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타인과 화해하는 삶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타인과의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부모와 먼저 만나고 형제 자매를 접한다. 소꿉친구를 만나 놀다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고 직장에서도 동료를 만난다. 인간은 가족, 이웃, 사회 공동체, 국가 공동체와 관계를 확대하면서 생활하는데 이를 생활원리 확대의 원리라고 부른다. 인간의 삶은 태어나서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러한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나아가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종교적으로 초월적인 절대자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인간의 삶도 결국 타인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이다. 이 모든 관계에는 바람직한 도덕율이 존재한다.현대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이러한 관계망이 흐트러지고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가족 간에도 도덕률이 흐트러져 불화의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혼율이 증가하고 파탄 가정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친구 간에도 끈끈한 우정은 사라지고 이해관계로 변질되고 있다. 사회 공동체 내의 경쟁은 날로 치열하고 인간의 관계는 더욱 이기적인 관계로 변질되고 있다. 사회 공동체 내의 개인간뿐 아니라 집단간에도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인간의 관계망은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더욱 흐트러지고 있다. 세계 최빈국인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가 오히려 높다니 이상한 일이다. 산업화 근대화의 역설적인 비극이 도처에서 발생한다.이 같은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인간이 공동체 내의 타인과의 관계도 바람직하게 설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타인으로부터 약간의 공격만 받아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타인에 대한 극한 감정으로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자존감이 결여되고 그런 사람일수록 타인과의 관계도 원만치 못하다. 독재자일수록 자존감이 결여된 사람이라는 분석도 있다. 윤리학자들은 인간이 타인과의 화해하는 방식을 제시하지만 그 실천은 어렵다. 타인과 불화의 증가는 사회 공동체의 위기구조를 양산한다.부활절이 가까이 오고 있다. 모든 종교가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용서는 사실상 어렵다. 용서라는 말은 쉬워도 인간의 감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누구나 트라우마로 오래 간직한다. 용서는 결국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남을 미워하면 상대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망가진다. 주변에는 자신을 괴롭힌 상대를 죽을 때까지 보복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미운 상대가 죽기 전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보았다. 자신부터 비워야 용서가 가능하다. 용서는 상대의 잘못된 행위만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행동과 인격의 탈동일시(脫同一視)라고 부른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법언과 같다.타인과 화해하기 위한 용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용서는 마음만 고쳐먹으면 어렵지 않게 할 수도 있다. 먼저 타인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감정부터 잘 이해해야 한다. 세상에는 오해로 인한 불화가 많고 그것이 때로 평생 갈 수도 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는데 상대는 그것을 ‘나의 자랑’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까지 있다. 모두 오해가 빚은 결과이다.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 습관’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지하철에 어린아이 두 명을 데리고 전철을 탄 아빠가 있었다. 차가 움직이자 두 아이가 천방지축으로 날뛰면서 울부짖었다. 차안의 승객들은 버릇없이 잘못 기른 이 아이들의 아버지에게 비난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승객들은 그 아이들이 교통사고로 숨진 어머니 장례를 치른 직후였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기 위해서는 역지사지하여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용서는 내가 상대를 향한 결심이기에 우선 나부터 상대를 용서해 보자.

2019-03-31

‘개방된 사회’의 새로운 적은 누구인가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칼 포퍼의 제자인 조지 소로스가 오늘날 21세기 열린사회의 적으로 중국의 최고 지도자 시진핑을 지적하여 화제를 낳고 있다. 세계적인 투자의 귀재로 알려진 그는 한국을 방문하여 투자처를 찾은 적이 있다. 그는 몇 해 전 한반도의 남북이 화해하고 ‘사실상의 통일’로 간다면 1인당 국민 소득이 8만 불이 넘어 세계 2위가 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한반도에 평화가 오면 전 재산을 한반도에 투자할 용의가 있음도 밝혔다. 지난달 그는 또 다시 골프장 사외이사 자격으로 지난달 한국을 방문하였다. 그는 최근 중국의 시진핑을 열린사회의 새로운 적으로 간주하였다. 그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사회 철학자 칼 포퍼는 ‘개방된 사회와 그 적’이라는 책을 통해 유명해졌다. 포퍼는 개방 사회를 가로막는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였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공산주의의 창시자 마르크스를 2대 원흉으로 본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이상국가론에서 자신과 같은 철인이 지배하는 계급사회를 주창하였다. 국가를 보위하는 군인 계급과 생산자 계급이 지도자인 철인을 잘 보필해야 이상국가가 성립된다는 취지이다. 그러나 포퍼는 이러한 통치자, 방위자, 생산자 계급 분담 사회가 불평등 구조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퍼는 플라톤을 계급주의자로 몰아세워 개방사회의 첫 번째 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포퍼는 칼 마르크스를 개방된 사회의 두 번째 적으로 간주하였다.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인 마르크스는 당시 자본주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계급 없는 공산 사회’론을 제시하였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눈물도 한숨도 없는 이상적인 사회를 약속했다. 그러나 마르크시즘에 기초한 공산국가는 계급독재를 강화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포퍼는 마르크시즘을 개방된 사회의 또 다른 적으로 간주하였다. 마르크스가 살아 있었다면 무척 화가 나 이에 강력하게 항의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풍요가 시작되는 영국 런던 대영도서관에서 글을 쓰다 생을 마감하였다. 포퍼의 시각에서는 마르크스 이론에 토대한 소련식 사회주의는 전체주의화하여 개방된 적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연장선에서 소로스는 다보스 포럼의 공개 석상에서 중국의 시진핑을 개방사회의 또 다른 적으로 간주하였다.그가 시진핑을 개방된 적으로 규정한 것은 시진핑의 통치 철학과 지도노선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사회의 개방화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천안문 시위는 중국 당국에 의해 오래전 좌절되고 말았다. 시장 경제를 지향하는 중국이지만 아직도 당의 통제는 강화되고, 인권의 사각지대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언론과 종교의 자유는 물론 학문의 자유마저 봉쇄되고 시민의 권리는 이중 삼중으로 통제되어 있다. 시진핑의 ‘일대 일로’라는 외교 정책 역시 제3세계에 대한 지원이란 명분으로 지배와 착취를 자행한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전체주의적 통제를 강화하는 시진핑은 개방된 사회의 새로운 적이라는 입장이다.이러한 시각에서 포퍼의 ‘개방된 사회의 적’은 언제나 등장할 수 있다. 포퍼나 소로스가 개방 사회에 역행하는 이데올로그들을 적으로 간주한 논리는 정당성을 지닌다. 우리는 인권과 존엄성이 보장되는 개방 사회를 지향하는데 이를 방해하는 세력은 모두 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오늘날 한반도에서 개방된 사회의 적은 누구일까. 우선 분단 상황에서 분단 고착세력과 북의 개방을 가로 막는 전체주의적 세습체제는 개방된 사회의 적으로 간주할 수 있다. 남한 사회에는 과연 개방된 사회의 적은 없는가. 남한의 정치 사회적 민주화 과정에서 인권을 탄압하거나 권력유지에 혈안이 되었던 세력은 ‘개방된 사회의 적’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이다. 촛불혁명 이후 보수와 진보 간에는 이념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이들은 아직도 상대를 개방된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후일 역사는 이를 어떻게 평가할지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2019-03-24

자신과 화해하는 삶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여러 해 동안 학기 시작 초 대학생들에게 ‘나는 누구입니까’라는 제목의 한 장짜리 리포트를 부여한바 있다. 정답이 없는 자유로운 숙제인데도 학생들은 쓰기가 힘들다고 했다. 대부분의 학생이 자신의 성장과정, 가족 관계, 현재의 입장만을 열거하고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술하는 데는 부족했다. 종교를 가진 일부 학생들이 자신의 절대자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자신 있게 써 내려가기도 했다. 특이한 것은 상당수의 학생들이 자신의 현재의 삶에 만족치 못하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다. 결국 그것이 자신과 화해(和解)하지 못하고 자존감마저 상실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세상에는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여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외적 평가나 자극에만 민감하여 내적으로 자신의 헛된 욕망을 채우려는 경향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자신을 비하하거나 과시하는 것도 ‘거짓 자아’에 의존한 결과이다. 거짓 자아는 때로는 열등감으로 때로는 상대에 대한 지배나 공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은 이를 ‘자기 방어’ 기제라 명명하였다. 자신의 결점이나 능력을 감추기 위하여 자신을 방어하려는 욕망은 거짓 자아와 결합한다. 인간이 강한 자에게 아부하고 약한 자를 괴롭히는 매저키즘이나 새디즘적 본능도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인간의 삶에는 실수도 있고 실패도 있다. 그것이 때로는 상처로 남는다. 결국 그것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신과 화해하지 못하는 요인이며 자존감을 상실케 하고 타인과의 관계마저 단절시킨다.자신과 화해하는 삶은 자신의 참 자아에 일치하는 삶이다. 인간은 자신을 바르게 알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우리 주변에는 자존감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 사회적 일탈행위나 자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려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다. 자신의 약점과 장점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긍정적인 삶이 자신과의 화해하는 길이다. 그것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는 삶이며 자신의 부족을 메우려는 긍정적인 삶이다. 그러한 삶속에는 거짓자아는 발동할 수 없으며 에릭슨은 이를 ‘통합자아’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자신과 화해하는 삶은 신앙인이 절대자 앞에서 겸손하듯이 자신에게 정직하고 솔직한 삶이 될 수 있으며 행복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정직하고 공정한 사회는 자신과 화해한 사람이 많은 사회이다. 자신을 위로하고 칭찬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삶의 만족도가 높은 사회이다. 도덕성과 준법성이 살아 숨 쉬는 선진사회는 대체로 개인의 긍정적 자아가 발달한 사회이다. 우리의 삶에는 물질과 경제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어선 선진사회라고 하지만 아직도 문화적으로 성숙한 사회는 결코 아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자살률이 세계 1위이고 교통사고가 빈발하고, 정치적 갈등이 난무하는 사회이다. 일본의 집단주의적 정치는 형편없지만 국민 개개인의 민도는 우리보다 높다.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며 그것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다. 우리도 극일(克日)을 위해서 그들 개개인의 정직성을 배워야 한다.우리가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거짓 자아를 버리고 참 자아를 마주해야 한다. 참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조용한 자기 성찰이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 주변의 널려있는 매스미디어는 참 자아를 방해하고 자신과 화해까지 가로막고 있다. 그렇다고 자신과의 화해는 인격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대인은 바쁠수록 일기를 쓰는 등 자신과 대화 시간이 필요하다. 다행히 여러 종교의 가르침이 그것을 안내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기도와 묵상, 불교의 참선은 결국 인간이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함을 일깨우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자신과 화해하는 성찰의 계절이 되길 바란다.

2019-03-17

하노이 회담과 김정은의 정치 행태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세계적인 관심사 하노이 북미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세기의 담판은 빅딜도 스몰딜도 아닌 노딜(no deal)로 끝나고 만 것이다. 김정은은 그의 부친 김정일과 달리 언론 노출을 기피하기 보단 즐겨하는 편이다. 지난해 싱가포르의 회담에 이은 이번 하노이에서의 그의 노출은 세계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는 조부 김일성의 인민복과 같은 옷을 입고 베트남의 하노이를 방문했다. 그는 중국을 종단하여 하노이까지의 당 간부와 수행단을 이끌고 66시간, 2박3일을 열차로 이동하는 장정(長程)이었다. 하노이 북미 회담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번 여행에서 그가 보인 몇 개의 정치 행태에 관한 함의를 분석해 본다. 트럼프와 첫 만남 시의 김정은의 표정은 예상과 달리 매우 초조해 보였다. 싱가포르에서의 첫 상견례시보다 그는 불안하고 당황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2천500만 조선인민의 수령인 그의 태도는 약간 겁먹은 표정이었으며 자연스럽지 않는 웃음을 짓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니 그는 톱다운(top down)식의 정상회담에 앞선 미팅에서 트럼프에게 모험적인 배팅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는 영변 핵시설 정도만 폐기하면 미국이 대북제재를 풀 수 있다고 오판한 결과이다. 내년 미국 대선을 앞둔 트럼프를 북한식 ‘벼랑 끝 전술’로 밀어붙여 결판을 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협상과 계산에 빠른 노련한 트럼프는 이를 덜컥 수용할 수 없었다. 영변시설 외의 플러스알파를 요구했던 것이다. 김정은의 초기의 불안했던 표정을 이해하는 포인트이다.김정은은 열차 이동 중 간이역에 내려 담배 피우는 장면이 노출되었다. 애연가 김정은이 담배를 피우고 여동생 김여정이 재떨이를 받치는 모습이다. 중국 당국의 철통보안을 뚫고 끈질긴 일본 사진 기자가 포착한 특이 장면이다. 머리가 흐트러진 김정은이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고, 동생이 재떨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북한의 독특한 측근 정치의 실상이 노출되는 순간이다. 20대 후반의 김정은이 북한의 노령 간부들 앞에서도 수시로 담배를 피운 것은 수령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행태일 것이다. 고도 비만인 김정은은 의료진의 권고도 무시하고 술과 담배를 즐긴다. 이를 제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이 북한 정치체제의 불행이며 한계이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후 두문불출하던 김정은이 하노이 주재 북한 대사관을 방문한다. 대사관 정문에서부터 수령 김정은을 맞이하는 베트남주재 북한 대사는 흥분된 표정으로 자신을 큰 소리로 소개한다. 북한 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의 환영 열기는 그야말로 열렬하였다.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보던 지도자 동지를 직접 맞으면서 울부짖는 여성 모습까지 보였다. 똑같은 장면이 그의 귀환길 새벽 3시 평양역에서도 연출되었다. 역두에는 90대 고령인 김영남, 당 서열 2위인 최용해 모습도 보였다. 당과 군의 간부들이 도열하여 협상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수령을 환영하는 장면이다. 북한식 일인 통치, 수령 통치의 진면목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김정은은 벌써 집권 8년차를 맞고 있다. 2011년 갑작스런 부친의 사망으로 승계된 그의 리더십은 흔들림 없이 집행되고 있다. 세습왕조체제 하의 30대 통치권자 김정은의 정치 행태도 이제 조금씩 변모하고 있다. 그는 작년 평양회담 시 문재인 대통령과 카퍼레이드를 하고 운동장에 운집한 평양 시민들을 향해 대중 연설도 하였다. 그는 집무실에서는 올해 서양식 신년사도 발표하였다. 그는 베이징, 싱가포르, 하노이 방문 등 선대의 ‘은둔의 정치’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의 경직된 정치 체제는 변하지 않아도 그의 정치 행태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북한 최고 통치자의 이러한 작은 변모가 북한 개혁 개방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정은의 정치 행태는 아직도 정상국가의 지도자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2019-03-10

대구는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聖地)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대구는 3·1운동 당시 서울 부산 원산을 잇는 교통의 중심도시이며 상업 거점 도시이기도 하다. 오늘의 대구의 달성공원, 두류공원, 망우공원, 앞산공원에는 허위, 이상룡, 이상화, 우재룡, 이상설 등 항일 독립지사들의 기념비와 공적비가 즐비하다. 팔공산은 한말 산남의진의 본거지이며 앞산 안일사는 조선국권 회복단이 창립된 곳이다. 대구의 도심 곳곳에서는 항일 지사들의 생가, 집터, 유적 등이 있다. 대구 계성학교의 아담스관은 독립선언문을 등사한 곳이고 서문시장은 만세 운동의 시발점이다. 대구의 제일교회와 남산교회는 만세운동의 산실이며 보현사 역시 태극기를 제작한 곳이다. 현 삼덕교회의 자리인 대구형무소는 애국지사들이 고초를 받고 순절한 곳이기도 하다.대구가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불리는 것은 항일운동의 지사들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대구는 일제의 강제 병합 후 자발적인 항일운동 결사체가 많이 창립되었다. 대구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자랑스러운 도시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일제는 한반도의 경제적 수탈을 위해 이 나라에 차관을 강요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에 대해 빚을 갚기 위한 민간 운동이다. 대구 광문사(수창초등학교 뒤) 사장인 김광제와 서상돈 등 13인은 나랏빚 1천300원(당시 우리나라 1년 예산)을 갚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금연과 금주를 통해 개인이 매달 20전씩 헌금하자는 운동이다. 여러해 전 대구에는 국채보상공원이 조성되고, 국채보상운동이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대구의 자랑이다.대구 달성공원에서는 3·1 운동 4년 전인 1915년 독립무장단체인 대한광복회가 창설되었다. 조선 8도에 지부를 둔 항일 비밀 무장 조직인 셈이다. 이 조직은 대구 앞산 안일사에서 창설된 조선국권회복단과 풍기에서 결성된 광복단을 통합한 전국적 조직이다. 총사령 박상진, 지휘장(참모장) 우재룡, 권영만 지사는 만주의 지부(길림광복회 김좌진 장군)까지 두었다. 이들은 조선 국권 회복을 위한 과감한 의혈 투쟁을 전개하고, 만주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도 모금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조세 운반 마차를 습격하여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고, 친일 부호 장승원 등을 처단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대구의 3·8 만세 운동의 위세도 대단하였다. 이날 1919년 3월 8일 오후 2시 대구 서문시장(현 섬유회관 건너편)에서 출발한 만세 시위는 중부경찰서를 지나 종로와 약전골목, 중앙 파출소를 거쳐 현 대구백화점(당시 달성군청)까지 계속되었다. 거사 당일 기독교인 이만집 김태련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당시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선생과 학생들이 선도하고 대구고보(현 경북고)학생 200명이 가세하여 1천여 명이 만세 시위에 가담하였다. 이후 4월15일까지 한 달여간 의성·청송·안동·예천 등 경북 각지에서 84회에 걸쳐 2만8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주모자와 가담자 3천296명은 체포 감금되어 옥살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이처럼 대구는 항일 운동 본산으로 항일 독립 운동의 성지라고 불릴 만하다. 대구 신암 선열공원에는 독립 애국지사 52명이 나란히 누워 있다. 이러한 대구의 항일독립 정신은 1960년 대구 2·28 학생 민주 운동으로 부활되고, 4·19 혁명 정신으로 이어졌다. 대구는 한때 한국의 모스크바라 불릴 정도로 진보 세력의 중심 무대가 된 적도 있다. 대통령 후보 조봉암이 이승만을 누른 것도 이곳 대구이다. 대구는 전통적인 정의와 의혈의 DNA를 간직한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던 대구가 수구 보수의 도시가 되어버렸다. 3명의 수구 대통령을 배출한 때문일까. 여하튼 대구에 사는 시민들은 항일 성지라는 역사적인 자부심부터 가져야 할 것이다.

2019-03-03

주변 4강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바라는가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세계의 이목이 베트남의 하노이로 쏠리고 있다. 북미 2차 정상회담에서는 어떤 합의문이 발표될 것인가. 이번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획기적인 합의는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북미 간에는 완전한 비핵화, 대북 제재 해제, 종전선언과 평화 협정 체결이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은 북미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고 주변 국가의 이해관계도 걸려 있는 문제이다. 주변 4강은 겉으로는 한반도의 평화 구축을 표방하지만 내심으로는 자국의 실익을 우선하려고 한다. 이 점이 우리의 4강 외교가 극복해야할 과제이다.미국의 입장부터 살펴보자. 미국은 북한의 장거리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의 미 대륙 침공이 최우선적 관심사이다. 미국은 북핵으로 인한 미국인들의 안보 불안제거라는 입장에서 북핵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트럼프는 북한의 직접적인 핵실험 등 핵위협이 없었더라면 북한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치 않았을 것이다. 미국 언론도 트럼프는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북핵 협상으로 타개하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트럼프는 러시아와의 내통관련 뮬러 특검의 조사 결과발표에 따라 탄핵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이를 희석시키고 내년 재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대북 협상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그가 정상회담을 앞두고 대북제재와 대북 투자라는 채찍과 당근 전술을 구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중국도 한반도 문제를 자국의 이익확대라는 관점에서 추진하는 것은 미국과 비슷하다. 중국은 북한이 종국적으로 북미 평화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중국의 세계 전략에 도움이 된다고 보지 않는다. 중국은 오히려 내심으로 북한이 미국 제국주의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는 종전의 정책을 선호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종래의 순망치한(脣亡齒寒)에서 보듯이 친중적인 북한 정권이 중국의 입술역할을 기대하면서 북한이 대미 방어전선의 교두보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중국은 경제적으로 열세인 북한지역의 광산이나 나진 등에 투자하고 북한 소비시장에도 영향력을 확대중이다. 이런 정황에서 중국은 미국이나 남한 자본의 북한 투자를 꺼릴 수밖에 없다.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해 종전선언 당사자임을 강조하면서 간여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 당국이 김정은을 수시로 다독이는 외교도 이런 연유이다.일본과 러시아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서 미국의 동북아 외교는 적극 지지한다. 일본은 북미 관계가 개선되고 북한이 정상국가로 대접받으면 대일 청구권 등 골칫거리가 등장할 것을 우려한다. 과거 6·25 전쟁 때 군수 보급 기지로 재미를 본 일본은 현재의 분단 상황을 내심으로 즐길지도 모른다. 러시아 역시 미국에 대해 각을 세우면서 한반도의 비핵화에 자신의 역할을 행사하려고 한다. 그들은 태평양 진출을 위한 북한 항구개방에 관심이 많으며, 북한 경유 가스 라인의 남한 연결 등 경제적 이득을 노리고 있다. 러·일은 공히 남북의 화해나 북미 평화 협정보다는 과거 6자회담의 당사자로 회귀하여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주변 4강의 이러한 자국 이익우선의 원칙은 한반도의 평화 체제 수립의 본질적 장애물이다. 정부는 한반도 평화 보장을 위해 주변 4강 외교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과거 통일 전 서독은 미국과 프랑스 등 서방외교를 유지하면서도 대소, 대 동구 외교를 교묘하게 추진하였다. 그것이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 우리도 주변 4강 외교를 현 수준에서 한 단계 끌어 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한류 등 문화적 우수성을 활용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외교에는 경제력 못지않게 문화적 헤게모니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도 너무 조급한 접근은 경계하면서 경제 협력과 문화적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 그것이 완전한 통일이전의 ‘사실상의 통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2019-02-24

한국의 제3당의 존립은 어렵다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제3당은 대의정치에서 의석수에서 제3위를 차지하는 정당을 말한다. 현재 국회의원 29석인 바른미래당은 제3당이다. 바른미래당은 1년 전 국민의 당과 바른정당이 통합하여 2018년 2월 13일 창설된 정당이다. 이들은 진보를 내세운 집권당 더불어민주당과 보수를 앞세운 자유한국당의 양당구도에서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를 앞세워 제3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바른미래당은 지난해 지방 선거에서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한 명도 내지 못하고 겨우 10% 미만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당내의 심각한 노선 갈등을 겪으면서 창당 1주년 기념식에는 유승민 등 당내의 중진들마저 참석하지 않았다. 당 내분은 계속되며 또 다시 제3당은 당 존립의 위기를 맞고 있다.한국 정치에서 제3당의 존립이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무엇보다도 양당의 대결 구도에 익숙한 민심은 중도적인 제3정당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이후 촛불 세력과 태극기 세력의 극한적인 대결 구도에 제3당은 정체성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집권민주당이 30∼40%, 제1야당의 지지율이 20∼30%대 지지에 육박하는데도 제3당이 8%대로 외면 받는 이유이다.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로 양분된 흑백의 여론은 제3 중간 지대를 회색지대로 간주하고 선호하지 않는다. 한국의 양극의 정치판에서 어정쩡한 중도는 기회주의자로 몰려 설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여야의 진영논리가 지배하고 합리적 타협론자를 배신자나 기회주의자로 몰아가는 정치풍토에서 제3당은 존립 자체가 어려운 것이다.또한 제3당은 제도적 측면에서 한국의 패권적 대통령 중심제와 소선거구제 하에서 성공하기는 더욱 어렵다. 서구의 내각책임제 하에서는 다당제를 가능케 하여 제3당이나 군소정당도 존립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10여 개의 군소 정당이 착근하고 유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서구에서는 제3당은 대부분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거나 연립정부의 중요 파트너 역할을 한다. 이처럼 서구의 다양한 정당은 서구인들의 다양한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내각제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독일에서는 녹색당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공산당이나 극우정당까지 가끔 제3의 정당의 역할을 수행한다. 서구의 내각제와 정치적 관용문화는 다당제를 수용할 수 있지만 우리의 대통령 중심제는 양당제만 선호할 수밖에 없다.그러므로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제3의 정당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과거 김종필의 자민련과 정주영의 통합국민당도 반짝하다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과거 이인제, 정몽준, 문국현, 안철수의 대선 전야의 급조된 신당은 대선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 제3당인 바른미래당이 위기를 맞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당의 정체성 면에서도 당내의 중도 우파는 우측으로 중도 좌파는 좌 클릭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적 위기 앞에 양당의 통합에는 선뜻 합의했지만 당의 노선은 여전히 동상이몽 격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보수정당의 개혁을 외치고 진보 정당의 합리성을 주장하는 당의 노선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한국형의 현실정치에서는 어느 쪽으로부터도 확고한 지지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제3당 바른미래당은 내년 총선까지 버티기도 어려운 입지이다. 바른미래당의 일부는 자유한국당으로 일부는 더불어민주당으로 복당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내년 총선 공천을 전후하여 한국의 제3당은 또다시 이합집산을 재개할 가능성이 높다. 이 나라 정치 발전을 위해서는 제3당의 정착이 절실히 요구되지만 한국의 정치적 현실은 이를 허용치 않고 있다. 서독은 통일 전 분단된 상황에서도 정치적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를 의사당 벽면에 걸어 두었다. 당시 서독에는 공산당과 극우 파시스트 정당도 공존했다. 정치적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무지개의 7색이 독일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우리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2019-02-17

트럼프의 ‘비즈니스 정치’를 해부한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정치 행태는 매우 특이하다. 트럼프의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정치는 상식을 뛰어 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에는 정치는(政治)는 정야(正也)라는 공자의 ‘정의 정치’도, 현대적 ‘권위의 배분’이라는 정치도 찾아볼 수 없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미국의 이익을 최우선하는 협상의 정치만이 보일 뿐이다. 그는 러시아 섹스 스캔들 등 여러 혐의로 곧 탄핵될 것이라는 비판 속에서도 실리의 정치만을 고집하고 있다. 이민 유입 방지를 위한 멕시코 국경선의 봉쇄, 자기와 뜻이 맞지 않는 관료의 전격 해임, 연방정부의 업무정지 등 그의 ‘비즈니스 정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부동산 재벌인 트럼프의 경력구조와 상인 기질은 ‘비즈니스 정치’의 토대이다. 비즈니스의 본질은 이익 창출을 위한 거래정치이다. 그가 쓴 ‘협상의 기술’은 그의 정치관을 대변한다. 트럼프의 ‘비즈니스 정치’는 미국인의 실익을 우선하는 정치이다. 그의 정치는 도덕성이나 공공성을 무시하기에 ‘악의 정치’라는 비난도 따른다. 트럼프의 정치는 전통적인 공화당의 보수 정치도 아니고 진보적 정치는 더욱 아니다. 그는 미국의 국익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끝까지 추적해 이익을 관철한다. 트럼프 정치는 킹메이커인 로저 스턴의 ‘정치는 무지한 사람을 끌어 모아 벌이는 쇼 비즈니스’라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스턴은 트럼프 후보를 만난 순간을 기수가 명마를 찾은 것처럼 가슴이 뛰었다고 술회하고 있다.트럼프의 비즈니스 정치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득정치를 정치의 본질로 본다. 그의 정치는 거래 과정에서 마키아벨리적 권모술수도 용인될 수밖에 없다. 그는 미국의 이익 창출을 위해 협상 상대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고 회유하기도 한다. 그것이 그가 바라는 정치의 본령이고 최상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내 정치뿐 아니라 외교에서도 미국의 힘을 배경으로 패권정치를 수시로 구사한다. 트럼프는 이란과의 핵 협정을 파기하고, 동맹국의 미군 주둔 비용의 대폭 인상을 요구한다. 경제 대국 중국과의 무역 분쟁도 어정쩡한 타협보다는 압박 정책을 구사한다. 모든 외교도 장사꾼의 흥정처럼 보고 타산이 맞지 않으면 즉각 파기한다. 북핵 문제도 북한의 비핵화 조치 없이는 어떤 대가도 없다는 배수진을 치고 있다.트럼프의 비즈니스 정치는 국내외 여론을 위한 선동 선전 정치도 선호한다. 마치 상품을 과대선전하는 것과 같다. 그의 선거 참모 스턴은 ‘무명 정치인보다는 악명 정치인이 낫다’고 트럼프를 부추겼다. 트럼프의 발언은 종종 진실과는 상관없는 파격적인 언사가 등장한다. 트럼프는 전술적 후퇴도 마다하고 공격적인 선전 정치와 압박 정치를 펼치고 있다. 양보나 사과라는 용어는 그의 정치 사전에는 없다. 그는 방어정치는 실패한다는 스턴의 주장에 따라 상대에 대한 공격의 정치로 일관하고 있다. 외교 협상에서 트럼프는 유리한 협상 조건이 나올 때까지 강경 압박 정책은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정치는 북한의 협상 파트너인 김정은에게도 적용하며 북한이 협상만 잘하면 ‘위대한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트럼프의 이러한 비즈니스 정치는 여론의 따가운 비난도 개의치 않고 미국에서는 통하고 있다. 그는 내년 대선에서의 승리도 염두에 둔 듯하다. 그가 대선에서 승리하기는 어렵지만 뚜렷한 민주당 대항마가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백인들의 누적된 불신이 트럼프식 힘의 정치를 선호한다는 주장도 있다. 솔직히 말하여 미국인들은 트럼프를 ‘최악의 정치’라고 비난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자신들의 역할을 대행해주기를 바란다. 지난 대선 트럼프의 선거 본부장 스턴의 ‘공격적인 흑색선전과 막대한 정치 자금만 있으면 미키마우스도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비즈니스 정치의 핵심인지도 모른다.

2019-02-10

민족 분단의 단초는 항일 투쟁의 분파에서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상해 임정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다녀왔다. 상하이의 초대 임정 청사, 윤봉길의사기념관을 거쳐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의 임시 정부 유적지도 돌아보았다. 지난해 충칭 임시 정부방문에 이어 두 번째 학술 탐방 행사의 일환이다. 독립운동 정신 계승사업회가 마련한 이번 학술대회에는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도 참여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의 항일 투쟁을 재조명하기 위함이다. 석원화 교수는 상해 복단대학의 명예교수이며 코리아연구센터의 주임이다. 그는 조선인들의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을 3개 분파로 나누어 그 활동을 소상히 소개하였다. 한국의 학술 대회 참여자들의 가장 관심을 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활동한 첫 번째 그룹은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이회영, 안창호, 신규식 등 상해임시정부파다. 우리는 대체로 중국에서의 항일운동하면 상해에서 출범하여 중경에서 해방을 맞이한 26년간의 임시 정부의 활동만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건국은 3·1운동과 상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에도 명시하고 있다. 중국의 석 교수는 상해 임정이 윤봉길 의거 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하에 독립운동의 투쟁 역량을 강화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김구의 한국광복군과 김원봉 중심의 조선민족전선 연맹은 중국군과 함께 항일 투쟁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요체가 되었으나 이승만의 단정 안에 밀려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두 번째 그룹이 1926년 중국 조선인 집거지에서 조선 공산당을 조직하고, 동북 항일 연군에 가담한 최석천, 김일성, 김책 등의 활동이다. 이들의 항일 행적에 관해서는 남한 땅에서는 소개된 자료가 거의 없으나 김일성이 중국의 동북항일 연군의 소조로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북한 정권 수립된 후 우리사회는 좌파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항일 독립운동을 무시하고 배제한 결과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들의 활동은 보잘 것 없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보천보 전투 등 이들의 항일 투쟁을 영웅시하고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소련이 1945년 대일 선전 포고를 하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소련 변경지역으로 장소를 옮겨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해방 후 김일성은 소련군 소좌로 귀국하여 결국 스탈린의 지지 하에 북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세 번째 그룹은 중국 모택동의 팔로군과 신4군에 편입되어 중국의 항일 근거지에서 활동한 세력이다. 팔로군 포병 대장을 역임한 무정과 최창익, 김두봉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중공군 최후의 근거지인 연안에서 출발하여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항일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 잔재를 소탕하였으며, 북한의 정권 수립 시 군대 조직의 주요 구성 부문이 되었다. 이들은 북한 정권의 초기 주요 요직을 맡았으나 6·25 전쟁 전후 대부분 숙청되었다. 6·25 전쟁 후에는 허가이 등 소련파도 숙청되었다. 결국 북한정권에는 김일성 중심의 갑산파만 살아남아 오늘의 백두 혈통이라는 삼대 세습의 토대가 되었다.결국 일제의 조선 강점이 분단의 씨앗이라면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의 분열이 분단의 단초가 되었다. 1945년 2월의 얄타 비밀 협정에 의한 미국과 소련의 38선을 경계로 한 분할통치는 한반도 분단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해방 공간에서 남북의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상해 임정에서 탄핵된 후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은 남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중국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소련군에 편입된 김일성은 북한의 수상이 되었다. 모두가 역사의 운명이고 아이러니이다. 임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선열들의 항일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겨 민족의 재통일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민족의 통일이 한민족의 완전한 해방이기 때문이다.

2019-01-27

대구 달성공원의 대한광복회 창립을 아시나요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1919년 3월 1일 일제 강점 하에서 서울에서는 33인이 독립을 선언하고, 대구에서도 3월 8일 서문시장 부근에서 만세 운동을 시작했다. 이어 전국 방방곡곡의 만세운동은 연 참여인원이 100만 명을 넘었다. 대한광복회는 3·1 운동 발발 4년 전인 1915년 8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항일운동 조직으로 창설됐다. 일전에 찾아간 대구 달성공원에는 이곳에서 대한 광복회가 창설되었다는 표지판 하나 없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의 광복을 위해 대구에서 창설된 이 단체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3·1 운동의 모태인 광복회의 결성 장소가 달성공원임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일제 시 달성공원에는 일제가 천황폐하를 위해 절을 하도록 세운 요배(遙拜)대가 있었고 일제의 대표적인 신사(神社)도 이곳에 마련되었다. 일제가 식민통치를 위해 신성시했던 이곳에 광복회가 설립한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이 단체를 주도한 선열들의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정신이 이곳을 창립 장소로 선정했음직하다. 대구의 달성공원에서 1915년 8월 25일(음력 7월 15일 ) 창립된 대한광복회는 영주 풍기에서 1914년 11월 결성된 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을 통합해 설립된 항일운동 단체이다.비밀 결사 조직인 대한광복회는 이 조직의 중심에 울산 출신 박상진 총사령이 있었다. 그는 서울 양정서숙에서 경제학과 법률학을 공부한 엘리트이며 1910년 어려운 법관 시험에 합격했다. 평양 판사 발령이 났으나 일제하의 벼슬을 초개처럼 버리고 무장 독립단체의 선봉장이 됐다. 당시 광복회는 우재룡을 지휘장으로 하는 중앙조직을 갖추고 조선 8도 지부를 결성했다. 1915년 12월에는 만주 길림 광복지회(지회장 김좌진)까지 설립해 항일 독립운동의 기세를 확장했다. 이들 단체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도 굴하지 않고 전국적 조직망을 완비하고,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해 후일 3·1 운동과 상해 임정의 발판이 됐다.광복회는 독립 운동가들의 자금을 마련해 지원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군사 무장 조직까지 갖춰 일제에 강력히 저항하는 조직이 됐다. 이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만주에 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 설립 등 군사계획까지 수립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 조직원들은 국내의 의연금 등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나 성과가 부진하자 곡물상회 등을 운영하면서 자금조달에 힘썼다. 이 상회는 광복회의 비밀회의 장소가 되고 군자금 모금의 창구 역할을 겸했다. 이들은 일제의 수탈과 가혹한 감시 하에서도 일제가 징수한 세금을 수송하는 우편마차를 습격해 독립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 우재룡 지사가 주도한 경주 우편 마차 탈취사건, 영월 중석광산과 운산 금광 습격사건이 대표적 사건이다. 한편 광복회는 관찰사를 지낸 친일 부호 장승원 등을 과감히 처형하는 등 의혈(義血)활동도 동시에 전개했다.대구 달성공원에서 창립된 광복회는 후일 이 나라 독립운동의 노둣돌이 됐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광복회의 비밀 결사 항쟁 정신은 후일 독립지사들의 의혈투쟁으로 연결됐다. 이러한 항쟁 정신이 상해 홍구공원의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 조직을 결성한 박상진 의사는 1926년 8월 11일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고, 채기중 등 여러 명의 애국지사들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당시 군자금을 모금을 하다 체포된 우재룡 지사는 두 번에 걸쳐 18년의 형기를 치렀다. 이처럼 대구는 이 나라 항일 투쟁의 본거지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광복회가 창설되고 3·8만세운동의 유물과 유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이곳 시민들은 달성공원이라도 찾아 선혈들의 의로운 뜻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2019-01-20

정치적 이념 갈등의 허실(虛實)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2017년 진보를 표방하는 촛불집회가 적폐 청산을 내세워 정권 교체를 이룩했다. 보수를 지지하는 태극기 집회가 박근혜 대통령을 옹호했으나 대세는 역부족이었다. 아직도 촛불과 태극기의 행렬은 간간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 화력은 약하다. 지난번 시위 과정에서 충돌할 위험도 있었지만 묘하게도 피하게 된 것만 해도 다행이다. 양측 모두 진보와 보수를 앞세워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현상을 흔히들 정치적 ‘이념 갈등’이라 하지만 이러한 갈등을 이용하려는 정치 세력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우정치(衆愚政治)는 참 진보도 보수도 아닌 경우가 많다.이데올로기(ideology)란 어원적으로 이념(idea)의 논리(logic) 합성어다. 정치이념은 개개인의 정치적 의사가 공동체 안에서 집단화된 신념체계이다. 정치적 동물인 인간이 정치현상에 대해 일정한 이데올로기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대표적인 정치 이데올로기 구도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이다. 보수는 우익, 진보는 좌익으로 분류되며 그 중간에 여러 이념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보수는 전통적 가치와 체제에 만족하면서 급진적 변혁을 싫어하는 입장이며, 진보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개혁이나 혁신을 선호한다. 둘 다 인류의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다. 세상은 새의 좌우 날개처럼 양쪽이 공존해야 안전과 발전을 보장할 수 있다.우리의 정치 사회의 문제는 사이비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 양상이다. 이들 간에는 사사건건 감정적으로 대립하고 곳곳에서 상대를 타도의 대상으로 본다. 이념 과잉으로 눈이 먼 사람은 무조건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선을 자처한다. 이들간에는 정치적 사안에 대한 해석과 평가가 완전히 다르다. ‘남북 정상의 대화’만 해도 사이비 보수는 공산 국가 되기 위한 준비단계로, 진보는 평화 정착의 토대로 환영한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문제도 이념의 잣대로 분석한다. 보수는 상대를 ‘종북 좌빨’로, 진보는 상대를 ‘수구골통’이라 비난한다. 이러한 감정싸움은 가족, 동창회, 종친회, 동향 선후배 사이에도 종종 발생한다. 유쾌해야할 친목 모임이 종종 파탄으로 끝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수와 진보의 참가치를 모르는 사람일수록 감정의 기복은 더욱 심해진다. 자신의 정치적 불만을 정치적 한풀이로 삼기 때문이다.우리 사회에서 사이비 이념에 침작해 감정싸움을 한 역사는 상당히 오래다. 한국사회에서 이념 갈등의 뿌리는 대부분 정치인들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비롯됐다. 해방정국의 정치인들의 과욕이 이념이란 이름으로 포장돼 중상모략, 암살로 연결되기도 했다. 또한 6·25 동족간의 전쟁은 이념간의 대립과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당시 좌익과 우익의 개념조차 모르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다 희생된 사람이 많다. 제주도 4·3, 여순 반란사건, 대구 10·1 사건도 모두 사이비 이념을 근거로 상대를 단죄해 버렸다. 지금도 골동품이 된 미국의 메카시적 수법이 선거 때마다 등장한다. 우리 현대사의 슬픈 비극이다. 오늘의 가짜 뉴스도 상대방 공격의 무기가 된다. 그것이 정치적 식견이 부족한 과잉동조 층의 무기가 되니 안타까운 일이다.이제 우리 사회도 사이비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하루 빨리 종식돼야 한다. 이 원인을 제공한 정치인들부터 이를 바꾸기 자성이 필요하다. 보수를 자처하는 자유한국당도 진보를 앞세운 더불어민주당도 정당개혁을 통해 참 보수와 진보의 가치를 정립해야 한다. 선거 때만 되면 정치적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는 마타도어와 흑색선전부터 탈피해야 한다. 그리하여 보수와 진보를 지지하면서도 양쪽을 수용하는 중도(moderate)층이 늘어나야 한다. 이러한 이념의 극한 대립을 피하기 위해서는 원론적으로 양당제가 아닌 다당제가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아직도 양극단을 선호하고, 그 중간을 기회주의로 보기 때문 다당제의 정착은 어렵다.

2019-01-13

김정은의 ‘서양식’ 신년사를 보면서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김정은의 신년사 발표 스타일이 달라졌다. 탁자에 기대어 불안한 모습으로 신년사를 읽던 작년의 모습과는 완전히 파격적이다. 그는 자주 입던 인민복을 벗어던지고 말쑥한 정장 양복 차림으로 만연체 연설을 이어갔다. 노동당 중앙위 건물 3층 집무실 소파에 앉아 50여분간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그는 원고와 프롬프터를 번갈아 보면서 과거의 가쁜 숨을 내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변모는 대중 기피증이 심했던 그의 선친 김정일과는 완전히 달라진 장면이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 방북 시 평양 군중들 앞에서 카퍼레이드도 하고 대중 연설까지 하였다. 김일성 광장의 수십만의 군중 앞에서 예상과 달리 ‘전 인민에게 영광 있으라.’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사라지던 부친 김정일과는 대조적이다.이번 신년사로 김정일의 집무실 모습이 세상에 노출되었다. 값비싼 서양식 소파, 잘 정돈된 책장과 수많은 책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발표하는 그의 뒤에는 인공기와 노동당기가 비치되어 트럼프의 집무실 모습과 비슷하였다. 사실 북한 권력의 심장인 그의 집무실은 신비의 베일에 덮여 있었다. 북한 땅에서 완전무결하다는 ‘당이 결정하면 인민은 따른다’는 철칙만 통했다. 그의 집무실 신년사 연출은 북한이 개방적이고 정상국가로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2018년 자정을 넘어 새해 새벽의 녹화도 열심히 일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자는 뜻일 것이다. 여하튼 이번의 신년사는 발표 형식면에서는 지난 7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할 수 있다고 달라지려는 그의 모습은 나쁘지 않다.그러나 신년사를 발표하는 그의 뒷면에는 김일성 할아버지와 김정일 아버지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두 분 다 정면을 보지 않고 서류를 보면서 일하는 장면이 찍혀있다. 먼저 가신 두 분처럼 그도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일까. 우리는 잘 알지만 서양 사람들은 뒤의 두 분의 사진이 누구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 사진 속의 인물이 북한을 70년간 통치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진임을 알고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북한 당국은 이번 집무실 회견 공개가 3대 세습체제를 세상에 알리려고 한 것일까. 서방에서는 아직도 북한식 3대 권력 세습 제도도 백두 혈통이란 것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이번 신년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곳곳에서 다급한 의도를 표출하였다.그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재차 촉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분명한 핵 폐기 프로그램 제출을 요구하고 북한은 가시적인 대북제재 제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대북 제재를 ‘가혹한 경제 봉쇄’정책이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다행이도 트럼프는 북한의 친서와 신년사에 만족한듯 북미 정상 회담을 이른 시일 내 개최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회담 장소를 베트남이나 몽골 또는 한반도 비무장지대로 예비점검했단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회담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 이에 김정은은 협상이 지연되면 ‘새로운 길’이라는 카드를 쓸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길이 과거의 핵·경제 병진노선으로의 회귀는 아니겠지만 대미 압박용임은 부정할 수 없다.이번 신년사 중에 눈길이 가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김정은이 ‘경제 노선’에 관한 집념을 계속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석탄 생산을 다그치고, 관광사업도 하겠으며, 조건없이 금강산과 개성공단을 개방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당 간부들의 관료 부패를 막겠다는 입장도 분명히 하였다. 이미 시장경제 초입에 들어선 북한에도 수없는 관료부패가 있다는 증좌이다. 물론 북한에서 부패한 당 간부 청산이 조직의 숙청수단으로도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김정은의 신년사는 형식면에서 파격적으로 바뀌었고 내용면에서도 변화의 조짐을 감지할 수 있다. 김정은의 신년사를 통한 깜짝 변신이 북한 개혁·개방의 신호탄이 되기를 바란다.

2019-01-07

철마(鐵馬)는 대륙을 달리고 싶다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지난 26일 북한 개성 판문점역에서 남북 철도 연결 기공식이 열렸다. 남측에서는 조명균 통일부 장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북쪽에서 리선권 조평통위원장, 김윤혁 철도성 부상이 참석했다. 남북이 분단되고 철길마저 끊어진지 어언 70여 년. 남북의 철길은 언제쯤 이어질 것인가. 눈 덮인 북녘 산하를 거쳐 만주를 지나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고 싶은 철마의 꿈은 이뤄질 것인가. 판문점역에 등장한 평양과 서울을 향하는 이정표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조국의 분단으로 섬나라가 되어 버린 우리도 대륙 횡단의 꿈은 실현될 것인가.남북의 철도와 도로의 연결은 우리 경제에 상당한 이점을 줄 수 있다. 29일 우리 대한민국의 수출 실적이 단군 이래 처음으로 6천억달러를 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기업의 1억달러 수출 탑을 받던 시절이 오래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벌써 세계 6위의 무역 강국이 됐다. 그러나 분단의 비극은 우리를 섬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유럽 여행이나 물건의 수출은 배나 비행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수출품이 육로를 통해 유럽으로 이동하면 시간은 반으로 줄고, 비용은 반으로 절감된다는 보고서가 있다. 우리는 북방 개척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 경제의 추동력을 살려야 한다. 남북의 철길 개통은 정부의 신경제 구상의 출발이다.북한 김정은 정권도 남북 철도에는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북한 방문길에 필자가 본 북한의 도로 사정은 형편이 없었고, 관개 시설도 우리의 60년대 수준이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도 남북 정상회담 시 스스로 북한의 도로 사정이 형편없음을 인정했다. 평양만 벗어나면 산은 민둥산이 많아 아직도 목탄차가 다니고 소달구지를 이용하는 주민들이 많다. 그러나 북한의 경제적 여건은 사회 기반 시설에 투자할 상황이 아니다. 그들은 낙후된 철도와 도로 건설을 위해 남한의 ‘통 큰 투자’와 기술을 원하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은 남한과 서방의 적극적인 투자를 유치하기는 어려운 처지이다. 그들은 부러울 것이 없다고 자랑하던 ‘주체 경제’의 추락상을 보여주기 싫고, 그들의 취약한 고리를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북한이 처한 심각한 딜레마다.이처럼 남북의 철도와 도로 연결 사업은 남북 양측에 상생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이행에는 현실적 제약이 너무 많다. 북한에 대한 미국과 유엔의 대북 제재는 사업의 가장 큰 현실적 억지 요인이다. 이번 기공식도 미국과 협의하고 유엔 안보리의 허락을 얻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라시아 철로 진출의 길목에 위치한 중국과 러시아의 협력를 구해야 한다. 이들을 잘 설득해야만 철도 연결을 순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이번 판문점 기공식에 중국, 러시아, 몽골의 대표를 초청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하나의 제약은 남한의 대북 투자에 대한 거부감과 부정적 여론이다. 그것은 북한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북한에 대한 강한 불신을 가진 여론이 이 사업마저 다시 ‘퍼주기’ 사업으로 폄하할 것이다.이러한 내외의 제약을 동시에 제거하기는 무척 힘들다.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1차적 과제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에 전격 합의하는 일이다. 새해에는 이러한 소망이 이뤄지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남북 철도와 도로 연결은 대북투자라는 입장에서 추진되길 바란다. 우리의 철마는 눈 덮인 대륙을 횡단하길 바란다. 베를린을 거쳐 마드리드와 런던까지 달리길 바란다. 그것이야 말로 탈냉전 시대의 동북아의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며 남북이 ‘사실상의 통일’로 나아가는 단초이다. 새해에는 섬나라 사람처럼 위축된 우리의 마음부터 활짝 펴지길 바란다. 우리는 북방 진출을 통해 민족의 원대한 꿈을 다시 펼쳐야 한다. 그 길목에서 우리는 같은 혈맥인 중국의 조선족과 러시아의 고려인을 보듬어야 한다. 그것이 한민족의 자존심을 살리는 길이며, ‘동방의 꺼지지 않는 등불’이 되는 길이다.

2018-12-30

자유한국당 투톱 체제의 인적 청산

▲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 체제는 위기에 처한 당 개혁을 위한 궁여지책으로 출범했다. 홍준표 당 대표는 대선 패배에 이은 지방선거 참패로 물러났다. 제 1야당인 한국당의 지지율은 계속 폭락했고, 친박과 비박의 당내갈등은 계속됐다. 박근혜 정부 시 총리후보에서 낙마한 김병준 교수는 전격적으로 한국당의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의 당 개혁을 위한 조치는 곳곳에서 암초에 부딪치기도 했다. 며칠 전 한국당은 나경원 의원을 당의 원내 대표로 선출했다. 한국당은 이제 미묘한 입장차이를 보이는 김병준·나경원 투 톱 체제로 운영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당의 쌍두마차가 헝클어진 당을 위기에서 구할 것인가. 아니면 양자의 갈등으로 당은 다시 내홍을 겪을 것인가. 김병준 비대위원장은 출발시부터 당내 친박이나 비박의 확고한 지지기반없이 불안한 상태로 출범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과 교육부총리를 지냈으며 진보적인 정책 노선을 견지했던 인물이다. 한국 정치판에서 진보와 보수가 큰 틀에서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우리 정치의 현실에서는 보수와 진보 진영은 엄연히 구분된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를 넘나드는 김 위원장의 정치 행태는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기 어렵다. 벌써 김 비대위원장이 자신의 정치적 욕망만을 채우려 한다는 비판이 따른다. 그의 정치적 정체성은 용기있는 결단이라기보다는 기회주의자로 공격받기 쉽다. 김 비대위원장의 정체성 혼란이 당 리더십의 위기와 연결될 수 있다.그렇다면 새로 선출된 나경원 원내대표가 당 개혁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인가. 그것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그의 당선은 친박과 비박의 갈등구도에서 어부지리의 결과라는 것이다. 원래 그는 비박이었으나 탈당치 않고 잔류파로 남아 있다가 이번 경선에서는 친박의 지지로 당선됐기 때문이다. 그는 원내대표 경선 3수만에 친박에 빚을 지고 당선된 셈이다. 그는 당선 후 이번 경선이 친박과 비박의 갈등의 종식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단지 정치적 레토릭일뿐이다. 정치9단 박지원 의원은 그의 당선을 ‘도로 한국 당’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이 나경원의 인적 청산의 딜레마이고, 한국당의 리더십의 위기구조이다.한국당의 투톱 체제는 당면한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전망이 밝지 않다. 한국당은 당 개혁을 위한 인적 청산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우선 처리해야 한다. 김 비대위원장 체제는 출범한지 오래 되었지만 당 개혁의 구체적 프로그램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당 개혁의 핵심 과제인 인적 청산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박과 비박은 당의 절박한 위기 상황의 책임을 서로 상대에게 전가하고 있다. 비박은 대통령의 탄핵을 초래한 국정 농단의 원천적 책임을 친박에게 돌리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 탄핵의 원죄에서 자유롭지 못한 친박은 대통령 탄핵의 책임은 탄핵에 동조한 비박이 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아직도 당내 다수파인 친박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선제 방어기제이지만 당의 근본 개혁에는 역행한다.이러한 와중에서 한국당의 조직강화 특위는 지난 15일 늦게 현역의원 21명이 포함된 79개 지역의 당협위원장을 교체키로 했다. 인적 쇄신 명단에는 최경환, 홍문종 의원 등 친박 핵심과 비박계의 좌장인 김무성 의원과 조강특위 김용태 위원장도 포함되어 있다. 김병준 비대위 체제는 양비론적 입장에서 친박과 비박의 핵심을 잘라 버린 셈이다. 탈락된 현역 의원들이 반발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한국당의 인적 쇄신을 계기로 당내 친박과 비박의 갈등은 더욱 격화될 조짐이 보인다. 투톱의 리더십이 2월 전당대회까지는 봉합된 채로 유지될지도 의문이다. 보수정당의 인적 청산을 통한 체질 개선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재로서는 2월 전당대회까지의 한국당의 당 개혁 과정을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다.

2018-12-17

문재인 정부는 지지율 하락을 직시해야 한다

▲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문재인 정부가 출범한지 벌써 1년 5개월이 지났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민심을 등에 업고 탄생한 정부이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로 얼룩진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정의로운 국가 건설’을 약속했다. 광화문의 촛불 혁명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의 희망을 부풀게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는 대단히 컸으나 차츰 실망으로 변하고 있다. 집권 초반 70∼80%를 넘나들던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는 지난주 40%후반으로 추락했다. 아직 대통령의 지지도가 레임덕(Lame Duck)은 아니지만 40%의 지지율은 정부의 국정 주도권을 잡기 어렵게 할 수 있다. 문 정부가 국정 쇄신을 방기하면 지지도는 급락할 수밖에 없다. 문 정부의 지지율 급락의 근원은 결국 경제 문제다. 문 정부는 취임 초반 대통령이 직접 청년 실업을 챙기겠다고 청와대 집무실에 취업 상황판까지 설치했다. 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은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노동시간으로 집약된다. 그러나 청년 취업률은 개선되지 않고 경제 사정은 더욱 악화되고 빈부의 격차는 더욱 양극화됐다. 필자 주변의 자영업자도, 소규모 기업인도, 마트 주인도 문 정부에 대한 불평이 대단하다. 그러한데도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의 온기가 더디다는 말만하고 있다. 그간 아파트 가격은 폭등하고 서민들의 주거비 부담은 더욱 늘어나고 민생은 더욱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정부의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정책실장을 책임을 물어 교체했지만 아직도 경제회생의 전망은 어둡기만하다.그러한데도 문 정부는 경제의 혁신 성장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정부의 ‘녹색 성장’이나 ‘창조 경제’와 비슷하게 이상만 떠있지 성장을 견인할 정책적 비전은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더해 포퓰리즘적 복지정책은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노령연금의 대폭 인상, 미취학 영유아의 의료비 무료, 아동수당 확대지원, 청년 실업 수당 증액, 문재인 케어의 의료비 혜택 증대, 대학 강사의 방학 중 임금 지급 등이 그것이다. 선거전의 공약처럼 발표되는 정부의 분배 정책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충당될 수밖에 없다. 이로인해 혜택을 받는 수혜층은 환영하겠지만 어렵게 살아온 기성세대들은 우려를 금치 못한다. 우리도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처럼 파산을 우려하는 사람이 주변에는 상당히 많다.여기에 더해 최근 청와대 공직 기강의 붕괴는 정부에 대한 신뢰 상실로 이어지고 있다. 청와대 비서관의 심야 음주 운전과 공직비리를 감사하는 특별 감사반의 탈선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야당의 조국 민정수석의 사퇴 요구는 대통령의 신임으로 종결된듯 하지만 잠재화되어 있을 뿐이다. 정부는 이를 기강 확립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청와대에서부터 공직 기강이 해이하고 조직의 균열이 발생한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차제에 정부는 내외 정책모순도 시급히 쇄신하여야 한다. 국내에서는 탈원전을 추진하면서 이란과 체코 등과의 원전수출 외교추진은 이율배반적이다. 정부가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로 일본 정부에 일침을 가한 것은 국민정서에는 합치되지만 외교적 경제적 손실도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결국 문재인 정부의 트레이드마크인 대북 화해 포용 정책도 경제와 민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정책의 추동력을 상실한다. 더구나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의 열매를 국민이 직접 따먹지 못할 때 정권에 대한 실망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정부의 신뢰도가 ‘이영자(20대, 영남, 자영업자 지지율 하락) 현상’으로 떨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경제의 성장과 복지의 확대는 여야 정치권의 싸움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 이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인기영합적 복지 정책에서 탈피하여 대대적인 민생 회복과 함께 전반의 국정 쇄신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2018-12-10

김정은 체제의 개혁·개방의 현주소

▲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세상 만물 중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세계 각국의 사회주의 체제도 변화하고 있다. 동구 사회주의 국가는 체제 변화 과정에서 붕괴되고 말았다. 동독도 1990년 서독으로 통합됐다. 소연방은 해체되고 러시아만 홀로 남았다. 푸틴의 러시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국도 모택동 이후 지도자를 여러명 교체하면서 사회주의적 시장 경제에 접목됐다. 공산 베트남도 ‘도이 모이’를 통해 그들 경제의 앞날을 밝게 해주고 있다. 중미의 쿠바도 미국과 수교하고 대외 개방의 폭을 넓히고 있다. 북한도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 체제의 변화 척도는 이데올로기, 정치체제, 경제 정책이라는 변수를 통해 측정한다. 이 척도를 북한의 개혁 개방과정에 적용해 보자.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도 다소의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선대(先代)의 주체사상과 선군사상을 뒤로 미루고 사회주의 국가 재건을 위한 ‘경제 건설 노선’을 앞세우고 있다. 전자가 북한의 공식적 규범적 이데올로기라면 후자인 ‘경제건설’노선은 그들의 현실적 실천이데올로기인 셈이다. 2011년 12월 부친의 사망으로 집권한 김정은 위원장은 ‘핵·경제 병진 노선’을 과감히 탈피해 ‘경제 건설 노선’을 선언했다. 곳곳에서 그는 선경(先經), 선민(先民)을 앞세우고 경제 건설 현장의 노동자를 찾고 있다. 이러한 북한 통치 이데올로기의 변모는 정치제도나 정책의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초기 군지도부를 수시로 교체했다. 그러나 당·국가 일원체제의 원칙은 존치되고 대대적인 정치 개혁은 수반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백두혈통론에 따른 수령승계론은 김정은 1인통치의 기반이다. 항일 빨치산 후손과 혈연적인 권력 측근이 그를 보위하고 있다. 북한의 권력 엘리트는 이념성보다는 전문성이 중시되고 젊은층이 과감히 권력 핵심에 기용되는 것이 작은 변화이다. 북한의 경제 엘리트 박봉주의 총리 재기용은 북한식 개혁·개방의 신호이다. 그러나 북한의 1인통치 체제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며 권력의 초기 분산 형태인 집단지도 체제의 가능성은 아직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것이 북한식 정치개혁의 한계이다.그러나 북한의 경제 건설 노선은 북한식 개혁·개방의 촉매제가 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과거와 달리 북한의 낙후된 경제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그는 농업 생산량 증산을 위해 협동농장의 운영 방식을 25∼30명의 분조 관리제에서 가족 영농 방식으로 바꾸고 있다. 2012년 농업, 공업 등의 각 분야에서 성과에 따라 생산물을 분배한다는 6·28조치를 단행했다. 북한의 종합 시장은 400여 개로 확대되어 경제의 동력이 살아나고 있다. 시장 확대와 더불어 운수업과 휴대전화가 600만대 이상 보급됐다. 그들은 적은 투자로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원산과 백두산 관광개발 사업을 과감히 추진하고 있다.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 시장 경제의 초기단계에 들어섰는데 그것은 다시 회귀하기 어렵다는 시장의 기본 원칙이다.이처럼 북한의 개혁 개방은 위로부터의 개혁 개방이며 경제 분야에서 선행되고 있다. 북한 김정은 체제는 국가의 안전보장과 민생 경제의 회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한다. 그러나 체제 개방의 당위성과 체제 붕괴의 위험성이 그들의 딜레마이다. 그들이 오래전부터 전 세계 사회주의의 국가가 다 망해도 북한은 망하지 않는다고 우리식 사회주의를 선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북한이 2차 북미 회담을 통해 비핵화 프로그램과 북미 평화 협정초안을 맞교환할 수 있을까. 그것이 성사될 때 북한식 개혁·개방은 본격화될 것이다. 우리의 대북 경제 협력이나 투자도 당분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2018-12-03

남북관계의 변화를 보는 상반된 시각

▲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남북관계가 급변하고 있다. 4·27 판문점 선언 이후의 남북관계는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는 듯하다. 철원 비무장지대 내에서 남북의 장교가 전술도로를 연결하기 위해 어울려 악수하는 장면이 보도됐다. 6·25 전쟁 시 전투가 치열했던 화살머리 고지 일대에서 유해를 찾기 위함이다. 지난 두 차례의 정상회담 때 손을 맞잡은 남북 지도자의 모습과는 다른 장면이다. 개성에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개설돼 남북의 회합이 성사됐다. 이미 비무장지대 내에서는 최전방 초소가 철수됐다. 남북 간에는 휴전 선언에 버금가는 적대적 긴장관계가 해소되고 있다. 북미 관계에 비해 남북관계는 순풍에 돛을 단듯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이를 보는 시각은 불행하게도 양분돼 있다. 우리 사회의 보수진영에서는 이러한 사태의 진전을 매우 불안하게 보고 있다. 남북의 전격적인 군사합의는 안보 불안을 가중시킨다는 입장이다. 일부 극우 보수층은 김정은의 비핵화 선언은 위기를 탈피하기 위한 사기술로 간주한다. 일부 전문가들도 북한 당국이 핵협상을 장기화하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파키스탄처럼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술책으로 간주한다. 북한 당국이 일종의 살라미전술을 택했다는 것이다. 모두 북한 당국에 대한 강한 불신에 기인한다. 과거 시드니 후크가 공산주의자와 대화할 때 그들의 ‘입을 보지 말고 눈을 보라’는 경고에 의존한 결과이다.이에 대해 진보층에서는 남북관계의 현재의 변화를 대체로 지지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을 적극 지지하고 정부의 대북정책도 지지한다. 이들은 남북합의서의 국회 비준도 필요하고 김정은 위원장의 남한 방문도 환영한다. 대북 제재가 해제되면 대북 투자도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 물론 진보진영에도 급진 진보와 온건 진보는 정책의 방향과 속도에 차이는 있다. 이들은 남북의 화해가 시대적 소명이라는 입장에는 모두 동의한다. 이들은 남북이 제도적 법적으로 완전한 통일이 어려우면 EU와 같은 사실상의 통일을 희망한다. 결국 진보진영은 남북의 다방면의 교류 협력을 통해 마침내 독일식 통일이 성사되길 바란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보수와 진보진영 간에는 대북 정책에 관한 시각의 차이가 크다. 탈냉전 시대에도 한반도에는 통일 문제에 관한 여론이 대립하는 주된 이유이다. 한반도에서 첨예한 이념 갈등의 주된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 전쟁이다. 6·25 전쟁은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대리전이 됐다. 이 점이 분단 시 독일과 우리의 상황이 다른 점이다. 한편 여야 정치인들이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켰다. 선거 시 안보를 앞세운 보수 정당의 ‘북풍’공작은 보수층의 표를 모으는데 상당히 기여했다. 매카시적 수법이 수시로 등장했다. 그러나 지난 대선에서는 이러한 안보이슈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시들해졌다. 여러 차례 선거의 학습효과라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남북문제에 대한 가짜(fake)뉴스가 확산되어 보수진영을 결집시키고 있다. 사실을 왜곡 보도해 이념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다.결국 대북 문제에 관한 시민 사회의 이념 갈등은 정부의 대북 정책의 추동력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대북 정책에 관한 시민사회의 합의기반을 넓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여야 정치권부터 대북 정책에 관한 ‘역사적인 타협’이 전제돼야 한다. 독일 기민당과 사회당이 합의한 동방 정책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진영 간에도 진정한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오류부터 인정해야 한다. 남북관계의 진전에 대한 보수의 부정적 맹목적 시각은 시대에 역행함을 알아야 한다. 진보 역시 급진적인 남북관계 진전이 초래하는 위험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념과 정파를 초월한 헌법기관인 민주 평통이 이러한 중재 역할을 보다 충실히 해야 할 것이다.

2018-11-26

자유한국당의 ‘보수 개혁’은 성공할 것인가

▲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의 출범은 보수당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걸게 하였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 출신인 김병준 위원장의 비대위원장 등장은 계파 갈등을 덮기 위한 방편적인 선택이지만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김 비대위원장이 과연 자유한국당의 개혁에 성공을 거둘 것인가. 현재로서는 성공이라는 기대보다는 부정적인 회의론이 강한 편이다. 지난번 김병준 위원장의 전격적인 전원책 변호사의 특위위원장 임명은 상당한 기대를 모으게 하였다. 그러나 지난주 비대위가 단행한 전 위원장의 갑작스런 해임 통보는 보수정당의 개혁의 입지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잘 입증해주고 있다. 전 변호사의 사퇴는 외형적으로 전당대회의 개최 시기 문제의 갈등으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김병준과 전원책의 당 개혁을 위한 ‘전권’에 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전 변호사는 조직 강화를 위한 전권을 김 위원장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전대 일정을 6∼7월로 늦추자는 입장이었다.이에 김 비대위원장은 비대위의 뜻에 배치되는 전당대회 연기 주장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간극을 줄이려는 양측의 대화는 수포로 돌아가 전 변호사는 ‘개혁 의지가 없는 당에 잔류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당을 떠난 것이다.김병준 위원장은 내년 2월 말이나 3월 초까지 보수 정당의 개혁과 당 이미지 쇄신에 성공할 수 있을까. 김병준 비대위 체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후 혼미를 거듭하는 제 1야당을 구출할 수 있을까.김 위원장은 비대위원장 취임 일성으로 당을 ‘가치 정당’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적이 있다. 당의 개혁을 통해 바람직한 보수정당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수 개혁’이라는 통상적인 슬로건은 걸었지만 개혁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여 당 개혁의 목표와 범주도 설정치 못하고 있다. 새로운 보수를 위한 새 인물의 영입과 당의 세대교체는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전당대회만으로 당 개혁이 이룩될 지 의문이다. 이것이 자유한국당이 처한 당 개혁의 본질적 딜레마다.비대위 출범 이후에도 사분오열된 당내 파벌은 당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 당내는 친박과 비박의 오래된 갈등이 여전히 표출과 잠재를 반복한다. 당내에는 친박 강경파와 온건파, 비박의 잔류파와 복당파는 당 개혁에 관한 입장 차가 너무 크다. 탄핵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기득권을 지키려는데 사람이 많다는 비판도 따른다. 아직도 정파와 계파, 당권파와 비당권파가 뒤엉켜 싸우는 곳에 당의 참된 개혁은 기대하기 어렵다. 친박과 비박이 당 위기의 봉합책으로 김 비대위원장을 수용했을 뿐이다. 이러한 분열과 갈등 상황에서 신인들의 보수 정당의 입당은 사실상 봉쇄되어 있다. 이것이 자유한국당 개혁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심각한 딜레마이다.내년 전당대회를 앞둔 시점에서도 비전을 제시하는 당권 도전자들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세훈, 황교안, 원희룡 지사 등은 당권에 도전할 가능성은 있는가. 아직도 그들이 입당 절차조차 밟지 않는 상황에서 그러한 예측은 불가능하다. 당의 유력인사들이 전당대회를 앞둔 시점이지만 여전히 침묵만 유지하고 있다. 정당 개혁은 유력 주자들이 당권 도전을 위한 당 쇄신책을 밝히고 지지 세력을 확보할 때 가능한 일이며 그것이 당 개혁의 출발점일 것이다. 현재처럼 당내 지도자들이 정치적 이해관계만 따질 때 당 개혁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당의 위기 앞에서 자신의 기득권만 유지하려는 세력은 또 다른 적폐세력일 뿐이다.

2018-11-20

북한 붕괴론의 허와 실

▲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북한 붕괴론이 한동안 회자된 적이 있다. 1980년 후반 소련과 동구 공산정권의 붕괴 때문에 상당한 설득력을 지녔다. 미국의 일부 정책 전문가, 주한 미군사령관, 북한 전문가들도 북한의 3대 세습체제는 권력의 자체의 분열로 붕괴될 것이며, 그것은 시간문제라는 주장까지 제기하였다. 여기에는 냉전체제하에서 서방 자유 민주 국가의 승리라는 여망이 담긴 것이며 대북 전략적 차원의 프로파간다 성격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북한 세습 체제는 과연 붕괴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변화를 모색할 것인가. 북한 붕괴론의 허와 실을 철저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북한체제가 그리 쉽게 붕괴되지 않는 이유부터 살펴보자. 북한의 수령·당·군·국가가 결합된 특유의 북한식 억압기제는 체제 붕괴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당과 군은 수령옹위 양대 기둥이다. 북한은 수령을 정점으로 한 인민무력성·국가안전보위성과 인민안전성은 북한 인민을 조직적으로 통제하는 기제이다. 대중 사회조직인 소년단, 붉은 청년근위대, 사회주의 노동 청년동맹, 여성동맹, 직업동맹 등은 당의 방침을 일사불란하게 당의 방침을 따르도록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체제는 어버이 수령 중심의 가부장적 국가이며, 여기에 충성스런 인민들의 당과 국가에 대한 불만과 반란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북한은 대중의 동의기제마저 잘 갖추어 인민들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그람시가 말한 ‘대중의 동의’에 의해 정권은 유지되는 셈이다. 북한 당국은 ‘경제 위기 외인론’, ‘안보위기 결속론’, ‘일선 간부 책임론’ 등 대중 설득기제를 개발하여 당과 수령의 절대성을 계속 파급한다. 그들은 전 세계 사회주의가 붕괴되더라도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항구적이라는 신념까지 심어주고 있다. 북한 땅에는 인민 설득을 위한 채찍과 당근을 모두 갖춘 셈이다. 셋째는 북한 지배엘리트의 응집력은 강하고 분열 가능성이 작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지배 엘리트들은 현재 수령을 정점으로 일치단결되어 독자세력화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지배층은 수령과 당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으면서 최고 지도자에 대한 충성으로 보답한다. 일종의 공생관계이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소련의 반스탈린 과정에서 보여준 권력 분파현상도 상상하기 어렵다. 중국의 태자당이나 상하이방과 같은 분파적인 정치세력화는 엄두도 못내고 있다. 북한은 권력층은 빨치산, 항일운동가, 전쟁희생자 가족이 대부분이며 이들은 수령을 정점으로 백두혈통에 대한 충성심으로 뭉쳐 있다. 그 동안의 북한 정권의 수많은 숙청도 이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며 수단이다. 북한에서 3대 세습과 유일 영도체제가 가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로 인해 북한의 갑작스런 붕괴는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정책의 변화는 항시 수반된다. 지난해까지 핵·경제 병진노선을 선포했던 김정은은 비핵화를 선언하고, 연일 경제발전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북한의 시장화는 이미 2002년 7·1 조치로 본격화되었다. 초기 자본주의 형태인 시장화는 북한의 법, 제도, 규범, 문화의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북한 주민들의 집단주의적 가치관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북한 주민들이 겉으로는 당과 국가를 우선하지만 내심으로는 개인의 사유욕을 챙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당 간부 등 엘리트층의 이익추구도 예외일수 없다. 북한 당국이 시장화에 따른 황색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모기장 이론’을 제시한 것도 그 일환이다. 그러나 모기장이 ‘모기와 쇠파리’는 막을지라도 자본주의 바람 자체를 차단할 수 없을 것이다. 북한은 그러한 변혁 과정에서 세습 체제는 종식되고 당분간의 집단지도 체제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북한체제의 변화는 있어도 체제 붕괴로는 연결되기 어려운 이유이다.

2018-11-12

이응노 화백의 ‘군상(群像)’

▲ 배한동 경북대 명예 교수·정치학이응노(1904-1989) 화백은 충청도 홍성 출신이다. 서울과 일본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 파리로 유학해 그곳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화가이다. 그는 6·25 전쟁 중 헤어진 아들을 동베를린에서 만난 후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탄원이 없었더라면 상당기간 옥살이를 더 했을 것이다. 그는 1983년 프랑스에 귀화했으며, 1987년에는 북한의 초대를 받아 평양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의 회고전이 1989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개최되었으나 당시 정부의 입국금지로 그의 입국은 좌절됐다. 이 전시회 첫 날 그는 파리 작업실에서 심장 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장한 그였지만 분단과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극복치 못하고 파리에서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나는 2008년 6월 경 6·15 공동 선언 8주년 기념행사로 베를린과 파리를 찾은 적이 있다. 현지 동포들을 위한 남북 합동 강연을 위해 초청된 것이다. 남한에선 걸 판이란 연극팀이, 북한에서는 평양예술소조가 함께 초청됐다. 나는 그곳에서 이응노 화백의 조카 이희세 선생을 만났다. 그는 6·15공동선언공동위원회 유럽 대표이며, 화가로서 남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남북교류가 활발했던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평양과 판문점 민족대회에 다녀온 후 남한에서는 ‘요주의 인물’로 41년간 입국이 금지됐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최현정 감독의 ‘코리안 돈키호테- 이희세’가 그의 남북 왕래를 기록한 다큐 영화다.이번 광주 비엔날레의 ‘귀환’프로젝트에는 이응노의 작품 ‘군상’ 3점이 전시됐다. 그는 이미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혀있지만 그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은 그리던 고국땅에 돌아온 것이다. 그의 첫 ‘군중’ 관련 작품은 1940년대에 그린 ‘3·1 운동’으로 종이에 그린 수묵담채다. 당시 화가가 태어난 홍성에서 멀지 않은 천안의 3·1 운동 시위 장면을 그린 것일까. 당시 군중들의 일제에 대한 항거와 분노가 리얼하게 표출되고, 일경 7명이 총을 들고 군중을 진압하는 장면이 잘 묘사돼 있다. 이 작품도 해방 전에는 전시의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또 다른 두 점은 1980년대의 연작형태의 ‘군상’이다. 국내 입국이 금지된 이응노 화백은 광주민중항쟁을 외신을 통해 접하고 1985년과 1987년 이 연작을 남겼다. 광주 유혈 사태 시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분노하는 군중의 모습이 희망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작품에는 당시 분노한 수많은 군중의 ‘자유를 향한 몸짓’이 축제처럼 묘사돼 있다. 40년대의 3·1운동 시의 군중이 사실적이라면 80년대의 춤추는 군중은 모두 희망적 유토피아를 지향하고 있다. 그의 작품 3점은 모두 기본 단위가 혼자가 아닌 다중(multitude)이며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집단화된 군중의 힘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그림으로 표출한 것이다.이응노 화백은 이미 30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예술혼은 광주에서 부활했다. 그는 군중이 프랑스 대혁명을 성공시킨 파리에서 좌파 화가 피카소도 자주 접했을 것이다. 피카소의 미제를 규탄한 ‘조선의 비극’도 파리에서 함께 감상했을 것이다. 작품 ‘군상’은 그가 파리에서 터득한 예술혼을 조국의 억눌린 민중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구상한 작품일 것이다. 1919년 3·1운동의 군중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쟁취케 했고, 1980년 광주의 군중이 87년 민중 항쟁 승리의 초석이 됐다. 그는 2016년 광화문 광장의 또 다른 ‘군상’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국 분단으로 남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살다간 그의 영혼을 위로할 뿐이다. 남북 화해시대에 그의 인간과 예술에 대한 재평가도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다.

2018-1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