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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눈물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 정치학8월 14일 ‘기림의 날’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억하자는 날이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실명 증언한 날을 기념하여 2017년 12월 이날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했다. 지난해에 이은 기념식 행사 장면을 보니 여성가족부 장관과 정치인들이 참석하고 아직 생존해 있는 피해 할머니도 여러 명 참석하였다. 낯익은 얼굴의 이용수 할머니가 소복차림으로 앞줄에 앉아 눈물 짓는 모습도 보였다. 일본 군속명부에 정식 등재되어 있는 김복동 할머니도 올해 세상을 떠났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로 한일 관계가 뒤엉킨 상황에서 치러진 이번 기념식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남기고 있다.일본군 피해 당사자인 이용수 할머니는 대구에 살아 계신다. 그는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 없는 위안부 합의는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활발한 인권 운동을 펼치고 계신다. 1927년 생 92세인 그는 아직도 수요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도쿄뿐 아니라 뉴욕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아베 정권의 부당성을 알리고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전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한·중, 베트남 등 약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대한민국의 등록된 피해자는 238명이며, 2019년 5월 현재 21명이 생존해 있다.일본은 아직도 위안부의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억지를 쓰고 있다. 지난 7월초 연해주 학술행사에서 이용수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증언은 아베 정권의 주장을 근본적으로 뒤집고 있다.“나는 1928년 12월 13일 생입니다. 우리 나이로 92살입니다. 나는 15살인 1943년 일본군에 끌려가 대만 신숙에서 3년간 고통을 겪다 해방 후 1946년 가까스로 풀려난 사람입니다. 그 때를 다시 기억해 봅니다. 내가 끌려간 그날 밤 여자 아이와 군인이 나의 방 뒤의 봉창으로 들여다보며 나오라고 손짓했습니다. 그때 나는 장난하는 줄 알고 몰래 마루에 나와 앉아 있었는데 여자 아이와 군인이 갑자기 들어닥쳤습니다. 나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5명과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배를 탔습니다.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그날 밤 갑자기 끌려간 것입니다. 어린나이에 나는 너무 몰랐습니다. 그 길로 끌려간 곳이 대만 신죽(新竹)의 일본 특공대부대인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대만 일본 가미가제 부대였습니다. 그곳에서 군인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고 다리를 칼로 치고 죽이고 전기고문도 당했습니다.…… ”이러한 수많은 피해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사과하지 않고 있다. 위안부 문제와 강제 징용 문제가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경제 제재로 연결되고 있으니 더욱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극우의 아베 정권은 한국 피해자들의 사죄와 배상 요구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억지를 쓰고 있다. 아베 측근들은 강제 위안부는 한 명도 없으며 심지어 한국에는 본래 기생문화가 있었고 위안부들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 종군했다고 강변하고 있다. 아베는 2015년 박근혜 정권 말기 한일 간의 위안부 문제의 ‘불가역 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기 때문에 문재인 정권은 외교 관례를 어겼다고 비난한다. 과거의 고노 담화를 뒤집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일 간의 합의를 정부가 파기한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제 징용의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처럼 국가 간 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법적 구제 절차는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제법의 상식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할머니들의 동의와는 무관한 10억 엔짜리 화해치유재단을 해체해 버렸다. 시민들은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27년간 1천400회의 수요 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민족적 반일 감정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의 양식있는 시민들까지 이에 동조하고 있다. 아베 정권은 지금이라도 위안부 문제에 관한 진정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한일 간 화해의 첫 단추이기 때문이다.

2019-08-18

북한의 권력 세습, 남한의 재벌과 교회 세습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세습(世襲)이란 권력이나 재산, 신분, 직업 따위를 가족이나 친족끼리 승계하는 것을 말한다. 개방된 민주사회에서는 특권, 재산, 권력, 명예이든 어떤 것이든 세습은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재산의 세습을 막기 위해 최소 50%에서 최대 65%까지 상속세를 부과하여 부의 불평등을 막으려고 한다. 자유 민주 사회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 경쟁이 이루어져 모든 사람은 출발에서부터 과정, 결과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함이다. 분단의 세월 70여 년, 같은 민족인 남북은 추구하는 정치 이념에 따라 사회의 구조와 관행도 상당히 이질화되어 있다. 남북한은 세습행태도 다른데 북은 권력 세습, 남은 재벌세습이 심각한 문제이다.북한의 권력세습은 3대에 걸쳐 이루어지고 비판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봉건 왕조국가도 아닌 나라에서 백두혈통이 세습의 기본 요건이 된 것은 아이러니이다. 백두 혈통이란 김일성이 백두산을 거점으로 부인 김정숙과 항일 빨치산 투쟁을 했다며 붙여진 명칭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난 김정일마저 백두산 정일봉 아래서 태어났다고 선전하는 것도 백두혈통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북한당국은 권력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령승계론을 제시하였다. 수령은 인체의 뇌수처럼 가장 중요하며 북한의 전 인민은 수령의 수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북한의 학자들도 ‘위대한 조선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백두혈통의 권력세습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이다. 북한 땅에서 수령에 대한 비판은 ‘국가 존엄 모독’으로 숙청을 당한다.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의 처형도 이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사람도 많다. 재산의 상속도 인정치 않는 북한체제에서 권력의 3대 세습은 그들만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종의 도그마이다.남한사회에서도 재벌 세습은 경제 정의 실현의 최대 장애물이 된 지 오래다. 재벌(財閥)이란 가족과 혈연으로 이어지는 거대 자본을 뜻한다. 우리나라의 대기업 삼성, 현대, 롯데, LG, SK 등은 대표적인 재벌이다. 한국어 고유명사인 재벌은 한국 경제의 독특한 모순 구조로 이해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재벌 세습이 한국에서는 당연시되어 양극화 현상은 심화되고 있다. 한국 재벌의 위장 상속, 분식회계, 배임과 횡령, 땅콩 회항 등의 횡포는 이제 다반사가 되고 있다. 한국의 재벌은 정치, 사법, 심지어 언론권력까지 교묘히 장악하여 재벌의 세습구조를 이어가고 있다.이같은 재벌 세습에 이어 교회 세습이 우리 사회문제로 등장하였다. 우리나라의 장로교회 중 등록교인 10만이 넘는 초거대 명성교회는 목사의 부자세습 문제로 시끄럽다. 성경 어딜 찾아보아도 교회의 부자 세습을 정당화하는 구절은 찾아보기 어렵다. 성경은 오히려 하느님의 참된 자녀는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고, 세상의 탐심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드디어 대한 예수교 장로회교단 재판국은 며칠 전 명성교회 부자 세습은 교회법상 ‘무효’라고 심판하였다. 그러나 명성교회의 현직 장로들은 합법적 절차를 내세워 후임결정이 결코 세습이 아니라는 주장하고 있다. 모두가 세속의 재물이 교회에 침투한 결과로 씁쓰레한 감정을 지울 수 없다.북쪽의 권력세습이나 남쪽의 재산 세습은 자유 평등사회의 구현의 장애물이다. 김정은의 3대 권력 세습은 북한의 모든 권력을 독점화하여 인민들의 인권마저 말살하고 있다. 남쪽의 재벌 세습은 부의 독점과 편중으로 경제 정의 실현을 가로막고 있다. 북한의 3대 세습구조는 인민들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종식되어야 할 사안이다. 북한은 최소한 권력의 집단지도 체제라도 등장하길 바란다. 남한의 재벌구조는 경제정의 실현을 위해 최소한 자본과 경영이라도 분리되어야 한다. 민족 통일을 위해서라도 남북의 장애물은 제거되어야 한다. 남북의 세습구조가 해소될 때 남북의 교류 협력은 더욱 촉발되고 통일의 새벽은 가까이 올 것이다.

2019-08-11

아베의 오만한 식민사관이 결국 화(禍) 불렀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일본의 8·2 경제 보복조치는 아베의 오만한 식민사관에서 비롯되었다. 아베는 1997년 12월 중의원 역사모임을 결성하고 사무총장직을 맡는다. 아베는 신도(神道)정치 의원모임 등을 통해 자신의 역사 인식의 토대를 굳건히 하였다. 아베는 이 모임을 통해 그의 극우 군국주의적 신념을 전파하였고, 일본 역사 교과서 개정운동도 동시에 펼쳤다. 이들의 ‘역사 교과서의 의문-젊은 의원들에 의한 교과서 문제 총괄’이라는 보고서는 일본 역사 교과서의 개정의 지침이 되었다. 아베의 패권주의적 군국주의적 시각은 일본 국익 팽창에는 기여했겠지만 우리 경제에는 상당한 타격을 피할 수 없다. 아베의 오만한 일본 극우 식민사관이 오늘의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연결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아베의 오만한 역사인식은 우리의 징용자 보상 문제에도 적용되고 있다. 아베는 1965년 한일 간 체결된 3억불의 보상협약으로 징용자 보상 문제는 재론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최근 한국 대법원의 징용자 일본기업 배상 판결은 그의 경제 보복으로 연결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같은 아베의 조치는 일본의 지식인들까지 수긍하지 못하고, 일본의 전 변협회장까지 국가의 잘못으로 인한 개인의 법적 구제 절차는 당연한 피해자의 권리라는 주장이다. 아베의 이러한 발상은 과거 국권 침탈과 식민지배를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이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부인하지만 아베의 과거사에 대한 오만한 인식이 한국에 대한 경제 보복으로 연결되었음은 분명한 현실이다.나아가 아베는 과거 종군 위안부 강제 동원까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는 위안부의 강제 연행을 인정한 1993년 고노담화까지 부정한 셈이다. 아베의 역사 모임은 조선의 위안부 문제도 ‘조선에는 기생집이 있어 위안부 문화가 보편화되어’ 강제 동원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1965년 조약체결 시 위안부문제에 관해 아무도 이의가 없었는데 한국 생존 증언자 16명의 의견 청취를 토대로 군의 강제 동원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종군 위안부의 강제 동원에 대해 물증 제시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2012년 박근혜 정부 시절의 ‘불가역’의 위안부 문제의 부당한 합의만을 이행할 것만 요구하고 있다.독도문제에 관한 일본 영토주장은 얼토당토않은 오만한 시각이다. 일본은 1905년 러일 전쟁 시 ‘주인 없는 섬 독도’를 러시아 함대 감시용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독도가 한반도에 속한 영토임은 1145년 삼국사기,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 등 우리 사료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1695년 돗도리번 답변서, 1877년 태정관 문서 등 그들의 문서에도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도는 울릉도에서 87㎞, 일본의 돗도리에서는 157㎞나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토인 독도는 사실 한일 합방에 의한 일본의 국권 침탈의 첫 희생물이다. 최근 러시아의 독도영공 침범에 대해 일본이 한국과 러시아를 싸잡아 비판한 것은 그들의 영토적 속내를 다시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아베의 이러한 과거사에 대한 오만하고 왜곡된 인식이 이번 8·2 경제 보복의 단초이다. 아베의 집권 초기의 군국주의나 패권주의적 주장은 일본 경제위기 탈출에 기여한 측면도 있다. 아베는 이제 일본의 보수적인 여론을 토대로 헌법 9조 개정을 통해 무력강국의 합법화를 획책하고 있다. 그러나 아베의 이번 경제 보복조치는 결국 자유무역의 원칙에 반할 뿐 아니라 그것이 일본 경제나 외교에도 부메랑이 될 것이다. 세계 3위인 일본 경제도 12위의 한국 경제를 이제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간 우리의 저자세 대일 외교가 오늘 아베의 오만성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아베의 너울성 파도부터 잠재워야 할 것이다.

2019-08-04

아베 극우 정치의 사상적 뿌리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아베의 극우 정치가 한일관계의 균열을 초래하고 있다.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절반의 승리를 차지한 아베는 그의 정치노선을 더욱 강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는 집권 이후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군국주의 부활을 획책하고 있다. 그는 일본 헌법 9조의 무력행사와 군사력 보유 금지 조항을 개정해 자위대 증강을 합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2006년 관방장관 시절부터 야스쿠니신사를 은밀히 참배하면서도 야스쿠니 참배가 결코 군국주의 강화는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것은 국가를 위해 희생된 사람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며 국민의 권리와 의무라고 주장한다.1954년생 아베는 친가, 외가 모두 일본 보수정치의 맥을 잇고 있다. 그의 외조부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이며, 외종조부 역시 사토 에이사쿠 총리다. 그의 외사촌 기시 노부오는 참의원 출신이다. 그의 조부 아베 칸은 중의원이었고 부친 아베 신타로는 자민당 간사와 일본 외상을 지냈다. 아베는 1961년부터 1977년까지 세이케이 초중고, 대학을 나온 후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2년간 어학연수를 하였다. 귀국 후 그는 고베철강 조후제재소에 잠시 근무했고 외상인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일했다. 그는 1993년 아버지 선거구 야마구치에서 부친의 명성과 인맥 금맥을 그대로 이어받아 중의원이 됐다. 그 후 그는 3선 총리가 되었으니 대표적 금수저 정치인이다.아베가(家) 3대는 메이지 유신의 이론가들을 사상적 고향으로 삼고 있다. 아베가는 조슈의 인맥의 좌장 요시다 쇼인, 다가스키 신사쿠를 특별히 존경한다. 요시다 쇼인은 맹자의 철학을 실천적 행동철학인 양명학으로 해석하고 따랐다. 요시다 쇼인은 쇼카손쥬쿠를 세워 젊은이들을 제자로 삼았으며 이 학숙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후일 명치유신의 주역들이 됐다. 이들 중에는 일본 막부정치 타도의 영웅 다가스키 신사쿠, 초대 조선통감을 암살된 이토 히로부미, 3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도 들어 있다. 아베는 고교시절 야마구치현의 다가스키 신사쿠의 묘를 참배하고 그의 이름에 신(晉)자도 다가스키 신사쿠에서 따올 정도로 그를 사상적으로 흠모하였다.아베의 사상의 뿌리인 요시다 쇼인은 급진적 개혁을 시도하다 1859년 29세에 막부정권에 의해 처형당했다. 그는 천황중심의 강력한 국수주의적 중앙집권 국가건설을 꿈꾸었다. 그는 천하는 천황이 지배하고 그 아래 만민이 평등하다는 일군만민론(一君萬民論)를 주장하며 당시로서는 위험한 막부정치에 맞섰다. 그는 구미 열강과의 불평등조약에서 야기된 당시의 국가적 손실을 조선 만주 등 영토 확장을 통해 만회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것이 소위 조선반도 침략론인 정한론(征韓論)이 되었으며 그 뜻은 후일 그의 제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실현된다. 쇼인의 제자 다가스키 신사쿠 역시 스승의 뜻에 따라 존왕양이 부국강병(尊王攘夷 富國强兵)의 철저한 옹호자가 된다. 결국 쇼카손쥬쿠의 야마구치 인맥들은 군국주의 명치유신의 계승자가 된다. 이 인맥에서 8명이나 총리가 되고 아베 역시 이 인맥의 일환이다.이 야마구치 인맥은 명치유신을 통한 일본 근대화의 영웅이지만 우리 역사에는 국권 강탈의 주범이며 원흉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베의 이번 대한무역제재는 일시적인 단순한 선거용 책략 이상의 반한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의 보수우익들은 아직도 아베의 극우 국수주의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여론도 나쁘지 않다. 일본 청년들도 잃어버린 일본의 경제 침체를 극복하고 취업 천국을 이룩한 아베노믹스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극일(克日)을 위해 아베 정치의 사상적 뿌리를 철저히 분석하고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아베의 대한관(對韓觀)은 단순한 역사해석의 차이가 아니고 아베의 몸에 체득된 국수주의의 산물이다. 우리가 이러한 아베의 이러한 역사인식과 무모한 경제전쟁에 일치단결하여 대응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9-07-28

정치 평론가 정두언의 자살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정치평론가 정두언이 자살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우리나라는 1년에 1만4천명이 자살하고, 인구 10만명 당 자살률이 26.5명으로 세계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자살자 중에는 노인, 인기 연예인, 유명 정치인도 포함된다. 검찰의 조사 과정에 있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 성완종 전 의원, 노회찬 전 의원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번 정두언 전 의원의 자살은 검찰 조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어서 그의 자살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키고 있다. 인기 정치평론가로 신망을 받아온 그가 당일 오전 방송에 출연하고, 오후에 유서 한 장만 남기고 자살한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그는 운전기사 아버지와 공사장 잡일을 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1956년 3월6일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무척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공부를 잘하여 경기고, 서울대를 나와 제24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20년 공직생활을 하였다. 2000년대 초 이회창의 권고로 정치에 입문하고,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장, 서울시 정무부시장도 역임하였다. 서대문을에서 17대에서 19대까지 내리 3선하고 20대 총선에서 패하였다. 그는 이명박 선거 캠프 기획본부장으로 활동한 결과 한 때 ‘왕의 남자’로 불리며 대통령을 보좌하였다. 그는 한 때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여 음반까지 낸 적도 있다. 그는 자살 직전까지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일식집도 경영한다고 밝힌 바 있다.정두언은 ‘정치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여러 해 동안 정치평론가로 활동하였다. 필자가 자주 시청하는 CBS의 ‘월간 정두언’이나 MBN ‘판도라’에서도 그의 직설적인 논평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만사형통’이라던 시절 권부의 핵심 이상득을 비판하다 권좌에서 밀려나기도 하였다. 그는 보수적 입장에 있으면서도 극우보수를 비판하고, 합리적인 보수의 길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는 진보 정치의 허구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두언은 좌우 양측 어느 측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여 정치인으로서의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그가 자초한 고난의 길을 걸은 셈이다. 이번 정두언의 비극은 참된 보수를 지향하던 정치인의 말로를 보는 것 같아 서글픈 마음을 지울 수 없다. 한국의 정당 정치를 빙자한 패거리 정치에 적당히 야합하면 생명은 부지할 수 있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여 정치적 실패자가 된 사람이다. 그를 감싸고 있었던 현실 정치에 대한 혜안과 비판이 그의 용기 있는 발언으로 비춰지기도 하였다. 물론 그는 뇌물혐의로 구속되기도 하고, 20대 대선의 쓰라린 실패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의 수차례의 정치적 실패, 이혼과 재혼 등이 인간에 대한 환멸로 연결되어 그의 지병인 우울증을 더욱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어릴 때 “아버지는 늘 밖으로 도셨고 수시로 어머니를 구타했다”고 정신적 상처를 진솔하게 고백한 적도 있다. 그가 자살 당일 오전 명쾌한 정치 평론을 끝내고, 오후 스스로 선택한 자살은 우울증이라는 무서운 병리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우리는 노회찬에 이은 그의 자살을 계기로 우리의 혼탁한 정치 풍토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국리민복이라는 정치의 대의를 상실하고 정쟁으로 치닫는 한국의 정당 정치,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서로 ‘내로남불’을 외치면서 당리당략에만 치중하는 패거리 정치, 이러한 왜곡된 정치 풍토가 존립하는 한 양심적인 정치인은 생존하기 어렵다. 정두언은 한국 정치의 왜곡된 현실을 직설적인 비판을 통해 대리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의 우울증이라는 정신적인 질병관리에는 실패하였다. 우리 주변에는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있고 유명 정치인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정두언의 자살을 계기로 우리 정치 풍토와 정치인의 정신건강을 체크해볼 시점이다. 정치평론가 정두언의 비극 앞에 그의 명복을 빌 뿐이다.

2019-07-21

고려인 이바짐과 김발레리야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러시아의 고려인을 현지에서는 까레이츠키라고 부른다. 이들 고려인 55만 명은 우즈베키스탄 19만, 카자흐스탄 10만,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5만, 사할린 4만, 이곳 연해주에 4만 명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1937년 10월 스탈린이 연해주 고려인 17만2천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결과이다. 스탈린은 연해주 고려인들이 일제 첩자가 될 것으로 우려해 멀리 중앙아시아로 쫓아버렸다. 세계 이민사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을 독재자 스탈린이 저지른 것이다. 연해주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명령 하나로 이틀분의 식량만 걸머메고 이곳 라즈도리노예역에서 열차에 올랐다. 한 달간의 이동 중 2만여 명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나갔다. 일제로부터 수탈당한 민족이 러시아에서 다시 수탈당하는 비극이다.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황무지 벌판에서 농사를 지어 연명하였다. 이들은 ‘고본질’이라는 독특한 협동영농방식으로 생산량을 대폭 증가시켰다. 고려인 중에는 소련 당국정부로부터 노력 영웅칭호를 받은 사람도 많다. 우즈베키스탄의 김병화는 대표적인 노력 영웅이다. 이들의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을 정도로 비참했단다. 10여 년 전 내가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 고려인 2세들 중에는 조선말을 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이들의 얼굴 모습까지도 우리와는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곳에는 상당히 성공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고난의 세월을 참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 앞에 할 말을 잃었다.스탈린 사후 그들이 다시 연해주 고향땅으로 오고 있다. 연해주 학술 간담회에서 발표한 이바짐과 김발레리야도 고려인 2세들이다. 우수리스크 노인회 부회장인 이바짐은 첫인상이 무척 당차 보였다. 그는 소련군 출신이란다. 그는 우리말도 잃어버리고 오직 소련을 위해 총을 들었던 사람이다. 그는 이번 발표 때 한국어는 모르고 러시아어로 주제를 발표하였다. 스탈린의 철권 통치하에서 민족어 사용을 금지시킨 결과이다.그는 러시아말로 발표하고 러시아인 통역 세르게이가 한국어로 통역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였다. 꽃미남 세르게이는 한국에 유학한 러시아 청년이다. 발표자 이바짐은 러시아 고려인들의 비극을 보는 것 같아 씁쓰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우수리스크 민족학교를 운영하는 김발레리야는 예상과 달리 한국어를 잘 구사하였다. 그는 우즈벡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한국어를 독학으로 익힌 장한 여성이다. 그는 우수리스크 고려인 학생들을 모아 우리 문화와 우리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고려인들이 러시아에서 동화되어 살 수밖에 없지만 우리 민족 전통을 지키는 가정이 많다고 소개했다. 고려인들은 생일, 결혼, 회갑은 반드시 상을 잘 차려 잘 대접한단다. 그래야 죽어서도 제사상을 잘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지난해 조부상을 당하여 딸의 결혼식을 연기시켰다고 전했다. 그들은 아직도 제삿날 부모님 산소를 찾는 전통도 이어 오고 있단다. 우리에게서 잊어버린 조선의 옛 풍습을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어 만감이 교차하였다.이곳 연해주 일대는 러시아 고려인, 중국 조선족, 남한인, 북한인이 4만 명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모두 민족은 같지만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다. 중국의 조선족은 이곳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 귀국길에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북한 노동자 일행을 마주했다. 하나 같이 키 작고 야위고 초라한 얼굴들이다. 같은 동포로서 연민의 정이 들었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자연스레 그들에게 말을 걸고 손을 내밀었다. 일행 중 북한 여성이 ‘북남 수뇌회담을 했으니 이제 우리도 좋아지겠지요.’라는 말로 화답하였다. 정상회담 이후 달라져 가는 화해 분위기를 대변해 주었다. 우리는 평양 순안 비행장으로 먼저 떠나는 그들에게 힘껏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언제쯤 남북주민이 함께 열차를 타고 두만강을 넘나들 수 있을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2019-07-14

연해주 항일 독립운동 유적 보호가 절실하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며 상해 임정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연해주의 임시 정부인 대한국민의회는 상해임정보다 한 달 앞서 설립되었다. 그래서 올해는 연해주 항일 운동 발자취를 찾는 사람도 많다. 독립운동 정신계승 사업회 소속인 우리 일행은 3박4일 일정으로 지난달 28일 연해주로 학술 탐방을 떠났다. 대구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3시간도 안되어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우리나라는 러시아 입국 비자가 면제되었고 입국신고도 자동으로 처리되었다. 내가 자주 다녔던 10년 전보다 입국 수속이 훨씬 간편해진 것이다. 당시 우리는 2시간 동안 짐을 조사받는 등 입국수속이 까다로웠다. 우리의 국력이 향상된 탓인지 공항에서부터 기분이 매우 좋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시가지 모습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차가 그대로 한글 표시를 지우지 않고 다녔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밀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다. 해삼이 많아 해삼위(海蔘威)라고 불리운다. 이곳 일대는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으며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던 낯설지 않는 땅이다. 우리나라 함경도와 두만강을 사이에 둔 이 지역은 선조들이 내왕이 잦았던 지역이다. 한말 1863년 함경도에서 13가구가 포시에트 부근 연추(크라스키노)에 처음으로 이주하였다. 연해주는 1937년 스탈린이 강제 이주시키기 전에는 고려인 17만 명이 거주했던 곳이다. 이곳은 일제를 피해 이주한 조선인들이 다시 멀리 중앙아시아로 유배된 비운의 원한의 땅이다. 아직 중앙아시아 일대에 약 50만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우리 팀은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에서 항일 운동 관련 학술대회를 가졌다.뒤이어 우리는 선조들의 항일 운동의 현장을 찾아 나섰다. 조선인들 최초의 거주지 지신허(知新墟)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거쳐 우수리스크까지 둘러보았다. 불행히도 연해주 어디를 가나 고려인들의 삶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유물과 유적은 온데간데없고 근년에 마련된 기념비와 표지판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디를 가나 우리말을 하는 고려인 동포를 찾아보기 어렵고 그들의 생활은 대체로 어려웠다. 민족의 해방은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고,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우리와 국교를 단절했다.소연방이 해체된 후 1990년 한국과 러시아는 정식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번 학술 탐방은 연해주에서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과제를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조들의 유물 유적부터 보존하는 일이다. 특히 연해주에는 일생을 항일과 독립 투쟁을 하다 순국하신 분들이 의외로 많다. 유인석, 이상설, 최재형, 안중근, 문창범, 이동휘, 장지연, 신채호 등이 그들이다.이 밖에도 김알렉산드라 등 사회주의 항일 혁명운동가들도 수 없이 많다. 다행히 안중근 의사가 결의한 단지 동맹비가 건립되어 있다. 조국이 해방되지 않으면 이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긴 이상설 지사의 유허비도 이곳 사이펀 강가를 지키고 있다. 최재형 선생의 생가도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어 무척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항일 애국지사들의 족적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다. 우선 상해 임정의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의 생가부터 보존하여야 한다. 신한촌의 그의 생가는 이미 슈퍼마켓이 되어 표지판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조선인 최초의 이주마을인 지신허는 러시아 군인들이 길을 막아 가수 서태지가 세운 마을 표지석도 볼 수 없었다. 임시 정부의 모태가 된 전로한민족 중앙회 총회가 열린 장소는 러시아인들의 전문학교로 변해 버렸다. 신한촌의 한민학교 역시 러시아인의 학교로 변신되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는 그 내용이 빈약하기 그지없다. 우리는 러시아 항일운동의 발자취를 하루 빨리 발굴·보존토록 해야 한다. 그것이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이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교훈이다.

2019-07-07

북미 3차 정상회담이 성공하려면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노딜(no deal)회담으로 끝나버렸다. 트럼프보다는 김정은의 충격이 더 컸을 것이다.트럼프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프로그램을, 김정은은 영변핵시설의 폐기만으로 대북 제재 해제를 요구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북미는 종래와 달리 상대에 대한 비난이나 책임전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양 정상은 언론을 통해 상대에 관한 호의적 입장을 표출하며 대화의 모멘텀을 이어갔다.트럼프는 지난달 29일 G20정상회의에서 트위터를 통해 29~30일 방한 기간 중 방문하는 비무장지대(DMZ)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고 싶다고 제안했고 두 사람은 30일 비무장지대(DMZ)에서 극적인 만남을 가졌다. 트럼프는 이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남쪽에서 김정은에게 워싱턴을 방문해달라고 말했다.물밑에선 북미 실무회담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3차 북미 회담이 성공하려면 북미는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여야 한다. 그것이 3차 북미회담을 풀 수 있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하노이 회담은 기본적으로 비핵화에 관한 실무적 합의 없이 정상 간의 합의에 맡긴 회담이다. 북한의 다급한 제재해제 요구와 미국의 완전 비핵화 요구가 합의를 구하지 못한 것이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폐기만으로 대북 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미국은 영변 핵시설 폐기외의 소위 플러스 알파(+α)를 요구한 결과이다. 이 회담은 실무진의 합의 없는 톱다운(top down) 방식의 정상회담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트럼프가 북한의 요구를 거부한 배경에는 미국 내 강경 보수층의 반대 압력이 크게 작용했다. 김정은 역시 정상 간의 ‘통 큰 일괄 타결’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으나 실패한 것이다.그러나 북미 간 3차 회담이 재개될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내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트럼프의 초미의 관심은 내년 대선 승리에 있다. 그는 공화당 내의 대북 강경 매파뿐 아니라 보수성향의 군산복합체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트럼프가 임기 중 완전하고 불가역의 북핵문제를 해결한다면 대선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것이다. 이것이 트럼프가 3차 정상회담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북한 김정은 역시 북미 회담 재개를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김정은이 선포한 ‘경제 발전 노선’은 미국의 강력한 대북 제재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 과정이 지속될수록 김정은은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미국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제재라는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트럼프가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을 향해 북의 완전한 비핵화만이 북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던지는 이유이기도 하다.우리 정부는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는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한다. 북·중 회담에서 중국도 휴전 협정의 당사자로 핵 문제 해결의 중재자로 나섰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는 모양새이며 북미 타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돌발 변수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조치를 전제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확고한 안전부터 담보해주어야 한다. 이번 회담이 성사되면 북한이 주장하는 톱다운 방식보다는 실무회담 중심의 바텀업(bottom up)방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북미는 ‘북한의 비핵화 실질 조치→국제사회 제재 해제·남북 경제협력 활성화→동북아 공동번영’이라는 이정표에 합의하여야 한다. 북미회담의 합의는 여전히 어려운 과정이며 당사국의 인내가 요구된다. 북미 정상 회담이 성공하려면 양국의 신뢰부터 확실히 담보되어야 한다.

2019-06-30

홍콩의 ‘우산 혁명’이 의미하는 것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이번 홍콩 시민 200만 명이 참여한 우산 혁명은 세계인들의 관심을 다시 촉발하고 있다.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홍콩에서 대대적인 반정부 불길이 타올랐기 때문이다.시위에 참여한 검은 옷의 홍콩 시민들이 한국의 시위 현장처럼 ‘임을 위한 행진곡’을 중국어로 불렀다고 한다. 한국 광화문 촛불 혁명 때처럼 그들은 촛불 대신 우산을 들고 저항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국의 방탄소년단과 같은 한류가 세계를 흔들더니 이제는 홍콩의 시위에도 ‘정치 한류’가 등장한 것이다. 물론 정치 문화는 비교되지 않지만 그들이 우리의 ‘광장 정치’를 벤치마킹하는 것은 나쁘지만은 않다.홍콩에서 반정부적인 우산 혁명이 시작된 것은 2014년이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청년 지도자 조슈아 웡(黃之鋒·23)은 구금되었고, 세계는 그에게 높은 관심을 보였다. 웡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범죄인 송환법 개정을 주도한 행정 장관 케리 람은 반드시 퇴진해야 한다고 했다.행정장관이 법 개정을 중지하겠다고 사과했지만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이다. 홍콩 인구 700만 중 약 200만 명이나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법 개정에 대한 단순한 불만만은 아니다.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표방하면서도 홍콩인들의 인권을 죄어오는 중국 당국의 통제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구 14억의 거대 중국은 2050년까지 세계 최강국이 된다는 중국몽(中國夢)을 선포했지만 내부적 모순이 산적해 있다.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가 가진 한계라고 볼 수 있다. 시진핑이 선포한 ‘일대일로(一帶一路)’와 ‘중국식 굴기(5D1B起)’의 내면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중국이 수치적으로는 이미 G2국가가 되었지만 G1국가인 미국에 비해 아직도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엄청난 격차가 있다. 중국은 사회주의적 시장 경제 접합과정에서 중국식 관료 부패가 만연되어 있다. 상해 등 강소성(江蘇省)의 비약적 발전에 비해 중국 내륙에는 아직도 발전이 더디다. 소수민족들의 독립 요구는 개혁 개방에 따라 더욱 커질 전망이 높다.이번 홍콩의 대규모 시위 사태도 사회주의 중국이 방치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렇다고 홍콩시위를 중국 내륙처럼 무력으로만 진압할 수 없다. 홍콩인들은 이미 상당한 정도의 서구적 민주적 가치와 다원주의 문화가 내면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20여 년 전 중국본토에 편입되었지만 대부분 서구적 삶의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워라벨을 추구하는 시민들이다. 이들 중에는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도 상당수다. 이들은 간선제가 아닌 직선제를 통해 홍콩 공화국의 지도자 선출을 바라고 있다. 물론 중국 중앙 당국이 이를 허용할 리는 없다. 홍콩의 6월 시위는 중앙정부의 압제로만 해결되지 않음을 입증하였다. 홍콩의 시민 세력은 결코 중국식 공민으로 개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홍콩의 민권에 대한 요구는 얼마나 확산될 것인가. 인접 광동이나 주해 지역에는 다소 영향을 미칠지 모르지만 중국의 여타 지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1989년 천안문 사태는 이미 중국에서의 반체제 운동의 한계를 잘 보여 주었다. 당시 학생들의 시위는 유혈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천안문 광장의 진압은 수천 명의 살상과 이를 방치한 개혁적 지도자 조자양까지 실각시켜 버렸다. 지난번 중국학자들과의 만남에서 중국의 개혁 개방이라는 체제 변화과정에서 중국식 민중 항쟁이 일어나지 않겠느냐를 넌지시 물어 보았다. 그들은 중국 공산당이 건재하는 한 그런 사태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슬라보예 지젝은 ‘공산주의는 결국 자본주의와 결혼한다’는 가설을 설파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2019-06-23

약산 김원봉 행적에 대한 양면적 평가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김원봉(1898∼1958)의 서훈 문제는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얼마 전 임정 100주년 기념 토론장에 참석한 옆 자리 여고학생에게 김원봉의 서훈문제를 슬쩍 물어보았다. 의외로 그는 김원봉에게 서훈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의 항일 운동 업적을 보니 정부가 서훈하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이다. 대체로 보수층에서는 북한 정권에 참여한 그에 대한 서훈을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진보층에서는 그의 항일 애국 활동에 초점을 두어 찬성한다는 입장이다. 그의 서훈 문제는 정부가 서훈 계획이 없다고 발표하여 일단락된 듯하다.차제에 김원봉의 행적에 관해 객관적 평가는 해볼 필요가 있다. 밀양 사람 김원봉은 1916년 18세 청년 나이로 일제에 저항하여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1919년 길림에서 무정부주의적 의열단을 조직하고, 무한에서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대장직을 맡았다. 그 조직이 1941년 조선의용군으로 확대발전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초기에 장개석의 지원을 받았으나 결국 이 문제로 조직 내분이 일어나게 된다. 1941년 무정과 최창익, 박일우 등 좌파는 화북의 팔로군에 가담하고 무정은 팔로군의 포병사령관이 된다. 1942년 김원봉은 의용군 일부를 이끌고 중경의 광복군에 합류하여 부사령관이 된다. 광복군 장준하, 김준엽도 중경임정에 합류하던 시기이다. 김원봉의 광복군 복귀는 매우 잘된 선택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1945년 갑작스런 조국의 해방은 김원봉의 선택을 어렵게 하였다. 그는 1945년 12월 늦게 서울로 환국했지만 그에게는 설 자리가 없었다. 해방공간의 국내 정국이 김원봉을 실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 고등계 형사 출신 노덕술로부터 또 다시 수모를 당했다. 반민족특위는 유명무실해지고 이승만이 친일 청산의 의지마저 보이지 않자 그는 불만이 더욱 커졌다. 결국 정부 수립과 신탁 통치 문제로 어수선한 해방공간에서 그는 북쪽 정권을 선택했다. 1948년 김구, 김규식과 같이 평양 정치 협상회의에 갔다가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그는 중경시절 비서 사모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조선에 가고 싶지 않지만 남한 정세가 나쁘고, 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의 월북이 자진이냐 납치냐 하는 논쟁은 불필요한 것이다.1948년 북한 정권 수립 후 김일성은 그에게 국가검열상이란 장관직을 주었다. 김일성은 자신의 정통성을 위해 광복군 출신 김원봉이 필요했던 것이다. 1952년 그는 노동상으로 발탁되고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우리의 국회부의장 격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직도 맡았다. 그러나 그는 1956년 갑자기 실각되고, 1958년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죄’로 정치범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에 청산가리 독살설, 자살설도 등 아직도 분명치 않지만 그가 북한에서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북한은 6·25 전쟁 후 연안파 무정도 숙청하고, 친소파 거두 허가이, 남로당 대표 박헌영도 숙청했다. 그들은 모두 북한정권 수립에 기여하고 토사구팽당한 인물들이다.결국 김원봉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일제하의 암울한 청년시절, 의혈단과 조선 의용대를 조직하고, 광복군에 합류하여 군무부장을 맡은 김원봉의 행적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결코 폄훼되어서 안 될 부문이다. 그러나 해방 후 남한 정세에 대한 불만과 이승만에 대한 불신으로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10대에 항일운동에 나선 열혈청년 김원봉, 풍찬노숙하며 조국 광복에 매진했지만 해방 공간에서 그의 형제 4명은 남쪽에서 좌익분자로 몰려 처형되고, 그 자신은 북한에서 희생제물이 되었다. 민족 분단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이다. 먼 훗날 남북이 하나될 때 그에 대한 평가는 정당하게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2019-06-16

강제이주 고려인들의 명예 회복 문제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한인들의 연해주 이민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다. 1863년 함경도 무산 최운보 등 13가구가 크라스키노로 집단 이주한 것이 최초 이민이다. 연해주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애국지사들의 망명지가 되기도 하였다.이상설, 최재형, 안중근, 홍범도, 문창범 등은 이곳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름 없이 죽어간 지사들도 상당히 많다. 조선에서 온 이주민들은 초기에 포시에트 부근 지신허(地新墟)에 첫 정착지를 마련하였다. 후일 이들은 우수리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진출하여 1930년대에는 이주민이 20여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신한촌을 중심으로 학교와 신문사를 세우고 권업회를 결성하여 삶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이 때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에로의 집단이주 계획을 세운다. 연해주 고려인들의 ‘일본첩자’ 활동을 미리 막고, 그들의 ‘자치권 요구’를 사전 차단한다는 명분이었다. 스탈린은 소련 인민위원회 결정 No. 1647-377cc호에 의해 1937년 10월 연해주의 고려인 17만2천여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켜 버렸다. 사전 예고도 없이 3∼7일 전에 통보만 하고 며칠 분 식량만 휴대시켜 화물 열차에 짐짝처럼 실었다. 이 무자비한 음모를 위해 고려인 약 2천500여 명을 사전 검속하여 ‘반혁명’ 분자로 몰아 처형하였다. 이에 한 달 간 이송 도중 1천500명의 조선인이 죽어 나갔지만 그들은 승차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조선인들은 그해 11월 겨울 칼바람과 배고픔 속에 중앙아시아의 낯선 땅에서 하차당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황무지에 내동댕이쳐진 것이다.억새와 잡초만 무성한 황무지에 흩뿌려진 이들의 고통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이를 악물고 새로운 땅을 개간하였다. 그들은 ‘고본질’이라는 특유의 협동농업을 통해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다행히 우즈벡 불멸의 ‘노력 영웅’ 김병화와 같은 걸출의 인물도 탄생하였다. 이들 고려인 3세 중에는 법조인, 교수 등 성공한 사람도 더러 있지만 아직도 고통의 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많다.1937년 스탈린 정권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은 그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 그들이 내세운 조선인의 ‘일본 첩자설’이나 ‘자치요구설’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 당시 연해주 고려인 대부분은 조선 땅에서 살기 힘들어 이주한 생계형 이민자들이었다.이들은 항일 투쟁에 앞장선 조선독립운동가들의 뜻에 따라 일본 첩자 역할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오히려 이들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조국의 광복에 힘을 기울였을 뿐이다. 또한 당시 연해주 고려인들은 러시아의 유대인처럼 자치권을 요구할 형편도 되지 못했다. 결국 강제 이주는 스탈린 정권의 잘못되고 무자비한 정책 결정의 결과일 뿐이다. 차라리 소련은 중앙아시아 황무지 개발에 농사 잘 짓는 조선인이 필요했다고 고백하고 사죄를 구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소련 당국의 입장은 많이 달라졌다. 흐루시초프는 1955년 고려인들의 법적 정치적 명예회복을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소연방이 해체된 후 러시아 당국은 1992년 ‘고려인 강제이주 백서’까지 출판하였다. 이는 후일 러시아연방 최고회의 민족문제협의회가 소련 시기에 탄압받았던 민족들의 복권에 관한 조사 활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 한·러 수교 후 1993년 러시아 고려인의 복권에 관한 법령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조선인들의 강제 이주가 잘못이며 그들의 명예는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늦으나마 다행한 일지만 그것이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고려인들의 원한을 달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분산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명예뿐 아니라 실질적 보상책도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이 요구되며, 남북한이 힘을 합쳐야 할 시점이다.

2019-06-09

항일 독립 운동의 성지, 연해주를 다시 보자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우리가 흔히 연해주(沿海州)라고 부르는 곳은 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Primorskii)지역이다.연해주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에 접하고 중국과는 방천에서부터 맞붙어 있다. 우리 선조들은 1863년부터 이 지역으로 13가구가 처음으로 이주하였다.하산에서 가까운 지신허(地新墟)가 함경도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한 마을이다. 일제의 침탈 전후 애국지사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이곳에서 달래면서 항일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곳이다.남북관계가 비교적 좋았던 시절 필자는 이곳을 자주 찾은 적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동북 쪽 아르촘에는 진기한 체육대회가 열렸다. 러시아, 중국, 한반도 남북으로 흩어져 살았던 우리 한민족이 친선 체육대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이날 행사에는 까레이스키로 불리는 고려인, 중국의 조선족, 북한의 일용 노동자, 남한의 현지 회사원 등이 참여하였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의 남북한 영사도 참여하였지만 손은 잡지 않고 눈인사만 하고 있었다. 필자는 이 두 영사가 손을 마주 잡도록 하여 참석자들이 모두 함께 사진을 찍게 하였다. 그 화합의 상징인 사진이 필자가 가장 아끼는 귀중한 사진 한 장이 되었다.오는 6월 말 독립운동계승사업회는 임정 100주년 기념으로 연해주 일대를 다시 탐방하려고 한다. 우리는 대부분 임시 정부하면 상해임정만 떠올리고 연해주의 항일 활동을 잊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1919년 4월 11일의 상해 통합 임정은 연해주의 항일 운동이 토대가 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상해 임정은 문창범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한 대한국민의회가 참여한 결과이다. 우리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크라스키노 일대의 애국 선혈들의 족적을 다시 찾는 것은 독립운동사의 대의를 살리기 위함이다. 과거 구소련과 국교마저 수립되지 못해 연해주 애국지사들의 족적을 찾기는 무척 힘든 과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1990년 9월 러시아와 정식 국교가 체결됨으로써 이곳 항일 투쟁의 역사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무척 다행한 일이다.과거에 비해 우리 선조들의 연해주 항일 독립 투쟁의 역사는 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유인석을 중심으로 의병 조직인 13도의 군이 편성된 곳이 이곳 연해주이다.홍범도, 이상설은 이곳에서 군사조직을 통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몸 바친 분들이다. 일제하에서도 이곳 조선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중심으로 학교를 세우고 성명회와 권업회 등을 통해 조국의 독립운동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안중근의사가 동지 11명과 단지 동맹을 결성한 곳도 이곳의 크라스키노이다. 우수리스크에서는 전로 한민족 중앙회가 조직되고 그것이 연해주 임정인 대한국민의회로 발전하였다. 이곳에는 일제의 침탈에 맞서 순절한 사람도 수없이 많다. 조국의 해방이 되지 않으면 이곳 사이펀 강에 유해를 뿌려 달라는 유언과 함께 사라진 이상설 선생, 강가의 그의 유허비는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한다. 일찍이 함경도 고향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재력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한 최재형 선생도 이곳에서 순절하였다.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암살한 안중근 의사도 이곳 우수리스크가 그의 활동 무대였지만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상해 임정의 군무총장을 지낸 이동휘 선생도 시베리아에서 생을 마감했다. 우수리스크의 고려문화센터는 이들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우리 학계가 연해주 항일 운동에 관한 역사를 보완하고 재평가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9-06-02

북한 개혁·개방의 새로운 징후가 보인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사회주의 국가의 개혁·개방은 체제 변화의 청신호이다. 그들이 경제 정책을 바꾸고 대외 개방을 하면 할수록 체제 변화가 따르기 때문이다.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소련식 개혁·개방인 페레스트로이카와 그라스노스트의 와중에 소연방이 붕괴되었다. 오늘의 푸틴의 러시아를 사회주의 체제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중국도 등소평 이래 과감한 개혁·개방을 추진하여 오늘의 사회주의적 시장 경제로 나아가고 있다. 베트남 역시 미국과 수교하고 도이 모이를 통해 초보적 시장경제로 가고 있다.‘민족 자립 경제’라는 명분으로 문을 걸어 잠근 북한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북한 김정은 정권도 개혁·개방이라는 역사의 행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북한의 괄목할만한 개혁 징후는 그들의 경제 노선에서 나타났다. 김정은은 이미 ‘핵·경제 병진노선’을 폐기하고 ‘경제 발전 노선’을 과감히 채택했다. 북한은 경제 발전을 위한 라선, 금강산, 개성, 황금평과 위화도, 신의주 등 5대 경제 특구를 개설하고, 중국식 19개의 경제개발구를 설치하였다. 아직 외부 투자가 없는데 그들의 고민이 있다. 그들은 최근 제2 경제인 ‘군수경제’를 제1경제인 ‘인민 경제’에 종속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렇다보니 종래의 선군 정치보다는 ‘당우위의 정치’로 나아 갈 수밖에 없다. 북한 권력 핵심인 총정치국장, 인민무력부장 등은 권력 서열에서 당 간부에게 밀리고 있다. 김정은은 최근 군부대 시찰보다 인민 경제 시찰 빈도를 높이고 있다. 노동신문은 원산항 갈마반도(명사십리)의 군사훈련장이 신도시로 변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함북 경성 증평리의 군사 비행장이 이제 대규모 온실 농장이 되어 채소를 재배한다고도 하였다. 북한의 군수 공장에서 농기계 건설기계를 생산한다는 소식까지 들린다.북한의 이러한 경제 우선의 정책은 그들의 농업과 공업부문 개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자급자족적 폐쇄 경제를 초보적인 시장경제로 바꾸려는 징후가 곳곳에서 보인다.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해 협동농장 20명 여명의 분조원 수를 10명 내외 가족영농으로 바꾼 지 오래다. 사회주의 분배 원칙인 ‘평균주의’를 배격하자는 슬로건도 나붙기 시작했다. 소토지나 유휴지의 개인 경작까지 허용하고 다수확 농민을 포상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생산이 중단된 국유 공장은 개인에게 임대하여 가동하고 있다. 북한 땅에도 자본주의적 능력제라는 바람이 분지 오래다. 이렇다 보니 북한 시장경제는 그 확산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 북한의 종합시장도 400개 이상이고, 개인 식당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정부는 상인들의 자릿세를 받아 부족한 세수를 충당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북한에서 450개의 외국기업의 상품전시회가 개최되었다. 남한 상품이 암시장에서 고가로 팔리고 한류의 바람이 불고 있단다. 평양에서는 도매시장이 개설되었고 돈 주를 중심으로 초보적 금융 시장이 개설되었다.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결과이다. 시장 경제와 소비 경제의 빠른 확산은 관료의 부패와 연결되어 북한 당국은 수차례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미 권력층 여러 명을 부패분자로 숙청하였다. 미국의 대북 제재 해제는 북한개혁·개방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될 것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북미 협상 테이블에 올린 이유도 제재해제를 위함이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가 경제 발전의 인센티브가 된다는 당근전략을 쓰고 있다. 북미 간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북미 수교가 된다면 북한은 아시아의 매력적인 투자 경쟁 지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이미 북한의 라선 경제 특구에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다. 투자 귀재인 짐 소로스는 북미 관계가 정상화되면 미국은 중국 이상으로 투자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이때 우리 기업도 과감한 대북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개성 공단의 재가동을 서두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19-05-26

한반도 통일 환경, 독일과는 다르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북미 하노이 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독일은 벌써 30년 전 1990년 10월 3일 통일을 성취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분단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흔히들 우리는 독일 통일 과정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일 통일 경험을 그대로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독일은 통일 당시 환경면에서 우리와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독일 통일은 그들 내부 통일 역량과 국제관계라는 외부 환경을 잘 조율하고 관리하여 이룬 성과이다. 우선 한반도의 통일 환경이 독일과 다른 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잘 극복 조정하는 것이 우리의 우선 통일 과제이기 때문이다.서독은 분단 시부터 영토와 인구라는 하드웨어가 동독을 압도하였다. 서독은 전후 영국, 미국, 프랑스 점령지역을 토대로 수립된 민주 정부이고, 동독은 국토의 약 3분의1도 되지 않는 소련의 점령지역에 수립한 공산 정권이다. 통일시 동독은 인구 1천600만 명이었지만 서독은 6천500만 명으로 동독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한반도는 분단 시 영토는 북한이 남한보다 조금 크지만 인구는 남한에 비해 적었다. 현재 남한은 인구는 5천만을 조금 넘었지만 북한은 2천500만 정도 일 뿐이다. 통일시 서독은 ‘라인 강의 기적’을 통해 1인당 국민소득이 약 2만 달러가 넘었지만 동독은 그 절반에 미칠 정도였다. 현재 남한의 1인당 소득이 3만 달러인데 북한은 겨우 1천500달러로 남북 격차는 20대1이다. 분단 시 동서독의 교류 협력과 남북 간 교류협력은 차이가 많다. 서독은 연 평균 26억 달러를 동독에 지원하였다. 이는 과거 김·노 민주당 정부 10년간 지원한 액수와 맞먹는데 우리는 ‘퍼주기’ 논쟁이 계속되었다. 전 동독인들의 서독에로의 탈출은 456만6천300명이라고 추정되지만 남한 정착 탈북자는 3만2천 명 정도일 뿐이다. 분단 후 서독에서 동독으로 가는 17억8천500만 통의 편지와 소포에는 커피와 초콜릿 등이 담겼지만 남북 간에는 서신 교환마저 되지 않는다. 양독 간에는 친인척 방문과 자유 여행이 허용되었지만 한반도에는 일부 이산가족 상봉만 있을 뿐이다. 동독에는 종교가 허용되었지만 북한에는 아직도 종교의 자유가 없다. 양독 간에는 상호 방송시청과 기자단 파견이 가능했지만 남북 간에는 언론이 엄격히 상호 통제되고 있다. 서독에는 공산당이 합법화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불법화되고 있다.통일의 외교 환경이 독일과 우리는 많이 다르다. 한반도의 분단이 얄타 협정에 의한 미소 신탁통치의 소산이라면 독일의 분단은 4국의 분할 지배의 결과이다. 독일은 주변의 미·영·불 등이 유럽 통합 차원에서 독일 통일을 희망했으며 당시 소련도 동·서독의 통일에는 적극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반도 주변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주변 4강이 한반도의 통일에 관한 입장은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양독 간에는 전쟁이 없었지만 남북 간에는 3년간의 전쟁이 있었다. 그후 미국이 자유 민주주의적 친미 통일정부를 원한다면, 중국은 사회주의적 친중 통일 정부를 바란다. 과거 서독이 당시 구소련에 경제적 지원을 통한 선린관계를 유지했다면 북미 간에는 아직도 적대적 공존이 존속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통일 환경을 우리도 독일처럼 순기능적 환경으로 바꾸어야 한다. 소득 수준의 향상이 주민 의식을 변화시킬 것이다. 남북 경제 교류 협력을 통해 북한 주민의 소득 수준을 올리면 그들 스스로 보다 살기 좋은 체제를 선택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도 서독처럼 경제적 통일 역량을 강화하여야 한다. 서독은 정권 교체와는 상관없이 브란트의 동방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우리도 화해 협력이라는 대북 정책의 기본 틀을 정권 교체와 상관없이 유지해야할 것이다. 우선 비핵화와 대북 제재라는 현안이 해결되면 북미뿐 아니라 남북 관계는 획기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통일 환경의 변화를 위해 매진해야할 시점이다.

2019-05-19

‘핵 보유국’ 북한의 식량 외교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북한의 비핵화 문제가 여전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북한의 인권문제나 식량문제에는 관심이 부족하다. 북미 하노이회담 결렬 후 북한은 최근 두 번이나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북한은 방어용 훈련이라고 하지만, 북미 대화 촉진을 위한 방책이라고 볼 수 있다.그에 앞서 북한 당국은 그들 특유의 자존심을 버리고 유엔 등 국제기구에 식량지원을 요청하였다. 북한 인구 2천500만 명이 배불리 먹으려면 600만t의 식량이 요구되는데 북한은 지난해 더위와 재해로 식량생산이 460만t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이 스스로 ‘핵 보유국’임을 선언하면서도 식량문제도 해결되지 못함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흔히 북한의 3대 경제 위기를 외환, 에너지, 식량이라고 한다. 북한의 식량위기는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시부터 시작되었다. 북한 주민의 식량부족은 기아문제로 연결되며 북한주민들의 저항까지 초래할 심각한 인도적 문제이다. ‘위대한 수령국가’이지만 배고프게 하는 수령을 따를 수 없는 주민들은 탈북하고 있다.일찍이 김일성은 ‘이밥에 고기 국 먹고, 비단옷 입고 기와집에 사는 인민의 꿈을 실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꿈은 김정은 시대에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이후 통계는 확실치 않지만 100만 명 이상의 인민이 아사했다는 보고도 있다. 배급제는 사실상 폐지되고 주민들의 식량구걸 행렬이 거주이전의 자유로 연결되고 있다.북한 당국은 이에 당황하여 여러 식량증산사업을 벌였으나 아직도 해법을 마련치 못하고 있다. 북한은 집단농장의 생산성 향상을 위하여 관리 인원을 25명 내외에서 대폭 줄여 5∼10명의 가족영농형태로 바꿔 보았으나 별 성과가 없다. 북한에서 개인 집 옆의 30평 내외 남새밭은 농작물이 잘 되는데 집단 농장의 농사는 한계에 이른지 오래다.개인의 소유욕을 막아버린 사회적 소유형태의 병폐 때문이다. 북한 당국이 하천부지나 야산의 소 토지개간을 허용했으나 식량의 증산에는 크게 기여치 못했다. 오히려 북한의 늘어나는 시장이 아사자를 구할 수 있었다. 북한의 집단 소유 형태를 바꾸지 않고는 식량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다.이러한 상황에서 ‘핵 보유국’이라 선전하는 북한이 특유의 자존심마저 버리고 대외 식량지원을 요구하게 되었다. 북한은 종래 그들의 경제 위기를 ‘미 제국주의의 압제’ 때문이라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주장이 주민들에게 먹혀들리 없다. 북한 김정은은 핵 개발을 통해 대미 협상 방식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아직도 북한의 비핵화 선언을 신뢰치 못하고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대북 제재를 더욱 강화하는 채찍을 사용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이러한 전 방위적 제재 강화는 북한의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북한이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나 세계 식량프로그램(WFP)을 통해 식량사정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뒤틀어진 남북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대북 식량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인도적 대북지원은 유엔의 제재 범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약 50만t 규모의 식량지원을 북한에 제공할 전망이다. 트럼프도 문재인 대통령과의 전화에서 이번 남한의 대북 식량지원은 무방하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국내의 대북 식량 지원에 대한 여론은 찬반이 갈리고 있다.보수적 여론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고, 진보적 여론은 남북의 화해를 위해 인도적 식량지원은 찬성한다는 입장이다. 여야는 이 문제에 합의가 있어야 갈라진 여론을 잠재울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화(和)자에서 보듯이 벼(禾)를 같이 먹는데(口)에서 화해는 출발한다. 북한에 대한 대북 식량지원이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 개선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길 바란다.

2019-05-12

식물국회나 동물국회부터 막아야 한다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우리나라 국회의원은 당선만 되면 엄청난 예우를 받는다. 한국고용정보원 공식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평균연봉 1위인 1억4천만 원, 보좌관과 비서 9명을 둘 수 있다. 재임 중에는 해임될 걱정이 없고 몇 개월만 재직하면 연금이 보장된다. 회기 중 면책특권이 보장되고 어딜 가나 ‘갑’이 될 수 있는 정치인이다.그런데도 이 나라 국회의원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무너져 있다.우리 국회가 식물국회라는 비판을 받은 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식물국회란 호흡만 하고 누워있는 식물인간처럼 우리 국회가 정상적 기능을 행사치 못함을 빗대는 말이다. 우리 국회는 여야 격돌로 수시로 문을 닫아 버린다. 그런데도 국회의원은 국민 혈세인 세비는 꼬박꼬박 챙기면서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다. 무노동 무임금이 원칙인데도 우리 국회의원들은 세비와 활동비는 받아 챙기고 상당한 특권까지 누린다. 의원들이 세비를 반납했다는 소리를 아직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주변의 어떤 정치평론가는 선거 전술만 잘 세우면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것이 벤처 기업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또 다시 제1 야당은 장외투쟁을 선포하고 국회는 개점휴업 상태이다.우리 국회는 최근에는 ‘동물국회’라는 소리까지 듣고 있다. 국회의원들이 동물처럼 몸싸움을 하는 것을 빗대하는 말이다. 정치의 기능을 흔히 권위의 합리적인 배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나라 국회는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치닫고 있다. 패스트 트랙으로 야기된 이번 사태는 여야의원들이 이를 스스로 국회선진화법까지 팽개쳐 버렸다. 과거에도 단식 농성이 있고 수십 시간의 필리버스터식 연설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여야가 육탄전을 치르는 동물국회는 없었다. 국회의장은 저혈당 쇼크로 입원하고, 의장을 앞장서 저지했던 여성의원은 성추행당했다고 고소까지 했다. 자유한국당 의원 5명이 삭발 투쟁을 선언하고, 전국의 장외 투쟁은 더욱 가열되고 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모두 의회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위이다.이 나라 의회가 식물국회와 동물국회를 반복하는 것은 아직도 후진적인 한국 정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이다. 파당적 이해관계로 여야가 상호 부정하고 거부하는 네거티브 정치가 판을 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한국의 정치는 사이비 보수와 사이비 진보 정당 간의 극한적인 투쟁만 있는 정치이다.우리 정치가 날로 참된 정책 대결은 없고 ‘너 죽고 나 살기’ 위한 살벌한 전투장으로 변하고 있다. 정당 간 두 번이나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여당은 언제나 힘으로 밀어붙이고, 야당은 이를 결사 저지하는 관습적 정치가 반복되고 있다. 국회가 패거리 정치의 이전투구 하는 모습만 보이니 자라나는 세대가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 정치인들의 이러한 극한 대결 구도가 국민들까지 적대적 대립관계로 몰아가니 한심한 일이다.우리 국회가 최소한 식물국회와 동물국회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여야 정치인들이 먼저 대오각성(大悟覺醒)해야 한다. 모두가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설득과 타협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국민들도 이제 ‘좌익 독재 타도’나 ‘독재정권의 후예’라는 주장에 관심이 없다. 시대는 저만 큼 앞서 가는데 정치는 아직도 과거로 퇴행하고 있다. 여야는 이미 발효된 국회선진화법부터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 양보나 타협은 정치적 배반도 아니며 굴종은 더욱 아니다. 여야 정치인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퇴행적 정치부터 반성하고 국회로 돌아오길 바란다.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군중을 향해 ‘너희 중에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이 여인을 돌로 쳐라’는 예수의 말에 정치인들은 진정 귀를 기울여야 한다.

2019-05-07

김정은의 리더십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미 국무장관 폼페이오는 김정은에 대한 평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독재자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베네수엘라의 마두로를 독재자라고 표현하면서 김정은도 같다는 입장이다. 북한 당국으로는 그의 이 같은 발언이 그들의 최고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로 단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북한 당국이 폼페이오를 북미협상 창구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정은을 몇 차례 독대한 미국의 협상 창구인 폼페이오의 교체를 요구한 것은 당연한 순서일 것이다. 북한 당국은 수령의 절대적 권위를 손상하는 그를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고 회담 결렬의 책임마저 전가하려는 의도로 보인다.막스 베버는 리더십을 전통적 리더십, 카리스마적 리더십, 합리적 리더십으로 구분하였다. 김정은의 리더십은 어디에 해당될까.김정은은 북한식 당·국가 일원 체제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북한 인민의 절대적인 숭상을 요구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이다. 베버의 분류상 그는 군주의 전통적 권위와 카리스마적 권위를 공유하는 지도자 유형이다. 1984년생의 30대의 지도자인 그는 조부 김일성의 모습으로 부족한 카리스마를 보완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왕조국가인 북한 체제에서 그는 김일성의 리더십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지난번 하노이 회담이나 이번 블라디보스토크 행차에서 그 모습은 재현되었다. 그는 김일성이 즐겨 쓰던 중절모, 인민복, 뿔테 안경, 옆머리를 쳐올린 헤어스타일, 걸음걸이까지 그대로 재연하였다. 그에게는 이러한 정치적 상징 조작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조언한 결과이다.그러면서도 집권 8년차를 맞이한 김정은은 김정일과는 다른 정치적 제스처를 여러 면에서 보이고 있다. 그는 은둔자인 부친과 달리 대중 앞에 직접 나서기를 좋아한다. 그는 서구 지도자처럼 양복 차림으로 집무실에서 신년사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농구를 좋아하고 미국의 농구 스타 데니스 로드맨을 평양에 초청하기도 하였다. 부인 리설주와 나란히 팝콘을 먹고 공연장을 찾는 모습도 보였다. 2017년 신년사에서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고 말하는 특유의 솔직한 화법도 보였다. 하노이 회담 후에는 “수령의 혁명 활동과 풍모를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우게(가리게) 된다”는 의외의 경고까지 하였다.그러나 이러한 그의 리더십은 본질적 변화라고는 볼 수는 없다. 약간의 파격적 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보화 시대의 65시간의 하노이행 열차 이동, 간이역 새벽 재떨이를 떠받쳐 든 여동생 김여정의 모습, 그의 현장 시찰시 지시사항을 기록하는 ‘적자생존’의 노 간부들, 평양 시민들의 열광하는 새벽 환영 행사, 모두가 왕조국가의 옛 모습이다.이번 북러 회담출발 전 평양 역두 간부들의 환송행사도 마찬가지다. 북한 권력 2인자 상임위원장 최룡해(70)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당부하는 수령의 모습, 노령의 간부들이 수령 앞에 읊조리는 모습은 왕조시대의 모습을 재현했다. 북한의 언론은 최고 지도자 위대성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김정은의 정치적 제스처가 변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리더십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의 명령은 북한체제에서 법 이상의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다. 그의 리더십은 언제쯤 정상국가의 합리적 리더십으로 바뀔 것인가. 수령 절대론과 집단주의, 당 권력 독점과 병영 통제 사회가 지속되는 한 그의 리더십은 바뀌지 않는다. 아직도 당권과 군권이 분리되지 않고 권력의 분립장치가 없는 땅에서 그의 권력의 독점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중국이나 베트남식의 집단지도 체제는 엄두도 내기 어렵다. 아직도 수많은 정치범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통받는 현실에서 언론의 자유는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체제 전반의 압제 상황에서 김정은의 리더십은 합리적으로 바뀔 수 없다. 북한의 개혁 개방이 그의 리더십 변화의 단초가 될 것이다.

2019-04-28

3차 북미 회담이 성사되려면

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지난달 3·27 하노이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기대했던 북미 회담은 노딜(no deal)로 끝나 버린 것이다. 지난해 6·12 싱가포르 북미 1차 회담은 그런대로 공동 선언이라도 발표되었지만 하노이 회담에서는 아무런 합의문 없이 끝나 버렸다.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은 여전히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FFVD)를 우선 요구했으며, 북한은 미국에 대해 대북제재 해제를 우선 요구한 결과이다.미국은 북 핵의 완전 폐기와 제재해제라는 빅딜을 원했고, 북한은 핵 폐기만큼의 스몰딜을 원할 만큼 회담의 목표, 내용, 방식이 사뭇 달랐다. 그러나 북미는 여전히 회담의 불씨를 살려가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3차 북미 회담은 과연 성사될 것인가. 현재로서는 정확한 예측은 어렵지만 양측의 조건만 조율되면 연내 개최도 가능할 것이다. 당사국인 미국과 북한의 현재의 입장과 성사의 요건을 점검해보기로 한다.미국은 하노이 회담 결렬 후 3차 회담에 관해 ‘느긋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사실 외교는 내치(內治)의 연장이라 답답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연방예산의 셧다운(Shut Down)문제도 해결되고, 로버트 뮬러 특검 위기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협상의 달인 트럼프는 북한과의 핵 협상에 조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한편 그는 김정은을 ‘좋은 친구’라고 칭찬하며 대화의 의지는 계속 보이고 있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러한 정치 행보만으로 대북 핵협상은 쉽게 풀 수 없다. 그의 전술은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은 막았지만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과의 빅딜에 앞서 북미 수교 등 체제의 안전 보장책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북한 당국은 이란의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카다피의 비극적 운명을 보았기 때문이다.북한 역시 미국에 대하여 종래의 벼랑 끝 협상이 통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북한은 여섯 차례의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통해 북한을 협상의 테이블로 유도하는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모호한 셀프 핵 폐기와 대북제재 해제라는 카드는 통할 리 없다. 그러한데도 북한은 여전히 북미 정상 간의 톱다운 식의 협상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북한은 협상의 파트너인 미 국무장관 폼페이오의 교체까지 요구하고 있다. 그가 김정은을 압제자(tyrant)로 모독한 결과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러한 ‘기 싸움 식’ 전술만으로 미국을 협상으로 유도할 수 없다. 미국은 대북 제재로 경제적 타격을 받는 북한에 대해 핵 폐기의 실질적 징후를 보일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북한도 이제 ‘영변+α’라는 핵 폐기의 실천적 프로그램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북한은 중일 정상회담에 이어 오는 25일 블라디보스톡 북러 정상회담을 앞두고 있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 정상외교 보다는 통큰 결단을 해야 할 시점이다.여기에 우리 정부의 중재자적 외교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2차 판문점 정상 회담을 통해 북미 싱가포르 회담을 추동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로서 한국의 중재자 역할이 샌드위치의 신세를 탈피하지 못하고 제한받고 있다. 우리 정부가 북한으로부터는 ‘오지랖 넓은 중재자’로 비판을 받고, 미국으로부터는 유엔의 대북제재에 적극 공조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번 한미 워싱턴 회담도 내용상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 버렸다. 우리가 미국과의 동맹외교와 중재외교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조건 없는 4차 정상회담을 제안하였다. 트럼프는 문재인 대통령 편에 김정은에게 보내는 친서를 전달했다고 밝혀 남북 정상 회담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을 설득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도 북미 회담을 촉구해야할 입장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는 길을 가는 것처럼 우리의 중재자의 외교는 길은 멀고 험하지만 계속하지 않을 수 없다.

2019-04-21

임정 100주년, 민족사 정기(正氣) 바르게 세우자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지난 4월 11일은 상해 임정 수립 100주년 되는 날이다. 올해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임정 기념식을 거행했다.상해 임정은 1919년 3·1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출범해 자주 독립과 민족해방의 견인차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지난주 미국 상하원에서도 임정이 한국 민주발전의 토대가 되었음을 결의안을 통해 재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국내의 3·1 운동은 잘 기억하면서도 같은 해 설립된 임정의 역사는 망각하고 있었다. 다시 2019년, 임정 100주년을 맞이해 우리는 임정 26년의 민족사적 함의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우선 상해 임정은 1919년 3·1 운동의 연장선에서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반만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은 한말 일제에 의해 허무하게 국권을 상실하였다. 일제의 조선 식민화과정에서 이 나라 총리대신 이완용 뿐 아니라 상당수 관료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나라를 팔아먹었다.그러나 당시 지조있는 애국선혈들은 국내 의병 투쟁을 전개하다 상해 임시 정부까지 결성해 조국 해방 전선에 아낌없이 헌신했던 것이다. 해방 시까지 임정요인들은 중국 망명지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이들이 이국땅에서의 헌신적인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아직도 이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또한 상해 임정이 국내외의 여러 독립단체를 통합해 단일 대오의 독립운동을 했음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상해 임정은 초기 지도자들 간 불화를 극복하고 한성과 연해주의 임정을 하나의 임정으로 통합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중국에서 중국 국민당의 상당한 지원을 받기도 하고, 일부는 중국공산당 팔로군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임정은 내부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1945년 8·15 해방 시까지 26년간 통합된 임정의 역할에 충실했다. 중국의 정부문헌과 학계에서도 임정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방 후 임정 요인인 김구와 여운형, 송진우 등이 희생됐다. 정부 수립과정에서의 임정의 정치적 거목들이 희생시켰음은 안타까운 일이며, 민족사의 비극이다.상해 임정은 1919년 4월 11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출범해 여섯 차례나 임정 청사를 옮겨 가는 고초를 겪었다.이들은 1945년 8월 15일 중경에서 갑작스런 해방을 맞이했다. 지난해 필자는 상해에서 출발하여 항주, 소주, 장사를 거쳐 중경까지 임정의 피난길을 추적해 본적이 있다.특히 임정은 오늘의 국회에 해당되는 의정원을 갖추고, 오늘의 헌법격인 임시 헌장을 통해 민주 공화정이라는 정체와 국체를 분명히 했다. 당시 임정요인들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국내외 조직을 관리하고 광복군을 양성하면서 제한된 형태이지만 외교권까지 행사했음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대한민국 임정의 이러한 역사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우리 현대사에서는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 해방 후 남한 이승만 정권은 반민족 행위자마저 척결하지 못했다. 특히 정부 수립 후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애국지사들이 친일 관료들에 의해 조사받는 역사적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의혈단 선봉인 김원봉이 친일 형사 노덕술에게 취조를 받은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당시부터 ‘친일하면 삼대가 흥하고 반일하면 삼대가 망한다.’ 속설이 유포된 배경이다. 일본 아베 정권은 아직도 일제의 식민지배에 관한 진정한 사과는 없다. 이는 여태껏 민족의 자주성을 세우지 못한 정부의 책임이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다행히 문재인 정부가 임정의 역사를 바르게 살피고 민족의 정기를 다시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용두사미가 되지 않도록 그 과정을 지켜볼 뿐이다.

2019-04-16

북한체제 변화를 보는 상반된 시각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김정은 위원장의 정치 행보는 과거와는 많이 다르다. 그는 북한의 선대 정권과는 달리 대내외적으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우선 ‘경제 발전’이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민생 현장을 찾아 나섰다. 수시로 생산 현장을 찾아가고 지난 4일에는 삼지연 건설현장도 방문하였다. 대외적으로는 핵·경제 병진 노선에서 비핵과 ‘경제 건설’을 앞세우고 있다. 5개의 경제 특구와 19개의 개발구를 선포한 후 해외 투자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과거 김정일 시대의 은둔과 폐쇄 이미지 대신 인민들 앞으로 성큼 다가서고 있다. 그러나 이를 보는 외부의 시각은 상반된 입장이 대립되고 있다.그 하나는 북한체제의 변화를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대체로 서방의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보수적 입장이다. 북한 김정은 체제의 민생에 대한 정책 변화는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변화이지 실질적인 변화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북한의 비핵화 선언도 대미 협상용 시간 벌기 술책이지 핵을 포기하기나 폐기하는 정책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나아가 북한의 비핵화는 북한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술책이라고 본다. 이는 대체로 북한을 불신하고 반공적 보수적인 입장에서 보는 외재적 시각이다. 이 땅에는 북한 정권에 대한 강한 불신과 반공교육 등으로 반공, 반북세력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다른 하나는 북한의 변화를 북한식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내재적 시각이다. 과거 재독학자 송두율이 이러한 주장을 펼치다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된 적이 있다. 이 주장은 북한 정권을 맹목적으로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기 쉽다. 이는 북한 문제와 북한적 현상을 북한 외부가 아닌 북한 내부의 논리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가령 북한 경제의 현실은 어렵지만 그 원인은 미국 제국주의의 압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핵 개발도 철저히 북한체제의 보위용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하면서도 자주적으로 살아가는 노선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북한의 수령제, 주체사상, 우리식 사회주의, 인민 민주독재, 북한식 계획 경제도 북한식 논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 두 입장은 문제점과 위험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둘 다 극우와 극좌라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자인 외재적 입장은 보수 우익의 입장을 철저히 대변하는 입장이다. 이는 냉전시대의 철저한 반공 논리를 토대로 북한 공산체제를 철저히 비판, 응징해야 된다는 입장이다. 후자인 내재적 입장은 북한의 정치 현실과 변화를 인정하고 옹호하는 입장이다. 물론 여기에도 순수 진보적 입장에서부터 종북 좌파에 이르기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여기에는 북한의 수령론이나 주체사상까지 용인하자는 주사파까지 포함된다.이러한 상반된 입장을 극복하는 방식은 없을까. 그것은 북한 체제 변화 징후를 탈이데올로기적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특정 이데올로기라는 안경을 사실상 벗기가 어렵다. 여기에 북한을 이념적 편견에서 탈피하여 내관적 시각에서 보자는 입장이 등장한다. 가령 북한의 400여개로 늘어난 종합 시장, 정보화 시대의 600만대의 휴대 전화보급, 북한 일인당 소득 1천불, 자영업의 증가와 관광 사업에 대한 열망을 사실로 그대로 수용하자는 입장이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와 인민 경제 발전 의지도 선입견 없이 바라보자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제3의 방식은 북한 체제의 변화에 대한 비판을 삼가하고 판단을 유보하자는 입장이다. 단 판단의 준거는 인간의 존엄성, 인류의 복지에 있음은 분명할 것이다.

2019-04-07