈 잡으라고 소리친 사람을 망신주기 위해 온갖 허물을 털어내는 구상유취한 짓은 제발 멈춰야 한다. 달을 보라 했더니 가리키는 손가락만 시비하는 일에나 몰두하는 구태정치는 청산돼야 한다. 아니, 그 ‘달’과 ‘손가락’의 혈투, 유권무죄(有權無罪)의 몰염치에 짓밟혀 쓰러지는 민생과, 무너지는 나라의 미래를 살려내야 한다.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

2019-09-15

‘검찰 개혁’은 시작됐나

안재휘 논설위원지금은 거의 잊혔지만, 지난 1992년 이탈리아에서 열혈 검사들이 주도해 일어난 마니풀리테(Mani Pulite 깨끗한 손)라는 이름의 부정부패추방 운동은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다.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의 본격적인 수사로 시작된 마니풀리테 결과, 1년 동안 고위공직자와 정치인 등 무려 3천여 명의 정·재계 인사가 체포·구속됐다. 전 국회의원의 4분의 1가량인 177명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검찰이 사생결단에 나선 듯한 결기로 날카로운 칼끝을 장관후보자 조국에게 겨눈 일을 놓고 상대적으로 더 많이 놀란 쪽은 여권(與圈)인 듯하다. 청와대와 행정부, 더불어민주당이 분을 참지 못하는 표정이다. 청와대 일부 관계자는 ‘미쳐 날뛰는 늑대’라는 극단적 수식어까지 동원해 “내란음모 사건이나 전국 조직폭력배를 소탕하듯 한다”며 검찰을 비난했다. 여당 의원들도 앞다투어 검찰을 힐난하고 있다.검찰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검 관계자는 “수사 개입 우려가 있는 매우 부적절한 일”이라고 반박했다. 며칠 전만 해도 윤석열을 ‘사상 최고의 검찰총장’이라던 여권 인사들이 같은 입으로 ‘반란’이라고 욕하는 게 말이 되나. ‘검찰 개혁’을 위해 조국을 내세웠다는 말이 진심이라면 ‘사전보고 안 했다’고 화를 내선 더더욱 안 된다.‘죽은 고기만 먹는 하이에나’라는 치욕적인 오명을 걸머졌던 검찰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민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가 관심거리다. 윤석열 총장은 바야흐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멋들어진 발언이 참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시험대에 올랐다.‘검찰 개혁’에는 크게 두 개의 과정이 있다. 그 1단계는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다. 2단계는 시대에 맞지 않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독점을 해소하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검찰 개혁’은 법무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국은 법을 개정해야 될 일이라 검찰의 공감 아래 입법부 국회가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까놓고 말하자면, 역대 정권이 줄줄이 ‘검찰 개혁’에 실패한 것은 선거 때 득표를 위해 공약했다가 막상 정권을 잡고 난 뒤 ‘사냥개 부리는 재미’에 흠뻑 빠져서 약속을 뒤집은 탓 아닌가.‘어쩌면 윤석열은 문재인 대통령의 제1 충신일지도 모른다’는 분석도 있다. 민심의 흐름을 역행하면서 문 대통령을 ‘망하는 길’로 몰고 가는 청와대 참모들과 정부·여당에 대해서 의미 있는 반기를 들고 있다는 추리인 것이다.이제 욕심을 좀 더 부리고 싶다. 윤석열이 그보다 훨씬 더 큰 가치, ‘이 나라의 부정부패와 불공정을 일소하기 위한 일대 설거지’에 나선 감동적인 혁신가였으면 좋겠다. 감동적인 한국판 마니풀리테를 볼 수는 없을까. 민심 지지를 바탕으로 검찰 개혁의 1단계인 집권세력으로부터의 독립만 철저히 실현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명실공히 ‘국민 검찰’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 싶은 기대가 부질없는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2019-09-08

‘음모론’의 虛와 實

안재휘 논설위원정치판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를 둘러싼 오만 의혹들을 놓고 패 갈라 싸운다. 그런데 조국이 별별 망신을 당하는 한동안 ‘시간은 우리 편’이라며 당당하던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의 기류가 좀 달라지고 있는 느낌이긴 하다. 이제야 민심을 조금이라도 살피고 헤아린 것인가. 물론 변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어떤 것도 없다.검찰이 전격적으로 조국과 관련된 거의 모든 곳에 압수수색 반원을 투입한 뒤 음모론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시간만 지나가면 자신들을 지휘할 법무부 장관 후보를 향해 칼을 뽑은 초유의 검찰 결단에 무수한 흉계설이 날아들고 있다. 윤석열 검찰총장은 도대체 왜 ‘오버’라고 욕먹어가면서 이런 극약처방을 내린 것인가. 성층권 대붕(大鵬)의 아득한 공작정치가 시작된 것인가.조국을 둘러싼 여론전쟁은 필사적이다. 정부·여당은 조국이 밀리면 다 죽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모습이다. 아니 더불어민주당은 청와대의 용(龍)이 묵묵부답이니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판단인 듯하다는 분석이 더 정확할 것이다. 윤 총장의 용단을 놓고 민주당이 총공세다. 검찰을 개혁해야 한다면서 자기한테 안 물어봐서 화가 난 듯한 집권 여당 대표의 감정적 발언은 아무래도 이율배반이다.뭇 사람들이 원하는 검찰개혁의 으뜸 덕목은 ‘독립’이다. 오직 국가와 국민만을 위해서 사법권을 발휘하는 엄정한 검찰을 원한다. 윤석열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문 대통령도 권력의 눈치를 보지 말라고 했다. 윤석열이 누구인가. “나는 사람에 충성하지 않고 오직 조직에 충성한다”는 감동적인 국회 답변으로 영웅이 된 인물 아니던가. 민주당은 검찰개혁을 무산시키려는 불순한 거사로 의심하는 모양새다.적폐청산의 지휘관으로 살차게 칼을 휘두르던 윤석열의 모습을 기억하는 자유한국당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더욱 갈팡질팡하고 있다. 청와대와 고도의 묵계로 다른 큰 판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모두 걷어 내지는 못한 것 같다. 아군의 팔 하나 꺾고 나서 적군의 허리를 꺾는 것은 검찰의 주특기다.‘동굴의 우상’에 영혼을 저당 잡힌 각계의 범여권 인사들이 거들고 나선 것을 보면 사태가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그 중에도 검찰의 압수수색을 ‘저질 스릴러’라고 힐난한 유시민은 가히 이 나라 최고로 교졸한 궤변가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촛불 시위 대학생들을 향해 ‘물 반 고기 반’이라고 야유하고, 마스크를 벗으라고 소리친 건 너무 나갔다.그런 음모론적 시각이라면 박근혜를 대통령 권좌에서 끌어내린 촛불 시위 역시 ‘물 반 고기 반’이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이미 보수의 뒤안길에는 당시 촛불 시위의 이면에 엄청난 음모세력이 있었다는 주장이 낭자하다. 어찌 됐건 무성한 음모론의 정글 속에서 도무지 앞이 안 보이는 일상을 견뎌야 하는 배고픈 민초들만 한없이 서글프다. 오면초가(五面楚歌)에 빠진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용은 도대체 왜 침묵하고 있나.

2019-09-01

‘가짜뉴스’의 두 얼굴

안재휘 논설위원‘뇌송송 구멍탁’이라는 조어(造語)는 2005년 제작된 ‘파송송 계란탁’이라는 오상훈 감독의 코미디영화의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조어는 지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 타결 이후 퍼진 핵폭탄급 선동 구호였다. MBC ‘피디수첩’의 잇따른 보도로 촉발된 논란과 이 선동 구호에 현혹된 뭇 시민들이 ‘100만 촛불대행진’ 등 반정부 시위에 동원됐었다.대법원은 ‘언론자유’ 영역을 침범하는 과도한 기소를 일축하면서도 MBC로 하여금 지나친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공개사과하도록 징벌을 내렸다. ‘가짜뉴스’에 휘둘린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무력함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무엇보다도 의아한 것은 지금껏 광우병 발병이 없다는 사실이다.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는 또 어땠는가. 무자비하게 양산됐다가 확인이 여전히 안 된 채 묻혀가고 있는 ‘가짜뉴스’들은 가늠조차 어렵다.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짜뉴스’는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될 병폐다. 단 한 번의 그 음흉한 장난질로 누군가 일생을 망치기 일쑤요, 때로는 한 나라가 치명적인 혼돈에 빠지거나 퇴행할 수도 있다. 세계 각국은 ‘가짜뉴스’에 대응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다. 싱가포르는 ‘가짜뉴스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운용한다. 독일에서는 ‘가짜뉴스’방치 소셜 미디어 기업에 최고 5천만 유로(669억여 원)의 벌금을 물리는 법안이 시행 중이다.그런데 ‘가짜뉴스’라는 말을 전혀 다른 개념으로 써먹는 지도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대표주자는 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다. 그는 자신에게 불리한 뉴스를 모조리 ‘가짜뉴스(Fake news)’라고 몰아친다. 미국의 정치학자 조셉 나이는 최근 자신의 칼럼에서 올들어 6월 1일까지 트럼프 대통령은 3천259건의 거짓을 말했다고 썼다. 참으로 흥미로운 기록이다. 그의 인식체계에 있어서 ‘가짜뉴스’의 정의는 ‘마음에 안 드는 비판’ 정도로 변질된 게 아닐까 싶다.우리나라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 언론들의 공격에 맞서 언론을 ‘불량상품’으로 규정하고, 불매운동 등 정부 부처의 적극 대응을 독려했다. 스스로 언론을 고소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작금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논란이 가히 쓰나미 수준이다. 그와 그 가족에 대한 의혹이 보편적인 국민 정서와 정면충돌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조 후보는 물론, 청와대와 민주당은 모든 의혹 제기를 ‘가짜뉴스’로 몰아 때린다.법무부는 ‘가짜뉴스’ 제작 및 유통 행위를 강력 단속할 방침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이 정부에 과연 순정한 의미의 ‘가짜뉴스’를 정의롭게 가려낼 신뢰성이 있느냐 하는 부분이다.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를 매국행위로 매도하는 한 또 다른 통제 시도는 위험하다. 느리고 힘들더라도 제대로 된 ‘진짜 뉴스’로 ‘가짜뉴스’를 밀어내는 게 맞다. 불편한 뉴스를 ‘가짜뉴스’라고 모함하는 ‘가짜뉴스’가 더 사악한 범죄다.

2019-08-25

‘조국 청문회’ 관전법

안재휘 논설위원차기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동네북 신세다. 야당이 벌떼처럼 일어나 오만 의혹들을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까발리고, 이 나라 언론들이 피를 본 상어처럼 특종 경쟁에 돌입했다. 법무부 장관이 어디 만만한 자리이던가. 이 나라 법치를 온통 책임지는 행정부의 으뜸 자리이니 관심을 기울이는 일이 이상할 까닭은 없다. 하지만 지금 펼쳐지고 있는 따따부따는 가히 대선주자 후벼 파기 수준이다.결론부터 말하면 야당이 무슨 푸닥거리를 하든,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할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이번 청문회도 결국은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로 끝날 가망이 높다. 언론이 경쟁적으로 벌이는 취재 경쟁은 결과적으로 조국을 도와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방주사를 놔주니 면역성을 기르는 데도 좋고, 청문회를 할 즈음이면 김이 다 빠져서 더 좋을 수도 있다. 민심을 돌아보니 조국의 법무부 장관 임명강행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가 민정수석을 하면서 공직자에 대한 제대로 된 검증작업 한 번 제대로 못 한 무능 따위는 이미 까마득히 잊은 표정이다. 지금 시점에 오히려 관심은 과연 야당이 그동안 못 밝혀낸 중대한 하자 한줄기라도 더 찾아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대목이다.정말로 걱정되는 것은 제1야당을 비롯한 야당이 또다시 이 중차대한 청문회를 구닥다리 ‘호통’과 ‘어깃장’ 쇼로 마무리하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다. ‘송곳 검증’이네, ‘메가톤급 폭로’네 하면서 빈 깡통이나 요란하게 두드리다가 종 치고 막 내리는 꼴이 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돌이켜보면, 국회에서 벌어진 인사청문회가 선진국의 수준에 닿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더욱이 제아무리 ‘부적격’ 딱지를 붙여도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돼 있는 제도하에서 국회 ‘인사청문회’는 유치한 ‘통과의례’처럼 돼버린 지 오래다. 왜 그럴까. 궁극적으로 국회 청문회가 민심에 닿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문위원들의 낮은 의식과 역량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청문회(聽聞會)에 쓰는 문자는 ‘들을 청(聽), 들을 문(聞)’자로 구성돼 있다. 영어로도 ‘히어링(Hearing)’이다. 그런데 우리의 국회 청문회를 보면 청문회가 아닌 문문회(問問會)로 끝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대략 청문위원으로 나선 국회의원의 묻고 또 묻는 ‘원맨쇼’ 형태로 펼쳐진다. 어쩌다가 답변을 좀 하려고 하면 청문위원이 말을 끊고 시간이 없다고 윽박지른다. 물론 여기에는 청문위원에게 할당된 시간에 ‘답변시간’을 포함하는 결정적인 결점이 있다. 청문회의 본질적 목적을 달성하려면 ‘질문시간’만 할당해야 하는데, 왜 안 고치는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야당이 ‘조국 청문회’를 또다시 관습대로 해나간다면 무조건 실패다. ‘어쨌든 임명될 것’이라는 예단을 전제로 청문회 자체를 보이콧 한다면 이야말로 하지하책(下之下策)이 될 것이다.조국 후보자에게 제기되고 있는 의혹은 사노맹 전력·사모펀드·동생의 위장 이혼과 편법 채무 문제 등 방대하다. 그러나 솔직히 야당이 결정적 허물을 밝혀내리라는 기대는 희박하다. 틀림없이 야당 청문위원들은 처음부터 흥분할 것이고, 중간에 논리가 부족하면 고함을 칠 것이고, 여차하면 파행으로 치달을 것이기 때문이다.풍부한 정보를 움켜쥐고 의혹의 내용을 조곤조곤 따져 물어 ‘듣고 또 들음’으로써 국민이 진실을 좀 더 알게 하는 모범적인 청문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 이번 청문회를 우리 그릇된 청문회 문화를 확실히 바꿔 낼 계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알고 물어야 한다. 답변을 들어야 한다. 목소리를 낮추어 짧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국민이 듣고 싶은 것을 들을 수 있게 유도해야 한다. ‘국회 청문회의 혁신’을 바라는 국민의 희망이 이번만큼은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2019-08-18

‘쓰레기통’ 엎어놓고 ‘미래’를 팔다

안재휘 논설위원‘애국가’가 위험하다. 이 나라 헛똑똑이 리더들의 어리석은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반일(反日) 선동에 혈안이 된 집권당 인사들의 경거망동 또한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인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에서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 주제의 공청회를 열고 “친일 잔재를 청산할 수 있는 최적기”라고 주장했다. 과거에도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행적 문제로 애국가가 논란이 된 바 있었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 안익태에 대한 단편적 평가도 그렇거니와 대한민국 근·현대사 내내 불린 애국가에 대한 뿌리 깊은 국민 정서를 무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지금 일본의 무역보복을 막아내는데 ‘애국가’ 시비가 대체 무슨 해법이 되는가.최재성 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한 라디오에 나와 방사능 물질 검출을 이유로 “도쿄를 포함해 여행 금지구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간사인 신동근 의원은 나아가 ‘도쿄올림픽 보이콧’을 말했다. 올림픽 보이콧은 일본의 무역보복보다도 더 천박한 망발이다. 후쿠시마 방사능과 연결해 내놓는 궤변이 교졸하기 짝이 없다.여기자 성추행 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전력이 있는 민주당 정봉주 전 의원과 김현 민주당 사무부총장, 최민희 전 의원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코피를 흘리는 그림이 들어있는 ‘일본 가면 코피나(KOPINA)’ 티셔츠 판매를 홍보하고 있다. 그 밖에도 지자체들이 만국기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일본 연수단 방문을 거절하고, 직원들이 쓰는 일본 문구들을 폐기 처분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서울 중구 서양호 구청장은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동과 청계천 일대 등 중구 전역에 1천100개의 ‘노 저팬’ 깃발을 걸겠다고 나섰다가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깃발을 도로 내리는 망신을 당했다. 시민들이 위정자들보다 더 성숙한 의식을 발휘해 ‘무차별 선동’을 꾸짖은 셈이다.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은 역사에 오점으로 남을 어리석은 판례를 남겼다. 한국 사법부는 이 판결을 ‘사법 적극주의’라고 지칭하지만, 국제적으로 ‘사법부가 외교 문제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사법 자제의 원칙’을 어겼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글로벌 스탠더드로 말하면 한국은 1965년 청구권협정을 인정하는 게 옳다.우리 정부는 어떻게 했어야 온당한가. 일본 정부의 반발을 예측하고 청구권협정 제3조 1항에 명시돼 있는 대로 후폭풍에 대해 적극적으로 외교력을 발휘했어야 마땅했다. 제3조 2항에 명시된 ‘중재’ 조항대로 내놓은 일본의 중재 제의 자체를 우리 정부가 8개월 동안이나 묵살했다는 대목은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아베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행태는 모조리 미심쩍다.우리 국민은 이미 알고 있다. ‘반일(反日)’이 아니라 ‘반 아베’로 가는 것이 슬기롭다는 것을 훤히 꿰고 있다. 일본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므로 현 정권이 문제이지 일본 국민 모두가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더 잘 깨닫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의 후손들이 영원히 함께하며 평화롭게 살아야 할 이웃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오직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 돼 과거의 냄새 나는 ‘쓰레기통’을 모두 엎어놓고 나라의 ‘미래’를 몽땅 헐값에 팔아먹고 있는 정치지도자들의 망동은 중단돼야 한다. 반론자는 물론 신중론자들마저 무차별적으로 악의에 찬 ‘친일’ ‘매국’ 딱지를 붙여대는 정치꾼들의 저열한 행태는 즉각 청산돼야 한다. 국민을 속이다 못해 자신마저 속이고 있는, 나라를 말아먹을 수도 있는 그 엉큼하고 어리석은 속셈일랑 당장 거두는 게 맞다. 야구장에서 들려오는 미스트롯 우승자 송가인의 애국가가 새삼 뭉클하다.

2019-08-11

‘외눈박이’ 정권의 필연적 시련

안재휘 논설위원일본 아베 정부가 결국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안보상수출심사우대국)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달 28일부터 발효가 예정된 이 조치로 인해서 수출 규제 대상이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서 857개 품목으로 늘어났다. 사실상 거의 모든 산업으로 확대된 데다가 일본 정부가 어떤 품목을 정밀 타격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까지 겹쳤다.한일 경제갈등의 시원(始原)은 지난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한 일본과 문재인 정부의 인식 차이이다. 협정 제2조 1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 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중략)…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돼 있다. 이 조항을 근거로 일본은 개인 배상문제를 재론하는 것 자체를 명시적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대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문에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핵심 논거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식민지배’ 자체에 대한 배상 판결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것이어서 간단히 이해할만한 내용은 아니다.일시적 반일감정으로 펼쳐지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이나, 아베에 대한 성토, 길거리를 메운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당장은 속 시원한 장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슬기로운 해결책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일본이 한국제품 불매운동에 대대적으로 나서면 우리 경제는 더욱 피폐해질 것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이 또다시 모진 고초를 겪는 것은 아닐까. 이번 사태는 결국 ‘외눈박이’ 정권이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시련이라는 느낌이 든다. 문 정권의 이념정책 성향은 실사구시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적폐청산’이 그렇고, ‘소득주도성장’이 그렇고, ‘탈원전’이 그렇고, ‘최저임금 폭증’이 그렇다. 명분으로 따지면 하나같이 그르지 않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제대로 작동되는 게 도무지 없다.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상위법인 국제협약이기 때문에 존중돼야 한다는 견해를 말하면 곧바로 “한일합방도 존중돼야 하느냐”며 ‘친일파’ 멍에를 덧씌운다. 작년 10월 대법원판결 이후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서 한일청구권협정 보완책을 마련하는 등 충돌을 피했어야 한다고 말하면 “네가 정권 잡아서 잘 해 보라”는 식의 마구잡이 핀잔이 돌아온다. 그 무지막지한 확증편향의 비논리적 이념무장이 작금 사태의 뿌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국정의 무한책임을 떠안고 있는 정권의 외교적 무능은 치명적이다. 반정(反正)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과거청산’을 내걸고 중립외교를 추구했던 광해군 때 인사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명·후금(청)과의 외교 교섭을 전담해온 평안감사 박엽(朴燁), 의주부윤 정준(鄭遵)까지 처형했다. 그리고 치욕의 병자호란을 불러들여 삼천리강산을 피로 물들였고, 자신도 눈보라 치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굴욕을 겪었다.국회 방일단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더불어민주당 김진표 의원은 “한국이 반복해서 일본의 상처에 손을 넣고 자꾸 후벼대는 것 아니냐는 비유를 하더라”고 일본 민심을 전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핑계만 무성했지 한일 관계를 이토록 악화시킨 책임에 대해서 사과를 앞세우는 위정자들을 본 적이 없다. 지금 국민들은 밖에 나가서 못난 짓을 하다가 실컷 얻어맞고 돌아와 줄기차게 ‘남 탓’만 거듭하는 찌질한 자식을 보는 부모의 애타는 심정일 것이다. 외교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도덕 교실이 아니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문재인 정권은 무려 8개월 동안 도대체 무슨 대비를 해왔는지 거듭거듭 묻고 싶다. 수상한 그림자의 실체가 갈수록 궁금해진다.

2019-08-04

늑대 ‘하나’, 호랑이 ‘넷’

안재휘 논설위원피장봉호(避獐逢虎)라는 옛말이 있다. 직역하면 ‘노루 피하려다가 범 만난다’가 되고, 의역으로는 ‘작은 해를 피하려다 도리어 큰 화를 당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정도가 될 것이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나라 안팎이 단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다. 날만 새면 한 건씩 일이 터진다. 도무지 쓸만한 외교전략 하나 안 보이는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처절한 ‘동네북’ 신세다.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넘어서 오면초가(五面楚歌)라는 신조어마저 나돈다. 일본은 무역보복의 칼끝을 도무지 거둘 기미가 없다. 오랫동안 기획한 것으로 보이는 이번 사변(事變)은 아무래도 적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 매듭을 드러낼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미국이 중국과 무역 공방을 지속하는 모습을 강 건너 불 보듯 하면서 여파를 짐작하지 못한 업보가 너무나 깊다. 정부가 스스로 ‘위안부 협상’을 파기하고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같은 변수를 가볍게 본 것은 결코 작은 허물이 아니다. 일본은 무역 문제를 정치수단으로 철저하게 활용하고 있는 트럼프를 따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보면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르고 있는 해코지를 트럼프에게 말려달라고 부탁하면 되리라고 믿은 안일한 판단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일본은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우리보다 열배 백배 공을 더 들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찰떡궁합을 나타내온 미국과 일본의 관계를 망각해서는 안 될 일 아니던가.며칠 사이 많은 일이 더 발생하고 있다. 북한은 신형 잠수함 개발에 성공했다고 떠벌리더니, 동해안으로 신형 탄도탄 미사일을 두 발이나 쏴댔다. 러시아전투기가 독도 하늘 우리 영공에 두 차례나 침범해 우리 공군기의 수백 발 경고 사격을 받았는데도 러시아는 “넘어간 적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우리 전투기의 사격을 놓고 일본은 “(독도 상공은) 일본 영공인데 한국전투기가 왜 사격을 하느냐”고 얄밉기 짝이 없는 참섭을 내놨다.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대응이다. 국방부는 최현수 대변인이 읽은 입장 자료에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일본 측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독도는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라고 강조했다. 그게 다였다. 아니, 이 나라 안보를 책임지고 있는 국방부가 탄도미사일을 쏴대는 북한이나 전투기로 영공을 침범한 러시아·중국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얄미운 논평을 내놓은 일본만 물어뜯는 게 말이 되나? 어느새 우리의 적은 오직 일본뿐이고, 북한과 러시아·중국은 아름다운 우방이 되었나. 트럼프 대통령이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들이 WTO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돼 무역 혜택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라고 USTR(미 무역대표부)에 지시했다. 중국을 겨냥한 조치라지만, 우리나라도 유탄을 맞을 가능성이 있는 변화여서 허투루 보아넘길 일이 아니다. 북한의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를 딱총 놀이쯤으로 여기는 트럼프의 야멸찬 언행이 분노를 부른다. ‘동맹국’인 우리가 북한의 핵 인질이 돼가고 있는 비극을 트럼프는 도대체 무슨 감상으로 관망하고 있나. 국가 안위를 온통 트럼프의 ‘힘’과 김정은의 ‘배려’에 맡겨놓고 사는 이 나라 국민의 삶이 새삼 애달프다.일련의 사태 발생에 대한 책임 있는 자세도, 외교력을 포함한 성숙한 해법도 오리무중이다. 문 대통령은 물론, 국방부 장관조차도 러시아 전투기의 영공 침범이나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에 대해서 꿀 먹은 벙어리 놀음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어떤 처지인가. 북한이라는 ‘늑대’ 한 마리 잘 다루면 끝날 줄 알고 내부 분열상만 드러내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미국·러시아·일본·중국 그렇게 네 마리 ‘호랑이들’의 먹잇감이 되어버린 토끼 같은 처량한 몰골은 아닌가.

2019-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