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봉 대구지사장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정철의 사미인곡 일부다.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관동팔경은 가사문학의 극치로 꼽힌다.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동방의 이소요,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이 3편뿐”이라고 극찬했다. 사미인곡 등 3편은 우리나라의 이소(離騷)지만, 한자로는 쓸 수가 없다. 구전과 한글로 전해질 뿐이다. 어떤 이가 칠언시로 ‘관동별곡’을 번역했지만, 아름답게 될 수가 없었다. 내용은 전달할 수 있었지만, 원작의 표현 맛이나 묘미가 살아나지 않았다.‘….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 밟고 가소서….’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김소월의 진달래꽃과 청록파 시인 박두진이 해방의 기쁨을 표현한 ‘해’라는 시의 일부다.국민이 애용하는 시다. ‘사뿐히 즈려 밟고 가라’는 말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라는 표현은 영어로도, 불어로도, 그 어떤 언어로도 그 속에 담긴 애틋한 마음과 벅찬 감흥을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다. 우리 글의 묘미는 한글로 표현했을 때 그 깊이를 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인도의 승려인 구마라습은 “천축인의 찬불사는 극히 아름답지만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면 단지 그 뜻만 알 수 있지, 그 말의 오묘한 뜻은 알 수 없다”고 했다.한글의 감칠 맛은 아무리 외국어로 번역을 잘 해도 그 오묘한 뜻과 맛은 표현하기 어렵다. 시어로 남아있는 한글의 아름다움이 더욱 그렇다. 한글 파괴와 줄임말이 난무하는 한글날이 애닯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