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1904-1989) 화백은 충청도 홍성 출신이다. 서울과 일본에서 그림 공부를 하다 파리로 유학해 그곳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 화가이다. 그는 6·25 전쟁 중 헤어진 아들을 동베를린에서 만난 후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탄원이 없었더라면 상당기간 옥살이를 더 했을 것이다. 그는 1983년 프랑스에 귀화했으며, 1987년에는 북한의 초대를 받아 평양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의 회고전이 1989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개최되었으나 당시 정부의 입국금지로 그의 입국은 좌절됐다. 이 전시회 첫 날 그는 파리 작업실에서 심장 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장한 그였지만 분단과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극복치 못하고 파리에서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나는 2008년 6월 경 6·15 공동 선언 8주년 기념행사로 베를린과 파리를 찾은 적이 있다. 현지 동포들을 위한 남북 합동 강연을 위해 초청된 것이다. 남한에선 걸 판이란 연극팀이, 북한에서는 평양예술소조가 함께 초청됐다. 나는 그곳에서 이응노 화백의 조카 이희세 선생을 만났다. 그는 6·15공동선언공동위원회 유럽 대표이며, 화가로서 남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남북교류가 활발했던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평양과 판문점 민족대회에 다녀온 후 남한에서는 ‘요주의 인물’로 41년간 입국이 금지됐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최현정 감독의 ‘코리안 돈키호테- 이희세’가 그의 남북 왕래를 기록한 다큐 영화다.
이번 광주 비엔날레의 ‘귀환’프로젝트에는 이응노의 작품 ‘군상’ 3점이 전시됐다. 그는 이미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혀있지만 그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들은 그리던 고국땅에 돌아온 것이다. 그의 첫 ‘군중’ 관련 작품은 1940년대에 그린 ‘3·1 운동’으로 종이에 그린 수묵담채다. 당시 화가가 태어난 홍성에서 멀지 않은 천안의 3·1 운동 시위 장면을 그린 것일까. 당시 군중들의 일제에 대한 항거와 분노가 리얼하게 표출되고, 일경 7명이 총을 들고 군중을 진압하는 장면이 잘 묘사돼 있다. 이 작품도 해방 전에는 전시의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또 다른 두 점은 1980년대의 연작형태의 ‘군상’이다. 국내 입국이 금지된 이응노 화백은 광주민중항쟁을 외신을 통해 접하고 1985년과 1987년 이 연작을 남겼다. 광주 유혈 사태 시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분노하는 군중의 모습이 희망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작품에는 당시 분노한 수많은 군중의 ‘자유를 향한 몸짓’이 축제처럼 묘사돼 있다. 40년대의 3·1운동 시의 군중이 사실적이라면 80년대의 춤추는 군중은 모두 희망적 유토피아를 지향하고 있다. 그의 작품 3점은 모두 기본 단위가 혼자가 아닌 다중(multitude)이며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집단화된 군중의 힘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그림으로 표출한 것이다.
이응노 화백은 이미 30년 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예술혼은 광주에서 부활했다. 그는 군중이 프랑스 대혁명을 성공시킨 파리에서 좌파 화가 피카소도 자주 접했을 것이다. 피카소의 미제를 규탄한 ‘조선의 비극’도 파리에서 함께 감상했을 것이다. 작품 ‘군상’은 그가 파리에서 터득한 예술혼을 조국의 억눌린 민중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구상한 작품일 것이다. 1919년 3·1운동의 군중이 일제로부터 해방을 쟁취케 했고, 1980년 광주의 군중이 87년 민중 항쟁 승리의 초석이 됐다. 그는 2016년 광화문 광장의 또 다른 ‘군상’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조국 분단으로 남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살다간 그의 영혼을 위로할 뿐이다. 남북 화해시대에 그의 인간과 예술에 대한 재평가도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