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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춤추는 ‘허깨비 풍선’

안재휘 논설위원가수 나훈아가 작심 발언을 내놨다. 그는 추석 특집 KBS 실황 공연 도중 “국민 때문에 목숨 걸었다는 왕이나 대통령을 본 적 없다”면서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僞政者)가 나올 수 없다”는 멘트를 날렸다. “KBS는 공영방송이지요? 두고 보세요. KBS가 거듭날 겁니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했다. 상식을 가진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다.그런데 이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을 놓고 야당이 먼저 반색이다. 장제원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잊고 있었던 국민의 자존심을 일깨웠다”고 무릎을 쳤고, 원희룡 제주지사는 “(정치인으로서) 너무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했다. 반면 여권은 “정치적으로 ‘오버’해서 해석하지 말라”고 야당에 퉁을 놓는다.우리 공무원이 NLL 북방에서 북한군의 10여 발 총탄에 사살되고 불태워진 천인공노할 사태가 발생했다. 비극이 청와대에 보고된 시각은 밤 10시인데, 문재인 대통령에게 정식보고한 시각은 다음날 오전 8시 반이란다. 안보 부처 장관·참모들은 새벽 1시에 긴급회의를 열었고, 문 대통령의 유엔연설도 나왔다는데 참 해괴한 일이다.사건 직후 잠시 분기탱천하던 집권당은 북한 전통문에 담긴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에 일제히 입을 닫았다. 청와대는 숨겨왔던 김정은의 친서를 강력소화기로 써먹었다. 이 나라 최고 궤변가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김정은을 ‘계몽 군주’라고 칭송했다.예상대로, 서울동부지검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군복무시절 황제 휴가 논란에 대해서 면죄부를 선사했다. 예측을 벗어난 것은 추미애 장관의 적반하장(賊反荷杖) 행태다. 동부지검은 수사결과와 함께 추 장관이 보좌관에게 카투사 대위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카톡 내용을 함께 까발렸다.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는 추 장관의 주장을 한 방에 뒤집은 셈이다.추 장관은 “전화번호는 줬지만 지시는 안 했다”는 기괴한 논리를 들고나와 비판자들에 대한 가공할 보복 소송전을 을러댔다. 시중에 “술은 마셨지만, 음주는 안 했다”는 식의 패러디가 폭포를 이룬다.아무래도 집권 세력은 당분간 ‘추미애 사석 놀이’를 더 끌어가고자 하는 게 틀림없다. 문재인 정권은 강력한 팬덤정치의 마력을 중심으로 권력 프로그램을 힘차게 작동하고 있다. 문제는 야당이 맥없이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리적 사유가 거세된 세상에서 야당은 권력의 바람 장난에 영락없이 놀아나는, 춤추는 ‘허깨비 풍선’이다.정권을 비판하는 여론은 허공에 겉돌 따름, 대안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고도의 정략 아래 뿌려지는 사석 밑밥에 눈이 어두워 도무지 ‘대안 정당’의 위상도, 지지여론을 일궈낼 적합한 수단도 구축하지 못하는 제1야당 국민의힘에 대한 실망이 깊다. 갈곳 잃은 민심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길을 묻고 있는데 마냥 허깨비춤만 추고 있으니 대체 어쩌자는 건가. 가수 나훈아의 상식발언 한마디에 박수나 치는 초라한 야당 수준으로 대체 뭘 할 수 있나.

2020-10-04

‘종전’ 너머 ‘철수’가 보인다

안재휘논설위원유엔연설에서 세계를 향해 ‘한반도 종전선언’에 대한 국제지지를 호소한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에 의한 우리 공무원의 피격화형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다. 화상 연설형식으로 이뤄진 유엔연설 이전에 의문의 실종사건으로 사라진 해양수산부 소속 어업지도선 공무원이 북한 해역에서 북한군이 저격 살해된 뒤 끔찍하게도 기름에 불태워진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공무원 피격사건 때문에 분노하는 여론에 묻혀 있지만,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지지 호소는 매우 심각한 논쟁거리다. 문 대통령은 유엔총회 화상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평화의 시작은 평화에 대한 서로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한반도 ‘종전선언’이라고 믿는다”면서 “종전선언을 통해 화해와 번영의 시대로 전진할 수 있도록 유엔과 국제사회도 힘을 모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 유엔연설 출발점은 지난 6월 15일 더불어민주당·열린민주당·정의당 등 범여권 의원 173명이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국회에 발의한 ‘한반도 종전선언 촉구 결의안’일 것이다.연설문 작성과정에서 ‘종전선언’에 대한 청와대 참모들의 일부 이견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이 최종결심했다는 후문도 들려왔다. ‘종전선언’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미군철수’ 주장의 빌미다. ‘종전선언’이 이뤄지면, 그게 아니어도 걸핏하면 ‘미군철수’를 부르대는 반미분자들의 목소리가 그악해질 게 뻔하다. 전쟁이 끝났는데 미군이 이 나라에 남아 있을 이유가 뭐냐는 논리는 어리석은 민심을 파고들기에 안성맞춤이다.주한미군·유엔군·한미연합사 사령관을 겸했던 버웰 벨 전 주한미군 사령관은 종전선언의 전제조건으로 “비무장지대 북쪽에 배치돼 서울과 남한의 북쪽 지역 도시들을 위협하는 북한의 대포와 미사일 역량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벨 전 사령관은 “해당 조건이 완전히 이행될 때까지 종전선언을 절대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종전선언→유엔사 해체→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이 노리는 긴 세월 불변의 적화통일 도식이다. 그 사실을 모를 턱이 없는 여권이 이런 불장난을 계속하는 것은 그 심중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를 의심케 한다. 문 대통령의 연설은 ‘북한의 비핵화→종전선언→평화협정’이란 항구적 평화체제 공식의 포기를 뜻한다. 그래서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은 위태롭다.문재인 정권의 ‘종전선언’ 카드는 집권 내내 공을 들여온 대북정책이 꼬여서 도무지 매듭이 풀리지 않은 답답함에서 나온 고육지책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토라진 김정은을 돌려세워서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고 싶은 그 뜻을 오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북한의 선의에만 집착하는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은 현실성부터 떨어진다. 1970년대 이래 판문점 선언 전까지 우리는 북한과 총 655회 당국자 회담을 했고, 그 결과 7·4 남북공동 선언 등 총 245건의 성명·선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중 단 한 건도 제대로 이행한 적이 없다.

2020-09-27

‘법꾸라지’ 공화국

안재휘논설위원공자는 도(道)를 일러 ‘솔선해서 행하는 것’이라 했고, 정(政)은 곧 ‘법제와 금령’을 뜻한다고 했다. 또 형벌을 주어서 균일하게 만드는 제(齊)에 치중하면 백성들이 형벌을 면하려고만 하고 부끄러움이 없어진다(齊之以刑 民免而無恥)고 경계했다. 법(法)은 야만의 시대, 무질서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인류에게 가장 유용한 도구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말처럼, 법이 과잉지배하는 사회가 되면서 무치(無恥)한 인간들이 양산되고 있다.지난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조국 사태의 논란들이 최근 들어 본격적으로 법정에서 다뤄지기 시작하면서 뜻밖으로 ‘법꾸라지’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조 전 법무장관의 아들 가짜 인턴증명서 발급 혐의를 받는 최강욱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경심 교수 모자가 200회에 이르는 모든 질문에 증언을 거부했다. 앞서 조국 장관 자신도 정 교수 재판에서 303차례나 형사소송법 148조 근친자의 증언 거부권을 들어 증언을 거부했었다.해석은 의외로 쉽다. 형사재판은 기준이 엄격해서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아무리 혐의가 짙어도 무죄가 나올 수 있다. ‘참말을 할 수도 없고, 위증의 죄를 무릅쓰고 거짓을 말할 수도 없어 최상의 선택을 한 것’이라는 풀이가 정확할 것이다.조국 일가의 ‘법꾸라지’ 행태는 일반 국민이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몰라서 못 하고, 무서워서도 못한다. 수많은 피고인이 질문에 답변을 거부했다가 판사로부터 ‘개전(改悛)의 정이 없다’는 질책과 함께 괘씸죄까지 보탠 중형을 선고받고 있다.조국 일가는 도대체 무얼 믿고 이렇게 하는 걸까. 자기들 세상에 새로 판이 짜진 법원의 판결을 믿기 때문이다. 야릇한 일은 벌써 시작됐다. ‘우리법 연구회’ 출신인 서울중앙지법 김미리 재판장은 조국의 동생 조권 씨에게 웅동학원 교사 채용시험지 유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일은 정말 중요한 혐의에 대해서는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는 사실이다.조 씨 혐의의 핵심은 거짓 공사대금 채권 확보 명목으로 가족끼리 짜고 치기 소송을 벌여 웅동학원에 115억 원 손해를 끼쳤다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교사 채용 지원자 두 명에게 시험지를 빼주고 뒷돈 1억4천700만 원을 받은 것도 시험지 유출만 유죄고 뒷돈은 무죄라고 판시했다. 돈 심부름한 사람은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는데, 시키고 돈 받은 사람은 무죄라니 참으로 해괴한 판결이다. 이제 어떤 가당찮은 일들이 펼쳐질지 충분히 예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지난해 조국 사태나, 최근의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논란을 보면서 이 나라가 여전히 초엘리트를 자처하는 성층권 ‘법 기술자’들이 지배하는 ‘법꾸라지’ 공화국임을 새삼 절감한다. ‘불공정’에 눈물짓는 민심은 아랑곳없이 ‘불법’만 아니면 된다며 뻗대는 지도층 위정자들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태에 넌더리가 난다.

2020-09-20

‘사석(捨石)’ 놀이

안재휘 논설위원바둑판 격언 중에 ‘기자쟁선(棄子爭先)’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돌 몇 점을 희생시키더라도 선수(先手)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수는 돌을 아끼고 상수는 돌을 버린다’는 속담도 있다. 바둑판에서는 초심자일수록 자기편 돌은 하나라도 죽이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고수는 사석작전(捨石作戰)에 능하다. ‘버림돌’을 잘 써야 고수다.‘내 살을 내어주고 상대의 뼈를 자른다’는 뜻인 육참골단(肉斬骨斷)은 일본 사무라이들의 세계에서 하수가 고수를 상대할 때 쓰는 비법으로 통한다. 변화무쌍한 정치권의 쟁패에도 이 작전은 왕왕 구사된다.연초부터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병역논란이 도무지 종식될 기미가 없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적극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2건의 ‘추 장관 탄핵’ 국민청원에 각각 24만여 명, 21만여 명의 동의를 얻으며 답변 요건을 충족하자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국방부의 급변이 특히 눈에 띈다. 국방부는 관련 규정들을 구구히 들며 전화로 휴가 연장한 추 장관 아들의 휴가 연장 절차에 하자가 없다는 해석을 내놨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휴가연장 명령서나 청탁 전화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나마 국방부의 해명이 민주당과의 협의 절차를 거쳐서 작성되고 공유됐다는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추 장관 아들 측의 법적 대응도 주목거리다. 추 장관 아들 서모 씨 군부대 배치 청탁 의혹을 보도한 SBS와 소속 기자를 형사 고발한 데 대해서는 한국기자협회 등 언론 3단체가 ‘언론 길들이기’라는 비판과 함께 고발 철회를 촉구했다.정부와 민주당의 반격에도 불구하고 추 장관 아들의 ‘황제 휴가’ 논란에 대한 국민 정서는 험악하다. ‘병역’이라는 민심의 역린을 건드린 일이어서 갈수록 고약해질 공산이 크다. 정치인들이 정치적 해법은 도외시한 채 스스로 판검사 밑으로 기어드는 현상은 우리 정치의 천박성을 상징한다.드디어, 정권이 추미애 장관을 ‘사석(捨石)’으로 놓고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조국 사태 때도 그랬지만, 팬덤이 지배하는 돌연변이 정치풍토 속에서 온 나라가 난리를 쳐도 거시적 계산법으로는 ‘총알받이’를 장기간 두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전략일 수 있다. 야권은 지금 ‘전술’에서는 이기고 ‘전략’에서는 지는 게임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헐벗은 경제도, 조국도, 윤미향도, 윤석열의 위기도 잊히고 있다. 윤영찬도 곧 잊혀질지 모른다.무능한 정권에 대해 ‘퇴진’을 요구하는 제2의 촛불 민심은 ‘코로나19’가 대신 막아주고 있으니 문재인 정권은 참 복도 많다. 적지 않은 국민이 선동 장난질에 부화뇌동하고 선심 정책에 휘둘리는 수준에 머무는 현실은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다. ‘깨어있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던가. 독재 타도를 위해 평생을 뜨겁게 살다 간 고(故) 함석헌 선생의 말이 다시 새록새록 떠오른다.

2020-09-13

‘이간질’과 ‘선동’ 사이

안재휘논설위원조선 초 황희(黃喜) 정승이 길을 가다가 검은 소와 흰 소를 몰고 밭을 매고 있는 농부의 모습을 보았다. 문득 궁금증이 일어서 “검은 소와 흰 소 중 누가 더 일을 잘 합니까?”하고 물었다. 농부는 못 들은 체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황희가 또다시 묻자, 농부는 소를 쉬게 해놓고 귓속말로 “검은 소가 일을 더 잘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굳이 귓속말로 하는 까닭을 물으니 농부는 “사람도 짐승도 자기 욕을 하면 기분이 나쁜 법입니다”라고 말했다.의사들이 정부의 일방적인 의료정책 추진에 반발해 벌어진 의정(醫政)갈등이 정치권의 중재로 수습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갈등의 한복판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SNS에 올린 간호사 격려 글에 대한 논란이 꼬리를 길게 이어가고 있다. 대통령의 속 좁은 ‘편 가르기’ 언어라는 비난이 빗발치자, 민주당 의원들이 번갈아 나서서 옹색한 반박을 펼쳤다. 다만 그 언급들의 논리가 하도 허술해서 막 내지르는 ‘충성 발언’ 정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문 대통령 글은 아무리 다시 읽어도 ‘순수한 격려’로 읽힐 여지가 없다. ‘의사들이 떠난 현장을 묵묵히 지키는’부터, ‘파업하는 의사들의 짐까지 떠맡아야 하는 상황’, ‘(폭염 당시 쓰러진 의료진) 대부분이 간호사들이었다’는 대목에 이르기까지 이게 정말 한 나라의 대통령이 쓴 글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야릇하다. 많은 국민이 ‘참모’들의 편협한 정보가 또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고 있구나 하고 안타까이 생각했다.그런데 수많은 비판 댓글이 달리는 등 파장이 깊어지자,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사달이 난 글을 작성한 사람이 대통령이 아니라는 변명이 등장한 것이다. 어떻게든 대통령을 보호하려고 둘러댄 말인데, 그 말들이 이번엔 대통령을 그야말로 바보로 만들어 해명도 변명도 못 하도록 궁지에 몰아넣고 만 것이다. 그동안 번번이 이슈의 중심이 됐던 SNS 글들의 저자가 따로 있다는 얘기가 돼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직분의 엄중함과 과중한 업무를 생각한다면, 대통령의 SNS가 직접 작성됐느냐, 않았느냐는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민주당 고민정 의원이 한 변명 또한 대통령을 도와주는 말이 못된다. 고 의원은 한 방송에 나와서 대통령 메시지를 놓고 “누구의 것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답하기가 참 어려운 부분”이라며 “발신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고민정이 말한 대로 보아도 문 대통령의 SNS 글은 ‘갈라치기’ 메시지가 역력하다. 만약에 대통령의 메시지가 확증편향에 빠진 팬덤정치를 의식한, ‘선동’을 목표로 하는 ‘이간질’의 발로였다면 이는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턱이 없는 들판의 소들에게조차 듣기 싫은 비교와 비난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고사(古事)의 교훈을 다시 떠올린다. 국민이 대통령에게서 듣고자 하는 말은, 모든 국민을 아우르는 진정 ‘대통령다운 말’이 아닐까 싶다.

2020-09-06

‘공수처법’과 찐빵

안재휘논설위원소문난 명품 찐빵 맛의 비결은 무엇일까. 좋은 밀가루를 골라서 쓰고 비법을 발휘한 반죽 기술이 상당히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찐빵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반죽 안에 들어가는 팥소다. 항간에 실속 없는 일이나 사건, 물건을 일러 ‘앙꼬(팥소의 일본어) 없는 찐빵’이라고 지칭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 아닐까. 불량한 팥소가 들어있는 찐빵을 놓고 명품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지난 20대 국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이 21대 국회에서 또다시 논란의 중심에 떠올랐다. 공수처라는 조직은 많은 국민이 걱정하듯이 운용하기에 따라서 최고 권력자의 강력한 독재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런 위험성 때문에 국민은 공수처장 선출규정에서부터 엄정한 정치적 중립을 담보하는 완전한 장치가 생명이라고 생각한다.21대 국회가 시작되고, 통합당의 비협조에 민주당은 안달이 났다. 지난해 민주당이 공수처법을 밀어붙일 적에 야당과 국민을 설득한 가장 중요한 논리는 “절대로 여당이 일방적으로 뽑을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통과된 공수처법은 공수처장 추천위원회 구성에서 여당 교섭단체 2명, 야당 교섭단체 2명 추천이고, 후보 결정은 추천위원 7분의 6 찬성으로 돼 있다.국회의장이 거듭 후보추천위원 선정을 요구했지만, 유령 취급 당하는 제1야당 미래통합당은 공수처법에 대한 위헌심판을 청구한 만큼 결과가 나온 뒤에 하자는 주장을 펴 왔다. 민주당이 몇 차례 공수처법 개정을 을러대더니 정말로 개정안을 제출했다. 개정안은 예상대로 민주당이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인사를 공수처장에 임명하고, 수사관들도 입맛에 맞는 인물들로 채울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법사위 소속 민주당 김용민 의원이 제출한 개정안은 공수처장 후보추천위를 여야 구분 없이 국회가 추천하는 4명 등 7명으로 구성하도록 했다. 또 공수처장 후보 추천 조항도 5명 이상만 동의해도 되도록 바꿨다. 야당의 ‘공수처장 후보 비토권’을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공수처 수사검사 인원도 현행 공수처법에서 정한 25명에서 ‘최대 50명’으로, 수사관은 40명에서 ‘최대 70명’으로 늘렸다. 수사검사 자격도 ‘10년 이상의 변호사’ 에서 ‘5년 이상’으로 대폭 낮췄다. 3년이었던 수사검사 임기는 7년으로, 최대 3회까지만 허용한 ‘연임 제한’ 조항은 아예 삭제했다. 법조계에서는 “젊은 민변 변호사들의 진입허용 노림수”라는 해석이 나온다.안 되면 법을 바꿔서라도 강행하는 여당이 다시 무슨 수상한 작전에 돌입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핵심 중립성 담보 조항을 제거한 공수처법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결과적으로 민주당은 입법과정에서 국민을 완전히 속이고 배신한 게 돼 버린다.좋은 재료를 넣기는커녕 팥소를 아예 빼버린 찐빵이 어떻게 명품이 되나. 아니, 맛있는 팥소는 제거하고 먹어선 안 되는 독소(毒素)를 잔뜩 넣은 찐빵으로 대체 이 나라 민주주의를 또 얼마나 죽일 작정인가, 걱정스럽다.

2020-08-30

‘남 탓’ 공화국

안재휘 논설위원‘칼을 빌려 사람(상대방)을 죽인다’는 뜻으로 직역되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은, 흔히 중국 남조 송(宋)의 명장인 단도제(檀道濟)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단공삼십육계(檀公三十六計)의 세 번째 지략이다. 직접 싸우지 말고 타인을 이용하라는 말로 의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수세에 몰릴 적마다 남의 칼을 빌려 휘두르는 통치란 결코 정의롭다고 말할 수 없다.세기적 돌림병 코로나19 싱크홀이 이 나라에서는 뜻밖으로 정권에 행운의 여신으로 작동한다. 정적 소탕과 정책 실험, 국론 분열의 선동 굿판만 거듭해온 문재인 정권 앞에 코로나19는 민심을 흐리는 연막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아가 작금 바이러스 재확산에 즈음해서는 반대자를 향한 합법적인 탄압의 칼로 변질될 위기에 처해 있다.문재인 정부는 집권 4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실정의 뿌리를 번번이 지난 정권을 비롯한 다른 원인에다 돌려 붙이는 ‘남 탓’ 정권, ‘핑계 정부’에 머물러 있다. 부동산 혼란으로 민심을 잃어 전전긍긍하던 정세를 반전시킬 묘책으로 ‘행정수도 이전’, ‘현충원 친일파 파묘(破墓) 논쟁’ 폭탄을 마구 던지던 여권은 8.15 대규모 반정부집회가 터지자 일제히 ‘코로나 칼’을 치켜들었다.코로나 재창궐은 휴가철에 경각심을 낮추는 성급한 조치들을 내린 당국의 방역실패라고 보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연일 방역 방해 활동을 찍어 ‘공권력 집행’을 외치고, 당은 코로나 사태 초기에 앞다투어 신천지를 때리던 같은 기술로 전광훈 목사를 철천지원수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전당대회마저 ‘남 탓’ 광기에 빠져 전광훈과 김종인을 한 몸으로 엮는 표독스러운 험구 세례로 책임을 덧씌우는 막말 경연대회로 치르고 있다.광화문을 울린 정권비판 구호는 종적을 감췄다. 그 많은 이들이 모여서 한목소리로 외친 민심은 코로나 소동에 모조리 형해화돼버리고 말았다. 사랑제일교회를 압수 수색한 당국이 ‘통신사 기지국 정보’를 이용해 집회 당시 광화문 인근에 머문 1만576명 모두의 연락처를 확보했다는 소식이다.드디어 광화문 반정부 시위대에 있었거나 그 언저리에 있었던 사람들, 최소한 적극적인 비판 정서를 가진 국민의 명단을 상당수 확보한 셈이니 이거야말로 정권안보 차원에서 큰 소득일 것이다. 겉으로는 코로나 방역에 협조하지 않은 죄, 속으로는 반정권의 죄를 물을 합법적인 자료가 생긴 셈 아닌가. 문득 조지오웰의 소설 ‘1983’이 떠오르면서 소름이 돋는다.‘남 탓’ 공화국은 희대의 비극이다. 1990년대 유행처럼 차량 뒷유리에 붙였던 ‘내 탓이요’ 스티커가 생각난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께서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돌아보자며 시작한 그 ‘내 탓이오’ 운동을 다시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인사도, 방역에 협조하지 않는 장삼이사도 다 대한민국 국민이다. ‘코로나’라는 칼을 빌려 ‘엄정 대응’하거나 ‘법정 최고형’으로 때려잡아야 할 주적이 결코 아니다.

2020-08-23

‘말 따로, 행동 따로’ 정치학

안재휘논설위원“검찰에서 ‘누구누구의 사단이다’라는 말은 사라져야 한다. 애초 특정 라인·특정 사단 같은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특정 학맥이나 줄 잘 잡아야 출세한다는 것도 사라져야 한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한 사람이 올해 들어 2차례나 검찰 학살 인사를 단행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라면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힘없는 아이를 뒷골목으로 끌고 가 실컷 두드려 패놓고 돌아서서 “폭력은 없어져야 한다”며 으스대는 일진 패악과 뭐가 다른가.모름지기 이 나라 정치권은 이중인격자들의 천국이 됐다. 앞에서 하는 말 다르고 뒤에서 시키는 일 다른 게 ‘유능한 정치’라고 믿는 타락한 정치학이 판을 치고 있다. 여러 번 속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앞에서 멋있게 좋은 말만 하고 뒤로는 민주당이 ‘독주’ 가속 페달을 밟는다. 대통령은 ‘협치’를 말하며 야당을 다독이는 척하는 선한 역할(굿캅)을 하고 민주당은 뒤에서 176석 의석수로 밀어붙여 매사를 독단으로 처리하는 악역(배드캅)을 맡는다.지난해 7월 문 대통령은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임명하며 “검찰이 청와대든 여당이든 권력형 비리에 엄정한 자세로 임해 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한 검찰은 어떤 몰골이 돼 있나. 중요한 수사를 담당했던 윤석열 검찰총장의 동료들을 다 잘라내는 게 ‘검찰 개혁’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이제 국민의 관심은 이런 만신창이 검찰이 그동안 세상을 놀라게 했다가 흐지부지돼가고 있는 권력형 비리 부정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쏠려있다. 청와대 울산 시장선거 개입 의혹은 어떻게 끌고 갈 건가. 윤미향과 정의연의 회계 부정 의혹은 또 어떻게 마무리 지을 것인가. 6개월째 지지부진한 추 장관 아들의 휴가 미복귀 사건 수사는 어디로 가나. 옵티머스 펀드 사건은 핵심 수사가 시원하게 진행될 것인가.윤 총장이 신임검사 신고식에서 한 말의 파장이 길다. 그는 우리 헌법의 핵심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있는 독재와 전체주의를 배격하는 진짜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제 발 저린’ 반응이 잇따르고 있다. 설훈, 김두관, 이재정 의원 등이 윤 총장의 사퇴를 종용하고 나섰다. 자기들은 한사코 ‘독재’와 ‘전체주의’ 아니라면서 왜들 그러나.손발이 다 잘렸다고 하지만 검찰총장직의 권능은 살아 있다. 윤 총장은 권력형 범죄에 대해 원칙대로 수사해야 한다. 포위한 추 장관 패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듣지 않는 대로 그 행태를 역사에 명징하게 남겨야 한다. 온 국민이 진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진짜 검사 윤석열’을 기다리고 있다.윤 총장은 지금 법대로 수사하는 게 “권력형 비리에 엄정한 자세로 임해달라”는 대통령의 당부를 지켜내게 되는 역설의 땅에 도달해 있다. 제대로 되느냐 마느냐는 다른 문제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의 정치가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시퍼렇게 멍들이고 있다.

2020-08-09

‘자판기’ 국회

안재휘논설위원‘자판기’는 인류문명을 바꾼 획기적인 발명이었다. 지난 2010년 아랍에미리트공화국(UAE)의 최고급 호텔 에미레이트 펠리스에 처음으로 금(골드 바) 자판기가 등장해서 화제가 됐다. 지난 2018년 중국의 공룡 기업 알리바바는 미국 자동차회사 포드와 손잡고 자동차 자판기를 등장시켜 해외토픽난을 뜨겁게 달궜었다. 모바일 앱으로 자동차를 구매하는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작금 21대 국회에서 벌어지는 초 스피드 법률 통과는 더 놀라운 ‘자판기’ 기록이 될 것 같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29일 ‘임대차 3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후속법안’을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전광석화처럼 통과시켰다. 통상적으로 국회는 상임위에 법안이 회부되면 대체토론, 소위 심사보고, 축조심사, 찬반 토론, 의결(표결)의 순서를 거치는데 이날 국회 상임위들은 짜 맞춘 듯이 모든 절차를 생략했다.민주당은 이어서 30일에는 본회의를 열고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재석 187명 가운데 찬성 185명, 기권 2명으로 의결했다. 법안의 본회의 상정부터 가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5분이었다. 군사독재정권 때도 좀처럼 못 보던 ‘입법 독재’의 활극이 펼쳐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수십 년 국회 입법 프로세스를 한순간에 무너뜨린 횡포의 뒤에는 교졸한 ‘법 기술’이 있었다.여당 국회의원들 입에서는 ‘소위원회는 강제조항이 아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국회법 제57조(소위원회) 1항을 보니 ‘필요한 경우 특정한 안건의 심사를 위하여 소위원회를 둘 수 있다’고 돼 있는 건 맞다. 민주당은 ‘둘 수 있다’는 대목을 ‘안 해도 된다’로 읽어 자기들 법안만을 짜깁기해서 통과시켰다. 분석도 안 된 법안을 기립통과 방식으로 처리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거수기’ 행태였다.아무리 좋은 명약이라도 약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있다. 유해한 요소가 있는지 없는지 철저하게 조사한 다음 시장에 내놓는 것은 상식이다. ‘부동산 3법’이 제아무리 좋은 제도일지라도 마지막으로 정리된 대체입법에 대한 국회 전문위원들의 검토보고조차 거치지 않은 것은 민주당의 치명적인 실수다.“학생운동 세대의 엘리트 그룹과 이른바 ‘빠’ 세력의 내밀한 친화성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며 문재인 정권의 ‘전체주의’를 우려한 진보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지적이 눈에 띈다. ‘결과’ 중심으로 ‘속전속결’만을 도모하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박정희 시대에 유정회를 만들어 부린 일이 우리 정치사에 부끄러운 흔적이듯, ‘결과 지상주의’에 빠진 민주당의 행태는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록될 가능성인 높다. ‘통법부’ 행태를 주도하고도 “야당이 양보해야 한다”고 우기고, “통합당이 민주주의 기본 작동 원리부터 다시 생각할 때”라는 적반하장을 서슴지 않는 여당 인사들의 막무가내 언행에 억장이 막힌다.이 엉터리 ‘자판기’ 국회 행태를 ‘민주주의’로 잘못 배우고 있을 아이들이 걱정이다.

2020-08-02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의 비밀

안재휘논설위원로마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에 살던 무시무시한 악당이다.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에 초대해 쇠침대에 눕히고는 침대 길이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길면 잘라서 죽였다.자기가 세운 일방적인 기준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맞추려는 아집과 편견을 비유하는 관용구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Procrustean bed)’ 연원이다.국회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집권 여당의 정치행태를 보면 로마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 이야기가 절로 떠오른다. 더불어민주당과 범여권은 4·15총선 결과 절대다수 의석을 준 민의(民意)를 아전인수로 침소봉대하고 있음이 확연하다.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주문 외우듯 하지만, 행태는 점점 비민주적이다.21대 국회 시작부터 민주당은 법제사법위원장 자리를 야당에 배려함으로써 국회의 견제기능을 보장하던 전통과 관행을 무시하고 점령해버렸다. 국회의 발목을 잡아 온 구태(舊態)를 핑계대지만, 상대적으로 야당을 오래 해온 자신들 발등을 찍는 소리에 불과하다. 집권 4년 차에도 기억에 남을 만한 잘된 정책도 없다. 난장판이 된 부동산 시장은 그 대표적인 실패의 상징이다.문재인 정권 초반의 특징은 ‘전 정부 탓’이었다. ‘적폐청산’이라는 운동권적 선동 광풍으로 입법·사법·행정부를 야금야금 장악했다. 야당의 무기력에 힘입어 총선압승을 일궈낸 뒤에는 의회독주 쓰나미가 점입가경이다. 권력이 ‘준법의식(遵法意識)’을 포기한 나라의 미래는 어찌 될까. 이 정권은 자기들 뜻대로 안 되면 곧바로 ‘법 개정’을 말한다.자기들끼리 만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으로도 야당의 협조를 기대하지 못하게 되자 대뜸 법을 바꾸겠단다. 내년 4월 재보선에 서울·부산시장 후보를 내기 위해 ‘당원투표’ 꼼수를 동원해서 당헌도 바꾸겠단다. 사나워진 민심을 일순 잡아 돌릴 요량으로 꺼낸 ‘행정수도 이전’ 꽃놀이패를 위해서는 ‘개헌하면 된다’고 간단히 말한다. 삼권(三權)을 다 거머쥔 정권답게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소위 ‘검언유착’이라는 이름으로 벌이고 있는 전 채널A 기자와 한동훈 검사장과의 공모 의혹사건에서도 정부·여당의 불순한 권력 행태는 판을 친다. 청와대와 법무부 장관을 뒷배로 놓은 중앙지검장은 직속 상관 검찰총장에 반기를 들고 싸운다. 수사심의위원회가 한 검사장에 대한 수사와 기소를 중단하라고 결정하자, 자기들이 만든 심의위가 잘못됐다며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모두가 끔찍한 반민주적 횡포들이다.‘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에서 정말 치를 떨게 하는 대목은 그 침대에 침대 길이를 조절하는 보이지 않는 비밀 장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나그네도 모두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던 음험한 계략이었다. 야비한 살인자 프로크루스테스는 그러나 아테네 최고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에게 걸려들어 자신의 악행과 똑같은 수법으로 쇠침대에서 죽임을 당했다.

2020-07-26

표리부동의 ‘협치(協治)’

안재휘 논설위원“군주가 고집이 센 성격으로 간언은 듣지 않고 승부에 집착하여 제멋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중국 전국시대 말기 법치주의를 주창한 한비와 그 일파의 논저인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소위 ‘망국 십계명’ 한 구절이다. 민주주의를 거론할 여지라곤 없었을 그 시기에 승부에만 집착하는 지도자의 소아병적인 리더십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정확하게 설파한 대목이 신비롭다.문재인 대통령이 또다시 ‘협치(協治)’를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21대 국회 개원식 개원 축하 연설에서 “협치도 손바닥이 서로 마주쳐야 가능하다”며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공동 책임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은 그른 게 없다. ‘저를 포함한’이라는 수식어는 반성의 기미까지 읽힌다.그런데 두렵다. 그동안 청와대에 여야 지도부를 불러 대화를 할 적에도 문 대통령은 ‘협치’를 기대할 수준의 ‘공자 말씀’을 많이 했다. 그러나 돌아서면 곧바로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정치행태가 강공 일변도로 흐르곤 하던 기억을 우리는 갖고 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소리장도(笑裏藏刀)의 정치술수가 구사되는 건 아닌지 심히 의심쩍은 형편이다.문 대통령은 “적대의 정치를 청산하고 반드시 새로운 협치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내우외환의 협곡에 처박히고 있는 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그 황당한 모순의 중심에 ‘승자독식(勝者獨食)’에 찌든 집권당이 있다.‘협치’는 무조건 승자의 아량과 양보에서 출발한다.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굴종하게 만들 요량이라면 ‘협치’의 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지난 4·15총선 이후 더불어민주당은 ‘국민 통합’이나 ‘협치’의 미덕과는 멀어도 너무 먼 정치행태를 보여왔다. 전통적으로 야당 몫인 국회 법사위원장을 군사 작전하듯이 점령했고, 급기야는 18개 상임위를 모두 독점하고 있다. 그래놓고 매사를 야당의 비협조가 원인이라고 욱대기는 내로남불의 남 탓만 읊어대고 있다.집권세력의 의도적 오독(誤讀) 감염은 중증이다. ‘정치보복’이라고 써 놓고 ‘적폐청산’이라고 읽는다. ‘검찰 장악’이라고 써놓고 ‘검찰개혁’이라고 읽는다. ‘언론 장악’이라고 써놓고 ‘언론 개혁’이라고 부르댄다.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협치’를 강조했다. “공동 책임”이라고도 했다. 이런데도 민주당이 국회 법사위원장 자리를 토해내지 않는다면 이건 확실한 ’레임덕 현상’이다. 백선엽-박원순 사망을 기점으로 확산하고 있는 이념 갈등을 해소할 방책도 없이 지금처럼 지지자 결집만을 줄기차게 추구한다면 ‘협치’ 타령은 썩은 솜사탕이다. 그런 노래는 한낱 신기루요 공갈빵이다. ‘승부에 집착하여 제멋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하는’ 권력자들의 표리부동에 국운이 날로 위태롭다.

2020-07-19

‘외눈박이’ 거인들의 나라

안재휘 논설위원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은 빅브라더(Big brother)를 등장시켜 당원의 모든 것을 감시하는 전체주의 국가의 모습을 그려낸 소설 ‘1984’에서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표현을 등장시킨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이끈 윈스턴 처칠 역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진실만이 오롯이 담겨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그 무서운 역사조작의 징후는 오늘날도 끊임없이 감지된다.지난 주말에 유명인사 두 사람이 사거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느닷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도 향년 100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하루 사이에 잇달아 일어난 두 거물 인사들의 죽음이 또 한 번 민심을 두 쪽으로 갈라내고 있다. 걸핏하면 청백전을 벌이는 대한민국의 고질병이 또 한차례 도지고 있다.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박원순 시장의 자살은 시장실 여비서가 장기간 성추행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한 게 원인이 아니냐는 추측이 유력하다. 장례형식을 서울시장(葬)으로 치르는 일에 대한 저항이 심각하다. 공무상 순직도 아닌 ‘자살’에 요란을 떠는 게 맞느냐는 비판이 흐드러졌다.백선엽 장군은 동작동 국립현충원이 아닌 대전현충원으로 장지가 정해진 일을 놓고 말이 많다. 이 논란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논쟁을 일으켜 왔었다. 백선엽 장군은 6·25 한국전쟁에서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을 수습해 기적적인 반격을 지휘해낸 전쟁영웅이다. 그러나 젊은 날 소위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 토벌 활동을 했다는 전력이 질긴 꼬리표로 달려 있다.안희정, 오거돈이 미투(Me too) 폭로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 상황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급서로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민주당은 파장을 끊어보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그러나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슬퍼하는 같은 입에서 호국영웅 백선엽 장군 사망에 대한 애도의 말 한마디도 안 나오는 행태는 도무지 납득하기 어렵다.문득, 지난해 현충일 추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해 한동안 여론을 달구었던 항일 무장투쟁 영웅 약산 김원봉 서훈 논란이 떠오른다. 그가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을 지휘한 일을 간과할 수는 없다는 반론이 거셌다. 약산 선생에 대한 서훈 당위성이 주장되자 시중에는 “김일성에게도 훈장 주자고 하게 생겼다”는 걱정까지 나왔었다.마치 독립운동하다가 흉탄에 맞아 죽은 애국지사마냥 치러지고 있는 박원순 시장 장례 모습을 선뜻 공감하기란 어렵다. 어떻게 똑같은 사고체계를 갖고 백선엽 장군에 대해서는 그렇게 야박할 수 있는지, 그 지독한 편견과 모순에 찌든 열광적 ‘순수주의’의 테러리즘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우리는 지금 영락없이, ‘외눈박이 거인들의 나라’에서 철저히 무시당하는 난쟁이들 신세다. 평생 나랏돈의 낭비를 걱정해온 시민운동가 박원순이 지금의 이 거창한 야단법석을 과연 즐거워할까. 삼가 백선엽 장군과 박원순 시장 두 분의 영전에 명복을 빈다.

2020-07-12

‘주초위왕(走肖爲王)’ 데자뷔

안재휘 논설위원선조실록에는 1519년 11월, 그러니까 조선 중종 임금 때 훈구파가 기상천외한 모략으로 젊은 개혁파 조광조를 제거한 기록이 등장한다. 궁궐 뽕나무 잎에 꿀로 ‘조(趙)의 성을 가진 사람이 왕이 된다’는 뜻의 ‘주초위왕(走肖爲王)’ 글씨를 새겨 뜯어먹게 하고, 중종은 그 나뭇잎을 역모의 증좌(證左)로 삼아 조광조를 능주(전남 화순)로 유배했다가 사사했다는 역사다.몇 해 전 인하대학교 민경진 생명과학과 교수 연구팀은 흥미로운 연구결과 하나를 발표했다. 기묘사화의 발단이 된 ‘주초위왕’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었다. 실험팀은 관악산 일대에서 나뭇잎 뒷면에 임금 ‘왕(王)’자를 써두고 곤충의 섭식 여부를 조사했지만, 벌레가 먹은 나뭇잎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조선 시대에는 소문만으로 관리를 탄핵하는 풍문탄핵(風聞彈劾)이라는 어이없는 제도가 있었다. 누군가 탄핵을 받으면 사실 여부를 떠나 일단 그 자리에서 물러나 조사를 받는다. 그러나 탄핵 내용이 허위로 밝혀지면 그를 주도한 대간(臺諫: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리)이 처벌을 받았다. 풍문탄핵은 골육상쟁으로 치달은 사화 비극의 촉매가 되기도 했다.여당 정치인들의 ‘윤석열 찍어내기’가 점입가경이다. 정권 초기 전 정권을 겨눈 ‘적폐청산’의 날랜 칼솜씨로 집권세력의 온갖 찬사를 받던 윤석열 검찰총장이 법무부 장관과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가공할 융단폭격을 받는 중이다. 추미애 장관이 권력 핵심으로부터 ‘찍어내기’ 밀명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검찰총장을 향한 추 장관의 잇따른 발언의 품격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다만 자신의 과거 언행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이 한둘이 아니어서 추 장관이 멀쩡한 이성을 지키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한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부르대던 그가 ‘검언 유착’이라는 네이밍으로 수사 중인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대목은 아연실색할 정도다.‘검찰 개혁’의 본질은 ‘정치적 독립’이다. 그런데 추 장관이 조장하는 검찰 내부의 패싸움은 오히려 권력에 줄 서는 ‘정치검찰’을 양산하고 있다. 윤석열 총장의 행동이 ‘항명’이라면, 윤 총장에게 반기를 든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의 행태는 더 심각한 ‘항명’이다. 민주당은 혹여, 비망록에 ’검찰장악’이라고 써놓고 ‘검찰개혁’이라고 우기는 건 아닌가. 말 없는 윤 총장을 지지하는 국민이 늘어가는 민심을 엄중히 읽어야 할 것이다.‘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에 대한 인하대 연구팀의 연구결과를 놓고 ‘그런 사건이 없었다’고 해석하는 건 심각한 오류다. 조광조를 왕권 강화에 이용한 중종은 급진개혁에 피로를 느꼈고, 훈구 세력은 그 틈을 파고들어 역모를 조작하는 ‘풍문탄핵’으로 기묘사화를 일으켜 신진 사대부들을 제거한 것으로 읽는 해석이 상식에 부합한다. 인하대 팀의 실험은 그 시절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실험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꿀을 먹자고 글자를 따라 이파리까지 뜯어먹는 멍청한 벌레는 없다.

2020-07-05

‘북한 비핵화’…그 가혹한 희망고문

안재휘논설위원최근 확인된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정책 기조에 대해 TK(대구·경북)의 여야 대권 주자들의 엇갈린 반응이 눈길을 끈다.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전 의원은 “화해의 손길엔 적극 협력하되 도발은 강력히 응징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뜻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다. 그러나 미래통합당 유승민 전 의원은 “북핵은 남한을 겨냥한 게 아니라는 착각에 빠져 (문 대통령이) 북한에 굴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북한의 냉탕-온탕을 오가는 분탕질 바람에 6·25전쟁 70주년이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지나갔다.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은 김여정이 앞장서서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는 온갖 험구들을 쏟아내며 시작됐다. 남북 긴장 고조는 우리의 천문학적 수치의 혈세가 투입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무도하게 폭파하는 시점에 최대치로 끌어올려 졌었다. 그러나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에서 “대남 군사행동 계획을 보류하라”고 지시했다는 보도가 나온 후 북한은 모든 도발 책동을 돌연 중단했다. 과연 수령 1인 통치 독재국가의 전형적인 행태가 또다시 드러난 셈이다.그런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이 펴낸 자서전 한 권이 여론을 들쑤시고 있다. 그의 자서전 내용에 언급된 문재인 정권에 대한 일종의 평가절하를 놓고 야당은 ‘그러면 그렇지’하는 심사로 내막을 밝히자고 파고드는 중이고, 여당은 볼턴을 잡놈 취급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볼턴의 주장을 종합하면, ‘북미 정상회담’은 애초부터 문재인 정권의 실속 없는 작품이고, 문 대통령이 중간자 역할을 하면서 양쪽의 뜻을 너무 낙관적으로 전달하는 바람에 파탄이 났다는 것이다. 판문점 회동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문 대통령이 부득부득 갔다는 폭로는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는 대목이다.문제의 핵심은 여전히 ‘북핵 폐기’다. 우리 국민은 물론, 온 세계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숙제는 ‘북한 비핵화’인데 그게 1인치도 진전되지 않았다. 북한은 핵을 완성할 시간을 넉넉하게 벌었고, 실질적 핵보유국이 돼가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려워졌다.굴종으로 유지되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북한 비핵화’라는 희망고문에 순치된 국가안보와 무장해제 상태에 접어든 국민 정서는 대한민국의 존폐문제에 직결돼 있다. 이제 ‘북핵 폐기’는 환상으로 끝났고 ‘핵 균형’ 같은 수단만이 남게 된 형국이 아닌가 느껴진다.‘강력한 국방력’이나, ‘한미동맹 강화’를 말하면 무조건 수구꼴통 취급하는 진보 인사들의 편견은 틀려도 한참 틀렸다. 위정자들은 이제 국민을 ‘북한 비핵화’라는 희망고문 속에 더 이상 가두지 말아야 한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말처럼 김정은은 핵을 폐기할 의사가 조금도 없는 게 분명하다. 힘으로 지키는 평화만이 참된 평화다. 상대방의 선의에만 의존하는 낭만적 평화론은 백해무익할 따름이다. 김부겸의 말과 유승민의 말이 모두 ‘평화’를 염원한다는 차원에서 같은 말이었으면 좋겠다.

2020-06-28

‘봄’이 폭파되다

안재휘 논설위원중매에는 ‘잘 하면 술이 서 말이요, 잘못하면 뺨이 석 대’라는 속담이 따라다닌다. 속담은 중매가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어렵다는 경계를 전한다. 사전적 의미로 혼인은 억지로 권할 일은 못 된다는 말이기도 하고, 중매 또한 함부로 할 일이 못 되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깜냥도 안 되는 서툰 사람이 큰일을 망친다는 뜻의 ‘반풍수 집안 망친다’는 속담도 있다.한반도 비핵화라는 세기적 과업을 목표로 하는 북미회담의 중매 역할을 자임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렸다. 북한이 예고했던 대로 개성공단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저들이 끝내 ’남북 합의’ 전면 파기 수순에 돌입하는 사태를 보면서 왕조 세습국가 북한을 설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절감한다. 요 몇 해 남북이 ‘봄이 온다’, ‘봄이 왔다’ 운운하며 열광했던 ‘평화의 봄’은 연락사무소 폭파 쇼로 끝장이 났다.평화는 ‘평화 타령’만으로 지켜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재확인된 셈이다. 굴종으로 잠시 유보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무래도 신변이 무탈하지 않은 것 같은 김정은의 형편과 재선 가도에 빨간 불이 켜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지 사이에서 한반도의 작금 상황은 매우 엄중하다. 우리의 의지와 아무 상관 없이 미지의 시한폭탄이 작동되고 있는 느낌이다.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코너에 몰린 것인가. 지난 일들을 차례로 복기해보면, 북미회담에 대한 문 대통령의 섣부른 ‘낙관’이 중대한 원인으로 짚어진다. 때마침 폭로되고 있는 존 볼턴 전 미국 대통령 안보보좌관의 고백 속에 힌트가 있다.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에 전혀 관심이 없이 사진찍기에 혈안이 됐던 트럼프와 내부 갈등을 빚은 볼턴의 장난질을 간파해내지 못한 패착이었던 것으로 유추된다.절박했던 것은 우리뿐이었다. 집권 이래 ‘세계 대통령’의 지위를 포기하고 국수주의(國粹主義)적 외교 행태를 보인 트럼프는 한반도의 운명을 한바탕 체스판처럼 다뤘는데, 청와대는 그걸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북미회담에 대한 문 대통령의 희망 섞인 낙관은 결국 양쪽으로부터 세찬 원망을 듣게 되는 최악의 결과를 빚고 말았다. ‘조선반도 비핵화’와 ‘북한 비핵화’의 근본적 차이를 묵과한 문 대통령의 전술이 실패로 귀결된 것이다.이제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 반미 운동권이 ‘대북 전단’과 ‘한미워킹 그룹’을 철천지원수 삼아 잡드리하는 행태에서는 그 어떤 해법도 있지 않다. 희생양을 자처한 김연철 통일부 장관의 퇴임사에 성성한 날카로운 가시들을 잘 읽어야 한다. 최소한 지금처럼 낭만주의 평화론에 찌든, ‘무능한’ 청와대 참모들과 국정원으로는 출구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평화 쇼를 연장하며 시간을 번 북한의 핵 무력은 한층 업그레이드돼 있을 게 분명하다. 시계 제로의 안개 속에 묻힌 나라의 아찔한 운명 앞에, 우리는 연일 조마조마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2020-06-21

‘김여정’과 ‘진중권’

안재휘 논설위원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의 대남 말 폭탄이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 일부 탈북인들이 북에 두고 온 부모 형제들을 깨어나게 해야 한다며 풍선에 매달아 날려 보내는 대북 전단을 문제 삼더니, 이제는 아예 전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비방들을 연일 쏘아대고 있다. 13일에 날아온 김여정의 폭언 미사일은 실로 오싹한 내용을 담고 있다.김여정은 이날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담화에서 “확실하게 남조선 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하다”며 “다음번 대적(對敵) 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멀지 않아 쓸모없는 북남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북한의 도발과 생트집에 대해서 국방부는 물론 우리 정부 누구도 까칠하게 되받아치지 않는 진짜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어엿한 대한민국 국민이 된 탈북인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를 김여정 한 마디에 마치 창고 안에 든 빈대 때려잡듯 온갖 부처가 다 나서서 타작 놀음을 하는 것도 일단 북한의 생떼를 달래기 위한 궁여지책이라고 치자.그런데 아주 엉뚱한 곳에서 이와 대비되는 야릇한 공방이 벌어졌다. 바로, 재야 평론가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한 마디에 발끈하여 집권세력이 앞다투어 모다깃매를 가하고 있는 행태다. 정의당 당원 출신으로서 ‘진보 논객’임을 자부하는 그는 지난 조국 사태를 기점으로 집권당에 대해 예리한 비판의 메스를 가하고 있다.그는 얼마 전 국민의당 초청 강연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겨냥해 “대통령에게 철학이 없다, 의전 대통령처럼 느껴진다”는 인상비평성 발언을 내놨다. 그러자 윤영찬, 하승창, 최우규 등 전·현직 청와대 참모들이 너도나도 나서서 그 발언을 융단폭격했다. 신동호 청와대 연설비서관은 기형도 시인의 시 ‘빈 꽃밭에서’를 동원해 비난 대열에 동참했고, 진중권은 곧바로 ‘빈 똥밭’이라는 패러디 시로 응수했다. 진중권은 “품격과 예의를 갖추라”는 신동근 민주당 의원의 공격에 대해서는 “대통령을 향해 ‘쥐박이’·‘귀태’라고 한 건 민주당”이라며 반격했다.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 진중권의 비평 한 마디에 떼거리로 달려들어 몰매를 퍼붓는 충신(?)들이 핵 위협을 일삼는 북한의 막강한 실력자 김여정이 문 대통령을 향해 퍼붓는 악담에 일언반구라도 반박했다는 소식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말이 안 되는 이중잣대다.더 걱정스러운 것은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우상화가 빚어낼 반민주적 통치행태다. 우리의 정치는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이 분산되고, 소수의견도 알뜰히 존중되는 다양성 충만한 선진 민주정치로 발전돼가야 한다. 김여정의 폭언에는 찍소리도 못하면서 건전한 표현의 자유는 충성경쟁을 벌이면서 무참히 깔아뭉개는 이중성은 타파돼야 한다. 진영논리가 빚어내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의 도그마 앞에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휘청거리고 있다.

2020-06-14

‘승자독식(勝者獨食)’의 저주

안재휘 논설위원“국민 여러분. 뭐든지 말해 보세요. 다 들어보고 결국은 내 마음대로 하겠습니다.”문재인 정부의 소통(疏通) 방식을 놓고 시중에 나도는 눈물 나는 패러디다. 여야 수뇌부가 청와대에 모여서 ‘협치’ 합창을 부른지 불과 며칠만에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이 펼치기 시작한 뒤끝 작렬, 일방통행, 승자독식 행태가 가관이다. 총선에서 대패한 미래통합당은 꽤 오래도록 힘을 쓰기 어렵게 생겼다.‘법대로’에 대한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의 현란한 마술부터 시작됐다. 민주당은 ‘총선 후 첫 임시회를 의원 임기 개시 후 7일 이내에 개최한다’는 국회법 5조 3항의 개원 규정을 존중해야 한다면서 53년 만에 단독개원을 강행했다. 지난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공수처법) 본회의 표결 당시 기권표를 던진 금태섭 전 의원에게 뒤늦게 ‘경고’ 징계 처분을 내렸다. ‘의원이 소속당의 의사에 귀속되지 않고 양심에 따라 투표한다’는 국회법 114조 2항은 존중되지 않았다.중요한 것은 이 조치가 앞으로 민주당을 일사불란, 만장일치, 단일대오 형태의 독재정당으로 운영하겠다는 신호탄이라는 점이다. ‘비민주적’이라는 지적을 반박한 이해찬 대표의 논리는 해괴하다. 그의 궤변을 요약하면 “당 대표가 먼저 말하지 않고 의견 다 들어본 다음 마지막에 마음대로 정리해 얘기하면 그게 민주주의” 정도로 된다.177석 민주당의 의기양양은 무시무시하다. 민주당 이수진 의원은 자신에게 실력이 없다고 폭로한 법관에게 “탄핵하겠다”며 복수의 칼을 내밀었다. 재판과 옥살이까지 다 끝난 한명숙 전 총리 사건도 뒤집겠다고 나섰다. ‘예술·학술·보도 등의 목적’으로 하는 표현의 자유까지 말살할 수 있도록 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왜곡행위 처벌법도 결국 통과시킬 것으로 예측된다. ‘친일’ 목록에 들어간 유공자들은 국립묘지에서 파묘(破墓)를 당해 부관참시의 횡액을 당하게 생겼다.30년간이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앵벌이 수단으로 악용했다가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로 위기에 몰린 윤미향 의원도 민주당 대표의 강력한 비호 아래 당분간 무사할 것 같다. 대한민국은 지금 또 하나의 잔혹한 ‘승자의 역사’를 기록하는 중이다.통합당의 최연소 남성 당선인 김병욱(포항남구·울릉) 의원이 언론 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의 필요성을 거론했다. 불과 8%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도 의석수는 177대 103이 돼버린 소선거구제의 모순을 지적한 발언이다. 그러나 거대 여당 민주당은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다.‘중대선거구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지역주의 극복과 정치 다양성 수렴, 사표(死票) 방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제도였다. 미래통합당은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꿀단지에 빠져 살던 긴 세월의 모순을 반성해야 한다. 지금 초라한 제1야당이 되어 당하고 있는 능멸은 그 어리석은 권력 놀음의 쓰디쓴 업보다. ‘견제와 균형’의 미덕이 사라져가는 여의도 국회는 지금 승자독식의 저주에 휩싸인, 이 나라 민주주의의 쓸쓸한 무덤이 돼가고 있다.

2020-06-07

‘민주당 시계’, 또 거꾸로 돈다

안재휘 논설위원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대개가 ‘승자의 역사’다. 길고 긴 야만 시절 이긴 자들은 어김없이 패자의 진실을 철저하게 말살하고 왜곡해왔다. 역사 기록에 남은 옳고 그름은 치명적인 조작 여지가 내재돼 있다. 단지 힘으로 이겼다는 이유로 승자가 언제나 ‘참’일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이치는 조금만 고민해봐도 다 알 법한 진실 아닌가.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대부 오자서(伍子胥)는 사사로운 원한을 풀고자 한때 자기가 모시던 초평왕의 주검을 끄집어내어 목을 끊고 구리 채찍으로 300대의 매질을 가했다. 이른바 굴묘편시(掘墓鞭屍)의 고사다. 우리 역사에서 무덤에서 시신을 꺼내어 다시 목을 자르는 잔혹한 부관참시(剖棺斬屍) 형벌을 일삼은 폭군은 연산군이었다. 생모인 폐비 윤 씨의 사사(賜死) 비극에 원한을 품은 연산군은 김종직·송흠·한명회·정여창·남효온·성현 등 여러 명에게 끔찍한 한풀이를 했다.지난 2007년 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노무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 있었는지, 회담록을 수정하거나 폐기했는지의 공방이 벌어졌을 때, 민주당은 ‘부관참시’라며 반발했었다. 일부 극우 인사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 훼손을 시도하고, 국립현충원 앞에서 묘소를 파헤치는 퍼포먼스까지 벌여 시끄러웠던 일도 기억난다.유례를 찾기 힘든 총선 대승으로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더불어민주당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 나왔다. 1987년 북한 공작원들에 의한 KAL 858기 폭파 사건 진상 조사 결과를 재검증하자는 주장도 다시 불거졌다.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현충원에 있는 친일파 무덤을 파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그동안 진보 일각에서는 ‘친일 인명사전’을 기준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된 60여 명을 계속 문제 삼아 왔다. 여권 내에서는 여수·순천 사건 재조명, 동학농민혁명의 명예회복 등도 추진되고 있다. 이 같은 무분별한 과거지향 행태에 대해서 일부 네티즌들은 “살수대첩도 재조사하자고 할 거냐”는 비아냥을 퍼붓기도 한다.민주당이 왜 또 과거사 뒤집기에 나서고 있는지를 놓고 여러 해석이 나돈다. 가장 설득력이 있는 분석은 ‘2022년 대선 준비’다. 민주당의 정치전략은 철저하게 과거사를 이슈화해 한(恨)을 끄집어내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을 수구꼴통 불의세력 프레임에 가두는 선동기법에서 출발한다. 지난 선거에서 연전연승한 결정적인 비결이기도 하다.그러나 이제 이런 ‘갈등 재생산’ 방식의 정치는 삼가야 한다. 코로나19라는 악마적 바이러스 발톱에 무참히 할퀴어 생존 여부를 놓고 전전긍긍하는 국민 앞에 매머드 여당이 혐오를 퍼뜨리는 정치공작만을 궁구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모처럼 건강한 정책 야당이 되고자 몸부림치는 제1야당과 함께 미래를 겨루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냄새나는 쓰레기통 엎어놓고 선동질에 몰두하는 정치로는 위기의 대한민국을 살릴 수 없다.

2020-05-31

통합당, ‘국민’ 편에 서라

안재휘 논설위원“개념이란 우리가 이것을 실천적으로 검증할 수 있을 경우에만 옳은 것이고, 행동의 결과로 나타낼 수 없으면 무의미하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 창시자인 퍼스(Charles Sanders Peirce)의 정의다. 실용주의 정신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능동적인 실천을 통해 미래를 지향해 가는 하나의 원동력으로서 극대화된다는 논리다. 실용주의란 투철한 ‘현실 인식’과 ‘실천력’, ‘미래비전’을 함께 수반할 때 가치가 있다는 얘기쯤으로 의역될 수 있을 것이다.이틀간의 21대 총선 당선자 워크숍을 마친 미래통합당이 ‘실용정당’을 표방했다. 총선 참패로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는 통합당은 긴 논란 끝에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기로 하고, 머뭇대던 미래한국당과의 통합도 29일까지 매듭짓는 것으로 결정했다. 주호영 원내대표가 발로 뛰고, 다수의 초재선 당선자들이 힘을 합쳐 밀어준 결과로 해석된다.워크숍이 끝난 뒤 배현진 원내대변인이 발표한 성명에는 중요한 대목이 많다. 우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눈에 띈다. “언제나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해 싸우겠다”는 선언도 시원하게 들린다. “익숙했던 과거와의 결별 선언을 한다. 오직 국민만 있고 국민 눈높이에 맞는 실용 대안 정당을 만들겠다. 대안과 혁신으로 가득한 미래만 있다”는 맹세도 뜻 깊이 들린다.실용주의 창시자 퍼스가 말한 세 가지 요소 중에서 일단 첫 번째 항목인 ‘현실 인식’ 측면에서는 꽤 많은 성찰이 이뤄진 것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동안 좀처럼 탈출하지 못했던 ‘꼴통보수 감옥’에서 비로소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든다. 부디 선언문의 약속 조목조목처럼 확 달라지기를 성원한다. 하지만 통합당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리 다사롭지 않다. 형편없이 기울어진 운동장 아래쪽에서 정말 그 모든 걸 실천해낼까 하는 의심도 깊다.실천력을 담보해낼 응집력과 지혜는 튼튼한 기초체력에서 나온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히딩크는 모든 파벌의 넝쿨들부터 한칼에 잘라냈다. 한동안 기술훈련 대신 기초체력을 키우는 고강도 훈련만 시켰다. 경기에 거듭 대패해 ‘오대빵’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그래도 히딩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의 프로그램대로 밀고 나갔다.월드컵 본선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진가는 드러났고, 전무후무의 ‘4강 신화’를 기어이 이룩해냈다.통합당은 히딩크의 한국축구 월드컵 4강 신화에서 힌트를 찾을 필요가 있다.권력자들끼리만 주고받는 게임의 법칙부터 깨부숴야 한다. 이제 더이상 낡은 ‘권력’ 편에 서면 안 된다. ‘국민’ 편에 서서 국민이 듣고자 하는 목소리로 국민을 설득하는 기초능력부터 키워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진 공리공론의 늪에서 탈출해야 한다. ‘실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 인식’은 실용이 아니다. ‘미래비전’이 없는 ‘실천력’ 또한 실용의 범주 바깥에 있다. 통합당의 미래는 비로소 실험실에 있다.

2020-05-24

‘태종·세종’이 왜 거기서 나와?

안재휘 논설위원정치권이나 정치 논객들이 종종 써먹는 비판 용어 중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라는 비유가 있다. 용비어천가는 원래 조선 세종 때 선조인 목조(穆祖)에서 태종(太宗)에 이르는 6대의 행적을 노래한 서사시다. 정치 이야기에서 이 말은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이 특정 실세 보스를 향해 비판의식을 거세하고 과장된 수사법으로 칭송만 일컫는 현상을 비꼬기 위해서 주로 동원된다.지난 4·15총선 결과와 관련해 여당의 대승을 진작 예견했다는 반응이 없지는 않지만, 뜻밖이라는 표정도 상당수다. 야당을 지지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라는 표현까지 쓰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라는 탄식이 많다. 그 정서를 타고 일부의 메아리 없는 ‘부정선거’ 주장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개헌선에 육박하는 숫자의 거대한 ‘범여권’ 의석을 당당히 거느리게 됐음은 역연하다.느닷없이, 여당 정치권에서 듣기 민망한 문비어천가(文飛御天歌)가 잇따르고 있다. 강원도지사에서 영어(囹圄)의 신세로 전락했다가 와신상담 끝에 국회로 돌아온 민주당 이광재 당선자가 시작했다. 그는 노무현재단의 유튜브 특별방송에서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은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롭게 과제를 만드는 태종 같다”며 “이제 세종의 시대가 올 때가 됐다”고 말했다.그러나 그 며칠 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3년 동안 태종의 모습이 있었다면 남은 2년은 세종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것이 참모로서의 바람”이라고 고쳐 말했다. 이광재 당선인이 문재인 대통령을 노 전 대통령에게 ‘끼워팔기’하듯 표현한 일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그는 문 대통령에게 ‘태종+세종’ 이미지의 화려한 포장지를 붙였다.정세균 총리까지 칭송대열에 동참했다. 정 총리는 페이스북을 통해 “지난 3년은 대통령님의 위기극복 리더십이 빛난 시기”라고 찬사를 띄웠다. 이쯤 되면 정부·여당 내의 작금 분위기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총선 압승 결과를 만들어낸 최대의 공신으로 불가사의한 지지율 고공행진을 일궈낸 문재인 대통령이 꼽히는 분석은 부인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그 시혜를 풍성히 받아든 여권 인사들이 감탄을 외치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태종+세종’은 너무 심했다. 왕권강화로 조선의 기틀을 세운 태종과 백성을 사랑한 불세출의 군주 세종을 함께 묶어 붙이는 찬송가는 좀처럼 소화하기 버겁다. “나라가 조선 시대로 돌아간 듯하다”는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의 촌평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민주주의가 만개한 나라에서 왜 하필이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봉건시대 군주들의 이름을 줄줄이 소환하는지 께름칙하다. 총선 대승이 아무리 흥겹더라도 꼭 기억해야 할 덕목은 있다. 내리막길에 정말 필요한 것은 액셀러레이터가 아니라 브레이크라는 교훈을 아주 망각하지는 말기를 부탁한다. ‘태종·세종’이 왜 거기서 나오나.

2020-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