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민족 분단의 단초는 항일 투쟁의 분파에서

등록일 2019-01-27 20:12 게재일 2019-01-28 18면
스크랩버튼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상해 임정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다녀왔다. 상하이의 초대 임정 청사, 윤봉길의사기념관을 거쳐 항저우, 자싱, 전장, 난징의 임시 정부 유적지도 돌아보았다. 지난해 충칭 임시 정부방문에 이어 두 번째 학술 탐방 행사의 일환이다. 독립운동 정신 계승사업회가 마련한 이번 학술대회에는 중국의 저명한 학자들도 참여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의 항일 투쟁을 재조명하기 위함이다. 석원화 교수는 상해 복단대학의 명예교수이며 코리아연구센터의 주임이다. 그는 조선인들의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을 3개 분파로 나누어 그 활동을 소상히 소개하였다. 한국의 학술 대회 참여자들의 가장 관심을 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활동한 첫 번째 그룹은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이회영, 안창호, 신규식 등 상해임시정부파다. 우리는 대체로 중국에서의 항일운동하면 상해에서 출범하여 중경에서 해방을 맞이한 26년간의 임시 정부의 활동만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건국은 3·1운동과 상해 임정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헌법에도 명시하고 있다. 중국의 석 교수는 상해 임정이 윤봉길 의거 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하에 독립운동의 투쟁 역량을 강화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김구의 한국광복군과 김원봉 중심의 조선민족전선 연맹은 중국군과 함께 항일 투쟁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요체가 되었으나 이승만의 단정 안에 밀려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두 번째 그룹이 1926년 중국 조선인 집거지에서 조선 공산당을 조직하고, 동북 항일 연군에 가담한 최석천, 김일성, 김책 등의 활동이다. 이들의 항일 행적에 관해서는 남한 땅에서는 소개된 자료가 거의 없으나 김일성이 중국의 동북항일 연군의 소조로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북한 정권 수립된 후 우리사회는 좌파나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항일 독립운동을 무시하고 배제한 결과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들의 활동은 보잘 것 없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보천보 전투 등 이들의 항일 투쟁을 영웅시하고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하였다. 이들은 소련이 1945년 대일 선전 포고를 하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소련 변경지역으로 장소를 옮겨 항일 투쟁을 계속했다. 해방 후 김일성은 소련군 소좌로 귀국하여 결국 스탈린의 지지 하에 북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세 번째 그룹은 중국 모택동의 팔로군과 신4군에 편입되어 중국의 항일 근거지에서 활동한 세력이다. 팔로군 포병 대장을 역임한 무정과 최창익, 김두봉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중공군 최후의 근거지인 연안에서 출발하여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항일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 잔재를 소탕하였으며, 북한의 정권 수립 시 군대 조직의 주요 구성 부문이 되었다. 이들은 북한 정권의 초기 주요 요직을 맡았으나 6·25 전쟁 전후 대부분 숙청되었다. 6·25 전쟁 후에는 허가이 등 소련파도 숙청되었다. 결국 북한정권에는 김일성 중심의 갑산파만 살아남아 오늘의 백두 혈통이라는 삼대 세습의 토대가 되었다.

결국 일제의 조선 강점이 분단의 씨앗이라면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의 분열이 분단의 단초가 되었다. 1945년 2월의 얄타 비밀 협정에 의한 미국과 소련의 38선을 경계로 한 분할통치는 한반도 분단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해방 공간에서 남북의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상해 임정에서 탄핵된 후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이승만은 남한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중국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 소련군에 편입된 김일성은 북한의 수상이 되었다. 모두가 역사의 운명이고 아이러니이다. 임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선열들의 항일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겨 민족의 재통일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민족의 통일이 한민족의 완전한 해방이기 때문이다.

시론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